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66)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66화(266/302)
265화. 왕(4)
“…여기에 있었어?”
은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하이프는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나무가 있었다.
지하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였다.
자신이 수없이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너도 여기에 있었구나.’
자신이 수없이 봤던 그 나무는 어쩌면 위그드라실이 아닐까.
그렇게 매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나무였다.
“맞아. 지금, 깨진 약속을 다시 치료하고 있었으니까.”
하이프는 손을 뻗어 나무를 만졌다.
“약속이, 그냥 저 나무를 만지면 다시 체결되는 거였어?”“그건 아니야. 약속은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했어.”
하이프는 라이엔을 바라보았다.
라이엔이 웃자 하이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은호. 약속은 우리가 그 누구도 해치지 않게 막아주고 있었어. 그렇지?”“맞아. 너희들도, 인간도 죽일 수 없게 막는다고 했어.”“나는, 이 사실이 너무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어. 왜 우리만 안 되는 걸까. 왜 우리만 참아야 할까. 그런데 이게 우리가 가진 야성을 짓누르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야성은 은호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서운 거였어.”
하이프는 말을 하는 내내 괴로워 보였다.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알아버린 얼굴이었다.
“그렇죠, 왕이시여?”
왕을 눈에 담은 하이프는 너무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 모든 걸 혼자 떠안고 있었던 존재가 바로 왕이었다.
“우리가 가진 야성은 거대합니다. 지성까지 보유하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라이엔이 숨을 섞으며 말문을 열었다.
야성은 동물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었다.
거기에 지성마저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본능에 의존하는 똑똑한 자가 무엇을 할지는 뻔했다.
“그래서 야성이 낮은 존재가 우리를 가엾게 여겨 자연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게 초대 왕입니다. 자연은 기꺼이 초대 왕의 바람을 이뤄 줬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약속인 거고요.”
라이엔은 약속을 설명했다.
약속이란, 자연이 이뤄 준 기적이라는 걸.
“그래서 약속이 존재하는 거로군요.”
은호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크기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처럼 환수가 환수이기 위해 무조건 필요한 장치라는 소리였다.
강압이 들어가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은호는 환수라는 생물이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에 빠져 있는지 이해했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자는 왕이 됩니다. 왕은 자연과 합심해 이 약속을 모든 존재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강압이라도요.”
라이엔은 천천히 걸어가 나무를 보았다.
―약속이란, 나의 힘과 내 오랜 친구의 힘이 섞여서 만들어진 힘이니까요.
조금 전 라이엔이 했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저 나무가 현재 약속을 유지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한 그루밖에 없었다.
“약속이 깨져버리면, 억눌렀던 것만큼 야성이 자랍니다. 약속에 반발이라도 하듯 나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동안 억눌러졌던 것들이 풀려나 미칠 듯한 해방감을 느낄 테니까요.”
왕은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친구는 약해지고 있습니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왔다는 거지요. 그래서 약속이 걷잡을 수 없이 깨지는 겁니다.”“원래 살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은호의 물음에 라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은호는 숨부터 튀어나왔다.
“모자란 만큼 내가 힘을 사용해야 하지만, 세계의 멸망을 늦추는 것만으로 버겁습니다.”“재해를… 봤어요.”
은호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건, 참… 끔찍하지 않습니까?”“끔찍하다는 말도 아깝더라고요.”
검은 포식자였다.
풀려나면 정말 모든 걸 씹어 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면 말이에요. 이곳에 원래 살던 식물들이 약속을 나눠서 짊어지면 안 되는 거예요?”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저 나무 하나에 모든 걸 의존하고 있었다.
은호는 그 사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안 됩니다. 이곳의 자연은 우리와 계약을 나누지 않았으니까요.”
“…….”
너무도 단순한 사실에 은호는 다시금 숨만 들이켰다.
계약자가 다르다.
이건 현실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계약이란, 그만큼 신중히 또 신중히 봐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여기서도 계약의 중요성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은호는 이제야 찬찬히 알았다.
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던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
이곳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목적 아래에 자연과 새로 계약할 자연의 대리자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은호.”
하이프가 침묵하는 은호를 불렀다.
그는 하이프를 바라보았다.
“이 나무가 나한테 여러 가지를 보여줬어.”“…어떤 걸 보여줬어?”“왕께서 뭘 했는지, 날 바라보던 자연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걸 보여줬어. 그래서 수많은 오해가 풀고 있었어.”
하이프의 눈동자를 맑아졌다.
떠나기 전에 보았던 그 모습보다 더 생기가 넘쳤다.
“자연은 나와 같이, 슬퍼해 줬어. 내 선택을 말려줬고, 내가 저지르는 일에도 걱정으로 바라봐줬어. 계속 내 눈물을 받아주고 있었던 거야.”“맞아. 식물들은 다 보고 있더라고.”“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하이프의 말을 들으며 은호는 나무를 향해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나가자 나무는 이에 공명하듯 똑같이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위그드라실이 내는 빛과 닮아 있었다.
‘위그드라실이 이 식물의 씨앗이 맞구나.’
은호는 위그드라실을 보았다.
머뭇거리던 위그드라실은 은호의 시선에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가도 돼?
“괜찮아. 다가가도 돼.”
위그드라실이 이렇게 머뭇거리는 건 처음 봤기에 은호는 응원했다.
나무를 빤히 보던 위그드라실은 은호의 팔을 따라 뛰다 손등 끝에서 또 주저했다.
힐끔 은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널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위그드라실은 용기를 받아 나무를 향해 손길을 뻗었다.
똑같이 빛이 공명하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은 고개를 올렸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 같았다.
나무도 위그드라실도 반가움이 가득했으니까.
은호는 위그드라실을 나뭇가지에 잠깐 올려놓고는 칼을 꺼냈다.
“이 나무, 너무 약해졌어요.”
나무한테서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혹여 죽어버릴까, 그 모든 게 걱정이 되었던 나무가 위그드라실을 남긴 게 아닐까.
“…나는, 당신에게 부탁조차 드릴 수 없습니다.”
왕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은호에게 부탁을 할까.
버거운 짐이었다.
그 무거움이 얼마나 깊은지 알기에 이곳으로 와달라는 말도, 도와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겁쟁이처럼 은호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자신은 유약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라이엔.”
은호는 라이엔을 불렀다.
힘찬 목소리에 라이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 말했죠? 당신이 바라는 걸 이뤄 주겠다고요.”“버거운 일입니다. 매 순간이 괴로울 정도로 버겁습니다. 이것까지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나는 당신을 지킬 거예요. 당신이 지키려는 그 모든 걸 지킬 거예요.”
미소를 너머에 드러난 은호의 의지는 강인했다.
왕이 죽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지켜야 하는 것도, 지킬 이유도 분명했다.
“라이엔이 가진 짊을 내가 받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약속을 유지하거나, 부여하는 힘은 왕이 가진 힘이었다.
이걸 어떻게 대신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라이엔. 내가 해야 하는 게 뭐죠?”
뭘 해야 하는지 다 알면서 은호는 물었다.
하지만 라이엔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라이엔은 왕이라는 그 자리와 가지고 있는 힘에 짓눌리고 있었다.
얼마나 어려운 자리겠는가.
은호는 기다렸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친구야.”
은호는 조금 전과 말을 달리했다.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라이엔을 대했다.
누군가는 왕이 유약하다고 말하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다.
다 끌어안느라 본인에게 수없이 채찍질하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그러면 네가 아파. 더는 널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은호의 말에 라이엔은 숨을 참는 것만 같았다.
놀란 건 하이프였다.
“으, 은호?”
하이프는 말을 더듬었다.
저 존재는 왕이었다.
지금도 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감에 휩쓸릴 것 같은데, 은호는 아닌 걸까.
“……왜, 내게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라이엔은 겨우 말을 꺼냈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보였을까.
아무도 자신을 이렇게 대한 자가 없었다.
늘 왕이라는 자리에 파묻힌 채 살았다.
휩쓸리고 싶지 않았지만,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참고, 인내하고, 견뎌야 했다.
그게 왕이었다.
“네가 다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 보여.”“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알아. 그래도 버거울 거야. 너무 힘이 들 거야. 그러니 이것까지 끌어안지 않아도 돼, 친구야.”“나는, 당신에게 부탁할 입장이 아닙니다.”“왕으로서는 그럴 수 있을 거야. 염치가 없는 뻔뻔한 행동이니까.”
멋대로 불러놓고, 부탁까지 한다면 얼마나 재수가 없을까.
은호는 싱긋 웃었다.
“친구로서는 부탁할 수 있잖아?”
“…친구요?”
“부럽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은 아니겠지?”“아닙니다. 그건 정말로 아닙니다.”“나는 인간이야. 너의 지위나 직함이 내게는 문제가 될 게 없어.”
은호는 라이엔과 자신과의 관계가 딱딱하게 굳어지길 원치 않았다.
자신이 접근한 방법이 라이엔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엔은 계속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은호는 그 자체가 안쓰러웠다.
이래서는 출발점부터 어긋날 게 뻔했다.
“괜찮아, 라이엔.”
은호는 라이엔을 바라보았다.
“나의 유약함이, 당신에게 어떻게 닿을지 모르겠습니다.”“넌 유약하지 않아. 널 희생해 인간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한 것도 알고 있어.”“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계속, 만나고 싶었습니다.”“나도, 널 만나고 싶었어. 이렇게 바라보고 싶었고.”
라이엔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은 깊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원망할까, 걱정됐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부름으로써 당신이 원치 않게 여러 가지를 짊어졌으니까요.”“그런데 만나 보니까 아니지? 나는 널 원망 하지 않아. 오히려 고맙다니까?”
은호가 실실 웃자 그 웃음이 옮은 것처럼 그제야 왕은 자연스럽게 웃었다.
별거 아닌데, 그 웃음 하나에 마음이 편해졌다.
“…신기합니다. 당신은 참 신기해요.”
은호는 자신을 왕으로서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한 존재로서 대했다.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다.
“맞아요. 은호는 참 신기해요.”
하이프는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뭘 하나 싶었는데, 은호는 왕을 도와주고 있었다.
“은호는 고집쟁이라서 왕께서 더 활짝 웃을 때까지 절대로 놔주지 않을걸요?”“고집쟁이가 아니라, 친절하다고 말해줄래?”
은호가 하이프의 말을 고치자 라이엔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초에 자신이 너무도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음에도 은호는 그러지 않았다.
“나를, 정말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당연하지. 애초에 널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온 거였어.”“위그드라실은 아직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 친구를, 도와주세요.”“봐, 별거 아니지?”
은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칼을 세게 쥐었다.
조금 전부터 되게 거슬렸기에 라이엔이 입을 열기 전에 손바닥을 그어버렸다.
라이엔의 앞발이 그대로 떨렸다.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아뇨. 별거 맞습니다.”
트라우마라도 걸릴 것처럼 목소리를 냈다.
그 고귀한 몸에 상처를 내다니.
“피가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서 그래.”
은호는 대수롭지도 않게 대답하며 피가 나는 손으로 나무를 향해 뻗었다.
피가 나무에게 스며들자 은호는 눈을 크게 떴다.
피가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달랐다.
‘…와.’
무언가 비어간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눈앞이 다 핑그르르 돌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자 라이엔과 하이프가 다가왔다.
“…괜찮아?”
은호는 나무를 향해 물었다.
“은호, 너 또 이럴래? 너부터 챙겨야지.”
하이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은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쪽은 그였다.
은호는 이전이랑 똑같았다.
전혀 변하질 않았다.
“이 친구,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 시들기 직전이었다고.”
은호는 남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불안해졌다.
왜 라이엔이 그토록 초조했는지 이해했다.
나무는 꺼져가는 불꽃이었다.
은호가 나머지 손바닥에도 상처를 내려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괜찮습니다.
식물에게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 빨랐다.
“아니야. 더 가져가도 돼. 피는 곧 다시 차오를 거니까.”
은호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피를 그렇게 가져가고도 꺼져가던 생기가 이제 겨우 차오른 수준이었다.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눈에 보였다.
다른 나무와 달리 자라지도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당신을 오인해 아프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어지러워 머리를 움직이는 걸 멈췄다.
“날, 더 빨리 불렀어야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참은 거야?”
은호는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더 빨리 왔다면 싱그러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제가 감히 당신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불렀어야지. 날 계속 도와줬잖아?”
라비의 아버지를 살릴 수 있게 해줬다.
사라진 식물을 부를 때마다 도와주지 않았는가.
더 많이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깔린 오해를, 풀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오해야 풀어가면 되는 거지. 시간은 많아. 그걸로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은호는 상처가 나지 않는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었다.
은은한 빛이 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위를 바라보았다.
“친구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러니까 약해지는 거잖아. 햇볕을 받아야지.”“죄송합니다. 내가 숨긴 겁니다.”
라이엔이 꺼낸 말에 은호는 의문을 담아 바라보았다.
“날 노리는 자가 있습니다. 나를 해치기 전에 이 친구부터 죽일까 봐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꺼낸 말에 은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널, 노리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