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거인과 비버 (1)
오크들은 인간들과 마주 섰다. 서로 무장했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쇠가 부딪히고 피가 튀지는 않았다. 서로 악수할 만큼 가까웠지만 충돌은 무기가 아니라 말로 이뤄졌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만나냐? 이렇게 가까이서 만나는 게 서로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인간 대장이 말하자 오크 대장이 콧김을 내뿜었다.
“우린 아무런 문제 없다! 너희가 문제겠지. 밀무역을 한 걸 알면 교회와 영주들이 너희를 교수대로 보낼걸.”
“대신 너희는 질 좋은 쇠와 식량과 금을 못 구하겠지.”
양측의 대화는 그런 식이었다.
이곳의 밀무역은 정해진 자리에 물건을 두고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크들이 목재를 두고 가면, 인간들이 그걸 가져가고 그 자리에 목재값을 두고 간다. 그동안은 목재가 먼저였다.
하지만 오크들이 대가를 먼저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겨울만 되면 반복되는 일이다. 나무를 베기도 좋은 계절이지만, 그만큼 나무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다만 올해는 유독 나뭇값이 올랐다. 결국 인간은 봄을 기약하며 놈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다.
“알았다, 알았어! 다음 조정 때 두고 보자고.”
오크들은 인간을 배려했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이 가는 길에 인간 여자 둘을 묶어 놨다. 걔들 몸값도 내라!”
애도 못 낳고 일도 못 하는 노예들을 풀어주고 푼돈이나마 받는다. 인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만데?”
“작은 금화 10개!”
“미친놈! 바가지잖아! 절반만 받아!”
“모자라!”
“절반도 많이 쳐 주는 거야!”
“빨리 안 가면 여자들 얼어 죽는다!”
지난한 협상 끝에 인간은 결국 오크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냈다. 감히 밀무역을 했냐는 비난을 받을 경우, 오크들에게 붙잡힌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만큼 좋은 핑계는 없다. 구출은 틈틈이 신경 써야 할 요소였다.
인간들이 투덜거리며 목재를 끌고 산에서 내려가자, 오크들은 희희낙락하여 거래 물품을 내려다보았다. 오크 대장은 포대 하나를 열어 그 안에 담긴 밀가루를 보았다. 흰 밀가루였다. 일반적인 통밀가루는 약간 붉은 갈색이 돌지만, 이건 최고급품이다.
“참 희고 곱군. 이제 흰색은 지긋지긋해진 줄 알았는데.”
오크들은 눈밭 위에서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이번 거래 물품 중 곡물은 고급 밀가루 약간, 나머지는 일반 통밀가루다. 오크 대장은 말을 이었다.
“계속 이런 거래를 하면 좋겠군. 요즘은 나뭇값이 금값이란 말이지.”
“인간이건 오크건 요즘은 나무가 많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대장, 이제 좋은 나무를 베려면 더 멀리 가야 합니다. 계속 이런 거래를 할 수 있을까요? 돈을 더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장 오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대로다. 지금 거래의 대상으로 각광받는 건 난로에 쪼개 넣을 장작 따위가 아니라 건축과 조선에 쓰이는 고급 목재다. 그런 걸 베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하지만 멀리 갈수록 일은 힘들어지고, 값을 높게 부를수록 고객은 줄어든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보다 비싸게 부르면 저놈들도 안 살 거야. 그건 곤란하지.”
“그럼 더 가까운 데서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남은 건…….”
부하 오크는 말끝을 흐렸다. 전투종족인 오크들한테도 껄끄럽고 감당 안 되는 종족은 있기 마련이었다. 오크 대장은 씹어 내뱉듯 말했다.
“아낙족 놈들 영역으로 가야지.”
* * *
아낙족 영역은 나무들까지 커지는지, 으리으리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참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 도토리로 돼지 키우면 털코뿔소만큼 자라는 것 아냐?”
휴식 시간. 나무들을 구경하던 에드워드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자 밴시 리안나는 정말로 믿어 버렸다.
“그럼 이곳 물을 마시면 저 커져요?”
“그럴 리가.”
카치운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가르달이 덧붙였다.
“밴시도 크냐?”
“크죠! 당연히!”
“너보다 큰 밴시 만나 봤어?”
“늙은 밴시들은 한둘 봤는데요.”
“그 사이즈 그대로 늙은 건 아니고?”
“아니에요!”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에요?”
“그 사이즈 그대로 늙으면 기사 양반이 너 던질 때마다 죄책감 들 거 아냐.”
“제가 기사님 관뚜껑을 먼저 닫아 드릴 건데요!”
에드워드는 리안나를 거꾸로 잡아 들었다. 리안나는 빼애액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에 웃는 놈이 진짜 이기는 놈!”
“그래, 그 말이 맞다. 내가 자주 한 말이지. 그러니 일단 지금 몰아서 혼나자.”
“몇 년 치요?!”
“천 년 동안 마차 뒤에 매달아 주마.”
“인간이 무슨 수로 천 년을 버텨요?”
“대대로 하면 못할 게 뭐 있겠냐.”
“와! 대대로 악당!”
베로니카가 점잖이 태클을 걸었다.
“그만 놀리고 풀어줘.”
에드워드는 낄낄 웃으며 리안나를 도로 땅에 놓았다. 그녀는 쌩 하고 달려가 도로 말 고삐를 붙잡았다. 에드워드는 리안나를 손가락질했다.
“온천에서 고기 좀 먹었다고 기가 살았어, 저게.”
“밴시도 용기가 먹은 고기의 양에 비례하려나?”
베로니카는 깔깔 웃어 버렸다. 붉은 고기는 힘과 용기의 원천. 리안나는 구시렁거리며 짐마차로 들어가 쟁여놓은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못 먹게 하기 전에 다 먹을 거예요!”
“아서라. 아낙족 마을 가면 또 산더미처럼 고기 나올 텐데.”
가르달의 말이었다. 리안나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도 고기 많아요?”
“아낙족이 뭔지는 아냐?”
“거인 아니에요?”
“그래. 키가 10피트를 넘기는 거인들이지. 그들의 손님 접대용 만찬은 거인 사이즈에 맞춘 요리들뿐이야.”
“와!”
리안나는 감탄했다. 10피트 크기의 거인들이 자기들 체격에 맞춰 내오는 고기 요리.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양이긴 했다. 에드워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많이 먹으면 식비가 보통이 아니겠구만.”
“그래서 아낙족은 비싼 물건들을 다룬다오.”
“비싼 거?”
“목재. 특히 고급 목재들을 다루지. 가구는 물론이고 건축이나 조선에도 쓰인다오. 그들의 체격과 힘이면 적잖은 양을 다룰 수 있지. 트레베리아 내전으로 값이 꽤 뛰었을 거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란 말이지.”
“이만한 산림을 점유하고 관리하는 것부터가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말이오.”
그때 상단 직원들이 다시 말을 달려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목적지는 티펜발트! 티펜발트요!”
* * *
잠시 뒤 아낙족 마을 티펜발트에 들어선 순간 일행은 난쟁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거인 사이즈에 맞춘 커다란 통나무집들. 에드워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 많다는 것치고 집은 질박한데…… 크기는 확실히 아낙족 사이즈군.”
“아낙족은 여기만 살아요?”
리안나가 질문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앵글리아에서는 북쪽으로 가야 본다고 들었다. 도시보다는 마을이나 가족 농장 위주고. 분포로 봐도 아르데니아 엘프보단 보기 힘들다지.”
“왜 비교 대상이 저희 동포죠?”
“그야 아르데니아는 엘프 전체로 보면 꽤 변방이라고 들었…….”
“변방이라니, 실례예요!”
“그럼 뭐라고 해?”
“가장 멀리 온 개척자들이죠!”
“그게 그거지.”
에드워드와 헬레나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상단행렬과 순례자들은 마을 곳곳으로 흩어졌다. 거인이라고 해도 손님 맞는 건 인간 마을들과 다를 게 없었다. 거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살짝 기가 죽고는 했는데, 그럼 거인들은 이때다 하고 숙식료를 부르는 것이었다.
다행히 에드워드는 말을 타고 있었고 서 있는 거인과 눈높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는 호객행위를 하는 어느 거인 여자한테 다가갔다. 약간 지저분한 옷차림에 앞치마를 걸쳤고, 팔다리는 노동으로 약간 굵어진 편이었다. 키는 남자 거인 못지않았다. 눈은 녹색에 머리카락은 고운 재가 생각나는 회갈색.
“잘 만한 곳 있소?”
“어머나, 귀여운 기사님이네!”
여자의 말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썩어 버렸다.
“종족 간 체격 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를 상대로 귀엽다는 말은 좀…….”
“에이, 뭘 그렇게 세심하게 따져요? 그리고 인간을 보고 건장하다고는 못하잖아요!”
에드워드의 뒤에 있는 로드리고와 조르쥬의 안색도 안 좋아졌다. 남성성을 과시해야 하는 기사들한테 어린애 취급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베로니카는 끅끅 소리를 내며 웃음을 참다 말했다.
“어지간히 하자 없으면 그 집으로 하자.”
“재미냐? 순전히 재미 때문이냐?”
“아님 뭐겠니?”
“이단심문관이 애꿎은 기사를 고문하려 하다니.”
에드워드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아낙족 여인은 에드워드의 말고삐를 잡았다.
“어차피 저한테 말 붙이셨으니 여러분은 제 손님이에요! 긴 밤에는 이야기와 요리가 필수죠! 그리고 저희 집에는 그게 다 있답니다!”
에드워드는 심통이 나서 슬쩍 말을 던져 보았다.
“창부도 있소?”
“어머나, 여자가 급하세요? 이를 어쩌나. 인간 여자는 많지 않아서 돈 많아 보이는 상인들 쪽에 먼저 가 버릴걸요. 아낙족은 전문 창부가 없고.”
아낙족은 덩치와 달리 성욕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창부가 없다고 듣긴 했다. 에드워드는 그게 아낙족식 손님맞이의 약점이다 싶어서 슬쩍 찔러 보았다.
“이야기와 요리만큼 중요한 게 없구만. 우리도 돈 있는데.”
그러자 아낙족 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가끔 손님 받기는 해요. [엄마와 아기> 놀이도 좋으면 상대해 드릴 수 있는데요?”
에드워드는 입을 떡 벌렸다. 인간 여자들의 순결 관념도 때때로 장식에 불과했지만, 아낙족 여자는 뭔가 다르다. 게다가 [엄마와 아기> 놀이……. 굴욕적인 광경이다. 베로니카는 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고 기사 삼총사는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로드리고부터 말했다.
“사양하리다.”
조르쥬도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런 건 해 본 적이 없어서 좀…….”
에드워드는 ‘응애 나 아기 에드 맘마조’라고 개소리를 지껄여 볼까 말까 고민했지만, 꼬마와 아기라는 단어에 심한 내적 저항감을 가진 그로서는 무리였다. 게다가 이 넉살 좋은 아낙족 여자는 진짜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졌소.”
어떤 미래든 끔찍할 게 예상되기에 에드워드는 결국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여자는 깔깔 웃어 버렸다.
“이래서 인간 기사님들은 귀엽다니까요?”
계급도 성별도 관습도 무시하는 폭언에 세 기사는 완전히 격파되고 말았다.
* * *
아낙족 여자의 이름은 지클린이었고 그녀의 집은 이름이 [세 자매 여관>이었다. 에드워드는 거인의 체구에 맞게 크고 길쭉한 통나무집에 걸린 간판을 보고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댁 같은 아가씨가 둘 더 있소?”
“동생이 둘 있었는데 결혼해서 다른 집에서 살아요. 저만 남았죠.”
“아가씨는 결혼 안 하고?”
“돈이 없어요! 동생 둘 지참금을 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모자라 빚만 남았죠.”
“저런. 전형적인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맏언니’로군.”
“인간분들을 상대하는 이런 삶도 재밌긴 해요! 마차는 집 옆에 세우시죠.”
지클린은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베로니카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 안에는 방의 구분도 없이 인간 사이즈의 침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으며, 양 우리도 그 안에 있었다.
“생활관이냐……?”
에드워드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확 밀려오는 양 냄새에 일행은 잠시 주춤했지만 지클린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 마을의 집들은 어딜 가도 이래요.”
“평소엔 양우리란 말이오?”
“아뇨. 양이랑 같이 자죠. 그래야 집 안이 따뜻해지거든요. 걱정 마요. 똥오줌은 부지런히 치우니까.”
지클린은 큼직한 빗자루를 들고 바로 바닥을 쓰는 시늉을 했다.
“날 놀리기 위해 굳이 이런 숙소에서 자야 할 필요가 있는가, 교황청의 이단심문관이여?”
에드워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베로니카는 바로 입을 열었다.
“……헬레나 양, 다른 숙소는 어떤지 알아보고 와 주시겠어요?”
헬레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달려나갔지만 지클린은 깔깔 웃어 버렸다.
“엘프분이 헛수고를 하시네. 전 청소해 놓고 있을 테니 얼른 짐 푸세요. 아, 침대 옆 칸막이는 치우면 안 돼요! 양들은 가운데 복도만 다녀야 되거든요! 침대 사이에 똥오줌 싸면 치우기 어려우니 꼭 닫아 두세요!”
칸막이는 나뭇가지를 대충 엮어 만든 것으로 양들이 밀지 못하는 여닫이였다. 그리고 침대 사이의 복도는 돌과 짚을 깔아 놨다. 청결에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는 건 확실했다.
잠시 뒤 헬레나가 돌아왔는데, 안색은 좋지 않았다.
“웬만한 집은 다 이 모양이에요. 거인들은 집 짓는 데 별로 관심이 없나 본데요.”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가축과 함께 지내는 건 진짜 시골집이란 뜻인데…….”
“여기 시골 맞는데요?”
지클린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에드워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골 여관이 양을 키우진 않소. 양은 다른 집이 키우지. 거인족 마을이라지만 여기도 교역로에 인근 마을인데…….”
지클린은 손을 내저었다.
“에이, 이거저거 부지런히 해야 먹고 살죠!”
아낙족. 먹는 데에 큰 비용을 지출하는 거인들. 베로니카는 결국 숙박을 결정했다.
“냄새야 하루쯤은 버티겠지.”
그때 지클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런데, 하루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무슨 뜻이죠?”
지클린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비버들이 길을 막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