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94)
294화 전초전 (3)
캠벨 가문의 피를 이었으며 시르티카 백작의 여동생인 베로니카는 시오니아 공주 베로니카와 동명이인으로, 둘은 친척이자 오랜 친구다. 그리고 비텔리아 교황청에 같이 유학을 가, 고향의 동맹이 되어 줄 세력을 찾는 연결줄 역할을 했다.
얼마 전까지는.
“맙소사, 공주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베로니카와 비슷한 체구에, 색깔도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사제의 말이었다.
공주의 천막 안에서 비슷하게 생긴 두 여자가 마주 섰다. 방문객이 베로니카와 다른 점이라면, 눈매가 좀 더 서글서글하고 머리카락이 곱슬거린다는 것 정도. 사제복은 짙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 조합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로니.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공주 베로니카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로니라는 애칭으로 불린 백작가의 베로니카는, 공주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뇨! 큰 전쟁이 나게 생겼다는데 와 봐야죠! 어차피 교육과정도 끝났고.”
“계속 동맹과 용병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냐?”
“너무 걱정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마지막으로 남은 용병들 끌고 왔어요. 그 이후의 일은 남은 사람들이나 후배들이 해야겠죠. 물론 제가 돌아가서 계속할 수도 있지만, 공주님 곁에 있는 것도 중요하겠죠!”
“걱정되어서?”
“엄청나게 걱정했죠! 타고 가신 배가 난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목매서 죽고 싶었다니까요! 국왕 폐하께서는 계속 편지를 보내서 자초지종을 물으시는데 더 버틸 재간이 없더라고요.”
결국 로니와 친구들, 그리고 비텔리아 교황청 사람들은 경건왕 루이에게 베로니카의 경로를 이실직고했다. 그래서 시오니까지 가는 마지막 길에 파브리스 같은 추격자가 붙기도 했고.
베로니카는 그 사실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로니와 그 친구들 탓으로 몰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미안.”
딱 한마디로 사과할 정도로 몰염치했다. 장대한 삽질의 역사를 ‘미안’ 한마디로 퉁치려는 공주의 모습에 로니는 폭발했다.
“공주님! 이젠 무모한 짓 안 하시겠다고 저랑 약속하셔야 해요? 최소한 절 대역으로 내세우는 것만큼은 이제 피해 주세요! 폐하께서 제 목을 날려 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고요! 국왕 폐하도 못 이기는 공주님을 제가 어떻게 이기냐고 항변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네가 여기까지 온 게, 사제로서 지원하기 위함일 뿐은 아닌 것 같은데?”
“필요하면, 다시 공주님의 대역도 맡아야겠죠. 이번엔 공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국왕폐하의 안배겠지만요.”
“아깐 피해 달라며?”
“공주님이 무단으로 저지르는 짓과 국왕폐하의 명령으로 하는 게 같나요?”
베로니카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 신변 안전을 위한 대역은 백작가의 레이디가 맡을 게 아니야. 차라리 노예나 범죄자 중에서 찾는 게 맞겠지.”
“그야 그렇지만요. 그런데 미리 준비된 사람이 없잖아요?”
대역을 준비하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다. 대역이 그저 말없이 서 있기만 해도 될 때만 있는 게 아니다. 시선을 끌려면 직접 나서서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많다.
국왕이나 최우선 왕위계승자쯤 되면, 예법에 밝고 행동거지가 반듯한 게 보통이다. 단어선택도 일반 귀족들은 쓸 일 없는 단어들까지 고르게 된다. 대역도 그런 사전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 한다.
반은 전설같이 나도는 이야기지만, 대역이 진짜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진짜 행세를 할 역량까지 갖추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하긴. 이제 와서 어떤 대역을 준비해도 너만 한 대역은 없겠지만.”
“별로 듣고 싶진 않은 칭찬이지만, 어쨌든 칭찬이니까 달게 받들지요.”
“어디서 대역을 할 건지는 들었어?”
“공주님은 좀 더 후방으로 이동하시고, 제가 에드워드 경과 동행할 거라던데요.”
“반만 들었네.”
“네?”
“뭐, 괜찮아. 나머지 반은 내가 설명해 주지.”
베로니카는 화로에 올려뒀던 쇠꼬챙이를 꺼내들었다. 그걸 본 로니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거 고문용 인두 아니에요?”
“왜 아니겠니?”
“그런 흉흉한 걸 왜 공주님 천막에 두신 거죠?”
“다 쓸 데가 있으니까.”
베로니카는 로니의 어깨를 붙잡은 다음, 그녀의 곱슬머리로 손길을 옮겼다. 곱슬거림은 심하지 않았다. 야지를 여행하는 도중이라 그런지 관리가 잘 안 되어서 조금 푸석하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공주도 머릿결 관리는 어디 숙소에 머무는 것만큼 하진 못하고 있으니까.
베로니카는 로니를 향해 미소지었다.
“일단 움직이지 마.”
* * *
경건왕의 본대에서 약간 떨어진, 에드워드 부대의 숙영지. 지휘부 천막은 늦은 밤에도 바빴다.
“생각 같아선 투구까지 똑같이 만들고 싶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서 황동 장식만 만들었소. 뭐, 먼 데서 보면 거기서 거기겠지.”
가르달의 말이었다. 그에게서 투구를 넘겨받은 켈러핸은 감탄부터 뱉었다.
“놀라운 솜씨군. 역시 드워프답습니다. 이걸 제 투구에 다는 겁니까?”
“그렇소. 뭐, 투구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놈들이 그런 것까지 알아보겠어?”
“일반 잡병이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주술사왕은 천리안을 가졌다는 소문이 있으니, 알아볼지도 모릅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개조했거나 옮겨 붙인 걸로 생각할 거요. 설령 진짜 천리안이 있다면, 어차피 속지도 않을 거고.”
“그렇겠지요.”
“그리고 조르쥬 경도 능히 잡았겠지. 그러니 놈은 천리안이 없거나, 있어도 제한적으로 쓸 거란 결론이 나오는 거요.”
“사실 그간 몇 가지 사건으로 다른 지휘관들도 그런 추측을 내놓긴 했습니다만…… 조르쥬 경이라. 전 그 기사와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드워프분께서는 그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 확신하시는군요.”
“실력은 있거든. 이단자들의 성채에서 열어 재낀 성문을 지키고, 눈길에서는 수십 명의 도적들 앞에서 물러서질 않았소. 거인 여자에게도 쫄지 않았다고.”
가르달의 인물평을 듣던 에드워드는 마지막 말에 한마디 얹었다.
“마지막에 그 지클린 양 이야기는 뺍시다. 차라리 오거 주술사한테 돌격한 이야기를 넣으쇼.”
“에이, 그건 엘프가 마무리를 지어서…….”
“활약상을 평하는 기준이 깐깐하시군.”
“배알 뒤틀리게시리, 엘프의 공적을 어찌 드워프가 논하겠소?”
“그 기준이었어?!”
만담을 하는 사이, 헬레나가 에드워드의 천막 앞에 섰다.
“또 드워프가 몹쓸 주둥이를 놀리고 있군요. 들어가도 되나요?”
“들어와.”
에드워드가 허락하자마자, 헬레나가 붉은 사제복의 여성과 함께 들어왔다. 약간 곱슬머리인 흑발 여자. 커다란 안경도 꼈다. 꼿꼿하진 못하고 구부정한 자세였는데, 헬레나는 딱딱한 투로 말했다.
“공주님의 대역을 맡게 된 베로니카 양입니다. 시르티카 백작의 여동생이죠. 진짜 여동생.”
“아, 우리한테 파브리스와 올리비아를 보냈던 그 양반의?”
가르달의 말에 헬레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곱슬머리 베로니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남자들의 시선을 피해 헬레나의 등 뒤로 반쯤 숨었다. 에드워드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이름은 숱하게 들었지만,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모기 날개 소리 같은 답이 헬레나의 등 뒤에서 새어 나왔다. 에드워드는 친구와 드워프를 돌아봤다.
“낯가림이 심하시군.”
“여사제 소굴에서 막 나왔다면 남자 면역이 없을 만도 하지.”
“소굴이라니…… 단어 좀 골라 말씀하시죠, 드워프분.”
켈러핸이 경미한 주의를 줬지만 가르달은 콧김만 내뿜었다. 그는 지적사항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유감이지만 실력은 기대하지 못한다고 들었소. 하루에 쓸 수 있는 주문이 하나뿐이랬나?”
“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커진 답변. 하지만 여전히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켈러핸은 숙녀의 명예를 위해 바로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죠. 공주님 수준의 사제가 극히 드문 겁니다. 상당수의, 사실상 대부분의 사제는 하루 하나가 전부입니다.”
에드워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이쪽하곤 좀 호흡을 맞춰 봐야 할 것 같은데. 켈러핸,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그러지. 출발 전에 보자고. 다른 분들도, 편한 시간 되시길.”
켈러핸이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가 천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에드워드는 바로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곤 다시 천막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명 좀 하지, 베로니카?”
“뭐야, 들켰네?”
공주 베로니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펴고 커다란 안경도 벗어 버렸다. 가르달은 답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에드워드는 황급히 가르달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가르달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드워드는 그의 입을 막은 손을 치웠다. 헬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안 들키고 온 것도 용하죠.”
“젠장. 백작가 아가씨는?”
“로니라고 불러도 돼요. 서로 구분하려면 그렇게 부르신다더군요. 지금은 공주님 천막에요.”
“곱슬머리는 어떻게 만든 거야?”
“인두로. 반대로 로니 양은 곱슬머리를 폈고요.”
펌. 머리카락에 열기나 약품을 이용하여 곱슬곱슬하게 볶거나, 웨이브로 만들거나, 곧게 펴서 그런 모양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만드는 과정이나 또는 그렇게 한 머리. 에드워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기 그런 기술도 있었나……!”
“재미난 미용술이지. 원래는 로니의 머리를 펴서 여기로 보낸다는 거였겠지만.”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녀는 눈까지 내려 거슬리는 앞머리를 치우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들 조용히 있어 줘. 오빠를 속여야 하니까.”
“공주님. 피라미드 때는 내가 몰라서 그랬다는 핑계가 통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간 나 진짜 경건왕께 멱살 잡히는 걸로 역사책에 이름이 남을 거야. 제발 가만히 좀 있지?”
“잠입작전이라며. 주문 하나밖에 못 쓰는 일반 사제를 데려갈 거야?”
베로니카가 눈을 흘겼다. 화났다. 에드워드는 그녀를 달랠까 반박할까 하다 소극적인 항의로 그쳤다.
“공주는 적진 한복판에 데려가도 되고?”
“왕이 친정하는 판에 공주가 직접 못 나올 건 또 뭐니?”
할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의 계획은 심플했다.
경건왕과 그 군대가, 그리고 각지에서 불러모은 영웅적인 기사들이 활약하는 것으로 주술사왕의 시선을 끈다.
켈러핸이 에드워드로 변장하고, ‘진짜 공주’가 그 곁을 맴돌다 후방으로 떠난다.
에드워드는 결사대를 편성해, 그 사이에 주술사왕의 군대 후방으로 침투한다. 잠입 과정에서, 만에 하나 활용처가 생길지도 모르니 ‘가짜 공주’를 준비해 둔다. 현장에서 여전히 엄중할 적의 본진을 찌르기 위한 2중 3중의 속임수를 짜낼 수 있다.
결사대에 편성될 사제라면, 사용 가능한 주문의 숫자는 많을수록 좋다. 강건한 육체, 건강한 정신은 필수.
에드워드는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조건에 딱 맞는 사제긴 한데 말이다…… 폐하께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걱정 마. 오빠한테는 ‘후방 철수 전까지 예비 남편과 좀 뜨겁게 있고 싶다’고 해 놨으니까, 섣불리 접근하지 않을 거야. 켈러핸 경은 나와 로니를 분간할 수 없을 테고, 성정 상 그녀한텐 손도 안 대겠지.”
“안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이라도 그냥 포기하고 후방으로 빠져 주시면 안 될까, 공주님?”
베로니카는 웃어 버렸다.
“헬레나 양은 데려가면서? 게다가 로니를 네 곁에? 마음에 안 들어. 아주.”
“로니 양은 왜?”
“네 심장과 사타구니에 물어봐.”
“나란 놈의 신뢰도가 낮군…….”
“근데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아봤니?”
에드워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끼고 살 여자를 못 알아보겠냐?”
“어머나, 기특하기도 해라.”
순간 헬레나의 시선이 묘해지는 걸 본 에드워드는 황급히 덧붙였다.
“끼고 살 여자의 거짓말도 당연히 알아봐야겠지.”
“그런 걸로 해 두지요…….”
헬레나와 베로니카의 시선이 슬쩍 미끄러지더니 중간에서 부딪혔다. 헬레나가 먼저 말했다.
“조건은 기억하시죠?”
“그럼요.”
둘의 대화에 의아해진 에드워드가 물었다.
“무슨 조건?”
“왕의 군대에서 여기까지 빼돌려 주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걸었죠. 그중 하나가 이번 출정 전날 밤의 분할요.”
에드워드는 잠깐 벙쪘다.
“뭐?”
“시간이 없다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짬은 내야죠? 제가 먼저 하기로 했어요.”
“아니, 잠깐. 나 전초전 계속 치르고 왕께 보고도 하고 결사대 뽑고 재편성 서두른다고 며칠 동안 쉬지도 못했는데…….”
“준비하시죠.”
헬레나는 전혀 듣지 않았고, 베로니카는 말없이 품에서 눈금을 새긴 양초시계를 꺼냈다. 눈금은 딱 절반.
“반반이에요.”
“알아요.”
“어이쿠야, 나도 나가 봐야겠구만.”
가르달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막을 나가는 베로니카를 뒤따르며, 짧은 말로 지원요청을 차단했다.
“댁 업보임.”
에드워드는 반박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헬레나는 천막의 입구를 걸쇠와 끈으로 단단히 봉하고는, 반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엘프 여전사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그럼…… 뭐부터 해 볼까요?”
에드워드는 밀려드는 업무와 부인들의 시간차 공격 아래, 전초전을 패배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