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바위산의 은자들 (2)
은자 유스타스.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걸로 유명. 에드워드에게 괴력의 저주를 건 장본인. 몰골 때문에 그를 미리 알아보는 사람은 적었고, 신앙에 관심 없던 에드워드는 그의 정체를 몰랐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 이미 성자 소리를 들었다. 저주 걸린 에드워드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장례식 관짝에 들어간 뒤였고, 교황청에 의해 초고속 시성.
포경선 선장. 앵글리아와 대륙간 해협을 건널 때 에드워드를 태워주고, 이상한 떡밥만 던져댄 인간 아닌 존재. 치매 주술사 니코스의 방문도 받고, 고대 악마 다쉬사베스와도 아는 사이고, 레피림과는 적대관계. 정확한 정체는 몰라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불길함을 가졌음. 선장이니까 당연히 그동안은 바다에서만 만났다.
그리고 지금 여기. 시오니아의 동부 내륙쯤 자리 잡았던 옛 고대 왕국의 흔적 어딘가.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장소라는 이야기는 개뿔도 없었으며, 바닷물을 찾는 건 한겨울에 생딸기를 찾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장소다.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들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서 있기만 했다. 결국 동굴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종말이 올 때까지 서 있을 텐가?”
은자 유스타스의 목소리였다. 에드워드는 숨을 잔뜩 들이마신 다음, 적진으로 돌입하는 심정으로 발을 내딛었다.
목소리는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동굴 속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구불구불한 길은 촛불 빛이 나오면서 겨우 끝났는데,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공간에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양초가 타올랐다.
그들이 다시 말을 걸기 전에 에드워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지. 내가 술 처먹고 당신을 쓰레기 더미 위에 앉힌 것. 근데 여기서 ‘난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소리 같은 거 하면, 나 좀 다시 빡칠 거요. 그거는 미리 말해두겠소.”
다 늙은 노인의 이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가 보는 건 육신이 아니오, 젊은 기사여.”
에드워드는 ‘그럼 포스의 영이냐’라는 말을 뱉을 뻔했다. 다행히 그가 말하기 전에 선장이 끼어들었다.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이 성자는 참 짓궂은 양반이지. 지나가면서 보이는 사람들마다 시련과 수수께끼를 준다니까. 심지어 죽어도 안 변해.”
에드워드는 선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댁은 다리통에 물통 달고 나타나야 하는 거 아뇨?”
“그게 무슨 뜻인가?”
“데비 존스라는 어느 저주 받은 선장은 바다를 못 떠나서, 잠깐이라도 육지에 오르려면 바닷물 담긴 통에 서 있었지.”
포경선 선장은 웃지 않았다.
“바다에 안 가면 선장을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오만이겠지. 하지만 결말 앞에서는 궤변이 안 통하오.”
에드워드는 콧김을 한번 내뿜었다.
“그래서, 영혼을 시험하는 자와 잡아가는 자가 한낱 기사에게 뭔 볼일이 있다고 이런 이벤트를 꾸미셨소? 내가 말해볼까? 이 열쇠검의 복잡한 내력을 파악하고, 그 봉인을 깨서, 악마 레피림이나 죽음의 주술사를 잡아 족치라는 거 아뇨?”
“기사다운 생각이군. 폭력으로 대가를 치르고 모든 걸 해결한다는 게 말이오.”
유스타스가 말했다. 그는 깡마른 손가락을 들어 에드워드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러나 지금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선택의 문제요. 빛과 어둠의 합의로 어떤 거대한 임무를 맡는 게 아니라.”
“엥? 선택?”
“레피림과 주술사 왕의 문제는 니코스와 다쉬사베스와 이 선장이 꾸민 일이고, 지옥 내부의 일이오. 빛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논할 건 아니지.”
“내게 이 열쇠검을 준 게 골치 아픈 거 해결하라고 한 거 아니었소?”
“다쉬사베스가 뭐라 했소?”
에드워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선장이 대신 내놓았다.
“손아귀의 힘도, 부러지지 않는 검도 거짓말이다.”
“아, 맞다! 그랬지! 그거!”
에드워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오?”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오늘날의 문제에 비하면 둘은 단순히 도구에 불과할 뿐이란 거요. 어떤 계시가 아니라.”
선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는 해협으로 돌아온 기분을 맛보았다. 커다란 고목 같은, 완고하고 불길한 남자.
“열쇠검은 그저 저주 받은 결말을 가진 옛 검의 하나요. 여러 왕실 보물고나 지키다가 원래 이름과는 동떨어진 ‘열쇠검’이라는 이름을 받았지. 그래도 그 검의 이름에 착안해, 은자는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소. 그리고 그 검은 옛날에 다쉬사베스에게 큰 상처를 입혔고, 미래엔 레피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뿐이오.”
낮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지금 도구가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요.”
“나?”
에드워드의 물음에 은자 유스타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그림 본 적 없소, 기사여? 사람이 홀로 서 있고 그의 한쪽에 천사가, 반대편에는 악마가 선 그림을.”
에드워드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유스타스는 계속 말했다.
“오늘, 여기서는 영혼이 하나뿐이지.”
에드워드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빛의 편이 될 것인가 어둠의 편이 될 것인가 묻는 거요?”
“그렇소.”
에드워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 조용히 처리할 것이라는 뜻이다. 어느 사이엔가 들어왔던 길도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고전적인 대답을 골랐다.
“이미 빛의 편인데. 그간 내가 죽인 사교도들 꼬라지를 보고도 어둠의 편에 서고 싶지는 않소. 됐지? 이제 저주 풀어주는 거요?”
유스타스는 불쌍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빛의 편에 선 적 없소. 빛의 편에서 태어났을 뿐.”
에드워드는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네가 빛의 미덕에 충실했냐’는 정도의 말이겠지만, 환생한 사람 입장에서는 특이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빛의 편에 선다고 꼭 저주가 풀리지는 않을 거요.”
“아니, 왜?!”
“그건 빛의 뜻에 달린 문제니.”
선장이 킬킬 웃었다.
“그대 행적을 보시오. 저주 받기 전 앵글리아 국왕의 기사로 뛴 것보다 성지순례길이 빛을 더 기쁘게 했을 거요. 빛은 그대가 저주를 풀기보다 그걸 이용해 공헌하기를 더 바랄지도 몰라.”
“뭐 이런 불공평하고 제멋대로인 게 다 있어?!”
에드워드의 항의에 유스타스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소.”
“난 일개 인간이오! 필멸자라고! 천사니 성자니 하는 이야기에 비하면 저기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출세길이나 잡아보려는 소박한 인간!”
에드워드는 유스타스 앞에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요? 저주의 발단이 된 밤을 후회해야 하는 거요? 술을 끊을까? 거지들을 찾아다니며 발을 씻길까? 아니면 이 검의 원 주인이 저지른 악행을 대신 뉘우치고 기도할까? 저주를 풀고 나서 빛에 공헌하면 안 되는 거요? 그 저주가 유용하다면, 차라리 다른 형태로 내게 베푸는 법도 있잖소?”
“당장 해야 할 게 하나 새로 생겼군. 빛을 상대로 흥정하지 마시오. 당신 영혼에 도움이 안 되오.”
에드워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 성자 유스타스는 잡히지 않았다. 손이 연기를 통과하듯 허공을 갈랐다. 선장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빛은 완고해서, 납득할 만한 대답을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소. 게다가 설령 저주를 푼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알맞는 보상이 내려올까? 시오니아 국왕이 부유한 상속녀를 내려 줄 거라고? 누가 장담한단 말이오? 은을 가득 채운 궤짝 하나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에드워드는 선장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선 채로 물었다.
“빛과 어둠은 내 영혼을 왜 그리 고평가하는 거요?”
“모든 영혼은 다 다툼의 대상이오. 모래알도 홍옥도 이 싸움 앞에서는 다 똑같소. 그대 영혼의 가치만 높은 게 아니라. 그 돌멩이가 어디서 왔는지 정도의 특이사항은 알아둘 때도 있지만.”
그제야 에드워드는 천천히 선장을 돌아보았다. 선장은 계속 말했다.
“아까, 사교도들의 꼴을 보고도 어둠의 편에 서지는 않겠다고 했지. 헌데 그 사교도들은 다른 자들을 본 적이 없어서 어둠의 편에 섰겠소? 빛의 완고함을 못 따라간 자들은 당신 생각보다 많소.”
선장의 손이 에드워드의 어깨를 짚었다.
“불쌍한 영혼들이지.”
“어둠은 흥정을 받아들일 거요?”
“그게 어둠의 일이오.”
선장의 의족이 동굴 바닥을 강하게 때렸다. 따악! 그 순간, 에드워드는 동굴이 아니라 거대한 성 안에 섰다. 그가 균형감각을 잃고 움찔거리는 순간, 성채 안의 하인 하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어…….”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인은 잠시 에드워드의 눈치를 보더니, 곧 자기 할 일로 돌아갔다. 숲에서 꺾어온, 이파리 가득한 나뭇가지들을 차가운 돌바닥에 깔아 냉기를 막는 것이었다. 월동 준비.
그 일을 감독하는 건 영주 부인의 역할이었다. 에드워드는 뒷모습만 보이는 여인을 발견했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녀는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은 어디서 본 검은색이었다.
선장이 말했다.
“고귀한 여자와 안정적인 출세가도라면 어둠도 기꺼이 제공해 줄 수 있소. 그게 당신의 사제 아가씨라 한들 말이오…….”
에드워드는 선장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은자 유스타스를 돌아보았다. 환상은 사라지고 다시 동굴이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곳에 빈약한 촛불들, 그리고 거지꼴이 된 은자.
“빛은 그저 하나만 제시할 뿐이오. 그대의 행동이 그대를 완성하리.”
옛 이야기들이라면 주인공은 여기서 빛을 거리낌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겪는다면 한없이 복잡한 이야기였다. 빛이 말만 저렇게 하는 거라면? 어둠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은자 유스타스는 덧붙였다.
“아직도 손익을 따지고 있소, 기사여? 당신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에드워드는 힘없이 말했다.
“어쩌란 거요? 별 볼일 없는 인간이 정해진 출세코스에 올랐소. 그것조차 없던 삶에 비하면, 말 그대로 황금 같은 기회잖소. 여기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죄악이 아뇨?”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나섰겠지.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은 기꺼이 넘고, 안을 수 있는 여자는 닥치는 대로 건드리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요?”
“당신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었잖소. 이 세상을 이해할 마음도 없었고. 당신 스스로를 믿은 것도 아니지. 지금 당신은 그저 빈 껍데기요. 세상에서 한발짝 물러나서는 자신의 안위만 챙겼지. 하지만 그래서는 결국 아무것도 못 얻을 거요. 이해도 애착도 없으니까.”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에드워드는 이 세상의 가족들에게도 정을 붙이지 못했고, 베레스포드 공작의 교육도 그저 시키는 대로 수행했을 뿐이었다. 왕실을 따라다니며 봉사한 것도 결말을 못 봤을 뿐, 애착이 있는 자리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해와 애착이라.”
에드워드는 문득 엘프 도시 아르데니아 근처의 어느 백작성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등짝에 꼬마악령이 달라붙어 몸을 뺏으려 했을 때, 그가 호위하던 여사제가 했던 말.
‘너만 할 수 있는 것, 존재증명이든 애착이든 아무것도 없어?!’
“없었지. 확실히.”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이해한단 거요? 독실한 신앙인이 되라고?”
“빛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 필요하오. 그게 없으면 무엇을 믿든 눈먼 믿음에 불과하니.”
“난 뭐 아무것도 안 해 본 줄 아시오? 내가 어설프게나마 알던 것들로 뭔가 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반동만 처맞은 이야기들 해드릴까?”
“찌꺼기를 비우고, 뛰어들어, 다시 채워서, 감수하고 나아가야 하는 거요. 어디에 뛰어들어 뭘로 채우는지는 당신이 선택해야 하고.”
그 순간 선장이 다시 의족으로 바닥을 때렸다.
따악! 따악!
“광야에서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릴까? 수도회에서 손에 메마른 흙을 묻히며 하늘을 원망할까?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터무니없는 적에게 덤벼야 할까? 죄 없이 재판받고 억울하게 죽을까?”
그가 의족으로 바닥을 때릴 때마다 온갖 환상이 에드워드를 괴롭혔다. 에드워드는 짜증을 담아 외쳤다.
“내가 언젠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거라고 했지? 지금이 그때요. 제발 닥쳐!”
“지금이 돕는 거요. 세상에 뛰어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소. 진심으로 산다는 건 진심으로 고난 당한다는 이야기요.”
에드워드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성자와 악령 사이에서, 그는 조그맣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내가 누군가한테, 어딘가에 애착을 가질 수 있긴 한 거요?”
유스타스는 웃으면서 반문했다.
“보상으로? 인연으로?”
선장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자는 받을 수 있어도, 후자는 못 받는 거요. 누굴 생각하고 있소? 순례길의 동료들? 두고 온 여자들? 시장바닥처럼 돈줄이 마르면 떠날 자들과, 바다만큼 변덕스러운 여자들을 믿지 마시오. 싸워 얻을 수 있는 것 앞에 왜 무릎 꿇으려 하는 거요?”
에드워드는 한 여자를 떠올렸다.
“서로 이해를 시도해 볼 사람은 하나 있는데.”
“타인의 완고함과 변덕 사이에서 길을 잃고 죽어간 기사들의 예를 반복할 거요? 그 여자도 주겠다니까.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지 마시오.”
에드워드는 마지막 말에 반응했다.
“아까 하려던 말을 깜빡했네. 걔가 댁이 준다고 해서 올 여자는 아니라고 봐.”
선장이 침묵했다. 유스타스는 껄껄 웃었다.
“실수하셨군, 선장.”
선장은 신경질적으로, 다시 의족을 바닥에 내리쳤다.
따아악!
그 순간 동굴 천장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주둥이가 나타났다. 에드워드가 바다에서 잡았던 시서펜트는 피래미로 보일 크기의 면상이었다. 산맥을 베어물면 입자국을 남길 것 같은 초현실적 크기.
에드워드는 그게 환상인 걸 알면서도 그 말도 안 되는 크기에 압도되었다.
고래의 주둥이가 에드워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암흑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