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충전이 필요합니다
헬레나는 새 무구를 완전히 다 갖춰 입고 적색탑 앞 연병장에 섰다. 번쩍거리는 비늘갑옷과 글레이브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엘프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도 충분했다.
딱 한 종족, 드워프만 빼고.
“엘프식 미술의 미래가 심각하게 걱정되는군.”
가르달의 도발적인 언행이었다. 그의 갑옷, 방패, 투구는 기존에 쓰던 것을 소소하게 개량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드워프에게는 충분한 수준의 방어력이었다.
진짜 중요한 개선은 공격력이었다, 상처 난 철퇴 대가리를 재가공해 도끼날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철퇴의 형상은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훌륭한 드워프식 도끼만 남았다. 새 도끼날에서는 시퍼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거 괜찮은 거예요?”
헬레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가르달은 도끼자루를 쥔 손으로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누굴 걱정하는 거냐?”
“당신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드워프가 통닭구이 되든 말든. 지옥에서 새어 나오는 번개가 애꿎은 사람들을 태워버리는 건 아닌가 그게 걱정이지.”
“하하! 애석하지만 지옥의 번개는 못 나와. 문이 닫혔으니까. 이건 재료와 주문으로 이 주변에서 모은 번갯불이야. 드워프가 쥐면 힘이 솟아 나오지.”
“더 끔찍한 무기가 됐군요.”
“그게 무슨 망발이냐!”
“드워프의 손끝을 어떻게 믿나요?”
“드워프의 기술을 어찌 못 믿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의 문제죠.”
“아, 백작부인 됐다고 막말을 퍼붓네?”
“평민은 알아서 숙이시죠.”
드워프는 입꼬리를 최대한 늘어뜨리고 코를 벌름거리는 등 괴상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내 상관은 백작이고, 투자자는 첫째 부인인 공주님이지. 둘째 부인은 아무것도 아닌데?”
헬레나는 가르달을 쪼갤 기세로 덤벼들었다.
“엘프들은 다들 저렇게 싸우나 봐요? 저러니 성벽도 그냥 넘는 건가.”
헬레나가 더 가볍고 튼튼한 갑옷을 입고서 보여주는 공중곡예에 경탄한 멧밭쥐의 질문이었다. 그 남편인 족제비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때보다 더 미친 것 같은데…… 저러다 드워프 양반이 죽거나 크게 다치겠는걸.”
그 소릴 들은 주변 사람들이 움찔움찔거렸다. 사실, 다들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못했다. 글레이브를 강아지풀처럼 휘두르며 공중에서 3회전을 하는 엘프 여전사를 뜯어말릴 방법 따위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아. 내버려 둬. 둘 다 적당히 하는 거야.”
자기 주변 기사들까지 움찔거리기 시작하자 베로니카가 핀잔주듯 말했다. 왕실 근위기사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 비슷한 걸 내놓았다. 저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베로니카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는 믿을 만하니까.
베로니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말 많은 여마법사가 이 역할을 대신할 텐데 말이지. 산만한 집요정이랑 콤비를 이뤄서.”
“창밖에 매달렸던 걔 말씀이십니까?”
한 근위기사가 질문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산만한 집요정은 지금 에드워드와 스텔라를 따라간 참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법사 뒷바라지용 만능 하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시건방진 인텔리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던 리안나는 결국 에드워드의 손에 거꾸로 매달렸으니 ‘끌려갔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백작은 그 요사한 분홍머리 마법사에게 꽤나 친절하군요. 공주님과…… 저 엘프 여전사가 있는데 말입니다.”
“남자들이 발정난 거야 역사에 하루 이틀 적힌 일이 아니니 신경 안 써.”
“크흠! 관대하시군요.”
“어차피 귀족한테 직속 마법사는 필요하니까. 그런 입장을 빼고 봐도, 나나 에드한테 적당히 필요한 여자고.”
“공주님한테도요? 어떤 면에서 말씀이십니까?”
“까불거리다가도 알아서 기는 여자.”
근위기사들의 얼굴이 안 좋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 정보를 갱신했다. 공주님 은근히 포악함.
베로니카는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 사이에서 짧게 말했다.
“뭐, 별별 고생을 하면서 서로 정들기도 했고. 단순히 주고받는 관계라고만은 못하지. 이제는.”
* * *
카말라 백작의 건축사이자 적색탑의 설계자, 이후 카말라성 증축공사의 책임자는 드워프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죄다 드워프에게 맡겼다간 사소한 것에서 뜬금없는 드워프 기준이 나올까 봐 에드워드가 걱정한 탓이었다.
다행히 그 건축사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나 그만큼 경험도 많았고, 실력이 좋으며, 열성도 있었다.
설계안 하나 때문에 카말라를 떠나 유로푸스까지 달려올 정도로.
“백작님, 공주님과 엘프님의 거처 말입니다. 아, 지금 쓰는 침실 말고요. 나중에 완성될 별도의 탑 말입니다. 일차 설계안에서 좀 더 개선할 점을…….”
에드워드는 방문 앞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빠르게 할수록 좋은 거잖습니까?”
“미안한데, 그건 알아서 해주고 나중에 승인만 받아. 당신 실력은 확인했으니까. 구체적으로 상담할 시간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사님의 학위 심사는 그냥 동행해서 대기만 하신다고…….”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큰일이 생겼거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공주님이나 엘프님의 거처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에드워드의 여마법사는 어디까지나 고용인. 남녀관계로는 끽해야 정부. 정식 부인에 비하면 한참 격이 밀리는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범주로도 못 묶이는 처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지. 그만 가봐.”
에드워드는 문을 닫았다. 그의 등 뒤에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님, 저 약간 감동 받았어요.”
에드워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방은 에드워드의 방이 아니었다. 스텔라의 방이었다. 그러나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주문 재연이 안 되는 현상에 대처하느라 서로 모인 것일 뿐.
에드워드는 급하게 하인들을 보내 시약상점들을 털었고, 그렇게 모은 시약들은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 중이었다.
“막판까지 고생시키네요. 새 주문이란 거.”
“괜찮아. 건설경영 시뮬레이션들은 꼭 그런 미션 내리거든. 시저라든가, 제우스라든가, 파라오라든가. 시리즈는 다르지만 트로피코라든가. 당장 도움은 안 되는 무형이거나 영적인 측면의 지표를 제시하면서 제물을 바치라느니 신전을 세우라느니 학력을 올리라느니 요구하는 게 많지.”
“기사님, 죄송한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스텔라는 미안한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았다. 에드워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겨우 이게 막판은 아니지. 시작이지…….”
“시작요?”
“직속 마법사 스텔라로는 말이야.”
에드워드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마법박사 따자마자 볼일 끝났다고 떠날 거 아니잖아? 연구비는 계속 필요할 테고.”
“아…… 그, 그건 그렇죠.”
스텔라는 얼굴을 붉히곤 에드워드의 시선을 피했다. 에드워드는 사방에 널린 종이쪽지들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원인을 못 찾았어?”
“가능한 한 그때와 같은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근처에 사원이 있어야 한다던가, 뭐 그런 거?”
“음. 비슷해요. 사실 그런 조건까지 똑같아야 한다면 일종의 상징물을 대신 배치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이미 해봤고…….”
“비는 안 왔지.”
“고대 사제놈이 부른 폭풍은 있었죠. 근데 이것도 아닌 것 같고…….”
“그 마법의 정확한 원리가 뭔데?”
“설명하기 까다로운데요, 조악하게 말하자면, 신에게 선택받은 기사를 지팡이처럼 쓴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너와 내가 읊은 이중창이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것까진 다 완벽한데…… 아마 제 상태 문제일지도…….”
“상태?”
“궁지에 몰린 상태 말이에요.”
에드워드는 그게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다쉬사베스의 피라미드에서도 스텔라는 ‘걸작’에 가까운 불꽃 마법을 완성했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자 재연하는 데는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마법사가 짜내는 성공.
“흠. 그럼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는 건가.”
“엑. 설마 열쇠검으로 겨눌 생각은 아니시겠죠?”
“소용없으려나?”
“안 베실 거 뻔히 아는데요, 뭐…….”
“후원 철회…… 도 안 할 게 뻔하긴 하지.”
“대단히 감사하네요. 뭐, 최소한 정부 연금은 받을 테니.”
“사실, 고작 정부 연금만 준비하진 않았다. 네가 박사 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 가만 있어 봐. 이 방법으로 압박해 보자.”
에드워드는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스텔라는 그걸 받아 제목을 읽어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결혼 계약서? 이게 뭐죠?”
“정부라고 하지만 어디 짱박아둘 것도 아니고, 내 곁에 있으려면 대외적으로는 누군가의 아내여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마련했다. 가짜 증명서야.”
“아하. 위장 신분이다 이거군요. 그럼 제 서류상의 서방님은 누구죠?”
“가고일을 물리친 방랑기사 에드워드. 나랑 이름이 같고, 내 수하의 월급기사지.”
그 말에 스텔라는 서류를 세세히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게 뭐야! 전부 기사님 이야기잖아요?”
“그래. 공식적으로는 카말라 백작이 이룬 게 아닌 업적들, 지나가던 무명기사가 이룬 업적들이지. 내가 시오니아 들어와서 추적자들 때문에 이름 못 대거나 가명 대고 해치운 일들 있잖아.”
“이런 일을 각 장소에서 완전히 똑같이 해치울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요. 와, 기사님. 이중 신분이시네요?”
“말했잖아. 네게 맞는 지배자가 되어주겠다고. 널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우와, 우와.”
“거기, 결혼 조건도 붙어 있다. 연금이라든가, 저택이라든가. 천천히 읽어 봐라. 너만 서명하면 된다. 아, 그 기사의 성씨도 공란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짓던가.”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자 쪽이 마법박사로 기재되어 있는 것. 스텔라는 양심이 찔리는 기색과 불안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과도한 기대를 담아주시니 황송해 죽겠네요…… 이러다 결국 재연에 실패하면 어쩌죠? 이 이야기들 다 물 건너가는 거예요?”
“실패는 옵션이 아니다. 성공해야지.”
“흑.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궁지에 몰아넣으시네.”
“그래서, 될 것 같냐?”
“잠깐만요. 그때랑 기분이 비슷하긴 한…… 아.”
“응?”
“기분.”
“엥?”
“제가 감정선을 유지하고, 저와 기사님 둘이서 같은 목표를 봐야 하는 게 조건이 아닐까요? 지팡이야 생물이 아니지만, 이 경우는…….”
“난 마법 모르니까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몰라. 마법에 감정도 필요해?”
“생각보다 많은 주문이 그렇죠. 수사학이 괜히 필요하겠어요? 형식과 내용은 술사 자신한테도…….”
“알았어, 알았어. 그럼 실험해 보든가.”
“실험요?”
“그때랑 같은 기분을 내본다며.”
“어, 음. 어떻게요?”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아냐? 무슨 기분이었는데? 아무거나 입 밖으로 꺼내 보든지.”
스텔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그의 허벅지 위에 팔을 올렸다. 전기가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듯, 체온이 에드워드의 살갗을 스쳤다. 여마법사는 연인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의 검, 나의 불, 나의 탑, 그리고 나의 지배자…….”
“그때 진짜 그런 생각했어?”
“기사님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때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해보는 중이에요. 감정이란 게 원래 한번 지나가면 덤덤해지기 쉽잖아요.”
“그런가. 과격한 게 듣기는 더 좋군.”
에드워드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스텔라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얼른 집중이나 하시죠. 제 감정 식기 전에.”
“음, 어디에?”
“어디든 상관없어요. 저도 알고 기사님도 알 만큼 쉬운 게 좋겠지만…… 그게 뭘. 까. 요?”
스텔라의 숨결이 에드워드의 사타구니에 닿았다. 그 순간 남자는 의자 팔걸이를 강하게 붙잡았고 거기서 스파크가 튀었다.
펑!
“아, 깜짝이야!”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 팔걸이에서 손을 떼는 순간, 스텔라는 환호했다.
“됐다! 성공했어요! 재연 성공했다고요! 시전자의 감정선이 문제였어요! 갈수록 더 강하게 자극해야 하는 거였다고요! 이래서 7교양 중 수사학이 마법사 필수과목이지!”
스텔라는 신나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손끝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을리는 줄 알았네. 그럼 이제 재연에는 문제없지?”
“네! 어, 그러니까, 제가 기사님 생각을, 어…….”
순간 어색한 침묵이 방을 채웠다.
갈수록 더 강하게.
스텔라는 양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싸맸다.
“그러니까, 시전 전에 기사님이랑 가능한 한 같이 좀…… 있어야겠는데요…….”
“흠.”
에드워드는 슬쩍 스텔라 옆에 붙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버리는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심사까지 얼마나 남았지?”
“점심 이후니까, 다섯 시간 정도?”
“심사는 몇 시간 걸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길어도 저녁 먹기 전에는 끝나겠죠.”
에드워드는 고개를 낮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때까지 그냥 이렇게 있으면 돼?”
“아뇨…… 재연은 심사 마지막에 하거든요. 그때 기사님이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가능한 한……. 저기, 기사님? 손이…….”
스텔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옷 위로 에드워드의 손이 오가기 시작했다. 베로니카에 비하면 작고, 헬레나에 비하면 가느다란 몸이었다. 빼빼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그러나 품에 폭 안겨 떨리는 것만으로도 사내를 흥분시켰다.
“심사 끝나면, 이럴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다 있네. 뭐, 심사 전도 나쁘진 않지. 네 충성심을 증명하려면 말이야. 맨날 ‘학위 따고 나면, 따고 나면’ 하며 도망 다닌 아가씨.”
“기사님…….”
여마법사를 희롱하던 에드워드는 했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박사 되면 날 떠날 건가?”
“아뇨…….”
“내가 널 버릴 것 같나?”
“아뇨…….”
“그럼 내가 네 감정을 어떻게 채워 줄까?”
“그건…….”
“스스로 말해.”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스텔라는 천천히 로브자락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등과 엉덩이를 기사에게 밀착시키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항복선언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성패 이전에 이미 목줄을 잡힌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기사님만 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절 굴복시켜 주세요.”
잠시 뒤, 복도에서 노닥거리던 리안나는 번개 마법사의 비명소리를 듣고 놀라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