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성묘의 수호자
한 하인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에 든 주전자로 물을 채웠다. 그동안 에드워드와 경건왕은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지뢰밭을 걸어가는 심정으로 남매 사이의 관계를 가늠해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다행히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자께서 꼭 필요한 일이라 판단하셨다면 내게도 뭔가 한 말씀을 남기셨겠지. 자네한테 증거물이라도 남기면서, 옛 이야기처럼.”
“어떤 옛 이야기입니까?”
“어디어디에 성당을 세워라, 같은 것. 나는 안 믿는 왕 역할일 테고, 자네가 겨울산의 장미 같은 증거를 가져와 날 놀라게 하겠지.”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게 어디서 많이 들어본 형태의 이야기임을 인정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하지만 성자께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지. 아마 내가 헤아리고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데.”
“이번엔 많이 불친절하시더군요.”
“성자를 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에드워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빼고 설명했다. 경건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세에만 정신없던 기사가 삶에 눈을 돌리고 진정으로 살게 되는 이야기라. 좋군. 나쁘지 않네. 그걸 결심하고 선언하는 과정은 평이 갈릴지도 모르겠지만.”
에드워드는 왕의 앞만 아니었다면 시선을 회피하고 싶었다. 선장에게 외친 거절의 말이 영 그랬으니.
“그러나 여자에게 열정을 품는 건 다른 기사들도 하는 일이지. 심지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네. 여자만 눈에 들어오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일도 흔하지.”
왕이라면 아예 정부를 두는 게 권장되기도 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권하며, 종족의 사정에 따라 중혼이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에드워드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왕은 물컵을 한 차례 입에 대었다 뗀 다음 말을 이었다.
“공주의 부군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시오니아의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말입니까?”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네. 될 거야.”
왕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의자에 몸을 더 기울였다.
“내 가문이 왕위를 지키는 데 집착하지는 않네. 시오니아에 영원한 주인은 없었어. 내 선조 역시 바다를 건너온 순례기사 무리였거든. 여기서 변하지 않는 건 지배층이 아니라 사람들이야.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지.”
왕은 다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떤 자는 그 부와 위세를 얻었다 기뻐할 것이고, 또 어떤 자는 상상하기 어려운 중압감에 몸부림치겠지. 땅과 욕심을 위해 싸우는 자가 전자일 것이고, 자신의 안위만 보는 자가 후자일 것이야. 하지만 둘 다 왕의 자리에는 부적합해. 모험광이나 전쟁광은 애초부터 제외될 수밖에 없고.”
“어떤 자가 왕의 자리에 적합합니까?”
경건왕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변하지 않는 것들, 즉 이 땅 위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
침묵이 흘렀다. 왕은 덧붙였다.
“나는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싸웠어. 내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싸웠고. 물론 내가 믿지 않거나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싸웠지. 다음 왕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네. 성지는 적이 많고, 특히 동쪽의 주술사 왕은 강대하니까.”
“수도 근처까지 그의 손이 뻗어 있더군요.”
“보고는 들었네. 랄프라는 가명을 썼다지?”
“폭동은 결국 못 막았습니다만.”
“그게 주술사 왕의 노림수인지, 단순한 폭동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네. 설령 어느쪽이든, 자네 탓은 아니야. 주술사 왕은 비바람 같지. 국경은 군대만 막는 게 고작이야. 교회와 함께 좀 더 노력해야 하는데…….”
에드워드는 왕의 눈 속에서 어떤 생각을 읽었다. 누가 그 주술사 왕과 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래서 패트릭 켈러핸을 고르셨습니까?”
“그래. 그는 거절했지만…….”
“신앙과 올바름의 화신 같은 녀석이죠.”
“베레스포드 공작 아래서 같이 배운 사이라더니, 잘 아는군.”
“폐하보다도 더 오래 그 녀석과 같이 지냈으니까요.”
“그가 그 신앙심과 공정함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해줄 수 있기를 바랬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신은 못하지. 내 여동생도 그러더라고.”
베로니카.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공작 아래서 좀 나아진 겁니다. 줄곧 사람을 안 보고 혼자 천상에서 논다고 지적 받았거든요.”
“공작이 그대는 어딜 지적하던가?”
“맘 붙이고 정착할 곳부터 찾아야겠다고 하셨죠.”
다시 침묵. 한참 뒤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내 여동생만 사랑하는 게 아니길 바라네. 그걸 증명할 기회를 주지.”
“어떤 기회 말입니까?”
“이곳 사람들을 위해 공적을 세울 기회.”
“이미 몇 건은 세우고 왔습니다만…… 부족한지요?”
“회개 전 자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주를 위해서도 아니라. 이곳 사람들을 위해 싸울 기회가 필요하지.”
에드워드는 허리를 좀 더 꼿꼿하게 폈다.
“뭘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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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는 방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파브리스와 베르니카는 보이지 않았다. 한 하인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주님과 그 수행원은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따라오시죠.”
“아, 그래.”
에드워드는 그의 말에 따라 몸을 돌렸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한 기사가 다른 하인의 안내를 받아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에드워드가 아는 얼굴이었다.
“패트릭?”
“에드워드 경. 오랜만이군.”
상대방이 웃어보였다. 금발에 훤칠한 미남. 서코트의 문장은 시오니아 왕실 문장이었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기사단장이라지?”
“자리를 잘못 택했어. 싸울 일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더라고.”
기사 서임식이 끝나자마자 성전에 참여하겠다고 성지로 떠나버렸던 동기. 그 열정은 전혀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드워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아마 성묘의 수호자께서 안배한 것이겠지.”
“오늘 호출도 그런 것 같군. 우리가 여기서 만나다니.”
“그 뭐냐, 공주님과 결혼을 종용 받는다지?”
패트릭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난 신앙을 위해 싸우러 왔을 뿐이야. 명예는 왕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남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구의 여자를 뺏는 데는 관심 없어.”
마지막 말에 에드워드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냐?”
“왕께 이미 대충 전달 받았어. 사정도 짐작이 가고.”
에드워드는 동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눈 앞에서 왕위가 왔다 갔다 하는데도 전혀 안 흔들리는 인간. 신앙의 표본. 에드워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없어지는군.”
“무슨 자신?”
“왕이 된다는 것. 차라리 네가 왕의 자리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여자와 공주는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지.”
“사랑의 도피를 그래서 하나 싶다.”
“똥개 찰리라면 그런 고민 없이 결혼과 상속을 수락했겠지.”
에드워드는 뿜어버렸다. 그는 패트릭의 어깨를 치며 킬킬거렸다.
“네가 그놈 별명을 말하는 건 처음 듣네.”
“불쌍한 친구.”
패트릭은 성호를 그었다. 에드워드는 따라서 성호를 그었다.
“내가 죽였지만.”
“좀 심한 방법을 썼더군. 그래도 그 죄가 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결국 악마에게 영혼이 넘어갔다는 게 불행한 일이야.”
“다시 나타날지도 몰라.”
“더는 셋이서 옛날처럼 같이 다닐 수가 없겠지.”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한가지 의문을 머리속에서 떠올렸다.
“가만. 공주님 이야기가 이미 전달되었다면, 왕이 널 왜 부른 거야?”
“앵글리아 국왕이신 로버트 폐하의 문제야. 베레스포드 공작님의 무리가 국경 통과 허가를 받으셨다는군.”
“엥? 이제?”
“성지에 오시자마자, 성유골함을 노린 세트렛인들의 게떼 공격을 물리치신 덕에, 여기서도 인망이 높아져버리셨거든. 자발적으로 붙은 순례자들의 숫자가 이미 군대에 가까워서, 인근 영주들이 영토 진입 허가를 내주기가 어려웠어.”
“저런.”
에드워드는 게떼한테 침공당했던 항구도시를 떠올렸다. 당시의 공적은 결국 남은 사람들이 다 나눠가진 모양이었다.
“로버트 폐하의 함대가 지금 바다를 떠돌고 있는 모양이라, 베레스포드 공작님도 급해지셨더군. 시오니아도 앵글리아 군대가 내일이라도 도착하는 건 아닐까 다들 난리야. 길과 보급품을 준비해줘야 하니.”
“저런.”
“그 문제로 상의할 게 좀 많아. 특히 난 앵글리아 출신이잖아.”
패트릭은 에드워드의 서코트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수도에 머무는 동안은 왕실 이야기를 좀 많이 전해줘야 할 거야.”
“안 그래도 탈탈 털리고 나온 길이야. 조금 전까지 꼬치꼬치 캐묻더라.”
에드워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새 임무도 받았지.”
“좋은 일이군. 어떤 임무지?”
“군대를 모아서 변경요새 하나를 좀 맡아달라네. 앵글리아군이 도착하면 연합군이 진격할 테니, 그 전까지 요충지 방어를 굳혀야 하는 모양이야.”
패트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도 모아야겠군.”
“널린 게 순례자니 쉽지 않겠어?”
“그렇지만도 않아. 트레베리아 내전이 용병 수요를 다 끌어가버리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는 용병의 숫자는 격감했어. 치안불안으로 순례자들도 마찬가지고.”
오면서 항상 들었던 그 문제들. 에드워드는 앓는 소리를 냈다.
“공주의 부군쯤 되려면 그래도 자기 세력이 있어야 할 텐데.”
“꼭 군대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기사 몇 명만 있어도 돼.”
“몇 명만?”
“애초에 국왕 폐하가 날 부군으로 찍은 것도, 이곳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려면 외부에서 온 세력 작은 기사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사람일수록 왕의 명령은 잘 들을 테니까.”
에드워드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나도 좀 그럴 듯한 봉토를 줘야 하는 것 아냐? 변경 요새사령관이 뭐야?”
“요새 이름은 아나?”
“푸른바위거성이라는데.”
“아는 곳이군. 평시는 열 명쯤 있지만 전시에는 만 명도 들어가는 큰 요새지. 중요도도 낮지 않아. 거기가 뚫리면 왕국의 최대 비단 생산지가 위험하거든.”
“비단?”
“시오니아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지.”
에드워드는 생각에 잠겼다. 패트릭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왕께서 뭐라시던가?”
“이곳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댔지. 비단이라. 과연. 주요 수출품이란 말이지.”
뽕나무 한 그루, 누에나방 애벌레 한 마리조차도 시오니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재산.
에드워드는 패트릭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조언 고맙다. 친구는 역시 이래야지!”
“뭘. 나도 국왕 폐하의 결혼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나름 다행이지. 근데 뭐하게?”
에드워드는 바로 패트릭을 지나치며 말했다.
“편지부터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