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67)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67화(267/302)
266화. 왕(5)
은호는 말을 꺼내다 말고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삐약이한테 들었겠네.”“아뇨. 그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약속을 깬 자니까요. 모를 수가 없습니다.”“알았는데, 일부러 방치한 거야?”“알았지만,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나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왕의 찬란하던 갈기가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마음이 불안한지, 왕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내 움직임 하나에 수많은 목숨이 따라옵니다.”
재해.
자신들.
인간들.
생각해야 하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삐약이한테도?”
“맞습니다. 섣불리 그 무엇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은 ‘복종’이니까요.”
왕은 말을 끝내며 하이프를 보았다.
하이프는 왕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왜 제가 있는 앞에서 하는 겁니까?”“그대가 가진 힘을 압니다. 타마르.”
이름이 나오자 하이프는 흠칫거렸다.
어떻게 이름을 안 걸까.
“…이름을, 볼 수 있습니까?”
왕에게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적 없었다.
그렇기에 하이프는 더욱더 왕을 두려운 듯 바라보았다.
“그대는 복종에 당하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정신의 힘이 이를 저항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믿는 겁니다.”
‘티토가 당한 힘이 저거였어?’
은호는 왕이 꺼낸 말에 티토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시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티토가 약속을 파기하게끔 유도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억마저 날려버렸다.
티토가 기억을 떠올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식물 역시 그 존재를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 그 존재가 식물마저 조종할 수 있는 거야?”“맞습니다. 그 힘의 범위는 굉장히 넓습니다.”“그럼, 친구야. 그 존재가… 이곳을 이미 장악한 건 아니지?”
은호의 물음에 왕은 걸음을 멈췄다.
불안한 행동을 내보였다.
“……장악했습니다.”
왕에게 나온 말에 은호는 숨을 삼켰다.
왜 왕이 함부로 부탁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버렸다.
그 존재 때문에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네가, 약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던 그사이에 이 일이 벌어진 거구나.”
은호는 기가 찬 듯 말을 꺼냈다.
약속이 깨지면 이를 다시 체결해야 했다.
가만히 둔다면 환수가 인간을 습격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을 테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제 내부에서 단속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인간이 개입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이엔은 수호자를 통해 수없이 약속을 깬 존재들을 찾아다녔다.
그럼, 약속을 다시 체결할 때, 얼마나 많은 힘이 소모될까.
약속을 깬 자를 찾아다니는 동안 약속을 깬 존재들이 늘어나기만 하는 상황을 보며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래서 약속을 계속 깨려고 한 거였어. 왕과 저 나무의 힘을 계속 소모하게 하려고.’
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잔악했다.
이 결과의 끝이 어떤 건지 알면서도 이랬던 걸까.
‘수습도 못 할 행동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회사에서 일만 벌여놓고, 수습도 못 한 채 도망친 놈들이 떠올라 더 화가 치밀어올랐다.
‘라이엔은…….’
대체 왕은 어떤 싸움을 해왔던 걸까.
알면서 바라봐야만 했던 그 심정은 오죽할까.
“너는 괜찮은 거야?”“괜찮습니다. 내가 가진 힘이 더 강하니까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지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인간마저 돌아서 버린다면, 또,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니까요.”
세계의 멸망.
그 끔찍했던 일이 또 벌어질 테지.
라이엔은 그 말을 삼켰다.
똑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미 만났고, 곧 만날 겁니다. 오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내가 만났다고?”
은호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봤던 존재는 많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남은 건 딱 둘 뿐이었다.
누구인지 알자마자 은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디올린. 그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라이엔은 이름을 언급했다.
이름에 제약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 제약을 알기에 함부로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가야 합니다. 지금, 오고 있습니다.”
“라이엔.”
“네.”
“디올린이 흑견들을 죽인 걸 알고 있어?”
“…….”
왕은 다가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숨소리가 빨라졌다.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었다.
라이엔이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보는 것에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아무래도 디올린은 널 잘 모르는 것 같아. 네가 뭘 알고, 모르는지 말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흑견들을 죽일 리가 없지.”“그게 무슨 소리입니까?”“인간과 손을 잡은 사실을 숨기려고 죽인 거야.”“인간의 실수가… 아닌 겁니까?”
라이엔은 분노를 꾹 눌렀다.
갈기가, 털이, 가면에 부착된 장식구들이 수도 없이 흔들렸으니까.
“아니니까, 만나려고.”
은호는 디올린을 제대로 보고자 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따위 짓을 저지르는지.
“당신이 디올린을 만나겠다고요?”“그래. 얼굴은 봐야지.”
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자신을 어쩌질 못할 테니까.
“일단, 가야 합니다.”
라이엔은 은호를 재촉했다.
그게 먼저였다.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디올린에게 들킬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무가 급히 은호를 불렀다.
나뭇가지가 뻗어왔다.
꺾어, 가져가십시오.
은호는 거절하려다가 위그드라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안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꺾었다.
심으라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가야 한다는 라이엔의 재촉에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고마워.”
가지고 있는 피를 나무에게 전부 뿌려주었다.
* * *
“…생각보다 늦어지네. 그렇지, 친구?”
윈디드가 말을 꺼내자 흑견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렇다.”
“…화난 거 아니지?”“내가 화를 내봤자 무엇이 달라지는가?”
어딜 봐도 흑견은 화가 난 상태였다.
어쩌면 화가 아니라 실망일까.
무엇이 되었든 윈디드는 그 감정을 이해했다.
흑견은 왕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태어나서 본 존재가 왕이셨어. 우리 집안은 대대로 수호자를 했으니까.”
흑견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왕과 함께한 시간은 말썽꾸러기와 만난 시간보다 훨씬 길어.”“너에게 실망한 건 맞다. 하지만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나의 일과 너의 일은 다르니까.”
자라왔던 환경도, 겪었던 사건도 달랐다.
흑견은 숨을 길게 내쉬려다가 멈췄다.
빛과 함께 라이엔과 은호가 나타났다.
“왔는가?”
흑견은 은호에게 다가왔다.
“멈추세요.”
라이엔은 흑견이 아닌, 밖을 보며 말했다.
“접니다, 왕이시여.”
그 목소리에 은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에 윈디드와 대화하던 목소리가 맞았다.
그 환수가 디올린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손님이 있습니다.”
“아, 아까 봤습니다. 수호자가 들어가는 걸 봤으니까요.”“다른 손님입니다.”
“다른 손님이요?”
의문이 들려오자 은호는 밖을 향해 걸었다.
누가 그를 말리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내가 손님이야.”
은호는 디올린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슴을 닮은 저 환수는 날카로움이 섞인 붉은 눈동자로 은호를 보았다.
조각과도 같은 근육과 머리 뒤로 넘긴 뿔이 매력적이며 발이 다리보다 훨씬 두껍고 굵었다.
날개의 한쪽을 달아놓은 것처럼 화려한 꼬리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안녕, 친구야.”
은호가 목소리를 꺼내자 디올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시선은 위로 올라갔다.
“…왕이시여, 인간이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해명을 바랐다.
‘놀랐니?’
은호는 웃음을 꾹 눌렀다.
몰랐으면 몰랐지, 안 이상 디올린의 눈빛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인간이긴 한데, 내가 자연의 대리자야. 이 정도면 올 자격이 있잖아. 그렇지?”
은호의 두 눈이 살포시 감겼다.
어차피 마나석이라는 그 비밀을 캔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았는가.
뭘 숨길까.
“아무래도 나를 보면 다른 환수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왕이 친구를 거절한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
디올린은 황당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은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냐.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들어올래? 급한 일 같던데?”
디올린은 주저하다 말고 안으로 들어왔다.
흑견을 보자 아주 잠깐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흑견은 디올린을 보았다.
“…어떻게, 어둠에서 태어난 자가 있는 거지?”
디올린의 물음에 은호가 도리어 웃으며 대답했다.
“맞지? 친구도 놀랐지? 나도 그랬어.”
태연하게 끼어드는 그 말에 디올린은 라이엔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왕이시여?”“기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잘못을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까요.”“…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디올린은 겨우 말을 삼킨 듯 보였다.
은호는 태연하게 디올린에게 다가갔다.
디올린은 눈가를 꿈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더러운 걸 보는 듯한 눈이었다.
“왜 도망가는 거야, 친구야?”
은호는 그 반응을 오히려 이상하게 받아들이며 더 빨리 다가가 디올린을 만졌다.
순간, 디올린은 깜짝 놀라며 날을 세웠다.
“그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 마라, 인간!”
그 눈동자에 경멸이 어렸다.
인간을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라이엔의 목소리가 무거워지자 이곳 분위기가 금세 싸늘하게 변했다.
“인간이, 저를…….”“자연의 대리자입니다. 예의를 갖추시죠.”“…그럴 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대리자라뇨.”
은호는 디올린의 말에 교감의 힘을 퍼트렸다.
새어 나오는 빛을 보자 디올린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정말이야. 식물이라도 키워봐야 믿어주겠어?”
은호가 장난기를 담아 물었지만, 디올린이 주목한 건 퍼진 빛이었다.
빛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이건 진짜였다.
이건, 위험했다.
“……정말 자연의 대리자라고? 네가?”
디올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눈을 했다.
“맞아. 내가 죽으면 큰일이 난다는 말을 나누고 있었어. 그렇죠?”
은호는 눈웃음을 지으며 라이엔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왕께서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분위기가 이상할 만큼 좋았기에 디올린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해지면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사라졌던 대리자가 돌아왔으니까요. 그만큼 신중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그러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입니까?”
윈디드가 디올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일이 되풀이되는 듯한 상황에 디올린은 윈디드를 보았다.
살짝 날이 선 눈빛이었지만, 윈디드의 표정에서 그 어떤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영문을 알 수 없는 의문만 가득했다.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니야.’
디올린은 생각했다.
“친구는 의심이 많아 보이고, 왕은 친구를 믿고 있나 봐.”
은호가 실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당연히 신뢰합니다. 내가 누굴 믿겠습니까?”
감미로운 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디올린은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어떤 순간보다 왕이 자신을 신뢰하는 게 선명히 느껴졌으니까.
“…아차, 왕에게 하려던 급한 말이 뭐야? 이제는 같이 들어도 되겠지?”
은호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묘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디올린은 라이엔에게 보고를 올렸다.
“…최근, 불손한 움직임이 감지됐습니다. 이곳에 낯선 자의 흔적을 느껴 보고하러 왔으나, 저들일 줄은 몰랐습니다.”“불손한 움직임이라… 혹시, 배신자가 있는 거야?”
은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눈길이 가자 디올린은 날뛰는 마음을 억눌렀다.
위험했다.
생각 이상으로 자연의 대리자가 가진 힘은 강렬했다.
“그렇습니다. 조금 더 확신하면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알려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배신을 할 수 있어?”
놀라던 은호는 디올린을 향해 도리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아니, 듣자 하니까, 상황이 좀 복잡하더라고.”“나도 듣고 있으니, 이상하더군.”
흑견이 입을 열었다.
뭘 하는지 몰라도, 이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사슴 대가리한테 뭔가가 있다는걸.
“왕이 죽으면 우리가 다 죽는다고 하는데, 어떤 멍청이가 왕을 배신하는가?”
흑견은 ‘멍청이’에 힘을 가득 주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하네. 우리가 죽는 걸 모르는 걸까?”
윈디드는 흑견이 던진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깬 자들이 아닐까 싶습니까?”
디올린이 꺼낸 반문에 은호는 턱을 매만졌다.
“약속을 깨도 이성이 있잖아. 그렇죠?”
은호는 라이엔에게 물었다.
“이성은 남아 있습니다.”“그런데 왜 머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죠? 본인이 왕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텐데요. 아. 본인이 왕이 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믿는 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장난기를 담은 은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얄미웠다.
은호의 시선은 디올린을 향했다.
“친구야. 친구는 어떻게 생각해? 고민을 되게 많이 했을 거잖아?”“잡아야 합니다. 이유를 떠나 왕을 위협하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잡는 게 먼저긴 해. 만약에 범인을 알아낸다면 그 환수한테 이 말을 꼭 하고 싶긴 해.”
은호는 디올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라이엔 뒤쪽의 나무를 보며 경고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헛고생이라고. 혹시나 왕을 죽인다고 해서 왕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왕이 되려면 자연의 축복을 받아야 했다. 자신이 거부하면 자연도 의견 정도는 반영해주지 않을까.
은호는 고개를 돌려 디올린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유감이라고 말이야.”
너 말이야.
왜 디올린이 왕을 노리는지 모르겠지만, 내심 찝찝한 구석이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확실한… 경고가 되겠군요.”
디올린은 표정을 유지했다.
은호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은호는 디올린을 붙잡는 듯한 말을 꺼냈다.
“나눌 말씀이 있잖습니까?”“그건 그렇긴 한데…….”“조금 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흥분했던 모양입니다.”“그건 괜찮긴 한데,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야?”“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디올린이 돌아가자 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경고가 됐을까.
자신의 말에 흔들렸을까.
뭐가 되었든 디올린이 세운 계획이 백지화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자인가?”
흑견이 입을 열었다.
조용한 분노가 들끓었기에 은호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맞아.”
“…그게 무슨 말이야?”
윈디드는 눈을 깜박거렸다.
뭔지 알겠지만, 머리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그대를 해한 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몰랐습니다.”
라이엔은 흑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됐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이 모든 걸 일으킨 존재를 방금 알아내지 않았는가.
“…저놈에게 죽지 마라.”
흑견은 말을 하는 내내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기가 어려워졌다.
“네. 죽지 않겠습니다.”
라이엔의 대답이 떨어지자 흑견은 그대로 웅크렸다.
“나누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조만간 인간이 올 거다.”
태호가 올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애초에 왕이 난리를 피워 이렇게 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면 말이야. 상황이 좀 이상하긴 해도, 간식 먹을래?”
은호는 공간을 열었다.
그 너머에 집이 펼쳐져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꼬맹이들이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다 같이 말이야.”
아마도 라이엔이 반 정도 걸쳐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은호는 상상하며 즐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