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봉인 해제
환각이 내린 어둠, 거대 향유고래의 아가리 속은 바다 같았다. 분명 단단한 바닥을 딛고 있던 발밑이 허전해졌다. 위아래가 분간이 안 가는 어둠 속에서 에드워드는 익사할 걱정까지 해 버리고 말았다.
“헤엄치는 시늉은 그만두게나.”
유스타스의 목소리였다. 조각배 위에 등불과 낚싯대 하나를 들고 탄 노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에드워드는 그 조각배의 뱃전을 붙들었다.
“혼자 좋은 거 타고 그러쇼?”
“이런 조각배가 뭐 좋은 거라고.”
그 순간 유스타스의 뒤로 커다란 범선이 나타났다. 순간 포경선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위에는 선장은커녕 사람 하나도 없었다.
“선장은 어디 갔소?”
“아마 자네가 다시 찾기 전에는 안 나타날 테지. 그 정도 되는 악령이 실수한 건 부끄러운 일이거든.”
유스타스는 낚싯대를 한번 까딱였다.
“조급했던 거요. 자네 동료가 밖을 맴돌고 있는 모양이니.”
“엥? 동료?”
“걱정되어서 찾아왔나 본데.”
“어디로 가는지는 말 안 했는데.”
“자네 동료들쯤 되면 말 안 해도 쫓아올 수 있잖소?”
돌아갈 여비가 아슬아슬하게 남을 때까지, 사람이 적은 곳을 골라 달렸지만, 딱히 숨은 건 아니다. 에드워드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조각배 위로 몸을 날렸다.
투웅!
그는 열쇠검을 뽑아다 성자 유스타스에게 내밀었다.
“댁이 진짜 유스타스인지 모르겠소. 선장이 변신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을 테니까.”
“의심이 많군.”
“교회도 그러지 않던가? 신의 기적이랬는데 알고 보니 악마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했더라…….”
“빛의 인도 아래 자기 자신을 믿는 기사는 그런 데 흔들리지 않소. 자네 스승인 베레스포드 공작은 이런 식으로 의심했을까? 켈러핸이라면? 오는 길에 만났던 기사단 지휘관들이라면?”
“말이 많아지는 것 보니 더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소.”
“그럼 하던 대로 해결해 보시오.”
에드워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로 칼을 집어넣었다. 유스타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자네 방식이 안 통할 때도 있단 말이지. 그럴 때 빛과 어둠이 손을 내미는 것이고.”
“흠. 이 큰 배는 뭐요?”
“선장이 이 배의 사람들을 전부 끌고 가려고 했던 적이 있소. 하지만 내가 마침 타고 있었고, 고된 대결 끝에 사람들은 전부 살렸지.”
에드워드는 범선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크긴 했지만 평범한 배였다.
“여기 탄 사람들은 운이 좋았군.”
“운만 좋았던 건 아니지만.”
“그들도 빛의 승리에 공헌했소?”
“어떤 이는, 그렇소.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한 것 자체가 이미 승리긴 하지만…….”
에드워드는 성자를 돌아봤다.
“제페토 영감은 내게 뭘 바라는 거요?”
“계속 말하고 있잖소? 빛의 이름 아래서 자네 자신을 믿고, 스스로 행동하라고. 그런데 제페토가 누군가?”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인형과 고래 뱃속에 갇힌 할아범.”
“코가 길어진다. 흠. 그걸로 하지. 자네가 거짓말을 하거나 솔직해지지 않으면 그런 저주를 추가하는 걸로.”
“구라치면 아래 코가 길어지는 옵션은 없수?”
“고래 뱃속에서 길어져봤자 어따 쓰게.”
에드워드는 낄낄 웃어 버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웃음을 멈추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노예건, 왕이건, 신 앞에서 다 같다고 칩시다. 하지만 역할은 다 다르겠지. 내가 묻는 건 빛이 내게 어떤 역할을 주려고 이러나 그거요.”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절로 알 일이오.”
“시원하게 대답을 못 해 주네.”
“아까 선장이 그러려다가 졌거든. 그 여자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그의 실수이자 반칙이었소.”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세상의 모든 탐욕 대신에 특별한 고난을 선택하면, 달라지는 게 뭐요?”
“세상 모든 기사의 탐욕과 고난이 다 똑같아서야, 무슨 변수가 나오겠소? 거기까지만 말하지.”
“틀에 박힌 탐욕에서 벗어나라고?”
“빈껍데기뿐인 탐욕이기도 하지.”
갑자기 조각배가 멈췄다. 어둠도 멈췄다. 대화도 멈췄다. 에드워드는 갑자기 밝은 빛을 발견했다. 바위무더기 위에 하얀 검이 꽂혀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검의 모습을 알았다. 열쇠검의 옛 모습.
“형식적인 탐욕은 아무런 소용이 없소. 봉인 전 열쇠검의 마지막 주인도 그걸 극복하지 못했지. 그만이 아니오. 많은 옛 검이 그런 결말을 맞고 잊혀졌소. 자네도 아지지야에서 보고 들었잖은가.”
“가까운 사람을 베어버린 검들 말이군. 뭔 놈의 비극이 그리 많은가 했소.”
“역사는 길고……. 이유야 다양했지. 권력, 치정, 포기, 광기…… 그대가 온 곳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나?”
에드워드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몇 가지 예를 떠올렸다. 헤라클레스가 미쳐서 자기 가족을 쳐 죽였다는 이야기라든가.
“그런 비극이 나한테 온다고?”
“빈껍데기한테는 다 오는 법이지.”
성자 유스타스는 허공을 계단처럼 딛어 조각배에서 큰 배로 올랐다.
“우리는 먼 데서 온 자네 그대로를 원하오. 그러니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을 거요. 다만, 진정으로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길 원하지. 방식이 아니라, 바람 말이오.”
“그럼, 그걸 어떻게 선서하면 되는 거요? 나는 고난을 택했노라 말로 할까?”
“방법이야 그대가 잘 알겠지. 정해진 곳에서 감수할 만한 모험과 틀에 박힌 보상만 갈구할 게 아니라면.”
에드워드는 침묵했다. 성자는 빛의 검을 가리켰다.
“결심했소? 그럼 그만 나가지. 저 빛의 검 자리에 열쇠검을 꽂으시오. 그리고 이 배에 오르시오.”
“왜 또 하필 이 검이오?”
“기왕지사 가져온 거니까. 그리고 그대가 이 검의 마지막 주인과 같은 예를 밟지 않겠다는 뜻으로.”
“안 꽂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땐 어둠을 따르게 되겠지. 이 어둠 속에서 선장을 기다리시오. 그가 선물과 보상을 들고 나타날 테니. 저주의 해제든, 여자든, 부귀영화든.”
빛이 경고한 비극을 피하느냐, 어둠이 약속한 것들을 얻느냐. 에드워드는 빛의 검과 유스타스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는 물었다.
“댁도 지겹겠지만, 한 번만 더 확인합시다. 나 내키는 대로 하라고?”
“그렇소.”
에드워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마쇼.”
에드워드는 조각배 밖으로 뛰어내렸다. 한없이 깊은 것 같던 물은 어느새 발목 깊이의 얕은 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바위무더기 위에 올랐다. 그는 빛의 검이 있는 자리에 열쇠검을 내리꽂고는 뒤를 돌아봤다.
“선장! 듣고 있겠지!”
침묵. 에드워드는 응답 없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서는 건 빛의 편에. 하지만 댁이 원하는 건 하나 해 주지! 닥치고 다 내놔!”
유스타스는 뱃전에 기대 폭소해 버렸다. 그는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배에 안 탈 건가?”
“탈 거요. 다만, 수도사처럼 고분고분한 걸 원한 건 아닐 거 아뇨?”
“이런이런. 이래서야 회개했는지 모르겠군.”
에드워드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그건 밖에 나가거든 마저 보여드리지.”
그 순간 어둠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유스타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배로 오게, 먼 데서 온 기사여!”
에드워드는 열쇠검을 뽑은 다음 황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좀 전까지는 얕았던 발밑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조각배를 밀치고 범선이 늘어뜨린 그물을 붙잡았다.
그 순간 천지가 뒤집혔다.
* * *
짝짝짝.
에드워드는 자기 뺨을 때리는 충격에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맑은 하늘과 밴시 리안나였다.
“와, 기사님 눈 떴다!”
에드워드는 반사적으로 리안나를 밀쳐내 버렸다. 옆으로 데굴데굴 구른 리안나는 벌떡 일어났다. 에드워드는 그것보다 약간 더 늦게 일어났다. 리안나는 도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에드워드의 정수리를 때렸다.
“기사님, 괜찮아요?”
“말과 행동에 괴리가 있다, 너?”
“기사님이 괜찮은 건지 시험해 보는 건데요!”
에드워드는 리안나의 볼따구를 꼬집었다. 리안나는 그래도 계속 까불거렸다.
“아야야야야야! 기사님 정신 안 차리면 두고 간댔어요!”
“누가?”
“내가.”
카치운의 목소리였다. 그는 리안나한테서 좀 더 떨어진 곳에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한테서 바짝 경계하는 늑대의 모습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본 그는 카치운이 경계하는 대상을 찾았다.
허수아비처럼 삐쩍 마르고 수염을 아무렇게나 길게 기른 선원이었다. 이 산속에서 처음 만난 사내를 어떻게 선원인 줄 알았냐면, 다 해진 옷을 입고 바다 냄새를 풀풀 풍겼으니까. 그는 낮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선장님의 전언이오.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 도움을 받겠다고 한 건 아니라고.”
“어쨌든 원하는 대로 하나는 해 준다고 해.”
“이제 선장님은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소.”
“유감이군.”
“하지만 당신의 수고는 기꺼이 받을 거요.”
“공짜로 받으시겠다?”
선원은 깡마른 몸을 돌렸다.
“당신 선택의 결과요.”
선원은 터벅터벅 걸어 산을 내려갔다. 카치운은 에드워드와 그 선원의 뒷모습을 번갈아 곁눈질했다.
“저거 인간 아니요.”
“나도 알고 있소. 아마 부하 악령일걸.”
에드워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위산 어딘가였는데, 들어온 곳은 아니었다. 완전히 엉뚱한 장소였다.
“여기가 어디요?”
“당신의 마지막 흔적이 끊어진 곳에서 훨씬 북쪽. 동부 국경지대와 그리 멀지도 않지.”
“어떻게 찾아왔소?”
“마지막 흔적까지는 입소문과 내 추적술로. 그리고 마법의 길은 이 꼬맹이 요정의 감으로 찾았지. 이상한 돌기둥 뒤를 돌았더니 이곳으로 순간이동해 있더라고. 다행히 아는 지형이라 돌아갈 수는 있을 것 같소. 기묘한 경험이 다 있네.”
“기사님이랑 사제님이 제 주인이라서 어딨는지는 대충 감으로 찾지롱요!”
에드워드는 감탄했다.
“너 그런 능력도 있었냐? 어쩐지 때맞게 던질 수 있더라니.”
“원래 그런 능력 아니에요! 그래서 기사님한테 비밀로 한 건데! 카치운 아저씨는 쓸데없이 촉이 좋아!”
“베르세바 지하 소동 때 대충 눈치챘지. 미로에 남겨진 애가 기사양반한테 알아서 돌아오는 거 보고.”
에드워드는 낄낄 웃어버렸다. 카치운은 에드워드의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의 봉인은 푼 것 같은데?”
에드워드는 그제야 열쇠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집 밖으로 나온 그 검은 에드워드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주변에는 깨진 쇳조각이 널려 있었다. 카치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지지야에서 기사양반이 들고 다니던 옛 모습과 좀 다르게 생겼소만?”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새 모습이오.”
에드워드는 열쇠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무식하게 두껍고 애매하게 길던 길이가, 근래 한손검에 걸맞은 크기로 줄어 있었다. 검 끝은 더 이상 뭉툭하질 않고 뾰족했으며, 날은 비단도 단숨에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자태였다.
“어디 내놔도 명검 소리 듣겠는데. 새 능력도 생겼으려나, 이거.”
“잘 됐군. 그럼 저주도 풀린 거요?”
카치운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검을 놓았다. 땡그랑. 검이 괴력을 버텨내는 게 봉인 덕이었다면, 봉인이 깨진 검은 에드워드의 괴력으로 망가뜨릴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심호흡한 다음, 장갑을 벗었다.
“어?”
한쪽 손바닥에 길고 가느다란 상처. 기사 생활을 하면서 얻은 흉터나 상처는 많지만,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늘고 붉은 선이 손바닥을 가로질렀다.
상처를 살펴본 카치운이 말했다.
“칼날이라도 잘못 잡았소?”
“바위에 박힌 빛의 검을 뽑을 때, 검날도 잡긴 했소. 하지만 장갑을 꼈는데.”
장갑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카치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돌멩이를 한 번에 부수지 말고, 천천히, 힘의 단계를 올려본다는 식으로 해 볼 수 있소?”
에드워드는 그 말대로 해 봤다.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어서 힘을 주는 순간, 에드워드는 돌멩이가 생각보다 단단한 물건이라는 오랜 진리를 되찾았다.
그는 잠시 말을 잊고 손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리안나는 고개 숙인 그를 힐끗힐끗 올려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저주 풀린 거예요?”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짧은 기도를 외웠다. 곧 돌은 굉음을 내며 박살이 났다.
콰직.
“안 풀린 거예요?”
에드워드는 도로 장갑을 낀 다음, 밴시의 덜미를 붙잡았다.
“으익?!”
밴시가 이상한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녀는 하늘을 날았다.
“어째서어어어어어어!”
리안나는 큰 바위 위로 날아가며 소리쳤다. 에드워드는 카치운을 돌아봤다.
“정상으로 돌아왔어! 근데 괴력도 낼 수 있어! 기묘한 감각인데! 후치 네드발이 이런 기분이려나?”
“그게 누구요?”
“감나무집 아들의 아들. 갑자기 힘이 세졌지.”
“모르는 사람이오만.”
불행히도 카치운의 모름은 에드워드를 말리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환성을 내지르면서 잠시 광란에 빠져 이것저것을 들어 올리거나 부수기 시작했다. 카치운은 입을 떡 벌렸고, 큰 바위 위에서 그걸 지켜보던 밴시는 투덜거렸다.
“여기 올라와서 차라리 다행인 것 같다 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