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 대형사고
객관 로비에서 스텔라는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팔락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헬레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게 뭐죠?”
“기사님이 파브리스에게 썼던 편지요. 납치극 때 기억나요? 가르달 씨가 전달했던 것.”
“아, 그것 말이군요. 그걸 파브리스가 아직 갖고 있었나요?”
“네. 풀어주는 대신에 뺏었죠.”
“그 편지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돈 한 푼만큼의 가치도 없어요.”
“그런 걸 왜 그렇게 기쁜 듯이 들고 있죠?”
스텔라는 편지를 똑바로 들어 헬레나에게 보여줬다.
“프리지아 학당 출신의 여마법사 스텔라는 내 것이니 내놓으라, 라고 쓰여져 있으니까요.”
헬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별로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다. 고용인도 ‘재산’처럼 취급하는 문장은 널렸다. 고용주에게 돈줄이 꽉 잡힌 스텔라라면 더한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성적인 의미로도 해석하는 건가요?”
“그렇게 해석해도 되고…… 엘프님이나 사제님보다도 먼저 ‘문서화’했다는 기념품쯤?”
헬레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혼이나 연애 증명서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군요.”
결혼은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이지, 증명을 떼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헬레나의 말은 합당했다. 그러나 스텔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편지들이 때로는 증서 역할도 하지요.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육체파인 엘프님이나 고전의 주인공인 사제님한테 안 뒤처지려면, 이 정도는 확보해 놔야겠죠?”
스텔라는 깔깔 웃고는 종이를 펑퍼짐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헬레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에드워드 경한테 마음이 있나요?”
“가끔? 기사님이 잘 나갈 때는, 제가 두근거릴 때와 겹치긴 하죠. 장래성이 나쁘지 않은 고용주기도 하고. 지금은 잘 나가는 것 같네요.”
헬레나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에드워드 경은 영지를 받는 게 아니라 교회기사로 전업할 텐데요. 당장 영지를 못 얻은 기사는 여마법사의 본격적인 직장으로 부적절하지 않나요?”
“시간이 좀 아깝긴 한데, 그렇게 받은 영지가 조막만 하면 걷어차고 다른 기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리스크는 거기서 거기?”
“묘한 계산이군요.”
“영지야 결혼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도 있죠. 하나같이 좀 더 까다로운 방법이란 게 문제일 뿐. 그리고 기사님은 교회기사로도 출세하고 남을걸요.”
“교회기사한테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할까요?”
“순례길에 보셨잖아요? 숨은 어둠을 찾거나, 죽다 살아나는 인간을 건지는 건 사제가 잘하지만, 마법사는 다른 영역을 다루죠. 필요 없다고는 못할걸요. 저 중노동하는 거 보셨잖아요?”
“그게 중노동이었나요?”
“엘프 기준 들이대지 마시고요.”
스텔라는 눈웃음을 쳤다.
“여차하면 사제님의 본가인 백작가를 노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건 좀 더러운 이야기군요.”
“욕심만 덕지덕지 붙은 영주 밑에 붙는 것보다는 깔끔한 이야기에요. 기사님 따라다니면서 내가 이 기사 키웠다고 자랑해야지.”
“누가 누굴 키워요?”
“기사님과 사제님 덕에 교회의 연구기관에 한자리 얻는다는 계획도 가능하죠. 교회 통제 아래 들어간 마법사라는 게 별로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연구비는 따박따박 나올걸요.”
“여러 가지 진로를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떠난다는 옵션은 없고.”
“엘프님, 섭섭하게 구신다.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헬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니지만요. 당신 역할은 좋아지지 않는군요.”
“헤헹. 사제님의 역할이나 엘프님의 역할은 어떤데요?”
“무슨 의미죠?”
“왜 우리 엘프님은 사제님한테 선공을 양보하셨을까?”
헬레나는 스텔라를 꼬나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 경이 선택한 거죠. 오래전부터요. 저는 거기 불만을 제시할 입장이 아니에요.”
“왜죠?”
“인간의 결혼에 엘프가 말을 얹는 건 규칙 밖의 일이에요. 엘프의 결혼에 인간이 말을 얹는 것처럼.”
“완고하셔라. 그럼 인간과 엘프의 결혼은요?”
헬레나는 말이 없었다. 스텔라는 피식 웃었다.
“엘프 기준은 욕심쟁이 기준이라니까.”
“무슨 의미예요, 그거?”
“엘프님이 잘 아실 것 같은데에.”
스텔라가 깐죽거리는 사이, 2층에서 밴시. 리안나가 내려왔다. 빨랫감과 빈 그릇과 빈 쟁반과 불씨통 따윌 들고 내려온 그녀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누구누구는 달달하게 시작해서 짐승같이 뒹구는데, 밴시는 잡일이나 연이어 하고, 세상이 재미없어요!”
스텔라는 웃어 버렸다.
“그래도 잡일 한다고 들어가 보긴 하네. 어때?”
“밴시는 신경도 안 쓰는 짐승들이래요! 서로 먹어치울 기세던데요!”
“격렬한가 보네.”
엘프 헬레나의 귀가 잠깐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텔라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앗, 엘프님. 방금 엿들어 버렸죠?”
“크흠. 고의는 아니었어요.”
헬레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스텔라는 히죽히죽 웃은 다음, 리안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끝날 것 같아?”
“곧요. 사제님은 몰라도 기사님은 보통 사흘 안에 죽을상으로 끝내잖아요. 지금도 꼴 보니 그럴 것 같던데요.”
“너만 보니, 그 재미난 거.”
“짐승 같은 플레이는 제 취향 아니에요. 시작 같은 분위기 계속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관람객 취향을 보장해줘야 재밌지.”
리안나의 말에 헬레나는 헛기침을 했다.
“어린애 모습으로 그런 말 하지 좀 않으면 좋겠어.”
“요정은 인간사회의 법을 개무시…….”
“그러다 꼭 얻어맞고 감옥 가잖아.”
“그러니까 요정은 매번 억울하다 예요!”
깐족거리기 대회라도 하는냥, 스텔라와 리안나는 마음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로비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해보기 시작했다.
* * *
겨울이지만 뜨거운 열기와 습기로 가득한 방. 침대 위에 서로 마주 앉아 끌어안은 두 남녀는 기진맥진한 채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먼저 문장을 완성한 건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연인의 입술에서 겨우 입을 떼고는,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간 양다리를 침대로 끌어내렸다.
“그, 그만 끝내.”
“대단히 감사합니다.”
“농담할 기운이 남아 있네?”
“아니, 나도 죽을 것 같거든?”
두 남녀는 나란히 침대 위에 쓰러졌다. 에드워드는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걸 느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시간이군. 모든 번뇌가 사라졌어.”
잠깐의 휴식 뒤, 베로니카는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나고는, 옷가지를 입지 못하고 대충 걸쳤다. 그리고는 정사 중 리안나가 놓고 간 편지무더기로 시선을 돌렸다.
“꽤 밀렸네…….”
“어디서 온 거야?”
“본가. 그리고 밖의 파브리스.”
“아, 그 새끼. 안 그래도 밖에서 만났는데.”
“제발 좀 나오라고, 이번엔 또 ‘집 밖’으로 나가 버리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더라.”
지척이어도 목소리가 안 닿으면 편지밖에 답이 없긴 했다. 에드워드는 낄낄 웃어버렸다.
“대형사고를 쳐버렸는데. 어쩌지?”
“대형사고지, 진짜…….”
베로니카는 투덜거리듯 말한 다음, 편지봉투 여럿을 한꺼번에 잡고는, 그 끄트머리를 손으로 쭉 찢어 뜯었다. 에드워드가 다시 농을 걸었다.
“편지칼 없어?”
“젖은 손으로 칼 쥐면 사고나. 닦기도 귀찮고. 그리고 칼 챙기러 갈 기력도 없어.”
“종이 뜯을 힘은 있고?”
“결대로 찢으면 힘들일 필요도 없어. 세상은 요령이 필요한 법이지.”
베로니카는 에드워드 옆에 도로 누운 다음, 편지들을 읽어내려갔다. 에드워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삐죽였다.
“그렇게 하고도 글 읽을 힘이 나냐? 서류 중독자네.”
“머리와 팔다리는 본래 따로 노는 거야. 기사들이나 일체화가 되는 거지.”
베로니카가 핀잔을 줬다. 그녀는 편지 몇 개를 읽어가다 한숨을 내쉬었다.
“파브리스가 가장 최근에 보낸 것도 있네. 앞에서 너 만났대.”
“그래서?”
“기세에 넘어가서 승낙하지 말라네.”
“경고가 늦었군.”
“내가 읽는 게 늦은 거지.”
베로니카는 편지 뭉치를 침대 옆으로 흘려 버렸다. 에드워드는 낄낄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본가에도 설명해야 하나?”
“해야지. 내 오빠는 무섭다?”
“정말 무서우면 네가 집 박차고 나가서 교회 들어갔을까?”
“나한테는 쩔쩔 매. 근데 너한텐 아닐 거야.”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장인어른 상대하러 가는 신랑 이야기야 널렸지.”
“부디 잘 참고해. 그 이야기들.”
에드워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 수를 써서 설득해야 하나…….”
“실컷 고민해. 조만간 만날 테니까.”
베로니카는 에드워드의 팔을 벗어난 다음, 책상으로 걸어가 잉크병과 깃펜을 주섬주섬 챙겼다. 의자에 앉아 답장을 쓰기 시작하는 그녀의 어깨에서 대충 걸친 옷가지가 흘려 내렸다. 에드워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식은 어쩔래?”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지나가는 사제 하나 붙잡아서 하고 싶어. 신 앞에서 맹세해버리면 오빠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너도 사제잖아?”
“이발사가 자기 머리를 스스로 깎는 거 봤니?”
“아, 그런가.”
“그리고 그런 폭주를 해 버렸다간 나도 뒷수습이 골치 아플 것 같아.”
“그렇겠지.”
에드워드는 한번 웃은 다음, 바지와 상의를 대충 챙겨 입고 문고리를 잡았다.
“뭐 좀 더 먹어야겠어. 가져와 줄까?”
“난 됐어. 리안나나 불러줘.”
“알았어.”
에드워드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문짝에 등을 기대고 있던 리안나가 데굴데굴 굴러들어왔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올려다보며 항의했다.
“좀 기척 내고 열라 이거예요!”
“냈는데. 너 자고 있었지?”
“와, 방에 냄새나! 땀 냄새랑…… 이상한 냄새! 세탁하려면 죽어나겠다!”
베로니카는 종이쪼가리 하나를 리안나에게 뭉쳐 던졌다.
“빨래는 나중에 해. 어차피 또 망칠 테니까. 그보다 이 편지, 전달해.”
“누구한테요?”
“읽어봐.”
리안나는 종이를 펼쳐 읽어보고는 계단으로 뛰어나갔다. 에드워드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식사는 빨리 마쳐야겠군.”
* * *
“유부남의 길에 들어온 걸 환영하지, 동지.”
카치운의 말이었다. 로비 구석의 탁자에서 스크램블 에그와 고깃덩어리들을 해치우던 에드워드는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들으면 들어갈 생각 없는 줄 알았겠네. 내 목표가 원래 결혼이었잖소.”
“예정보다 조금 더 빨리 들어왔지. 그리고 유부남은 원래 총각들에게 하루라도 더 빨리 결혼하라고 권하는 법이오.”
“왜?”
카치운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혼자 좆되면 억울하잖아…….”
가르달은 폭소했고 에드워드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가르달은 한참을 껄껄 웃더니 연초 파이프를 에드워드에게 내밀었다.
“배워 보시겠소? 앞으로 많이 필 것 같은데.”
“관두지…….”
그때, 로비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쥐 파먹힌 것처럼 뜯긴 파브리스였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는 에드워드를 보자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왔다. 에드워드는 놀라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쓰고 리안나가 전달해준 편지가 그의 통행증이었을 테니까. 식사 중인 기사는 고개를 들지 않고 인사했다.
“머리가 왜 그러슈?”
“그쪽 여마법사가 쥐어뜯었지…… 슬픈 일이오.”
“그렇군.”
“더 슬픈 건 내가 주군께 보고할 일이 생겼단 거지만.”
에드워드는 마지막 숟갈을 비우고는 그릇을 한쪽으로 밀쳐냈다. 리안나가 잽싸게 빈 그릇들을 치우는 동안, 에드워드는 파브리스와 눈싸움을 벌였다.
“시르티카 백작께는 조만간 뵈러 가겠다고 전해 주쇼.”
“백작님을 만날 필요는 없소. 국왕 폐하께나 갑시다.”
“보상 안 받을 건데.”
“받아야지. 보물이랑 여자.”
“전자는 받겠지만 후자는 안 받을 거요. 이미 생겨 버렸거든.”
“생겼다고 보고는 해야지.”
“급한 거 아니잖소.”
“급한 거요. 여자의 신분을 생각해 보면.”
에드워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백작가 영애면 그럴 만하지.”
“시르티카 백작의 여동생은 아직 유학 중이오.”
파브리스의 말에 일행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멈췄다. 에드워드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파브리스를 보았다.
“뭔 소리야?”
“캠벨 가문의 사람이자 시르티카 백작인 분은 아가씨의 외가 친척이오. 그분의 여동생은 아가씨를 모시고 함께 유학을 출발했고, 비텔리아에서 아가씨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지.”
카치운은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잡은 그가 에드워드 대신 물었다.
“외가?”
“그렇소.”
“친척?”
“그렇소.”
가르달은 눈을 끔뻑거리고는 질문했다.
“그럼 2층의 여사제는 누군데?”
파브리스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말했다.
“시오니아 왕국의 공주이자 아모리아의 여대공이시며 팔레프, 에코니움의 여공작이신 베로니카 전하요.”
일행들의 시선이 죄다 에드워드한테 박혔다. 에드워드는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파브리스를 보았다. 파브리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후회할 짓은 하지 말랬잖소.”
에드워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파브리스를 손가락질하다, 결국 폭언을 뱉고 말았다.
“구라치지 마, 닭대가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