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살짝 갈색의 세상
화재 현장에서 혼자 신난 건 밴시였다. 리안나는 공짜 나뭇재를 긁어모아 잿물을 만들어 세탁에 썼다. 검댕 묻은 옷들이, 불씨에 구멍 난 옷들이, 타다 남은 옷들이 요정의 손에 들어왔다. 세탁물은 돈을 남기고 주인에게 돌아갔고, 헌옷은 리안나의 현물자산으로 남았다.
“세상이 더 불탔으면 좋겠네, 묵시록의 아저씨들이 좀 더 태웠으면 좋겠네! 바짝 굽지는 말고, 살짝 갈색으로 구웠으면 좋겠네!”
밴시는 당장 퇴치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자작 노래를 흥얼거렸다. 헬레나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너, 그런 거 부르면 퇴치당할지도 몰라.”
“괜찮아요. 여기 누가 앵글리아어를 알아들어요?”
“앵글리아 출신이 왜 없다고 생각해? 성묘 수호 기사단의 요에도 앵글리아인들이 있었는데. 아지지야까지 찾아오는 앵글리아인 마법사가 없을 리가.”
그제야 밴시 리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쬐끄만 집요정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밴시는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이상 없음!”
“조심해.”
“엘프 언니 말이니까 신경 쓸게요.”
“내 말이라서?”
“일행 중 좋은 사람은 언니뿐이더라요.”
“좋은 사람의 기준이 뭐니?”
“일 안 시키는 사람요.”
심플한 기준이었다. 헬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요정은 어차피 일해야 한다며?”
“어?”
밴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일 안 시키고 고기 주는 사람!”
헬레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납득 가는 기준이네.”
리안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엘프는 까다로워요.”
“아깐 좋은 사람이라더니.”
“좋지만 까다로운 사람!”
잠시 뒤 리안나는 다진 고기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받았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까다롭지만 좋은 사람!”
“한결 듣기 좋네.”
헬레나는 리안나 것보다 조금 작은 샌드위치를 들고 벤치에 앉았다. 리안나도 그 옆에 앉아 볼이 터져라 고기를 물고는 웅얼거렸다.
“웅웅 우웅 우우웅?”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데스피나를 만나려 했는데, 그쪽에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더라고.”
“약속하셨어요?”
“그래. 잘 됐지. 그쪽 문제로 상대를 기다리게 한다면, 빚을 지우는 셈이니까.”
정확한 시계가 없는 시대. 점심때쯤 만나자 했더니 한 명은 11시에 오고 다른 한 명은 1시에 오더라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은 시대.
“시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예요? 빨리 떠나야 한다던데.”
“일주일을 단축하고 싶으면 이틀은 준비 과정으로 써야 할 때가 있지. 새로 고른 경로는 사막을 가로지른다니까, 준비에 꽤 공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으. 고될 것 같아요. 해안가를 따라서 세트렛인들에게 쫓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마.”
“기사님은 항상 문제를 달고 나타나잖아요. 이번에도 꼬일 거예요.”
“에드워드 경의 잘못이 아니잖아.”
헬레나의 말에 리안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엘프 언니는 요즘 기사님 편을 들어요? 뭐 잘못 먹었어요?”
헬레나는 애매한 뜻이 담긴 신음을 흘렸다.
“굳이 따지자면, 최근 에드워드 경은 올바르거나 흥미로운 결정들을 내리긴 했어.”
“어떤 거요?”
헬레나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사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야, 이상한 조합이군. 왜 둘이서 간식이나 먹고 있는 거야?”
고기 끼운 큰 빵을 간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철통 위장 드워프였다. 헬레나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데스피나를 만나려 했는데, 그쪽에 시간이 더 필요하대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응? 왜? 서로 싫어하는 것 아냐?”
“때로는 엘프끼리 할 이야기도 있는 법이죠.”
“흠.”
가르달은 도서관 건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곰팡내 나는 도서관에서 할 말들이라고 해봤자, 중요한 이야기는 없을 거야.”
“이상한 감각이군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종이 뒤의 글이 아니라 입술 밖으로 나온 말이지.”
“그 말을 기록하는 게 종이와 글씨잖아요. 당신도 작은 책자는 갖고 다니던데요?”
“외워서 읊기 위한 거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티격태격으로 이어지기 전, 데스피나가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왔다.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르달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드워프잖아? 에드워드도 왔어?”
“에드워드 경은 베로니카 양과 함께 여행 경로 짜고 영수증 쓴다고 정신없소. 스텔라가 대필 중이고.”
“그럼 당신은 여기 왜 왔어?”
“식간 산책 중이오.”
“식간? 재밌는 표현이네. 또 먹겠다니, 드워프 밥통은 바닥이 없나?”
데스피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은 다음, 헬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넌 그런 이야기에 관심 있어서 온 건 아니지?”
“먹고 마시는 이야기와는 좀 다른 문제죠.”
가르달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비밀인가?”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라.”
드워프는 미련 갖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리안나가 그를 쪼르르 쫓아갔다.
“드워프 아저씨도 고기 주세요! 저 간식만 먹었더니 배고파요!”
“그래야지. 옛날엔 몇 명이 모이든 소와 양을 잡아다 마리 단위로 먹어 치웠는데, 이 동네 인간들은 깨작깨작 먹는다니까.”
둘이 쌩 달려가는 걸 보고 데스피나는 웃어버렸다.
“깨작깨작이라. 드워프 기준으로 보면 뭐든 깨작깨작이겠지. 폭식을 일삼는 기사나 겨우 비슷하려나. 저렇게 단순하게 사는 것도 재주야, 재주. 정말 속물이라니까. 저자가 에드워드 경과 제일 죽이 맞는 동료지?”
“그렇죠.”
긴 힐난에 헬레나는 짧은 답변만 건넸다. 결국 대화는 데스피나가 다시 물어 이었다. 헬레나만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그 남자를 왜 따라다니지?”
* * *
자기 연구소가 날아간 데스피나는 에드워드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건드리면 큰일 나는 존재쯤으로 취급했다. 어디선가 받아본 취급이었다.
“소금산. 소금산의 루이사 님 생각이 났다.”
낙탁에 짐을 올리는 짐꾼들을 보면서, 에드워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베로니카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굳어버렸다.
“너한테 뭔가 기대했다가 학을 뗀 여자라는 게 공통점이긴 하네. 둘 다 네가 저지른 불에 실질적 피해를 입었고.”
“나와 불과 여자는 별로 궁합이 안 맞는 건가?”
“반대로 물바다 만든다고 설치지는 마라?”
베로니카는 웃어버린 다음, 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동 경로는 사막에 깊게 판 우물들을 거치는 것으로 잡았다. 하나하나가 지옥이 연상되게 깊고 어두운 우물들이지만, 생물의 생존이란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천국의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일차 목표는 베르세바. 대개는 유목민들이 관리하는 우물들을 통해서, 사막 도시 베르세바까지 간다.”
“사막 도시라.”
엘프들의 내전은, 그들의 기준으로 변방까지 영향을 줬다. 일부는 오늘날의 아르데니아까지 도망쳤다. 일부는 각 도시가 알아서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사막 엘프들은 폰티아뿐만 아니라 전체 엘프 기준으로도 명백한 변방 세력이었는데, 대개는 부족 단위 유목민이라고 했다.
“엘프들 도시는 아르데니아가 먼저 생각이 나지. 그쪽 처녀들은 날 길거리 곡예사의 원숭이 보듯 하더라고.”
“사막 엘프는 숫자가 적고 인간들과 어울려 지내는 비중도 높으니, 반응은 좀 더 다를지도 몰라.”
베로니카는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데스피나한테서 뭐 들은 것 없나요? 그녀는 바다 엘프지만 이쪽에서 활동한다면, 사막 엘프에 대해서도 들은 바 있을 텐데.”
“집요한 청혼자들이라고 하더군요.”
에드워드는 생각지 못한 단어에 뿜어버렸다.
“청혼자?”
“순혈 엘프가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요. 아르데니아와 비슷해요. 생각 있는 사막 엘프들은 잔존 엘프의 숫자가 너무 적은 걸 우려해서, 다른 엘프 세력들과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라는군요.”
헬레나는 에드워드를 흘겨보았다.
“인간과 같이 다니는 엘프라면, 엘프 기준으로는 미혼이나 마찬가지니까.”
인간은 단명한다. 아르데니아의 엘프들도, 에드워드가 죽으면 헬레나가 돌아와 다른 엘프랑 결혼할 것으로 기대한다. 에드워드는 그 말을 이해했다.
“아, 그럼 귀찮아지겠군.”
“제가 상대할 일이에요. 당신이 아니라.”
“네 일이면 곧 내 일이지. 특히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면 말이야.”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자,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죽은 뒤의 세속적인 일까지 욕심부리고 싶니? 백 년 뒤의 헬레나 양이 어느 엘프 동네에 있든지, 네가 알 게 뭐야?”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여사제의 백 년 미래도 진지하게 걱정 중인데.”
베로니카는 바로 에드워드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 * *
모래사막을 건넌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사막 엘프 유목민 일가족의 캠프였다. 모래폭풍을 대비해 낮은 높이로 친 사각 텐트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같은 유목민인 카치운도 그들이 처한 환경에는 혀를 내둘렀다.
“우물을 끼고 있다지만, 꽤 척박한 땅인데.”
“여긴 그나마 낫다네요. 다른 계절에 쓰는 목초지들 중에는 더 안 좋은 곳도 있다고.”
리안나가 말했다. 카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르도도 훨씬 지낼 만한 곳을 찾아 이동한 거지만.”
하지만 손님맞이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특히 엘프 헬레나를 향해서는. 먼데서 온 아르데니아 엘프라는 것은 사막 엘프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에드워드는 화려한 자수를 놓은 치렁치렁한 옷들에 둘러싸인 헬레나를 보고 웃어버렸다.
“여자들한테 더 인기가 많은데?”
“여자가 싸우는 게 신기하게 보이나 봐.”
“기사의 부인이나 유목민의 부인은 때때로 창칼을 잡기도 하는데?”
“때때로지. 어디까지나.”
최우선 보호 대상. 에드워드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약간 갈색이 감도는 피부의 사막 엘프 여자들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의 분리가 좀 더 엄한 것 같기는 하네.”
가르달은 껄껄 웃었다.
“뭐, 그저 애지중지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소만.”
헬레나가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에워싼 동족들에게 말했다.
“드워프 여자는 남자랑 분간이 안 가는 나무통이거든요.”
“여자는 수염이 없다고 했잖아!”
“네, 그게 전부죠.”
간만에 티격태격하는 가르달과 헬레나를 보고 에드워드는 낄낄 웃어버렸다. 그간 가르달은 카치운과 담배 친구가 되면서 헬레나와 말싸움을 벌이는 횟수가 줄었지만, 둘 다 그 성격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때 한 사막 엘프 남자가 에드워드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에드워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드워드 경, 소식은 들었습니다. 저는 박주가리 부족의 유리바테스입니다. 이 캠프의 가장이지요. 오늘은 사막의 긴 밤을 샐 이야기가 나오겠군요. 안으로 드시죠.”
엘프들이 말하는 일족과 부족의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는 적당히 응해 초대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극진한 환영에 감사드리오.”
손님 접대의 관습은 어쨌든 후하게 하는 것이 보통. 벌써 사막 엘프들과 그 주변 인간들은 양을 잡고 고기를 조리한다고 부산했다.
그때 짐꾼들이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에드워드는 그들의 소란과 시선을 눈으로 좇다 지평선을 보았다. 저 멀리 큼직한 바위 무더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뭐요?”
“아, 저거. 사막 오크들의 정찰병입니다. 종종 있는 일이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정찰병이 봉화를 올리죠. 에드워드 경의 명성이 저들까지 긴장시켰나 봅니다.”
대충 배경이 짐작되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베로니카를 돌아봤다.
“사막 여행길이 편하지는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