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반갑다 친구야 (1)
피라미드 밖 세트렛인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협상이 실패해서 에드워드 일행이 펠리샤를 끌고 가버린 건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렇다고 ‘아, 다 죽었구나’하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말라죽거나, 굶어 죽었을 거란 확신이 드는 시간이 지날 만큼은 피라미드 앞을 지켜야 했다.
그 시간 안에 펠리샤를 구조해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가문에서 쏟아질 분노를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능성 낮은 일이다. 에드워드 일행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직후, 무모함과 초조함과 절박함으로 무장한 추적대를 보내기도 했지만, 별 소식이 없었다. 재빨리 쫓아가서, 깊게 들어가지 않고 가장자리만 감수하겠다던 자들도 못 돌아온 것이다.
일이 엎어지면, 다들 현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누군가 책임을 지고 포기선언을 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법이다.
세트렛인들의 희망은 거의 망상에 가까웠지만, 에드워드 일행의 희망과 맞닿는 부분도 있었다.
‘악마가 지목할 정도의 기사와 사제라면, 대악마가 있는 걸 알고도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연놈들은 뭔가 믿는 구석은 있겠지?’
다행히도, 그들의 시간제한이 끝나기 전에 에드워드가 나타났다. 세트렛인들은 자신들이 주시하던 출입구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새 출입구를 열고 나타난 그를 보고 기겁했다.
“진짜 살아왔어?!”
“살아서 나왔다! 인간이 아니야!”
세트렛인들은 진영을 떠나 순수한 경외감까지 느꼈다. 수천 년 동안 살아나온 사람이 없는 피라미드에서 돌아왔으니까.
놀라운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일행과 몇몇 생존자들도 뒤를 이어 피라미드 밖으로 나왔다. 세트렛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 모습을 보기만 했다.
가장 놀라운 건 마지막으로 나온 생존자의 등에 업힌 사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세트렛 여전사, 펠리샤.
에드워드 일행은 가장 얕은 바닥을 발견할 때까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물을 건넜다. 세트렛인들이 제정신이었다면 경외는 경외, 일은 일이라는 식으로 에드워드 일행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제정신이 아닐 때, 펠리샤가 말했다.
‘나는 몰렉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제아무리 거짓말과 악행이 미덕인 세트렛인이라 해도 자기들이 섬기는 악마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최대한 거리를 벌렸음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이는 세트렛쪽 불빛을 보고 인상을 썼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베로니카도 한숨을 내쉬었다.
“변신옷으로 본모습을 바꾼다…… 그걸로 치료가 되긴 되네.”
악마의 선물. 흉내 낼 수 있는 겉모습은 본모습을 포함해 여섯. 그러나 불가피하게 본모습을 포기할 때가 오기 십상인 물건. 위험하다고 베로니카가 봉인해뒀던 마법 아이템.
“초반에 나왔다 작가도 잊었던 장비가 새삼 굴러 나오면 완결이 가까워지는 중후반이란 소리가 있던데 말이지.”
“또 희극 이야기니? 그렇게 긴 희극도 있어? 삼부작쯤 되니?”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소설도 장편 연재도 없는 시대. 그래도 대충 뜻은 통했다.
에드워드 일행이 데리고 나온 펠리샤는 사실 지젤이었다. 악마의 선물로 그녀의 모습을 바꾼 것이다. 진짜 펠리샤는 보물고 문짝에 짓눌려 죽은 것을 가르달이 대충 태웠다.
“뒤가 찝찝해. 다쉬사베스와 직접 맞대결을 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라.”
베로니카의 말을 에드워드는 긍정하지 않았다. 고대 시절에 잠적한 악마라지만, 정보는 훤히 알고 있었다. 일행의 카드는 거의 다 노출되었고, 식량은 남은 게 없었다. 그런데 사기가 낮은 생존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젤까지 끼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강한 여자였지. 의외로.”
에드워드는 그 감상만 뱉었다.
그의 원래 계획은 가짜 펠리샤를 인질로 해서 포위를 풀고 물 건너로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트렛인들이 절대 인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죽이려 하겠지만,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하면서 틈을 만들어본다. 그렇게 도망친 다음, 지젤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서 치료한다.
하지만 지젤이 이의를 제기했다. 변신옷이 상처까지 덮어주는지 확신 못 한다. 단지 겉모습만 바뀔 뿐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면 좋으나 싫으나 세트렛인들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다. 설령 변신이 상처를 숨겨도 변신옷을 벗으면 흉터투성이 얼굴로 돌아간다. 그 경우 에드워드 일행은 속임수를 들키고 지젤을 잃고 변신옷까지 잃는 무지막지한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지젤은 ‘변신’이 아니라 ‘본모습’을 버리기로 했다. 그녀의 발상은 에드워드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결론은 합리적이었다.
“본모습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형태를 포기하면 안 되는 상황에, 필수적인 새 형태를 추가해야 한다는 방식이 흔하겠지만…… 처음부터 본모습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없진 않을 것 같겠지. 그 생각을 먼저 한 게 내가 아니라 노예 여성이었다는 건 좀 놀랍지만.”
지젤은 세트렛 부대에 스스로 돌아갔다. 그녀가 ‘몰렉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라는 거짓말과 막대한 양의 보석으로 세트렛인들을 혼란시키고, 에드워드 일행을 놓아준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젤은 자신이 바로 가까이에서 모시던 옛 주인 펠리샤의 행동거지를 거의 완벽히 흉내 냈지만, 그건 단기 속임수였다. 펠리샤는 여전사고 지젤은 노예다. 속임수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지젤만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변신옷을 넘겨줄 걸 그랬나 봐. 그러면 어떻게든 도망칠 텐데. 과연 지젤이 혼자서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에드워드의 말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바로 저었다.
“그러진 못해. 여긴 세트렛 영역이고, 그 변신옷은 악마의 선물이야. 그 강력한 마법 아이템이 어둠의 영역으로 돌아간다니, 절대 안 돼.”
“교리 문제야?”
“……조금만 더 가면 내 고향 시오니아야. 이젠 더 이상 ‘멀고 먼 땅’도 아니라고. 어둠이 더 강맹해 질 건수를 줄 수는 없어.”
베로니카는 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겐 그럴 책임이 있어.”
“고향에 대한 책임이라.
고향의 범주는 소박하고 작게 잡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사제, 그것도 이단심문관이라면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다루는 스케일이 크니.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제는 그렇지.”
“기사도 그렇잖아? 넌 책임 안 지고 살 수 있을 줄 아니?”
가정, 부대, 영지민, 가축까지 기사의 관리책임. 에드워드는 입을 삐죽였다.
“할 만큼 한다 정도?”
베로니카는 눈을 흘겼다.
“그래서야 백날 떠돌이지.”
“흠.”
에드워드의 생각은 다시 지젤한테로 돌아갔다.
“책임이라…… 지젤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펠리샤는 세트렛인 귀족 여전사다. 흉내를 완벽히 낼 만큼 밀착해 다니던 노예라고 해도, 그 역할을 맡는다면 어딘가에서 실수하거나 중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도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해. 들키는 건 아닐지, 결국 빛의 신앙을 버리고 어둠의 영역에 적응해 버리는 건 아닐지, 아니면 뭔가 사고를 치는 건 아닐지.”
“반대로 커다란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텐데. 성안에 들어간 간첩처럼.”
“그게 쉽니?”
베로니카의 말에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로니카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둘은 사람들을 향해 움직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건, 해방 노예 지젤을 남겨두고서 왔다. 이제 와서 붙잡힌다면 그것도 그녀한테 민폐다. 할 일을 해야 한다.
“일어서! 오늘은 밤샘 행군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린다!”
에드워드가 소리쳤다. 스텔라가 졸린 소리를 뱉었다.
“잠 좀 자고 시작했으면 좋겠네요.”
“마차 들어갈 생각 하지 마라.”
가르달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동식 대장간과 노새까지 무사히 돌려받은 데 크게 만족했고, 혹여나 다시 뺏기는 일이 없을까 걱정스러운 판이었다.
리안나는 지붕이 수리되지 않은 마차 안에서 내용물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새로 추가된 보석 자루 몇 개.
“어쨌든 손해는 안 봤네요. 막판에 악마가 기사님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지만요.”
“그러게. 다쉬사베스 녀석. 치졸한 수법을 쓰긴 했지만, 꼭 죽이겠다기보단 알아서 해보라는 느낌이었어. 결국 우리가 나갈 때까지 아무런 장난도 더 안 치고.”
에드워드의 말에 베로니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모르지.”
“뭐?”
“변신옷 말이야. 그걸 세트렛인 영역으로 넘기는 것이 다쉬사베스의 목적이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와 교류가 있는 다른 악마의 목적이던가. 우릴 여기로 떠민 선장 같은 녀석 말이야. 우리 일행 중 변신옷의 기능을 아는 건, 리안나를 빼면 너와 나뿐이야. 우리 둘 중 하나가 변신하는 걸 고려했다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지. 지젤이 아니었다면…….”
에드워드는 살짝 소름 돋는 기분을 느꼈다. 지뢰밭을 통과해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인가.”
변신옷은 어둠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에드워드나 베로니카 등 일행 중 하나가 어둠의 영역에 남는 일도 없었다. 지젤한테 변신옷을 쥐어 주지 않았으니, 악마가 억지로 지젤의 변신을 들통나게 하고 옷을 빼앗아 갈 필요도 없다.
결과만 보면, 베로니카 말대로 아슬아슬하게 모든 위험을 회피한 건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주먹 쥔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아, 젠장.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지네.”
“어느 쪽이건 할 수 없지. 이젠 지젤의 재치와 신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베로니카는 좀비처럼 일어서는 일행들을 보고 말했다.
“이 일이 훗날 어떻게 돌아올지는 걱정되지만.”
며칠 뒤, 일행은 오아시스를 낀 석조 요새에 도착했다. 그곳의 병력은 기사 하나에 병사 열둘이 전부였지만, 숨 돌리기엔 충분했다.
기사는 에드워드 일행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먼저 온 표류자들을 만나긴 했습니다만, 당신들이 살아 있을 줄은 몰랐군요. 시간을 끌기 위해 남았다는 사람들이 돌아온 건 처음 봅니다. 신의 도우심입니다.”
“과찬이세요. 겨우 목숨만 부지했죠.”
베로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기사는 숯화로와 커피와 설탕을 내놓았다. 에드워드는 고깔 모양의 커다란 설탕 덩어리를 보고 감탄했다. 정제 설탕을 돌처럼 굳힌 놈인데 높이만 30인치였다.
“설탕이 굉장히 크군.”
“병사들 사기진작용 상으로, 그리고 손님들 대접용으로 구매한 거요.”
기사는 펜치로 설탕을 부순 다음 그 조각을 커피잔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에드워드와 베로니카 앞에 내밀었다. 설탕 덩어리는 클수록 순도가 떨어지고 싸다. 하지만 그런 제품이라도 누구나 쉽게 즐길 만큼 싼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잘 녹지 않는 설탕 조각을 입에 물고 쓴 커피를 마셨다. 원두를 곱게 가루 내어 물에 넣어 끓인 것. 탕약 같지만 향은 분명 커피였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기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앵글리아 출신임에도 커피에 익숙해 보이시는군.”
“왕실 챔피언 일을 하다 보니 희귀한 것도 한두 번 접하긴 했소. 엄청 오랜만에 마셔보긴 하는데.”
베로니카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치고도 익숙해 보이는데?”
“이런 사치를 누리고 싶었어.”
에드워드는 농담으로 넘겼다. 커피는 앵글리아는커녕 비텔리아에서도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드문 기호품이었다. 왕실에 진상된 적은 있지만, 꺽다리 로버트는 방향제로 쓰다 버렸다.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기서는 앵글리아만큼 비싸진 않을 거요. 앵글리아는 안 가봤지만.”
“어디 출신이쇼?”
“교황령 출신이라오. 직장 찾다 흘러왔소.”
“그리 멀지는 않군. 여긴 뭐 하는 곳이오?”
“이곳 영주님이 세운 최전선이오. 오아시스를 선점하고 근처의 어촌 마을과 대추야자밭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지금은 변경 중 변경이라 병사가 적지만, 전시가 되면 미어터진다오.”
지휘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남쪽을 가리켰다.
“겨울 되기 전에는 저쪽에서 아브멜렉의 환생군단과 각 영주들의 군대가 정말 치열하게 싸웠소. 놈들의 해군함대가 방주기사단한테 작살났다더니, 육지로 슬금슬금 기어 나오지 뭐요?”
“골치가 아프시겠군.”
“뭐, 그래도 요새가 직접 공격당할 일은 적소. 그리고 새 지휘관이 꽤 유능하다오.”
“지휘관? 당신이 지휘관 아니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맡은 것이라오. 여기 지휘관은 당신과 같은 앵글리아인 기사였는데. 이름이 찰리 맨슨이오. 겨울이라 전투가 멈추자, 잠시 다른 볼일을 본다며 나갔는데…….”
에드워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찰리?”
“그렇소. 혹시 아시오? 당신과 비슷한 나이대인데.”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레스포드 공작가 아래서 같이 기사 수업을 받은 자로, 내 친구요. 고생이 많으셨겠군.”
“하하! 유쾌하고 돈 잘 쓰던 친구던데?”
“지칠 때까지 노는 탓에 따라다니는 것도 고생인 타입이라서.”
“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하하하!”
에드워드는 마주 낄낄 웃었다. 그렇게 약간의 정보 교환이 오간 뒤, 임시 지휘관은 부하들의 보고를 받아 자리를 떴다. 베로니카는 에드워드한테 슬쩍 눈짓을 했다.
“찰리가 어떤 기사인데?”
“음. 너, 내가 성 다섯 채 값 포기했던 일 기억나? 여자들 수십 명 살리려고.”
투리치 시 이야기.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
에드워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걔라면 그 여자들 다 죽였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