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봉작 (2)
개척도시는 새벽부터 시끄러웠다. 어딘가에서는 벽돌을 구웠고, 어딘가에서는 나무를 베었으며, 어딘가에서는 수로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면모도 하는 일만큼 가지각색이었다. 대장장이나 목수처럼 돈 주고서라도 불러올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돈을 내고 땅의 소유권 내지는 사용권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땅을 받기로 한 사람, 기존 도시의 장인들 아래에서 푼돈도 제대로 못 받다 도망쳐 자기 가게를 꿈꾸는 도제, 균등 상속이라도 했다간 다 같이 굶어 죽을 자유농의 차남 이하 사내들, 사면을 노리고 도망친 범죄자, 새 통치자에겐 자신이 쓸모 있지 않을까 해서 기웃거리는 방랑 학생 등등.
“군대 세탁부와 매춘부는 특이한 축에도 못 끼네. 저기 저 남자 봤어요?”
“누구요?”
“방금 지나간 붉은 머리요. 저 양반과 친하게 지내는 세탁부 말로는, 원래 직업이 뭐였냐면요…….”
“와, 정말이에요? 잠깐. 저 여자 뭐야? 거의 다 벗었잖아요? 무희라는 건가? 춥지도 않나? 왜 이런 데 있는 거죠?”
인간과 드워프 혼혈인 멧밭쥐와 거인족인 지클린은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탁자 위에서 저녁식사와 잡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덩치 하는 여성들 사이에 낀 건 밴시 리안나와 마법사 스텔라.
이상한 직업의 사람들 때문에 잠시 바뀌었던 화제는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 아무거나 집어넣고 끓인 흰 죽을 퍼먹던 밴시가 원래 화제의 중심이었다.
에드워드의 여자관계, 특히 헬레나.
물론 리안나는 일하는 집요정에 맞게 문학적 소양이 궤멸적이었지만 며칠 내내 새벽까지 훔쳐본 남녀상열지사를 간단하게나마 묘사할 능력은 있었다. 멧밭쥐와 지클린은 실시간으로 열화되어 가는 밴시의 기억에서 끄트머리나마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클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분위기 좋네. 부러워라. 며칠째지? 벌써 보름 넘지 않았나?”
“중간중간에 자리를 비우거나, 안 하고 쉬는 날도 있겠죠…….”
멧밭쥐의 추측에 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넵. 있었어요. 그래도 반반은 가던데.”
“인간 사내들은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 많은 성욕이 솟나 몰라. 전에는 찬물이 진절머리 나서 밤손님 좀 늘려 받겠다고 했더니, 대체 몇 명이나 찾아오던지.”
“좋기만 한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하는가도 중요하지. 제 남편놈은 요즘 연이어 야간 경비라, 한참 잘 때 뜬금없이 깨우고 시작한다니까요? 자다 깨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데.”
멧밭쥐가 투덜거렸다. 지클린은 동의했다.
“엘프들이 괜히 인간을 하얀 오크라고 부르겠어요?”
“빛의 오크라고 하지 않나요?”
“그게 그거지, 뭐…….”
스텔라는 비인간 여자들의 음담패설 섞인 잡담 속에서 깨작깨작 숟가락을 놀렸다.
‘내가 어쩌다 이 테이블에 낀 거지…… 아, 이 여자들이 제멋대로 앉은 거지. 넉살도 좋기는. 돈 없는 마법사 취급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 이런 공동식당 죽이나 먹고 있으니.’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자괴감과 헛된 희망들이 그 속을 돌아다녔다.
‘그 지팡이는 고대신앙 중 마법사와 사제의 구분이 모호하던 곳의 유물일 거야. 굳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사제용이 아니지. 마법사용으로 더 어울릴 텐데…… 공주님이 흥미를 안 보인다면 내가 가질 수도 있어. 하지만 예비 남편이자 연인이 주는 선물을 그렇게 홀랑 다른 사람에게 넘겨 버릴까? 그저 보물 취급해서 기쁘게 받아 챙길지도…… 게다가…… 나는…….’
멧밭쥐가 먼저 이상을 캐치했다. 그녀는 마법사한테 질문을 던졌다.
“엘프님은 회개한 데다 낭만적인 야만전사 영웅이 취향인 것 같은데, 마법사님은 어때요?”
“네, 네? 저요?”
“투리치 시에서 기사님을 스스로 찾아왔다면서요? 고용해달라고. 혹시 첫눈에 반했다, 뭐 그런 건가요?”
“첫눈까진 아니고 스스로 찾아가긴 했…… 는데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멧밭쥐와 지클린은 밴시를 가리켰고, 스텔라는 꼬맹이의 정수리를 손날로 내리쳤다.
“푸헥?! 왜 때려요!”
“넌 정말 비밀이란 게 없구나!”
“그거 비밀이었나요! 아니잖아요! 그리고 요정은 떠벌리는 것도 일이다 이 말이에요!”
“구라 치지 마! 말 많은 게 자랑이니?”
“와! 점 치고 약 파는 도박중독 마법사가 그런 말을!”
“내가 해부학은 안 배웠지만 안 좋은 소리들만 구체적인 이 반사회성 요정 뇌는 꼭 까봐야겠어!”
“까보라요! 고대 미라의 기계톱도 못 깠는데!”
“발터 경의 요정 베는 검을 빌려오면 되지롱!”
“역시 인텔리는 해롭다!”
둘이서 한창 티격태격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소란스러운 함성 소리와 말발 굽소리가 울렸다. 여자들의 시선이 급조주택들 사이의 대로로 향했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유목민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수는 못해도 수백 단위. 다양한 부족이 참여했는지 차림새는 무리마다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안장에 오크 해골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것.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는 그들 선두에는 카치운이 있었다. 못 보던 갑옷을 꺼내 비단옷 위에 걸친 모습이었다. 스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모은 병력을 다 끌고 왔을 리는 없으니까…… 천 명 가까이 수하로 들였을지도 모르겠네. 카치운 아저씨.”
리안나가 그 말에 반응했다.
“기사님네 병력이 2천에서 3천쯤 되던가요?”
“성지순례를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도 있으니까 재수 없으면 그것보다 더 적게 잡아야 할 수도 있어.”
“그럼 카치운 씨의 병력이 정말 크네요. 도움이 되겠어요.”
“가능하면 검은벽요새 함락 전에 저 병력을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앞으로도 활약할 구석이야 많겠죠. 꺽다리 로버트의 군대에 합류한다던가.”
스텔라는 그 무리들 가운데에서 익숙한 얼굴들도 찾았다. 카치운네 가족들이었다. 스텔라는 일어나서 그들 앞에 섰다. 카치운은 스텔라를 바로 알아보고는 말을 붙였다.
“오, 마법사.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식사 중이었어요. 가족들도 만났네요?”
“그래. 중간에서 만나서 같이 왔지. 공주님이 항카이부에서 사들인 군대와 같이.”
베로니카가 에드워드의 최전선 사령관 임명이 결정되자마자 항카이부에 돈과 카치운의 편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유목민들도 합류하면서 군세가 적잖이 커진 상태였다. 스텔라는 아까 리안나와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이 군세가 미리 마련되지 못한 게 불행이네요.”
“어쩔 수 없지. 항카이부 군대는 공주님이 돈을 대고 내가 나서서 살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라고. 뭐, 앞으로 활약하면 되겠지.”
“그 갑옷은 뭐예요? 말에도 입혀놨네.”
“조부의 무구다.”
타이지. 한때 유목민들의 왕에 가장 가까이 섰던. 스텔라는 놀란 눈을 했다.
“그게 아직 있었어요?”
“버일러에게 담보로 맡겨놨던 거야. 이제야 되찾았지.”
“흐흥. 며느리는 만나봤어요?”
“만났어. 무클보다 나이가 있지만 건강하고 미녀더군. 손끝 재주도 꽤 있고. 조상 중에 엘프가 있다는 모양이더라. 혼수도 왕창 가져오고. 버일러께서 신경 좀 써주셨더군. 한시름 놨다.”
“딸내미들 혼수 남으셨어요.”
“아픈 데만 찌르다니, 이 간악한 혓바닥 같으니라고. 그래, 아직 시간은 있지만 열심히 해야지…….”
스텔라는 카치운의 뒤로 눈을 돌렸다. 약간 떨어져서 말을 타고 오는 무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것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충실하게 갑주를 챙겨 입은 모양새였다. 못 보던 말도 타고 있었는데 금빛털이 인상적이고 키가 큰 준마였다. 그 말이 신부의 혼수인 모양이었다.
무클은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 스텔라는 손을 살짝 들어본 다음 도로 카치운에게 눈을 돌렸다.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들었어요?”
“대충. 용광로의 쇳물은 언제 나오는 거야?”
“가르달 씨를 포함한 드워프들이 달라붙어 있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투자금 회수를 얼른 시작 해야 할 텐데. 공주님의 금고가 말라붙는 건 아닌가 몰라요.”
“그 공주님 장난 아니게 부자거든? 그건 걱정 마. 뭐, 의심 가면 직접 물어보던가.”
“네?”
“왕실 사절이 오고 있다더라. 봉작하게 왕성으로 올라와라 그거겠지. 너도 따라가야 할 거 아냐. 비서인데.”
스텔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초조해진 표정을 지었다. 뭔가 고민하던 그녀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방향은 헬레나의 천막 쪽.
카치운네 딸들과 반갑게 인사하던 리안나는 그녀들에게 비밀을 속삭였다.
“인텔리는 항상 약은데 손해 본다 이거야.”
* * *
왕실 사절의 도착은 카치운보다 이틀 정도 더 걸렸다. 에드워드는 그새 출발 준비를 끝냈고, 천막 안에서 헬레나한테 간단히 옷매무새를 점검받으면서 말했다.
“하녀들이 이미 봐줬는데.”
“거듭 점검해서 나쁠 건 없죠. 아, 이틀 전에 도착한 카치운 씨의 아들 말이에요. 결혼 선물 줬어요?”
“아직. 근데 결혼 소식 들었을 때 이미 카치운에게 보너스 줬잖아? 또 줘야 돼?”
“당사자가 받는 것과 다르잖아요. 작은 거라도 하나 더 선물해요. 이만큼 신경 써주고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기왕이면 신랑 신부에게 짝을 맞춰서.”
“누가 엘프는 눈치가 없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네.”
“내조는 아내의 의무죠.”
어째 ‘공주님 없는 동안 내가 이렇게 잘했다’라는 과시욕이 포함된 말처럼 들렸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보다, 이 도시 이름은 정했어요? 언제까지나 인간 도시, 엘프 도시 이렇게 부를 수도 없잖아요. 도시도 늘어날 테고.”
“시오니아 왕실이 옛 지명에서 딸 거라고 했어. 구체적으로 뭘 고를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역명은 옛날 그대로 하르몬으로 한다던데.”
“인간의 봉작은 번거로운 게 많군요.”
“시오니아 국왕이 순회법정으로 오가는 스타일이면 오늘 여기서 받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오늘 새로 받은 지명이 발아래 폐허의 지명과 다르다면, 훗날의 고고학자들은 골머리 좀 썩을 것 같다는 식의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자 헬레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명으로도 못된 생각이 가능한가 보네요?”
“못하리란 법도 없지…… 엘프도시들 이름은 정했어? 그쪽이야말로 아예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지었어요. 케라시움으로.”
“엘프식이야, 인간식이야?”
“절충쯤 될 것 같네요.”
“뜻 있어?”
“벚나무들.”
헬레나는 벚나무 씨족이고 지금 이 땅에 온 엘프들은 다 그쪽 관계자들.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헬레네스나 헬레나스 같은 이름으로 하면 좋겠는데.”
헬레나의 도시라는 뜻. 헬레나의 손끝이 당황으로 헝클어졌다.
“아주 노골적인 이름이군요.”
“그렇잖아? 저 엘프들은 네가 불러온 건데. 그리고 네가 내 짝이자 대표 중 하나가 될 거고.”
“기쁜 말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무리에요. 씨족의 힘으로 건설한 도시지, 제가 혼자 건설한 도시는 아니니까.”
“아깝군. 동네방네 자랑할 수 있는 건데. 이 여자와 그 도시는 다 내 거라고.”
헬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도시는 당신 것 아니에요.”
“도시는, 말이지. 경건한 마음으로 포기하지.”
에드워드는 헬레나의 턱을 들어 올린 다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헬레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엔 그녀 쪽에서 먼저 혀를 뻗어왔다. 인간의 살을 한참 탐하던 헬레나는 겨우 입을 떼고 말했다.
“짐승. 얼른 진정시켜요. 그럴 시간 없으니.”
“자기가 먼저 약 올려 놓구선.”
헬레나는 에드워드의 옆구리를 가볍게 때렸다. 기사가 낄낄거리는 순간, 한 병사가 밖에서 외쳤다.
“에드워드 경,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에드워드는 천막을 나섰다. 왕실 사자가 도착한다는 소식에 하루 이틀 남짓한 짧은 연회를 거쳤던 동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군중 중의 어떤 이는 피곤한 기색이었고, 어떤 이는 오히려 활기가 찼다. 다행히 에드워드를 따라갈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는 편이었다.
“엘프님도 이번엔 안 따라오고, 가르달 씨는 당연히 남을 거고, 카치운 씨도 그렇고…… 순례 멤버 중 남는 게 나와 밴시뿐이야!”
“허리띠도 있는데요.”
“걘 말 안 해도 무방하잖아. 어쨌든 이번에 기회가 있을라나…….”
“무슨 기회요?”
“아무것도 아냐.”
에드워드는 마법사와 밴시의 대화를 못 들은 척 하고 자신의 말에 올랐다. 헬레나는 살짝 손을 들어 그를 배웅했다.
“잘 다녀와요.”
그녀의 눈길이 슬쩍 스텔라를 향했다.
“스텔라 양?”
“네?”
“힘내요.”
엘프가 미묘한 미소랑 함께 말하자 스텔라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지팡이를 빼돌리고 말겠다는 의지.
에드워드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이었다. 스텔라가 헬라나를 찾아가 ‘공주님한테 선물하려는 지팡이의 문제점’을 열거하던 건 이미 그날밤에 에드워드의 귀에 다 들어간 터였다.
헬레나와 에드워드가 눈이 마주쳤다. 에드워드는 전방을 향해 도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봉작만큼 무섭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