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83)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83화(283/302)
282화. 치워버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엔은 웅크렸던 몸을 세웠다.
“아, 깨셨습니까? 곤히 잠드실 줄은 몰랐습니다.”“무슨 일이십니까, 디올린? 급한 일이 있습니까?”
디올린은 이름이 불리자 미소를 길게 지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어 겁이 나 들어오게 됐습니다.”“오랜만에 곤히 잔 모양입니다.”“찾아온 건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보고라고 생각해주셔도 좋고, 잔잔한 말동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라이엔이 괜찮다며 권하자 디올린은 조금 더 다가왔다.
문이 닫혔다.
무릎을 꿇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최근, 인간들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왕을 해할까 걱정입니다.”“디올린. 그대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겁니다. 인간은 날 해칠 수 없습니다.”
단호하되, 부드러운 말에 디올린의 한쪽 눈가가 위로 올라갔다.
“정말, 인간이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디올린은 말을 끝낸 뒤 입을 다물었다.
“디올린.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나 대신 많은 일을 하느라 힘들지 않습니까…?”
라이엔의 목소리에 디올린은 아주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다 자연의 대리자를 만난 영향이었다.
“평소랑 똑같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올린은 말을 꺼낸 뒤, 잠깐 앞발에 힘을 주었다.
영광이라.
우스웠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왕이시여.”
“말씀하세요.”
“자연의 대리자를 만난 뒤, 내내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대리자가 했던 말, 그게 정말입니까?”
―헛고생이라고. 왕을 죽인다고 해서 왕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자연의 대리자한테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그건 너무도 잔인한 사실이 아닌가.
설마 했지만, 눈앞에 있는 왕을 죽일 수 없다는 소리였다.
자연의 대리자가 왕을 죽인 자신을 왕으로 추대할 리가 없으니까.
“사실입니다.”
라이엔이 꺼낸 말에 디올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꾸욱 눌려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왕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허락을 맡은 겁니까?”“그대는, 왕이 되고 싶습니까?”
라이엔의 물음이 이어지자 디올린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격이 커 너무 깊게 물어봤다 싶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왕의 자리를 노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왕이 되는 법을 처음 들어 신기해서 물어봤습니다.”
디올린은 라이엔을 바라보았다.
찬란했다.
빛을 품은 듯한 새하얀 털마저 부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왕이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왕임을 알아챌 정도의 기품이 흘러넘쳤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압박하는 이 느낌, 쉽지 않았다.
“…당신은 제가 태어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왕이셨잖습니까. 바뀐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자는 부모가 아니라 왕이었다.
평생을 바쳐 왕에게 충성하고자 했다.
그래도 되는 분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분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맞아요. 디올린을 처음 본 건 나였어요. 그대는 내게 있어 얼마나 특별한지 모릅니다.”
라이엔이 가볍게 웃었다.
원래 세상이 멸망하는 날 태어난 존재가 바로 디올린이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그때도 왕께서는 웃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웃었습니다. 내가 슬퍼하면 그대들이 불안할 테니까요. 나는 그대들의 왕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디올린의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 본 그때부터 이 충성심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먼저 배신한 건 왕이었다.
“내가… 밉습니까?”
“어찌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디올린.”
라이엔은 수많은 말을 삼켰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야성을 지금도 얼마만큼 억누르고 있는 건지.
“나는, 그대를 무척 아낍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테지.
“그러면 왕이시여.”
디올린은 라이엔이 쓴 가면을 보았다.
자신은 저 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모두를 이곳으로 옮길 때 생긴 대가였다.
“제발, 인간에게 더는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마지막 부탁이었다.
자신을 아낀다면,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럴 수 없습니다.”
라이엔은 이전처럼 너무도 잔인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또, 디올린은 같은 소리를 꺼냈다.
“디올린. 그대는 성체입니다. 더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수없이 죽을 존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이미… 수없이 죽었습니다. 죽고 있습니다.”
“디올린.”
“지금은 그저 유예일 뿐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이룬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돌아설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인간의 간악함이 얼마나 깊은지, 왕께서도 알게 될 테니까요.”
디올린은 감정을 추스르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숨 한 번 골랐다.
“과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아닙니다. 그대의 걱정을 왜 모르겠습니까?”“왕께 누가 되는 말씀을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디올린은 정중히 말한 뒤 돌아섰다.
자연의 대리자를 부른 건 왕이었다.
사라진 자연의 대리자가 갑자기 나타났을 리가 없을 테니까.
왕은 보란 듯이 자연의 대리자와 함께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다 알고 있을까.
‘그럴 리가.’
몇몇 힘이 부서지고, 사라졌지만, 이런 일은 가끔 있었다.
알았다면 우르르 박살이 나야 정상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유감이라고 말이야.
자연의 대리자가 보여준 그 자신감.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자연의 대리자를 죽일 수 없어.’
만일 하나의 가정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야겠네.’
자연의 대리자라는 걸 떠나 인간이었다.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디올린은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올렸다.
마침 윈디드가 보였다.
커다란 날개와 함께 천천히 내려왔다.
등에 누군가 있었다. 아무래도 약속을 깬 자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멍청할 만큼 부지런하다니까.’
이래서 아껴두었다.
가장 완벽한 순간에 쓰고 싶은 존재였다.
“…….”
디올린은 윈디드를 부르려다 말을 멈췄다.
윈디드의 등에 있는 존재는 자신이 죽이려고 하다 실패한 존재였다.
그 멍청한 인간들은 괴멸했다.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런데 왜 윈디드와 함께 오는 것일까.
걸어오던 윈디드가 디올린과 마주하자 활짝 웃었다.
“하나 또 데리고 왔나 봐?”
디올린이 웃으며 묻자 윈디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왕께서 좋아하시겠죠?”
평소랑 똑같았다.
저 존재를 모르는 걸까.
“어디에서 발견한 거야?”“숲을 달리면서 마구잡이로 태우고 있던데요?”
윈디드의 대답에 디올린은 티토를 보았다.
잠이 들었다.
눈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이 사라졌다는 걸.
“아. 내가 하나 부탁해도 될까?”
디올린이 묻자 윈디드가 다가왔다.
“자연의 대리자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알아?”“…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요. 내가 데려왔거든요.”
윈디드는 대답하며 속으로 역함을 꾹 눌렀다.
―슬슬 날 보려고 할 때가 됐어. 아마 티토를 보면 조바심을 잃을지도 몰라. 삐약아. 침착하게 대응해줘.
은호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 이후는 이제 자신이 잘해야만 했다.
디올린이 의심하든 말든 은호에게 데려가야 했으니까.
시간을 벌어야 했다.
* * *
“…디올린이 삐약이랑 같이 만났어.”
은호는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제 윈디드랑 같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를 노리면 됐다.
디올린이 심은 힘은 바로 풀 수가 없었다.
확실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다 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내가 할게.
티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하는 게 맞아. 내가 가야 은호 너를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지도 몰라. 디올린은 내가 자유로워진 걸 바로 알 테니까.
‘잘됐으면 좋겠는데.’
은호는 이번 일을 해결할 환수들을 바라보았다.
폭시와 하이프를 비롯한 다람쥐와 원숭이를 섞은 듯한 환수, 링링. 고양이 슬라임같은 프프론 등 여러 환수가 모여 있었다.
모두 정신 계열의 힘을 가진 환수였다.
“괜찮아, 애들아? 떨리지 않아?”
은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환수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꼬옥 안아주었다.
“은호. 우리는 괜찮아. 이 힘은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건데?”“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은호가 미안해하면 안 되는 거야.”“나는, 왕을 보러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설레! 폭시가 그러는데, 왕이, 정말, 정말, 빛이 난다며?”
시선이 폭시에게 쏠렸다.
부럽다는 시선에 폭시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귀가 막, 녹아내릴 것만 같아. 그런데 으으음. 가까이 못 가겠어.”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압박이 느껴졌다.
감히 다가갈 수도 없고, 절대로 부수면 안 될 것 같은 아주 아름다운 물건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폭시는 은호를 더 안았다.
역시 은호가 제일 좋지만, 그래도 기뻤다.
“왕은 우리를 버린 게 아니야!”
그걸 확인했으니까.
직접 봤기에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주아주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어!”
왕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디올린과 죽어가는 세계, 그리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거야.”
은호의 옷자락을 잡은 폭시는 발가락에 힘을 꼬옥 쥐었다.
은호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의 왕이야.”
환수가 입을 열자 뒤이어 다른 환수들 역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우리의 왕이지.”
하이프는 흘러가는 분위기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약속이 다시 체결되지 않았다면 보지도 못할 풍경이었다.
“왕이 혼자 다 감당하고 있는 거 맞아. 다 감당하고 있는 사실이 속상했어.”
하이프가 씁쓸함을 드러냈다.
약속을 체결하는 도중 무척 가까이 있었음에도 다른 존재들이 디올린에게 지배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갚아야 할 은혜가 컸다.
물론, 그 은혜는 은호가 훨씬 더 컸지만.
약속을 체결한 지금도 은호에게 했던, 자신의 왕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은호. 불안하게 보지 않아도 돼. 우리를 구한 건 너야.”
하이프가 건넨 말에 환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말이네. 은호한테는 더 많이 해줘야 해.”
“그럼, 그럼.”
맞장구를 치는 소리에 은호는 멈칫거렸다.
저들은 지금 자신의 뭘 보고 있는 걸까.
같이 좀 보고 싶었다.
“아프고, 무너졌던 우리가 이렇게 일어나 왕을 도울 수 있게 된 거잖아? 은호 덕에 말이야.”
하이프는 콕 집어 이야기를 꺼냈다.
나쁘게 말하자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소리였다.
자연에서는 나약함은 곧 도태였다.
은호가 붙잡은 건 바로 그들이었다.
당황하는가 싶더니 은호는 이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내가 한 건 너희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응원한 것뿐이야. 이렇게 보니까, 너희는 진짜 대단한데? 내가 다 기쁠 정도야.”
열심히 은호를 칭찬했나 싶었는데, 그가 말을 꺼내자 모든 게 뒤집혔다.
폭시는 입을 살짝 벌렸다.
‘……치사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을 말을 꺼내놓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면 어떡할까.
폭시는 은호의 몸에 머리를 묻었다.
‘은호는 치사해.’
더 잘하고 싶었다.
더 많이 돕고 싶었다.
무엇보다 은호가 행복했으면 했다.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많이.
‘못된, 디올린.’
폭시는 이빨을 내보였다.
디올린만 없었어도 지금쯤 눈사자가 있는 산 위에서 눈사람을 만들 텐데.
은호의 손길이 닿자 폭시는 언제 나쁜 생각을 했냐는 듯 사르르 녹았다.
* * *
공간이 열렸다.
라이엔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꽈악 다물었다.
은호가 걸어왔다.
저번에 봤듯 싱글벙글한 미소였다.
그를 보자 올 게 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이곳에 지배된 존재들의 힘이 풀린 걸 알면 디올린은 많은 걸 눈치챌 거야.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너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왕을 지킨다.
이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라이엔이 묻자 은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디올린이 내 쪽으로 올 거야. 이미 그러고 있고.”“…은호는 디올린의 정신 계열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은호는 그 말에 당당하게 기계를 꺼냈다.
“임시지만, 태호 형이 만들어줬어. 임시라서 일회용이야. 그리고 혼자 있지도 않을 거고.”
아직 완전한 게 나오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했다.
그러니 정신 계열의 힘을 가진 환수들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단아도 도와주기로 했어. 단아는 꿈지기인데, 몸 주변에 재워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거든.”
단아가 가진 재워버리는 힘은 무척 강해 디올린 역시 경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교감의 힘도 있어. 버틸 수 있어.”
은호는 준비를 가득했다는 걸 알렸다.
“날 만나러 오고, 여길 들켜도 뭐, 내 1차 목표는 달성됐으니까, 괜찮아.”
“은호.”
“응?”
“괜찮습니다. 들키지 않을 겁니다.”
라이엔은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