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80)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80화(280/302)
279화. 계약
“…형. 듣고 있어요?”
은호는 아산에게 기대어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연락이 끊긴 건 아니었는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와. 와아아. 와.>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형. 괜찮아요…?”
<아니. …전혀. 조금도 괜찮지 않은 상태야. 와…….>
은호는 태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흑견들과 라이엔의 재회를 방해할 수 없어 흑견만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왔다.
앞으로 흑견들은 라이엔의 그림자로 들어갈 테고, 라이엔의 친구인 그 식물이 있는 곳에서 머물지 않을까.
흑견들의 존재만으로 무척 든든했다.
“기쁜가?”
크게 하품하던 흑견이 넌지시 물었다.
“기쁘지. 나는 기쁜데, 멍멍이 형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네.”“아무 생각 없다. 나는 그 무리에 낄 생각이 없으니까.”“역시 내 옆이 좋지?”
은호가 실실 웃자 흑견은 고개를 휙 돌렸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허…. 멍멍이 형님. 말을 그렇게 막 바꾸면 안 되는 거야.”“내 마음이 아닌가.”“아니, 그렇긴 한데…….”“인간은 좋아해도 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어렵다. 이해해주겠나?”“당연히 알지. 자중하고 있어.”
흑견에게는 자신이 느끼는 이 기쁨이 어쩌면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더 쓰라릴 수 있으니까.
“멍멍이 형님. 나는 말이야. 라이엔을 도울 거야. 주변을 다시 되돌릴 거고. 그 뒤에 디올린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려고.”“왕의 숨통부터 트겠다는 건가?”“맞아. 지금 이 상황은 안 돼. 라이엔은 지금 바람을 앞에 둔 촛불이야.”
일단, 계약이 시급했다.
여차하면 그곳을 떠날 수 있게 자유로워져야 했다.
<…은호 씨. 라이엔이 누군데?>
은호는 갑자기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놀랐지만, 이내 웃었다.
“왕이요.”
잠깐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다 놀랐어요?”
<더 놀랄 게 생기네. 왕의 이름을 알다니.>
“더 놀라도 돼요.”
<…아니야. 너무 놀랐더니, 심장이 아프네. 어쨌든, 은호 씨는 왕부터 보호하고 싶다는 거지?>
“맞아요. 왕부터 보호하고 싶어요. 그게 먼저잖아요?”<그게 먼저이긴 하지. 디올린의 시선을 피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거고. 그렇지?>
“네. 지금 제발 디올린이 알아차리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어요. 알아챘을까요?”
“아니.”
흑견이 대답했다.
<아니. 은호 씨가 가진 힘도 모를 텐데? 게다가 식물들이 은호 씨를 지켜주고 있잖아?>
“맞아요.”
은호는 아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게 있다면 바로 알려달라고 했다.
이전에 디올린이 초능력 관리국 뒤쪽에 있는 산속 식물들에게 마나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입을 막은 적이 있었다.
식물들이 자신을 공격했지만, 식물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공격한 건 아니었다.
어떤 단어가 버튼이 된 것처럼 반응했으니까.
‘내 피는 졌지만, 결과적으로 이기긴 했어.’
사라진 식물을 불러왔으니까.
‘사라진 식물을 불러와서 이름을 붙여주면 이곳에 자랄 수 있으려나.’
생각이 길어질 때쯤,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호 씨.>
“네?”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어.>
“형. 역시 잠을 깨우는 데 있어 이만한 게 없죠?”
은호가 자신감 있게 말하자 휴대전화 너머로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흑견들이 살아 있을 줄이야. 믿을 수가 없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나도요. 이 소식으로 형의 마음이 좀 가벼워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연락했어요.”
흑견이야말로 태호의 아픈 손가락이 아니겠는가.
<……고마워. 진심이야.>
“맛있는 거나 사줘요.”<…아. 지금, 환수랑 놀러 가고 싶네.>
“나는 놀러 갈 건데요?”<은호 씨만 간다고?>
“라이엔도 데려갈 건데요? 다 데려갈 건데요?”
세티아가 보면 얼마나 기뻐하려나.
‘당근도 가져다줘야 하는데.’
혼자 덩그러니 호수를 볼 세티아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주 찾아가기로 했는데, 요즘 겹치는 일로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만 참아야죠.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디올린.
많은 힘을 가진 환수였다.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게 라이엔부터 잡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디올린을 잡고 난 뒤에도 남은 일들이 쌓여 있지만, 천천히 해결해도 되는 문제들이었다.
“형.”
“뭘 할 건가, 인간.”
<…이건 뭔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말투인데?>
흑견과 태호가 불안함을 섞어 물었다.
“그냥… 형을 불렀는데요?”“다르다. 또 말도 안 되는 걸 꺼내려고 준비하는 거다.”<아니야. 이게 좀 달라. 뭔가 생각이 난 거 맞지?>
“…어떻게 알았어요?”
둘 다 정답이었다.
“하지 마라, 인간.”
흑견은 바로 말렸다.
<그거,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태호 역시 말렸다.
“일단 들어봐요. 갑자기 생각이 나긴 했지만,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근거가 없진 않겠지. 그런데 불안하단 말이지.>
“내가 한 식물을 불러왔단 말이에요. 이 식물이 디올린의 힘을 이겼어요.”“……인간. 그만둬라.”<…하. 이럴 줄 알았어. 진짜 이럴 줄 알았다고. 그때, 배가 뚫렸을 때 말하는 거지? 됐어. 그만둬!>
흑견과 태호의 반응은 너무도 좋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는 날을 세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은호는 당당하게 말했다.
“실험해볼 가치는 있잖아요. 만약에 그 식물을 키울 수 있다면 이게 전력이 되는 거고요. 지금 문제가 그거잖아요. 디올린이 과연 얼마나 많은 힘을 심었을까? 이거요.”<그건 맞는데…. 그럼, 하나만 물을게. 그렇게 식물을 부른다고 치면, 은호 씨는 괜찮아?>
“아뇨.”
<아니라고…?>
태호의 당황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긴 한데, 그래도 해볼 수는 있잖아요?”<일단 말이야.>
“네.”
<잠이나 자. 그럼.>
태호는 긴급하게 끊어버렸다.
급한 일이라면 이제 거의 다 처리했을 텐데, 도망갔다.
은호는 허탈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형이… 좀 달라졌는데?’
원래 이러진 않았는데.
은호는 갸웃거리며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아니, 멍멍이 형님. 이거 솔직히 해볼 만하지 않아?”
흑견은 바로 인상을 썼다.
은호는 이상한 힘을 쓰면 쓰러지곤 했다.
대체 어디가 해볼 만하다는 건지 몰랐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어볼 거나 물어보거라. 집으로 가야 하니까.”
집이라는 말이 나오자 은호는 괜히 실실 웃음이 났다.
“갑자기 왜 웃는가?”
“아니, 그냥.”
“인간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그래도 한 번은 생각해볼 수 있잖아?”
자신보다 동족이 훨씬 더 편할 수 있었다.
‘만약’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 나무나 봐라. 아까부터 계속 인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인간.”
“응?”
“만약이라는 건 없다. 됐는가?”
흑견이 못을 박았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
그렇게 말해주자 은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흑견 다운 말이었다.
은호는 몸을 돌려 아산을 보았다.
“아산. 너무 많이 기다렸지?”
아닙니다. 우리는 늘 한 자리에서 머무니까요. 무척 짧은 시간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만났습니까?
“…알고 있었어?”
은호는 입을 벌렸다.
아산이 그 나무를 알고 있을 줄이야.
땅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바다도 결국, 땅이 존재합니다.
“혹시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건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 나무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아산 역시 알려주는 걸 꺼렸다니.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그때는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자연의 대리자께서 원하시는 그 힘이 당신을 해칠 테니까요.
아산의 대답에 은호는 힘이 빠졌다.
“내가 뭘 어떻게 할지 예상했구나.”
우리는 당신을 다 보고 있습니다. 무얼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말입니다.
“식물들도 인간이 어떻게 나오는지 안단 말인가?”
흑견이 웃었다.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없지만, 들어보면 대충 그랬다.
참 우스웠다.
…죄송합니다.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이니까요.
아산의 사과에 은호는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해.”
굉장히 민망했다.
다급히 말을 돌렸다.
“위, 위그드라실 말이야. 그 나무가 널 통해서 위그드라실을 만들었다고 했어.”
은호는 아산을 끌어안은 위그드라실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자연의 대리자가 가진 힘과 그 나무의 힘. 그리고 저의 몸에서 비롯된 껍질이 섞여 있습니다.
위그드라실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세 가지가 다 섞여 만들어진 게 위그드라실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친구야. 이제 계약을 체결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
위그드라실이 완전히 자라지 않아 불안정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아산. 가능하다면 나는 이 계약을 체결하고 싶어.”
환수들이 가진 야성을 눌러야 했다.
이건 그들을 위해 꼭 필요한 거라고 했다.
이 계약은 당신이 죽은 뒤에도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유지가 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를 수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또한, 당신은 이 세계에 귀속이 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원래 세계로.
은호는 입을 열려다 말고 잠깐 멈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모의 집 기간을 더 연장할걸.’
그곳에 가족들이 있었다.
‘다행이다.’
회사를 때려치우기 전에 들렸다.
곧 같은 곳으로 가겠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인사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인사를 했네.’
은호는 방긋 웃었다.
“응. 괜찮아.”
그 세계에 후회는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다른 건 없어?”
없습니다. 당신은 자연의 대리자입니다. 자연의 선택을 받은 당신의 뜻을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혹시, 왕을 불러와야 해?”
그렇습니다. 서로 맞잡아야 합니다.
“앞발만 내밀면 된다, 이거지?”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건 괜찮아. 아산은 정말 많은 걸 알고 있네?”
아산은 나뭇가지를 뻗었다.
저는 그분이 탄생시킨 최초의 나무니까요.
“…어?”
은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전 자연의 대리자가 탄생시켰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분께서는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산의 나뭇가지가 은호의 얼굴을 만졌다.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주 그리운 이를 만난 것 같았으니까.
‘나는… 아니겠지?’
은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하도 희한한 일들이 가득해 설마 했다.
“그럼, 시작할까?”
아산이 뭘 말하는지 몰라 은호는 상황을 돌렸다.
준비됐습니다.
아산의 대답을 들은 은호는 다시금 태블릿을 보았다.
디올린은 라이엔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은호가 손톱을 물어뜯자, 흑견이 어둠으로 그 손을 잡았다.
“저번에 다 떼어먹고도 모자랐나?”“…아니. 습관이라서.”
은호는 디올린이 갈 동안 태블릿을 빤히 쳐다보았다.
‘들켰나…? 들킨 건 아니겠지?’
아니길 빌었다.
아직, 들킬 수 없었다.
대처를 얼마나 했는가.
허태인 때문에 디올린이 날이 선 건 알지만, 고작 그 이유 하나로 뭔가를 추론하기에는 모자랐다.
복종의 힘으로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도 자신이 언급되려면 지혜, 태호, 그리고 가을의 정신을 건드려야 할 테니까.
은호가 또 손톱을 물어뜯으려다 멈췄다.
디올린이 가고 있었다.
“…하.”
태블릿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보는지 몰랐다.
오죽하면 태블릿도 그만 살펴보라고 말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아산.”
은호는 아산에게 말을 하며 칼을 꺼냈다.
피를 많이 내려면 역시 이것밖에 없었다.
‘…아. 시간도 있는데 피를 전해주자.’
은호는 그 나무가 있는 곳으로 공간을 열었다.
아름다운 꽃잎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곳에 흑견들이 있는지, 샛노란 눈동자들과 마주했다.
소름 끼칠 뻔하나, 은호는 오히려 반가웠다.
“쉿.”
은호는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린 뒤, 손을 뻗어 가방을 뒤졌다.
미리 모은 피들이 가득했다.
은호는 흑견을 보았다.
흑견은 어둠으로 피를 죄다 쥐어서는 공간 안으로 쭉 뻗었다.
나무를 향해 피를 쏟았다.
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든 뒤, 공간을 닫았다.
쇠약함이 남달랐기에 이렇게라도 피를 줘서 건강하게 만들고 싶었다.
“들키지 않았겠지?”
은호가 묻자 흑견은 그를 빤히 보았다.
앞발로 얼굴을 눌렀다.
“초조해하지 마라.”
“그게 잘 안 돼. 이건 시간 싸움이고, 아직 들킬 순 없으니까.”
은호는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디올린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해 더 기다려야 했다.
은호는 말없이 태블릿만 보았다.
디올린이 완전히 바다를 건너서야 은호는 라이엔이 있는 곳으로 공간을 열었다.
“라이엔. 계약을 시작할게.”
은호는 라이엔을 보며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