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81)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81화(281/302)
280화. 계약(2)
기회는 잡아야 했다.
이 시기를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열린 공간 너머로 라이엔의 빛이 뻗어 나와 주변을 밝혔다.
급히 빛의 양을 조절했지만, 라이엔은 은호를 바라보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라이엔. 시간이 없어.”
은호는 라이엔을 재촉했다.
대체 왜 가만히 있는지 몰라도 아까 흑견들과 함께 라이엔을 찾아갔을 때 이미 계약을 체결하러 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미안합니다.”
갑작스러운 라이엔의 사과에 은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이엔. 왜 그러는 거야?”“계약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들었습니다.”
그 나무한테 들은 걸까.
만일 하나,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그것마저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은호는 라이엔이 안심할 수 있게 눈웃음을 지었다.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라이엔. 돌아갈 생각은 없어. 친구가 사과할 이유도 없고.”
이곳에 마나석은 없었다.
애초에 좋든 싫든 돌아갈 티켓이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라이엔의 탓으로 해버릴 수 있지만, 굳이 왜 그래야 할까.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 거 잊었어?”
은호는 라이엔을 보며 활짝 웃었다.
“너무 많은 짐을… 안겨 드린 것 같아 미안합니다.”
“라이엔.”
은호가 직접 걸어가 라이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발끝을 들어야 했지만, 라이엔이 고개를 숙여 닿았다.
“네가 너의 일을 하듯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아무리 하려고 해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하는 일을 할 수도 없으니까.”
각자 서로가 해야 하는 몫이 있는 것뿐이었다.
“싫어서 하는 일도 아니야. 억지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처음부터 너희의 임시 보호소가 되겠다고 결심했어.”
아름답고, 아름다운 환수라는 생물을 지키고 싶었다.
살면서 늘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삶은 고통이고, 절망만 안겨줬다.
하지만 그 고통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품은 알이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이 일이 다 끝나면 같이 놀러 가자.”
은호는 씩 웃었다.
“…놀러 간다고요?”
“맞아. 쭈욱 주변도 둘러보고, 네가 굳건하다는 것도 보여주고. 그리고 소개해주고 싶은 인간도, 아니다, 너는 이미 봤겠네.”“설태호말입니까?”
“맞아. 내 형이야.”
은호는 태호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딱 자신의 형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진짜 형이면 좋겠다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쩐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라이엔이 그제야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입니다.”
―동생이 있는데, 진짜 말썽꾸러기거든? 성인인 건 아는데, 나이 차이가 좀 나서 그런가, 자꾸 눈에 걸리네.
하소연이었다.
태호를 만난 뒤로 처음 듣는 말이라 기억이 꽤 오래 남았다.
늘 이곳에 가두게 해서 미안하다며 어떻게든 나오게 해주겠다고 위로해주던 인간이었으니까.
“그 말썽꾸러기가 은호였군요.”
라이엔의 말에 은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푸핫.
흑견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이 라이엔의 입까지 맴돌 줄이야.
“계…약하러 갈까?”
은호는 밖을 가리킨 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간 너머로 움직였다.
“그대가 가장 가까이서 은호를 본 존재입니까?”
라이엔은 걸어 나오며 흑견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힘이 드셨겠습니다.”
라이엔은 방금 은호가 꺼낸 말을 듣고 평소에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윈디드가 올 때마다 은호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매번 고민이 깊어 보이는 이유도 이제야 알았다.
―오늘 계약하자, 라이엔.
조금 전 은호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 할 줄은 몰랐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앞밖에 못 본다고 해야 할지.
라이엔은 상체만 공간 너머로 내민 채로 멈췄다.
곧 주변을 바라보았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수많은 냄새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밖이었다.
바람 소리가 제일 먼저 귀에 닿았다.
“그대가 아산이군요.”
라이엔은 흰 꽃과 검은 꽃이 공존하는 아산으로 시선을 뒀다.
고개를 숙이듯 꽃의 방향이 아래로 향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약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이엔은 은호를 보며 무거운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은호는 자연에게 자신이 믿을 만한 존재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자연은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아니었고.
‘증명’하는 대가가 달랐다.
그게 피였다.
목숨을 담보로 할 수 없으니 대체되는 대가였다.
아주 많이 흘려야 했다.
“은호. 괜찮겠습니까?”
라이엔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라이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
살며시 은호의 웃음이 터졌다.
사람이었다면 벌써 자신을 어떻게 이용할지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려볼 텐데, 라이엔은 아니었다.
수없는 걱정이 다각도에서 밀려드는 상황임에도,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말렸다.
‘이래서 저들이 너무 좋다니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똑같이 솔직한 마음이 다가왔다.
더 많은 걸 담고서.
크리스마스에 처음으로 받은 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은호는 아산을 보았다.
“뭐부터 필요해?”
위그드라실. 가운데 서 주시겠습니까?
아산의 부탁에 위그드라실은 아산이 가리키는 곳에 섰다.
여기에 서면 돼?
그렇게 물어보자 아산은 나뭇가지를 길게 뻗어 위그드라실을 쓰다듬었다.
위그드라실은 라이엔과 아산 그 중앙에 섰다.
자연의 대리자께서는 여기에 서 주시겠습니까?
아산이 가리킨 곳은 위그드라실과 마주 보는 곳이었다.
위그드라실에게 피를 뿌려주십시오.
“위그드라실한테?”
맞습니다.
은호는 그 대답을 들으며 위그드라실을 보았다.
“쪼그려서 뿌려도 돼? 위에서 뿌리면 아플 것 같은데?”
낙차가 있기에 무게가 달랐다.
라이엔이 작게 웃었다.
그런 걸 생각할 줄이야.
위그드라실이 양팔을 뻗어 근육을 보여주는 자세를 취했다.
난 강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자 은호는 괜히 웃음이 났다.
“맞아. 위그드라실은 강해. 강한 건 아는데, 그래도 아플 수 있잖아.”
씨앗이었다.
괜한 소리라는 걸 알지만,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쩌겠는가.
괜찮습니다. 당신은 이제 계약서 그 자체가 될 위그드라실에게 대가를 바쳐야 하니까요.
‘…아. 아산과 라이엔이 계약 주체자이고, 위그드라실이 계약서. 그리고 내가 그 계약서의 내용이 된다는 거네?’
왜 이렇게 섰는지 이해했다.
은호는 쪼그려 앉아 꺼낸 칼을 쥐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해?”
은호가 아산에게 물었다.
피를 바치며 계약을 맺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뒤는, 자연이 알려줄 겁니다. 나머지는 서로 손을 마주 잡아야 합니다.
아산의 조용한 말을 끝으로 은호는 손목을 베어냈다.
스윽.
오랜만에 느껴지는 통증에 은호는 깜짝 놀랐다.
‘이거 되게… 아팠네?’
그때는 몰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이런 통증이 아니었는데.
은호는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아차’하며 위그드라실에게 피를 쏟았다.
위그드라실이 붉게 적셔졌다.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은호가 말을 꺼내자 그 순간, 주변의 소리가 멈췄다.
은호는 놀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멈췄다.
동시에 은호 역시 생각이 멈췄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몰랐다.
왜 주변이 이렇게 변한 걸까.
“…얻어걸린 자라.”
타닥타닥.
타자 소리가 들렸다.
은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
지금 옷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
은호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야.”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너무도 낯설었다.
“나는 모습이 없어. 그래서 빌린 거야. 네 얼굴을 말이야. 혹시 불만이라도 있어?”
까칠했다.
목소리도 똑같은데,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서은호.”
자리에서 일어난 그 존재는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널 수 없이 보았어. 네가 이 땅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말이야.”
“…자연, 인가요?”
“사실 고민이 많았어. 나는 말이야, 이곳을 버리려고 했거든.”
자연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는 말에 은호는 그제야 망설임 없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돌한 시선에 자연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갑자기 꼬물꼬물 움직이는 거야. 이럴 애가 아닌데 말이야. 애초에 네가 가진 건 내가 건네준 힘도 아니잖아?”
드루이드.
이건 다른 곳에서 가져온 힘이었다.
“너도 이곳에 있던 존재가 아니고.”
자연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컵이 들려 있었다.
호록.
커피일까.
커피 냄새가 났다.
“그래서 그냥 봤어. 보다 보니까, 좀 재밌더라고. 다른 곳에서 온 네가. 내가 준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 다른 곳에서 온 생물체를 위하는 모습이 말이야.”
“비웃는 건가요?”
“아니. 내가 너를 비웃어봤자 얻는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방금 말했잖아. 나는 이곳에 손을 떼려고 했다고.”
“왜요?”
“질려서. 너도 숫자로 세는 것만으로 아득한 시간을 보내 봐. 질리나, 질리지 않나.”
자연은 마치 신처럼 말하고 있었다.
오만하게.
“아, 나는 신이 아니야. 그런 존재였으면 얼마나 편했겠어? 그냥 군집? 뭐, 그런 거야. 내가 말했잖아? 모습이 없어서 빌렸다고.”“이게 계약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인가요?”“그렇지. 원래는 뭐, 좀 더 엄숙하게 진행했겠지만, 이제는 귀찮아.”“그러면 그냥 계약 동의 사인만 하면 되잖아요?”“너를 못 만나잖아.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 다른 힘이든 뭐든, 날 만날 수 있는 티켓인데 그냥 보내면 되겠어? 나도 널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자연은 능글맞게 웃었다.
“어째서요?”
“궁금하니까. 아주 특이하고, 특별한 일이기도 해.”“궁금증은 해결이 됐나요?”
은호가 묻자 자연은 키득거렸다.
똑같은 얼굴로 저러니 점점 기분이 나빴다.
“아가야. 날을 세우지 마.”“지금 일어나는 것들은 해결할 수 없는 거죠?”“나는 그저 보는 것밖에 못 해. 날 대신 움직이라고 힘을 준 거고. 아, 내 힘은 아니지만.”“그럼, 당신 것도 주세요.”
은호가 손을 뻗자 자연은 배를 잡고 웃었다.
뭐가 웃긴 지 좀처럼 멈추질 못했다.
“아가야.”
자연은 다가와 손을 뻗었다.
은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욕심을 부리는 것도 다 좋은데, 똑같은 힘이야. 그래도 더 줄 수 있는 건 줘볼게.”“여길 버리지 말아요.”“그러려고. 너 있는 동안은 좀 더 볼게.”
왜 자신이 있는 동안인지.
그게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은호는 더 요구할 수 없었다.
체급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말이야.”
자연은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했다.
“널 원망한 적이 없다더라.”
“네…?”
“오케이. 계약 체결.”
자연은 ‘누군가’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호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은호의 표정이 굳어졌고, 자연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건드렸다.
그곳에 나무 모양으로 된 증표가 새겨졌다가 사라졌다.
은호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넌 내가 흥미를 느낄 만큼, 잘하고 있어.”
“…….”
갑작스러운 칭찬에 은호는 당황스러웠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야 하잖아? 그렇지?”
“맞아요.”
“조금은, 힘내볼까 해. 작고 작은 게 열심히 하려고 꼬물거리고 있으니, 좀 부끄러워졌으니까.”“꼬물거린 건 아니었는데…….”“하고 싶은 대로 해봐.”
자연이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대로 은호를 안아주었다.
“내 작은 아이야.”
뚝.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멈췄던 시간이 풀렸다.
‘…본인 힘이 아니라면서.’
은호는 기가 찼다.
고개를 들자 위그드라실 위로 피가 나무 모양이 되어 허공에 뜬 게 보였다.
되게 많은 양이었다.
“계약은.”
은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자신이 말한 게 아니었다.
고개가 돌아갔다.
라이엔도, 흑견도, 아산과 위그드라실까지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무슨 표정인지 몰랐다.
“체결됐다.”
그 말을 끝으로 떠 있던 모든 피가 위그드라실을 향해 스며들었다.
은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시선이 내려갔다.
위그드라실을 중심으로 피로 된 원이 그려져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자 그 옆에 라이엔과 아산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원이 그려져 있는 건 똑같았다.
‘…와. 저게 다 내 피라는 거잖아? 얼마나 흘린 거야?’
은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주 잠깐 눈앞이 캄캄해지나 싶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 흑견이 보였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그제야 은호는 자신의 몸에 피가 거진 다 빠진 기분을 느꼈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걸까.
추웠다.
너무 추워 정신이 아득해졌다.
라이엔이 주저 없이 공간 너머에서 나왔다.
은호를 입으로 물자 흑견이 진노했다.
“네가…….”
“화가 난 건 알겠지만,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어딘지 알아요.”
은호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라이엔이 밖으로 나왔다.
라이엔이.
정말 계약이 체결되었다.
은호는 안도하며 공간을 닫았다.
* * *
번쩍.
갑자기 흘러나오는 빛에 태호는 괴로워하다 말고 가만히 있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 자리에 라이엔이 서 있었다.
“……?”
눈을 의심하며 비비던 차, 라이엔이 은호를 내려주었다.
“……은호야!”
태호가 은호를 안았다.
손목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너무 놀라 외투를 벗어 지혈했다.
―미안합니다.
라이엔은 고개를 숙인 채 빛과 함께 사라졌고, 태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