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밀당은 능동적으로
대낮처럼 밝아진 거리에서, 넝마주이를 입은 한 순례자가 부서진 전차 무더기 위에 올랐다. 본래 신의 영광과 성인의 전례를 쫓아 이 땅에 왔을 그는, 그 어떤 신의 기사나 악마의 광전사보다 더 충만한 분노를 터뜨렸다. 상의를 찢고 말라깽이 같은 상체를 드러낸 그는 있는 힘껏 괴성을 내질렀다.
그 정체불명의 괴성에 응답하여 폭동은 더 격화되었다.
누군가는 칼을 빼 들었고, 누군가는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누군가는 불을 질렀다. 시의 치안을 맡은 경비대는 오히려 도망쳐서 숨어야 할 지경이었다. 긴급사태를 알리는 전령들이 가까스로 시를 빠져나가 곳곳으로 달려갔다.
에드워드 일행은 그 전령들보다는 빠르게, 간신히 도시의 성곽 밖으로 대피했다. 겨우 어느 허름한 여관 안에 들어선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찢어진 서코트를 보고 투덜거렸다.
“캐나다 사람들이 하키경기 지면 이런 난리통이 된다던데.”
“하키가 뭔지 캐나다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지옥이 또 있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네요! 밴시는 마구마구 채이고 밟혔어요!”
보통 사람이었다면 압사당하고도 남았을 참극 속에서 간신히 귀환한 밴시 리안나의 말이었다. 그녀는 울먹임 반 분노 반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왜 밴시는 안 챙겨주냐 이거예요!”
“안 죽잖아.”
카치운의 명쾌한 해답이었다. 드워프 가르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뺏길 순 없으니 끌어내 준 거다.”
“너무해! 안 죽는 재산 취급당했어!”
에드워드는 낄낄 웃었다.
“뭐, 어쨌든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지. 올리비아까지.”
에드워드의 눈이 식탁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동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직사각형 식탁이었는데, 올리비아는 그 구석에 자릴 잡아 식탁 위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각선 반대편 구석에는 스텔라가 비슷한 포즈로 널브러져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역배당이 터지다니…… 내가 찍은 전차는 3관왕까지 앞두고 있었는데…….”
“역배당이 터졌는데 배당금을 받으러 갈 수가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데요오오오오…….”
시의 유지들이 사교도 소동으로 죄다 죽은 뒤, 그 상속자나 권한대행들은 여론에 떠밀려 가까스로 전차경주를 열었지만, 이런 일까지 겹쳤다면 지불능력은 미지수가 되어버린다. 대폭동을 재난으로 규정하기만 해도 배당금을 지불하지 않을 핑계는 수확철 밀알의 숫자만큼 나온다.
“아까 그 폭동 말인데요. 쉽게 안 끝날 것 같아요. 선두의 전차가 부서진 걸 두고 누가 조작설까지 운운한 모양이더라고요. 배당금 받으러 가는 길에 칼 안 맞으면 다행일걸요.”
헬레나의 말이었다. 스텔라는 방금 부활한 언데드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사님? 지금이라도 강제집행 가능할까요?”
“얘가 아무 용어나 막 주워 담네. 내가 그럴 권한이 어딨냐?”
“칼 빼 들고 들어가서 윽박지르면 그게 강제집행이죠, 뭐.”
“내가 술 먹었냐? 저 수많은 폭도 상대로 홀로 싸우게?”
“술 드시면 싸워 줄 거예요?”
“내 재산이면. 근데 배당금 그거 내 몫 아니잖아.”
“2할 떼어 드릴게요.”
에드워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8할 내놔.”
스텔라는 입을 떡 벌렸다.
“와, 악당!”
“그 정도가 아니면 수지가 안 맞을 거다.”
“그냥 완곡한 거절이잖아요, 그거!”
헬레나는 덤덤한 투로 끼어들었다.
“그 배당금이 마누라 재산이었다면 에드워드 경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돌아가겠지만요.”
스텔라는 경악한 표정으로 엘프를 보았다.
“맨날 내가 뚜쟁이짓 하다가 역으로 당하니까 신선하네…… 그것도 엘프님한테 당하다니!”
“해볼래요?”
“안 말려요?! 엘프님은 기사님이랑……!”
“엘프의 결혼과 인간의 결혼은 별개로 취급해드릴 수 있는데요.”
어딘가 싸늘한 투의 말이었다. 가르달이 에드워드한테 속삭였다.
“쟤 유부남 취향 맞다니까.”
“댁 그러다 또 쟤 발길에 채일 거요.”
시험에 든 스텔라는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가 베로니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바로 포기했다.
“농담으로라도 ‘네’라고 했다간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포기. 진짜로 별개로 취급해줄지도 모르겠고, 뭣보다 사제님이…….”
“제가 뭘요?”
“방금 소름 돋게 무서운 표정 지으신 거 다 봤어요!”
“무슨 이야기신지?”
카치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는 여마법사잖소. 뭐 그런 걸로 놀리고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구원의 손길!”
“뭐, 나이 찼는데 결혼 안 하고 정부나 되겠다는 여자가 매춘부랑 뭐가 다른가 싶긴 하지만.”
“와! 폭언!”
에드워드는 낄낄 웃어버렸다. 환생 전 기준으로야 그런 삶이 가능한 남녀들도 있겠지만, 결혼을 안 하겠다거나, 결혼했는데 애가 없다거나 하는 경우는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게 전근대의 상식이었다.
“결혼이라. 뭐, 내가 먼저 거부하겠지만.”
“제가 그렇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나요! 저 기사님 거라면서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시오니아 수도 가서 보상은 일단 받아야 할 거 아냐.”
“알긴 아는데, 여자의 상처 받은 자존심 좀 돌아봐 주세요!”
카치운이 한 마디 더 얹었다.
“자존심 있다는 애가 결혼 안 하고 애인이나 만들겠다는 소릴 대놓고 하고 다니냐?”
“마법사 아닌 사람 기준으로 말하지 말기!”
밴시도 끼어들었다.
“고기 한 조각 가치도 안 되는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궤변으로 지킨대요? 배당금 못 받게 생긴 것도 사실이고, 그 해결책으로 기사님 못 쓰는 것도 사실인데.”
“이 주둥이! 이 가증스러운 주둥이!”
스텔라가 리안나랑 티격태격하는 걸 본 가르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스텔라는 회복됐군. 이제 저 여자만 남았소.”
에드워드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꿈쩍도 못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헛기침을 한 다음, 베로니카한테 눈짓을 던졌다.
“마무리 짓지?”
베로니카는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올리비아 맞은 편에 앉았다.
“넌 돈도 안 걸었는데 왜 그리 좌절해 있어?”
그제야 올리비아는 몸을 일으켰다.
“잘못하면 보름도 넘게 아가씨를 못 따라갑니다만……..”
올리비아에게 걸린 내기의 조건은 도시에서 열흘 머물기였다. 지금 머무는 곳은 엄연히 도시 밖. 카운트다운은 혼란이 진정되고 입성한 뒤에야 셀 수 있는 것이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이나 보름이나. 그 시간이면 난 수도에 도착하고도 남을걸.”
“끄으으으윽.”
“숙녀가 그런 이상한 소리 내는 거 아니야.”
“그거 평소엔 제가 하던 소리였는데 말이죠…….”
“평소엔, 말이지. 엄청 옛날처럼 느껴지네.”
베로니카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유학 갈 땐 못 데리고 간 것도 걸리는데, 지금도 못 데려가네. 그래도 약속할게. 오빠한테는 한 번쯤 얼굴 내밀기로.”
“반드시 그러셔야 합니다…….”
“약속한다니까.”
확언을 받아내자마자, 올리비아는 다 죽어가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마냥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에드워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으억?! 왜?!”
“잠자코 따라오십시오! 여긴 귀 좋은 족속들이 너무 많으니까!”
엘프, 드워프, 그리고 유목민까지. 올리비아는 여관 밖으로 나가 한참을 걸어 방앗간 옆에 멈췄다. 다행히 방문한 사람은 없었고 수차는 얼지 않은 물의 힘으로 쿵떡쿵떡 돌아가는 중이었다. 엘프도 진저리낼 소음.
“밀회 장소로는 고전적이긴 한데, 그 짓 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아니겠지?”
에드워드가 농을 걸었다. 올리비아는 잔뜩 험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그런 생각이나 하는 주제에, 용케도 아가씨 곁에서 절제하는군요!”
“잘 아네. 가끔은 참느라 죽을 것 같아.”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결혼할 생각은 없겠지요?”
“보상이 코앞인데, 내가 왜?”
“그 계산과 마음이 꼭 수도에 도착한 이후에도 이어졌으면 좋겠군요. 다만 당신의 기준보다는 더 넓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겁니다.”
올리비아는 에드워드의 멱살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보상을 받든지, 말든지, 저주를 풀든지, 말든지, 어느 불쌍한 귀족 영애를 색욕죄악에 빠뜨리든지,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아가씨랑 그 뭐냐, 결혼이든, 아니든 간에, 민감한 죄악으로!”
“선 넘지 말라고?”
“바로 그겁니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은 다음 손등으로 올리비아의 손아귀를 밀어냈다.
“걔가 이미 철벽을 친 이야기야. 결혼해서 교회기사 전업할 생각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고.”
“철벽이라.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그리고 과연 아가씨다운 조건이고.”
올리비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래도 노파심에 경고 하나 더 얹자면, 실수로라도 아가씨에게 손대는 순간, 당신은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교회기사 되는 거?”
“그것 이상의 문제입니다!”
“백작가 상속순위가 꼬이기라도 하나?”
“백작가는 문제 없습니다! 백작가 상속 문제 따위 당신이 걱정할 일도 아니고! 그 이상의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나 큰 문제인데?”
올리비아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시오니아 왕궁에서 난리가 날 정도의 문제지요!”
백작가 영애쯤 되면 왕궁에서도 주목하는 레이디. 앵글리아처럼 일종의 왕토사상에 힘입어 ‘상속녀 관리’를 하는 게 아니더라도, 전황과 정세에 따라 혼사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시오니아처럼 전쟁이 일상인 곳은 더욱.
“트레베리아에서 유명한 예를 들어볼까요? 신분이 반대지만 말이지요. 어느 대영주의 아들이 목욕탕집 딸과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는데…….”
“알아. 영주가 그 여자를 죽여 버렸고 아들은 빡쳐서 아버지네 원수한테 달려가 그 군세에 합류하는 등 갖은 개판이 난 이야기지. 결국 트레베리아 국왕이 중재해서 화해했댔나?”
“축약이 심하지만, 그렇습니다. 주변을 안 보는 열정은 그렇게 위험한 일이 되어 버리지요.”
“근데 목욕탕집 사람들은 천민이잖아. 앵글리아의 왕실 챔피언쯤 되면 유망주인데. 비교가 어렵지 않나?”
“그저 유망주일 뿐이지요! 선택권은 유망주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올리비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다음, 내뱉듯 말했다.
“사람은 주어지는 것에 만족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을 눈앞에 둔 자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이제 와서 다 된 일을 망치지 않길 바랍니다. 그게 서로에게 최선이겠지요.”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올리비아는 그 말만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서 도로 여관을 향했다. 에드워드는 방앗간 옆에서 혼자 서서 잠시 가만있다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있어?”
“어떻게 알았수?”
가르달이 방앗간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누군가는 따라올 것 같았지.”
“젠장. 감이 좋으시군.”
카치운 목소리였다.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쫓아오면 여관 경비는 어쩌고?”
“엘프 여전사가 있는데 뭘. 여마법사도 있고. 여자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른 나무 뒤에서 나온 카치운은 신발을 돌에 비벼 진흙을 떼어내고는 허리를 폈다.
“뭐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그렇진 않네. 전형적인 이야기에 전형적인 경고였소.”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구석이 있나?”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어쩔 거요?”
“어쩌다니?”
“사제 아가씨랑의 문제.”
“어쩌기는. 이야기한 대로지. 이제 와서 다 망칠 수는 없잖소.”
카치운은 옆으로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또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싶다’는 없소?”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 아닌가? 신분만 높은 데다 정략결혼 옵션이 달린 여사제를 건드려 말썽나는 것보다, 시오니아 국왕이 내려주는 상속녀를 받는 게 더 좋잖아.”
“그건 경에게 유리한 이야기지, 경이 하고 싶은 게 아뇨. 둘은 다른 거요.”
“사랑 때문에 재산을 걷어찬다는 식의 스토리는 안 좋아하는데.”
“이건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여자의 이야기도 아니오. 당신 이야기요. 당신 이야기.”
카치운의 말에 에드워드는 침묵했다. 가르달은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는 말했다.
“뭐, 무슨 선택을 하든 기사양반이 알아서 하겠지. 교회기사가 되면 어떻고, 영주가 되면 또 어떤가? 어차피 할 일은 똑같아. 맘에 안 드는 놈은 밟아주고, 돈이나 알뜰하게 모으고, 애 낳아 키우는 거지.”
에드워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드워프는 단순해서 좋겠구만.”
“남자의 진리요. 그것도 못해서 빌빌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느 쪽이건 여자와 자리를 얻을 수 있는 남자가 너무 궁상떨지는 마시오. 결론은 그 뭐냐…… 당신 마음 닿는 대로 해야 하는 거지. 사제 아가씨는 당신이 결혼하자고 하면 당장 수락할걸.”
에드워드는 입을 삐죽였다.
“이래도 저래도 자기는 나랑 결혼하기 어렵다는 말이랑, 탐욕스러운 기사가 자기랑 결혼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일은 없을 테니 한번 고백해보란 소리는 하던데.”
“마음에 없는 소리네. 밀고 당기는 거네. 걍 밀어붙이쇼. 댁 원하는 대로. 그럼 냉큼 수락하겠구만.”
“카치운이랑 댁이 하는 말이 비슷한 것 같은데?”
“하하하! 뭐, 나는 개인적으로 기사양반이 사제 아가씨랑 결혼해서 교회기사 노릇을 해도 재밌을 것 같기는 하오. 모험이 좀 더 길고 과격해질 것 같거든.”
“댁의 재미를 위해서 내 결혼 상대까지 고르진 마시구랴. 드워프 기준 미녀 매춘부를 강권하던 것에서 변한 게 없어.”
“좋잖소. 드워프 기준.”
에드워드는 발걸음을 뗐다.
“식사나 드워프 기준으로 합시다. 수도까지 강행군을 또 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