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여기다 등신아
파브리스는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으슥한 계곡 길을 야영지로 골랐다. 그는 주변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불은 필요 최소한만 피운다. 엘프나 드워프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물 끓여서 수통에 채워라.”
사막의 밤은 춥다. 전사들은 베로니카와 스텔라를 말에서 내려놓은 다음, 그 옆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파브리스는 정신을 차린 지가 오래인 베로니카한테로 시선을 돌렸다.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브리스는 뒤통수를 긁적거린 다음 입을 열었다.
“소리 지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재갈을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응답없음. 스텔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시 당했다. 파브리스는 한숨을 내쉰 다음 베로니카의 재갈을 풀었다. 다행히 베로니카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파브리스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때도 늦었고, 변명하기가 힘든 일이긴 합니다만, 해도 됩니까?”
“짖어 봐.”
“아가씨가 아니라 저 여마법사가 문을 열고 나올 줄 알았습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문고리를 잡고 나오실 줄은…….”
파브리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침묵. 몇 초 뒤 베로니카는 잔뜩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럴 거면 사제가 아니라 마법사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어야지! 내가 이단심문관 생활을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문고리 하나 스스로 안 잡겠냐!”
스텔라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베로니카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마법사는 때려도 되나요?’
그리고 무시당했다. 파브리스는 쩔쩔매면서 말했다.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혹여 채비가 안 된 아가씨의 방에 쳐들어가는 건 더 곤란할 것 같아서…… 그리고, 여마법사를 시녀 내지는 하녀로 쓰시는 줄 알았습니다.”
시녀 취급. 스텔라는 불만이 가득한 웅얼거림을 재갈 사이로 흘렸다.
‘마법사는 시녀가 아니야!’
그리고 다시 무시당했다. 파브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수였죠. 덕택에 마법사가 한 번의 주문을 쓸 기회만 줘버렸고요.”
스텔라가 사용한 주문은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네방네에 비상상황 발생을 알릴 수 있는 주문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들통나버린 바람에, 파브리스 일행은 도통 쉬지를 못했다. 그 강행군은 그대로 베로니카한테도 악영향을 끼쳤고.
베로니카는 이를 갈았다.
“그걸 감안해도 날 데려온 방법이 너무 거칠어. 이것도 오라버니의 뜻이냐?”
“반은 그렇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말고, 상처만 내지 말라셨거든요.”
“수단과 방법이라. 네가 지금 몇 개의 규칙을 어겼는지 말해볼까?”
“엄청나게 많이 어겼죠. 다시는 베르세바의 영역에 발을 못 딛을 만큼요. 잘못하면 교황청 교리법무성 징계과에서도 쫓아올 수 있겠군요. 교황청 암살자들이 그렇게 수준 높다는데, 사실입니까?”
“공식적으로, 교황청은 암살자 조직을 운영하지 않아.”
“교황청은, 그리고 공식적으로 말이죠. 아가씨가 시오니아인인지 교황청 사람인지 헷갈리네요.”
“네가 언제부터 내 정체성 형성과정까지 기웃거리게 됐어?”
파브리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옛날처럼 ‘오라버니한테 널 죽여달라고 할 거다!’라고 하진 않으시는군요. 이번엔 진짜 그 소리 다시 들을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만.”
평소엔 개인의 권리와 계약이 쉽게 무시당하지야 않지만, 지배가문이 사람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스텔라가 묘한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보았다.
‘옛날부터 성깔 하나는 화끈하셨네.’
그리고 다시 무시당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게 열한 살 때였나 그랬죠.”
베로니카는 웃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베르세바시에서 멀지 않은 곳, 군주의 치안 능력이 완전히 닿지 않는 곳도 아닌, 꽤 큰 마을에서 파브리스는 사고를 쳤다. 장정들 일부를 제압하고 촌장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지금쯤 촌장은 격노해서 베르세바의 군주에게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손님이 주인을 폭행하고 다른 손님을 납치한 격이니, 그 분노가 절대로 작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대형 사고를 쳐놓으면 오라버니가 참 기뻐하겠네.”
반어법. 하지만 파브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이긴 한데…… 아가씨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렇게 변명해 볼랍니다.”
“안전? 때려놓고? 변명이 될 줄 아니?”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그 명령을 그대로 돌려드려야죠. 그리고 아가씨도 그 기사 곁에 남는 것보다는 덜 아프고 더 안전할 겁니다.”
“자기합리화가 끝내주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요. 제발 곱게 봐주시죠.”
너무 오래되어 지나치게 가까운 가신. 그리고 에드워드와는 다른 방향으로 과격한 해결사. 베로니카가 아는 파브리스는, 이미 저지른 일로 끙끙 앓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싫어.”
“박정하시군요.”
“뭣보다 에드 곁에 남는 것보다 덜 아프고 더 안전할 거라는 데 동의가 안 돼.”
“그 남자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엘프, 드워프, 유목민 경기병 등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호위를 이미 받고 있었단 뜻이야!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너와 올리비아만 온 거야? 왜 신참 용병들을 데리고 왔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쓸데없이 많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정 기준이 너무 낮아. 어딜 봐도 앵글리아의 챔피언, 엘프와 드워프 전사, 유목민 경기병보다 잘 싸울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부정은 못 하겠군요. 하지만 아가씨는 그런 동료들을 데리고 다니는 대신 엄청난 모험을 하셨죠. 지하에서 언데드랑 싸운 것만 대체 몇 건입니까?”
“궁성이나 학교에서 할 경험은 아니긴 했지.”
베로니카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파브리스는 더 웃지 않았다.
“아가씨가 가주님과 싸운 뒤에 이단심문관 양성과정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다들 아가씨가 직접 뛰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저 법률 공부를 좀 더 파고드는구나 했는데, 순회판사 노릇까지 해버리실 줄은.”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 세상 구경 좀 더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오라버니가 찾아주는 신랑감만은 죽어도 거부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걸 대체 왜 거부합니까?”
파브리스의 질문에 베로니카는 도끼눈을 떴다.
“네가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얌전히 신부수업 받다 수준에 맞게 결정된 상대와 결혼하는 게 여자의 행복’ 같은 소릴 하니까 올리비아도 뛰쳐나가 금혼서약해 버린 것 아냐?”
“남의 집 아픈 과거사 들추지 좀 마시죠. 사회진출 하겠다는 여자들은 대체 왜 다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지나치게 배우면 시집가기 어려운데.”
“주교님들도 요즘은 그런 소리 대놓고 못 하는데, 너 내 앞에서 계속 깐죽거릴래?”
“깐죽거리다뇨?”
둘이서 투닥거리는 대화 내용을 드문드문
듣고 있던 부하 전사들 넷은 자기들끼리 감평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구만. 처음엔 대장이 무리한다 싶었는데.”
“전형적인 그거야. 말 안 듣는 딸내미.”
“사제나 되면 차라리 다행이지. 전에 난 쇠뇌 잡고 온 사냥꾼 딸내미 본 적 있어. 가출했대나.”
“뭐야, 어디서?”
“항구에서…… 백작가에 고용되기 전이었지. 뭐, 성지 오자마자 맡은 일이 이런 거라는 건 좀 실망스럽긴 하지만.”
“성지 오기 전엔 뭐했는데?”
“창고 경비원. 넌?”
“푼돈 받고 고블린이나 잡는 순찰대원이었지. 그 전에는 귀족 기사대를 전전했고. 트레베리아로 갈까, 성지로 갈까 고민 많이 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곧 베로니카와 파브리스가 조용해진 걸 깨달았다. 다시 돌아보니, 베로니카는 씩씩거리면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파브리스는 마법사의 재갈과 밧줄을 풀어주고 있었다.
“지팡이와 시약가방은 뺏었으니 일단 풀어주지. 아가씨 시중을 들도록. 자기 전에는 다시 손발을 묶는다. 이해했나?”
끄덕끄덕.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브리스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혹시나 해서 경고해두지만, 시약가방을 훔치거나 도망치려 하면 결과가 안 좋을 거다. 어느 쪽이건 사막에서 말라 죽겠지.”
끄덕끄덕. 스텔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파브리스는 만족했다. 그는 베로니카를 돌아봤다.
“그래도 이 여마법사는 눈치가 있군요. 평소엔 시끄럽던 입이 조용해졌는데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검을 들고 있으니.”
베로니카는 짧게 힐난했다.
전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마법사년은 좀 말이 통하겠군.”
“흠. 얼굴은 반반하던데. 가는 동안 꼬셔볼까.”
“쟤 얼굴에 네 얼굴을 들이밀면 계속 입 다물고 거부할걸.”
“니 얼굴은 뭐 물고 빨아주고 싶게 생긴 줄 아냐?”
시덥잖은 내용을 주고받은 전사들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문득 그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잠깐 소변 좀.”
“멀리 가서 봐라. 아가씨들 있다.”
“알아, 알아. 언제는 뭐 여자 없었나.”
“그래도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저기 저 아래로 싸버려.”
“알았어.”
사내는 일행에게서 떨어져나 나와, 큰 바위 뒤를 돌아 가파른 경사로 앞에 섰다. 한참 아래로 흘려보내면 냄새 따위는 안 올라올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을 보면서 사내는 혼자 중얼거렸다.
“으스스하구만. 확실히, 사막의 밤은 위험한데.”
덜그럭. 그때였다. 돌이 움직여 돌과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짐승? 괴물? 적? 귀신?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여기다, 등신아.”
드워프의 목소리는 그의 시선보다 낮은 곳에서 나왔다.
뻐엉!
호쾌한 발차기 소리와 함께 남자는 경사로 아래로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악!”
경사로를 데굴데굴 구르며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나머지 전사들이 화들짝 놀라 모닥불 주변에서 일어났다. 파브리스와 베로니카도 고개를 돌렸고, 스텔라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꺅! 뭐야?!”
“이고르가 떨어졌다!”
“적습인가?”
바위 뒤에서 드워프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전사들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나름 잔뼈가 굵은 용병들이라고는 해도, 그들이 에드워드 일행과 싸워 이길 것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고 올리비아도 없는 지금은 더욱.
“드워프 혼자야?”
“그럴 리가 있겠냐? 저 짧은 다리로 우릴 쫓아올 수 있을 리가…….”
“네놈은 기억해뒀다가 신장 줄이기 협회장의 도끼날 아래 둬주마.”
가르달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파브리스는 베로니카를 몸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발이 빠르군요, 드워프 어르신.”
“나 아직 안 늙었어!”
“드워프 선생.”
파브리스는 빠르게 정정해줬다. 그는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혼자 온 건 아닐 텐데, 메시지라도 들고 온 겁니까?”
“정확하다. 에드워드 경의 전언이다.”
“뭡니까?”
소금산의 드워프는 짧은 허리를 한껏 펴며 말했다.
“포로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