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알박기 (1)
해가 질 녘 쯤. 막 함락된 요새 안은 혼잡했다.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를 적의 역습에 대비해, 부대가 재편성을 서두르기 때문이었다.
공간적 문제도 겹쳤다. 해당 요새가 시오니아 왕국이 최전선 보루로써 돈과 자원을 쏟아부어 올렸던 푸른바위거성에 비하면 아담한 편인 탓이 컸다.
대신 지형을 끼고 높이를 확보한 타입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운 요새였다. 방어병력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엘프들 역시 고전했을 것이다.
“이 요새의 원래 이름은 검은 벽이라고 했죠. 오크들은 제각각 다르게 불렀지만요. 주술사왕이 여길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아의 말이었다. 베로니카가 덧붙였다.
“원래는 이 지방에 존재했던 소왕국의 왕성이었죠.”
“네. 주술사왕이 남쪽에 돌출부를 만들면서 최전선이 되었고, 그다음에 무너졌죠. 그다음은 시오니아의 거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크 무리에 차례대로 박살 나, 푸른바위거성의 위치까지 밀려났고……”
“비극이죠. 뼈아픈 역사고.”
“그래서 그런가…… 여기, 유명했는지 전설은 많더군요.”
“전설요?”
“마지막 군주였던 이가 ‘그 어떤 보물도 넘겨줄 수 없다’며 무너지는 성벽 아래 몰려드는 오크 군세로 몸을 날렸대요. 보물고 열쇠랑 함께요. 뒤엉킨 시체들 속으로 사라져서 영영 못 돌아왔다는군요.”
“어머나. 잔존 가문의 후손들한테서는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오래전 이야기니까요. 덧붙은 전설일 수도 있고…… 어쩌면 군주가 가문의 이야기를 전할 후손을 제대로 못 남겼을지도 모르죠.”
너무 어린 애만 살아남았다던가, 방계만 살아남았다던가 하면 가능한 이야기다.
“가문의 비극이군.”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일행은 그 이야기 속 보물고 앞에 섰다. 방문은 두 개였는데 하나만 열린 상태였다. 열린 방은 이미 에드워드의 고용인들이 내부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한 남자가 에드워드 일행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했다.
“금, 가죽, 뿔과 뼈 등이 있습니다. 오크들이 비축할 만한 물건들이군요. 드물게 보석도 좀 있고…… 세트렛인들과의 거래용이었나 봅니다.”
에드워드가 질문했다.
“돈은 좀 되겠나?”
“당장에 군자금에 보탬은 되겠습니다. 싼 물건들이 아니니까요.”
“나쁘지 않군. 옆 방은 어때?”
고용인과 에드워드의 눈이 동시에 벽을 향했다. 여기저기가 곡괭이 따위로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어떤 것은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됐고, 또 어떤 것은 방금 난 것이었다.
“벽이 무식하게 튼튼해서 흠집도 안 납니다. 아마 이 벽도 마법 걸린 것이 아닐지요.”
“흠.”
에드워드는 옆방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금속 자물쇠. 그것의 겉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어가 쓰여 있었는데, 베로니카가 해독하길 ‘빛의 이름으로, 불사조의 눈썹으로 열리는 문’이라고 했다.
열쇠 구멍으로 추측되는 것은, 얕게 파인 원형 홈이었다.
“붙잡힌 오크들 말이, 옛날부터 열리지 않은 보물고라지? 열쇠는 결국 못 찾았고?”
“예. 군주의 전설이 사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백 년도 더 전에 함락된 요새니 그럴 만하겠지. 베로니카와 스텔라의 힘으로는 해제 못하나?”
“그럼 세트렛인들이 사제나 마법사 잡아 와서 풀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아?”
베로니카의 말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긴 그렇네.”
결국 에드워드는 장갑을 벗었다.
“자물쇠도 귀한 물건일 것 같아서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야, 설마 부수게?”
“불사조의 눈썹으로 열리는 문이라며. 그게 대체 뭔지 짐작이나 가? 그리고, 여기서 가장 확실한 빛이 뭐게?”
에드워드는 저주 받았던, 이제는 축복으로 바뀌고 통제 가능한 자신의 두 손을 들어보였다. 베로니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회개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뭔 말이야?”
“그 힘으로 성벽을 쥐어 오르고 자물쇠를 부수는 대도가 되었으면 끔찍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에드워드는 대꾸없이 코웃음만 한번 치곤 자물쇠 앞에 섰다.
그때 밴시가 중얼거렸다.
“꼭 그거 크기인데요.”
“뭐?”
“기사님 팔뚝의 야간투시 마법팔찌요. 딱 그 크기네요.”
에드워드는 당황해서 다시 자물쇠를 살펴보았다. 과연 그랬다. 약간 솟은 돌기의 위치까지, 팔찌의 모양새와 완벽히 일치하는.
에드워드는 자신의 팔뚝을 돌아봤다.
“이게 왜 저거랑 맞지?”
“그걸 왜 밴시에게 물어보세요?”
에드워드는 밴시를 붙잡아 거꾸로 들었고 리안나는 비명을 질렀다.
“알려줘도 벌하는 게 어딨어요?!”
“넌 어떻게 알아봤냐?”
“기사님이 저주 풀기 전에 매번 그 팔찌 채워주고 벗겨준 게 전데요!”
일리 있는 지적. 에드워드는 납득해 버렸다. 그는 리안나를 내려준 다음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게 왜 거기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에드워드는 팔찌를 벗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물쇠 홈에 맞춰 보았다.
철컥.
보물고 문은 힘없이 열렸다. 수백년 묵은 공기가 에드워드 일행을 덮쳤다. 횃불을 들고 그 안으로 들어선 카치운이 말했다.
“기연이군. 진짜 열리다니.”
“나 슬슬 빛이 좀 무섭다. 뭘 준비해놓은겨.”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카치운은 그 말을 무시하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횃불을 한번 가볍게 휘두르더니 말했다.
“다쉬사베스의 피라미드 때 기억나쇼? 거기 축소판 같은 느낌이군.”
잊을 리가 없었다. 사막 속 고대 악마의 보물고. 에드워드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크들이 공물을 바득바득 모아놨던 초라한 보물고와는 수준이 달랐다. 꽉꽉 채운 황금과 보석들, 그리고 여기저기에 놓인 마법도구들.
“거기만큼은 아니지만…… 횡재했구만.”
에드워드의 짧은 소감이었다. 그는 안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마법도구들 앞에 섰다. 에드워드는 베로니카와 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두 지식인 아가씨들이 활약할 장소 같은데.”
“감정사로 부려먹는 거라고 솔직히 말해라?”
“원래 어느 정도 친해지면, 감정 정도는 공짜인 법이지. 데커드 케인 씨가 그랬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호인이네, 그 양반.”
베로니카는 에드워드를 한번 흘겨봐주고는 스텔라와 같이 선반에 붙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들은 천천히 마법도구 목록을 읊어가기 시작했다.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배.”
에드워드는 꼬깃꼬깃 접힌 손바닥 크기의 나무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보고는 중얼거렸다.
“무게까지 줄이네, 이거. 드래곤볼의 캡슐이 생각나는데.”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무게도 크기도 상관없이 팍 줄여버리는 것. 마법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나저나 다른 건?”
“불을 붙이면 한 시간마다 종소리를 내는 양초.”
“엄청난 물건과 시시한 물건이 함께 있군. 무기는 없어?”
“거의 없네. 이 성의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함락 직전까지 재고를 전부 꺼내다 전투에 썼을 테니.”
“그런가.”
그때 스텔라가 입을 열어다.
“있네요. 싸움도구.”
그녀가 들어올린 건 정수리에 높은 장식이 달린 투구였는데, 금빛 테두리를 둘러 보강했고 그 위에 마법의 문구를 써놓은 물건이었다. 장식은 커다란 황금 불사조로, 두 갈래로 갈라진 꼬리깃이 양쪽 뺨으로 내려가 있었다.
딱 봐도 왕가의 물건.
보물고 안의 다른 물건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다른 점은, 피투성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시커멓게 변한 핏자국들.
그러나 마법의 투구는 녹슬지 않았고 지금이라도 싸울 수 있다는 듯 번쩍거렸다.
“다른 건 다 선반에 있는데, 이건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더군요. 마지막 전투까지 한창 사용하다, 이 보물고 안에 급하게 던져 넣은 것 같아요. 아마 싸우던 중에 패색이 짙어지자…….”
미아의 말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설이 사실인가 보군. 군주가 보물을 넘겨줄 수 없다며 몸을 던졌다는 것 말이야.”
“네. 결국 포기하고 투구를 던져넣고는 문을 닫았나 봐요.”
“비극이군. 그래서, 마지막까지 적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던 투구는 어떤 물건이야?”
“일단 문구로 미루어 볼 때 확실한 건…… 적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그 무기를 파괴하는 투구.”
상상 이상의 물건이었다. 에드워드는 흥미를 보였다.
“굉장히 좋은 물건 같은데? 왜 그걸 가지고도 졌지?”
베로니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로도 뒤엎을 수 없을 만큼 열세였단 뜻이겠지. 불쌍하게도.”
“아니면 웬만한 마법의 투구로도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 적들 중에 있었던가요. 이번에 기사님 앞을 가로막았던 오크 사령관처럼요.”
스텔라가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수긍했다. 단신으로 전세를 바꾼 기사들의 이야기가 널린 시대지만, 그게 이야기가 되는 건 그렇지 못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로니카는 스텔라에게서 그 투구를 넘겨받아, 에드워드에게 내밀었다.
“이제 네 거야. 군주의 한을 풀어주고 복수도 해준 셈이니. 그리고 이 땅도 이제 네가 통치할 테니, 후계자라고 할 수 있겠지.”
잠시 그 물건을 내려다보던 에드워드는 그걸 받아 들었다.
“그래도 좀 닦아야겠다.”
“당연한 소릴. 오크 피일지도 모르잖아.”
에드워드는 밴시가 든 자물쇠 위에 투구를 올렸다. 밴시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닦는 건 드워프 아저씨가 안 하고 저한테 떠넘기더라고요.”
“잘됐네. 바로 시작해.”
“노동착취!”
“닭고기 줄까?”
“또 남는 거 떠넘기려고! 돼지고기 주세요! 제 덕에 자물쇠도 열었으면서!”
“알았다. 알았어.”
그때 한 기사가 에드워드를 찾아 들어왔다. 옛 검의 3기사 중 하나인 발터였다.
“에드워드 경.”
“무슨 일이오?”
“경이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소.”
“응? 뭐요?”
“성 아래 세트렛 마을 촌장들이 몰려온 모양이오.”
“뭐야. 이제 와서 싸우자 이건가?”
“아니. 그 반대요. 싸우고 싶은 놈들은 이미 죽거나 떠났고, 남은 건 이 근처에 뿌리 박고 사는 자들이오. 항복하겠다는군.”
발터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간 강한 쪽에 빌붙으며 생존했던 모양인데, 빛에게 항복하는 건 오랜만인 모양이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더라고.”
에드워드는 베로니카를 돌아봤다.
“개종시켜야겠지? 올리비아를 포함한 사제와 수도기사들을 좀 써야겠네.”
“내가 직접 갈까?”
“아니, 넌 수도로 돌아가. 여기 상황도 알려줘야지.”
“그렇긴 하네.”
“발터 경, 왕실에 보고할 사람 겸해서 공주님께 호위 좀 더 붙여줄 수 있소?”
“시구르드가 직접 가면 되겠지. 무용은 우리 3인조 중 제일이니까. 몇 명 더 골라보겠소. 공주님 호위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사람들 있으니.”
“고맙소.”
발터가 나간 뒤, 베로니카는 에드워드한테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항복 받고 나면, 여기서 바로 재건사업 시작할 거야?”
“글쎄. 한때 왕성이었다지만 이제 여긴 방어 거점이고 남쪽 끝이라. 영 힘들 것 같아. 행정 거점이자 터전은 다른 곳으로 해야겠지. 봐둔 데가 있어.”
“그래? 그럼 여긴 어쩌고?”
“적당한 기사에게 맡겨야지.”
“누구?”
에드워드는 웃으며 말했다.
“의심 많고 절대 밖으로 안 나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