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11)
11화 이 밴시는 유료로 해 줍니다 (1)
숲속. 천막 앞 그루터기에 앉은 은발 밴시 리안나는 기사 에드워드의 열쇠검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검날을 황홀한 듯 쳐다보았다. 왕실 열쇠 관리인의 상징인 열쇠검. 검 끝은 뭉뚝해서 찌르기는 어렵겠지만, 에드워드의 괴력을 버텨 낼 만큼 튼튼했다. 그녀는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왕실 보물을 닦아 본 밴시는 제가 유일할지도 몰라요.”
에드워드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훔친 왕실 보물 닦아 본 밴시로도 유일한 거냐?”
그 순간 리안나는 기겁해서 닦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거 장물이었어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제 공범이야.”
“꺄아악! 잘못했어요!”
“애 놀리지 마, 이 한심한 남자야.” 베로니카가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딴청을 피웠다. 리안나는 둘의 눈치를 살펴보다 검을 주워들고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훔친 거 아니에요?”
“훔친 거 맞긴 맞아. 근데 왕실에서 조건부로 용서해 줬어.”
“무슨 조건요?”
“성지로 가면서 뭐 이거저거 일도 좀 처리하고, 사람들도 돕고 그러라고. 어차피 쓸 사람도 없는 예식용 검이라 내가 가져도 상관없대. 그래도 왕실의 권위와 체면이 있으니 죗값은 치르란 말이지.”
“앵글리아의 왕은 엄청 자비로운 분이신가 봐요?”
리안나의 질문에 베로니카와 에드워드는 둘 다 고개를 힘껏 저었다.
“꺽다리왕 로버트와 자비라는 단어는 궁합이 안 맞아.”
베로니카가 말했다.
“자비가 왕의 뺨따귀를 갈길걸. 아니면, 왕이 자비의 목을 치거나.”
에드워드가 동의했다.
리안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앵글리아의 왕은 대체 어떤 짓을 하고 다니기에, 이단심문관과 불량기사가 합심해서 그의 성정을 이렇게 저평가한단 말인가? 일단 그녀는 머릿속의 정보를 갱신했다. 앵글리아 국왕 꺽다리 로버트, 매우 위험.
“그나저나 이 밤만 버티면, 내일은 침대에서 자겠네. 노숙은 할 게 못 돼.”
베로니카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로를 바꾸면 어때?”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려던 녀석이.”
“아까 지나가던 기사 양반들 하는 소리 못 들었어? 암브로즈 시에 역병이 돈다잖아.”
지나가던 여행객이 준 정보는 소중한 것이었다. 최신 정보. 전리품인 반지와 변신 옷의 감정도 중요하지만, 역병은 달갑지 않은 재앙이었다.
베로니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단심문관이랑 함께 있는 주제에 역병을 왜 걱정하니?”
“사제도 역병에 안 죽는 건 아니잖아.”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뜻이란다. 천국행 보증 수표.”
“듬직하네.”
에드워드는 반어법으로 투덜거렸다. 베로니카는 소매에서 반지가 든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할 일 많아. 그간 얻은 전리품의 감정도 하고, 특별 사법관으로서 도시나 교회의 행정과 사법도 도와야 할 테니.”
“이단심문관도 참 귀찮은 직업이군. 난 그냥 마음에 안 드는 놈 불태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성급히 굴지 마. 여행 도중에 그것도 질리게 볼 거야. 암브로즈 시에서 볼 거라고는 장담 못 하겠지만.”
“그때는 내가 불 댕겨 봐도 되냐?”
“왜?”
“아니, 재밌을 것 같아서.”
리안나는 입을 떡 벌렸고 베로니카는 인상을 썼다. 에드워드는 바로 덧붙였다.
“물론, 태워도 되는 놈들만 태울 거야.”
“이단심문관 짓을 하면서 그게 재밌을 거라고 말하는 놈은 몇 못 봤는데.”
“난 뭐든지 경험해 보고 싶다는 쪽이라.”
“그래서 왕궁 감옥도 들어가 봤니?”
“아픈 데를 찌르다니, 비겁한 년.”
베로니카는 깔깔 웃어 버렸다. 에드워드는 쓴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안나는 밤사이에 꽃 좀 더 찾아봐. 역병 지대에서는 꽃이 많이 필요하니까. 향기 강하고 독 없는 거로.”
“네!”
리안나는 검을 내려놓고, 잽싸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에드워드가 알기로, 질병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과 기적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냄새 또한 어떤 힘을 갖지 말란 법이 없었다. 옛사람들의 조언은 중요했다. 긴가민가 싶을 때는 둘 다 취하는 게 이득인 법이다. 소독도 하고, 악취도 막고. 마침 청소 전문 노예가 생겼으니.
속으로 질병 예방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생각해 보는 에드워드를 보고 베로니카는 쿡쿡 웃어 버렸다.
“밴시는 약초꾼이 아닌데?”
“아는 꽃이 없는 건 아니겠지.”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는 천막 안에 들어가 누우며 중얼거렸다.
“암브로즈에 꽃집이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네.”
* * *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에드워드는 밴시 리안나가 가져온 풀 무더기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넌 디기탈리스와 벨라돈나도 못 알아보냐? 촌년들도 그 정도는 아는데?”
그가 지목한 꽃들은 독초였다. 그것도 맹독. 물론 향을 맡자마자 사람 잡을 독초는 아니었지만, 입 근처에 두기는 껄끄러운 물건들이다. 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그거 먹어도 멀쩡한데요?”
“넌 밴시니까 안 죽잖아. 근데 이걸 왜 먹냐?”
“심심하고 할 일 없을 때 먹으면 하루 이틀 뒤에 깨니까요.”
“뭔 겨울잠이냐? 너 인간의 집에서 요리했다가 쫓겨난 적 있지?”
“와, 어떻게 아셨어요?”
“넌 앞으로 솥에 접근 금지다.”
둘의 만담에 베로니카는 깔깔 웃어 버렸다.
“밴시에게 그런 걸 시키는 네가 바보지.”
일행은 점심이 되기 전에 암브로즈 시에 도착했다. 강과 호수를 끼고, 해자를 두른 그 도시는 고대에 한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역사가 시작한 이래 주인이 몇 번 바뀌었고, 지금은 앵글리아 남동부의 도시였다.
“잘 타네.”
입을 흰 천으로 막은 베로니카의 첫 감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입을 막은 에드워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행은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불타는 저택을 보았다. 도시 곳곳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하늘은 시커멨다. 꽃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빈집 따위 없겠구만. 감정사는 남아 있으려나…….”
에드워드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집마다 문짝에 기호가 쓰여 있었는데, 그 종류를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어도 환자와 시신의 유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즘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삼각형이 그려진 집은 천 따위로 입을 막은 사람들이 안을 대충 살펴보더니 주변에 물을 뿌려 댄 후 불을 질렀다. 나름 체계적인 대응이었다.
에드워드는 투구를 썼다. 그 안에 채워 놓은 꽃과 풀 향기가 머리부터 내려왔다. 베로니카를 선두로 일행은 느릿느릿하게 말을 몰아 주교좌성당까지 갔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성당은 텅 비어서 사제와 몇몇 수도자들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주교는 이미 피신했고, 감정사 등 교회의 인력들은 안전과 일거리를 찾아 도시를 떠난 뒤였다.
전리품의 감정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그다음은 바다 건너야 있었다.
“젠장, 혹시나가 역시나라니까.”
에드워드는 짧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감정이 미뤄지든 어쨌든, 베로니카는 특별 사법관으로서 일해야 했다. 일행은 사제의 안내를 받아, 성당에서 멀지 않은 시청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시청은 광장 반대편이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시청도 한적하긴 마찬가지였다. 공무원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중한 업무의 상징인 서류 더미에 파묻힌 상태였다. 베로니카는 그 서류 더미에 새 서류와 편지를 얹어 자신이 도시와 교회의 사무에 도움이 될 특별 사법관임을 강조했고, 시청은 기꺼이 그녀에게 객관을 내주었다. 그 직후 베로니카는 서류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복도에 남은 에드워드와 리안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한적하네요.” 리안나가 말했다.
“그러게.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쁘긴 한데.” 에드워드가 답했다.
“공무원마저 다 달아났으니 별수 없지요.”
한 공무원의 말이었다. 흰 수건으로 입을 막은 그는 산더미 같은 세탁물을 끌어안은 채 자기 방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그는 세탁물 바구니를 복도에 내려놓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역병이 도시 안에서 시작했지 뭡니까. 밖이면 성문을 걸어 잠갔을 텐데.”
“도시 안에서?”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공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수구가 갑자기 마르고 악취가 심해지더니, 온갖 벌레와 쥐들이 지상으로 올라왔죠. 그때부터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시 경비대와 용병들이 하수구 구멍을 죄다 막아 버리고 제한된 시간에만 연답니다. 그 꼴을 본 세탁 전문가들이 제일 먼저 도망쳤고, 환자들의 오염된 세탁물이 쌓이길 시작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어요.”
“저런.”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무원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전염병이 돌 때는 일상복의 오염도 문제가 되는데 말이죠. 옷감이 상하는 것 이상의 문제에요.”
“맞는 말이야.”
에드워드는 동의했다. 물에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 옷이 얼마나 튼튼하냐 등의 문제로 갈리긴 하지만, 평소 일상복의 세탁은 뭔가 묻어서 옷감이 상하거나 얼룩이 남을 때만 다룰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전염병 상황에선 말이 달라진다. 나쁜 냄새는 병의 근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며칠에, 몇 달에 한 번 옷과 이불을 빨까 말까 한 사람들도 세탁물을 쏟아 내게 된다. 집에 환자가 있다면 더하다.
에드워드는 밴시 리안나를 내려보았다.
“그렇다고 한다.”
“네?”
리안나는 멍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밴시, 곧 죽을 사람의 옷을 빨래하는 요정.
에드워드는 리안나의 어깨를 붙잡은 다음 공무원을 향해 내밀며 말했다.
“얘는 집요정인데, 세탁부요.”
공무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서류부터 작성하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뒤 리안나는 시청 광장 분수대에 ‘특별 사법관 명령으로’ 임시 세탁소를 열었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도시를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세탁물을 대량으로 떠맡았다. 쏟아지는 은화와 세탁물 속에서 리안나는 양손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게! 바로! 밴시의! 본업이죠!”
객관 2층 창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사 에드워드를 향한 어필이었다.
“축하한다. 천리마 정신으로 일해라.”
“열심히 하란 뜻 맞죠?”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피식 웃고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투구를 벗었다. 투구 안에 있던 꽃과 풀들이 어깨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는 침대와 방 곳곳에 뿌려 놓았다.
“나쁜 냄새는 이 정도면 막을 수 있으려나?”
에드워드는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합격. 그는 방안을 살펴보았다. 침구는 깨끗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것들도 리안나에게 맡겨서 세탁 후 일광 건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 외의 쓸 만한 것은 청동 향로가 있었다. 그러나 향과 숯은 구하기 힘들 것 같았다. 원래 비싼 물건인데, 이미 시민들이 미친 듯이 소비하고 있을 테니까. 그는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침대 밑에서 체스판을 발견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인데, 절대 고급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평할 상황도 아니었다.
“뭐, 좋아. 부족한 것은 나중에 밴시 꼬마한테 심부름시켜야지. 그동안은 이거나 갖고 놀아야겠다.”
에드워드는 스스로 다짐하듯 혼잣말을 뱉었다. 그리고 체스판을 펼쳤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때려치웠다.
에드워드는 풀잎과 꽃잎을 주워 모아 도로 투구에 넣고는 머리에 썼다. 그다음, 창문을 열어 이불과 매트리스를 밖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방을 나갔다.
객관 밖으로 나가자 이불과 매트리스는 이미 리안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심심해.”
“애 같아요.”
에드워드는 리안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 둘은 티격태격하느라, 시민들의 호기심과는 다른 눈빛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