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여덟 발톱의 왕 (1)
두꺼운 가죽으로 덮여 있지 않은 곳에서, 머릿속까지 찌르는 듯한 무시무시한 고통.
대장 코끼리가 제일 먼저 광분했고, 혼란에 빠진 코끼리들도 하나하나 독충에 당했다. 중간부터 리안나는 겁에 질린 코끼리들에게 접근하기 힘들었을 뿐 밟히거나 치여도 죽지는 않아서 연거푸 시도는 했지만, 허리띠 캐슬린이 펄럭이는 귀 안쪽을 마음대로 지나치며 독충들을 마저 심어놓았다.
남아 있던 모든 코끼리가 광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원래 가축이 아니라 야생의 것을 잡아 길들이는 동물에 불과했다. 계기만 있다면, 그들이 조련사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전방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당연히 후방을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주술사왕의 군대는 코끼리들의 난동이 자기 뒤통수에 들이닥칠 때쯤에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로 들어오는 거야?!”
“으아, 으아아아악!”
“살려줘!”
오크들이나 세트렛인들이나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넓지만 양쪽이 막힌 지형. 앞뒤 좌우로 움직일 공간 따윈 없었다. 운 좋게 코끼리가 밟지 않고 지나갔다 해도, 광폭한 발걸음이 방향을 꺾어 돌아오지 말란 법이 없으니 혼비백산하기 마련이었다.
“적 코끼리가 증원…… 증원 맞나?”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켈러핸의 말에 주변 부하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시오니아군도 당황했다. 처음엔 아군을 짓밟아서라도 새로운 전력을 투입하려는, 주술사왕의 술책인 줄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광분한 코끼리가 먼저 나와 있던 코끼리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쓰러뜨리는 장면으로 드러났다.
적 전열이 난장판이 되자 시오니아군은 환호했지만, 눈치가 빠른 장병들은 광분한 코끼리에 적과 아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알아도 피하는 건 어려웠고, 어떤 재난은 시오니아군까지 들이닥쳤다.
쿠웅!
“물러서! 물러서!”
이미 코끼리들을 상대하고 있던 시오니아군도 급하게 거리를 벌려야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뒤통수가 까인 적군보다는 덜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어차피 적이고 적이었던’ 코끼리들을 향해 다시 공세의 날을 세웠다.
켈러핸이 소리쳤다.
“두 번은 없을 기회다! 다시 공격하라!”
“새 상금이다!”
여전히 객기가 제정신을 앞서는 한 기사가 외쳤다. 그게 신호가 되어 시오니아군의 공세가 계속 이어졌다. 주술사왕의 군대는 더 이상 똑바로 전진할 수 없었고, 코끼리가 발 딛는 곳부터 무너져 틈새가 계속 생겨났다.
화살, 투창, 그리고 ‘시오니아의 화염꽃’이 연거푸 날아가 코끼리들을 덮쳤다. 운이 나쁘거나 기력을 다한 전투 코끼리부터 쓰러졌다. 그다음은 무너진 적군 차례였다. 그들은 투사무기를 뒤집어쓴 다음, 기병대의 말발굽 아래 놓였다.
이제 더 강하게 몰아붙일 시간.
“국왕 폐하께서 나서신다!”
시오니아군쪽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 * *
“전투 코끼리 엉덩이에 너무 붙으면 항문에서 쏟아지는 똥무더기에 깔려 죽는 수도 있다지.”
베로니카의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네.”
“조련사들한테서는 가끔 발생하는 사고라는 것 같더라. 변비 걸린 코끼리를 관장하다가…….”
“마누라 공주님, 왜 그렇게 더러운 이야기만 하세요?”
“조심하라고.”
에드워드의 빈정거림에 베로니카는 눈을 흘겼다.
한편 에드워드는 주인 잃은 채 방황하는, 듀라한의 유니콘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것도 어떻게 써먹을 방법 없으려나.”
주인이었던 듀라한과 마찬가지로, 그놈도 육체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려 재와 벌레 따위로 채운 상태였다. 게다가 듀라한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몸 곳곳이 조금씩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알뜰한 건 좋은데, 딱히 더 쓸 구석도 없지 않소?”
카치운의 말에 에드워드는 미련을 버렸다.
“뭐, 그건 그렇지.”
그의 시선은 전투 코끼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적진으로 향했다. 전방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맴도는 코끼리도 있었고, 아직 정신을 못차리던 적군은 그냥 도망치기 바빴다. 에드워드는 열쇠검을 뽑았다.
“아직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돌파해서, 주술사왕의 군대까지 달려간다. 최선두는 기사들, 그다음이 엘프들. 카치운과 유목기병들은 좌우와 후방까지 커버.”
“길이 열리긴 했는데, 여전히 자살적이고 위험한 방법이군.”
가르달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그런 거 싫소?”
“난 말을 못 타잖소!”
“잘 타잖소.”
“타기만 한 거지! 말 위에서 싸우지는 못한단 말이오!”
“어쩌겠수. 주술사왕 앞까지만 참으쇼. 공주님 옆에서. 카치운, 공주님 잘 지키쇼.”
“맡겨두쇼.”
헬레나는 베로니카의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베로니카 양은 전사가 아니니까 말이죠……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그러면서 슬쩍 에드워드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베로니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주 대우 받으려고 오라버니를 속이며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에요.”
“전술적인 견지에서 말한 거예요. 사제는 중심 아니면 후열이잖아요?”
둘 사이에서 묘한 냉전적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에드워드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 없는데.”
싸우지 말아달란 뜻이었다.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여인 사이로 말을 몰았다.
“좀 편하게 연구실에서 노닥거리는 날은 언제쯤 오려나요? 이 전투만 끝나면?”
“와, 인텔리가 꾀부리려 한다!”
밴시가 깐족거렸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스텔라와 리안나마저 투닥거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캐시.”
“넵!”
에드워드가 구체적으로 명령하기도 전에, 캐슬린은 리안나를 붙잡아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에드워드는 자기 주변을 맴도는 리안나를 보고 말했다.
“준비한 소품이나 붙여라.”
“기사님은 사기꾼이라서 지옥 갈 거예요. 꼭 지옥 가세요. 기사의 지옥에 제일 먼저 가시고 사기꾼의 지옥도 가시고, 난봉꾼의, 요정학대범의, 그리고, 그리고…….”
리안나는 투덜거리면서 ‘소품’을 입었다. 조끼. 흰 거위 깃털로 만든 커다란 날개가 등에 붙은. 본래는 연극용 소품이었는데, 리안나 체구에 맞춰 개조한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런 건 이단심문관으로서 경고를 할 수도 있는 건인데 말이지.”
“적을 속이는 건 상관없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묵인하는 거지.”
에드워드는 낄낄 웃으면서 자기 주변을 맴도는 ‘천사’를 향해 말했다.
“보기는 나쁘지 않네.”
리안나는 죽은 생선 눈깔로 중얼거렸다.
“개종한 보람이 있네요.”
성의가 없는 빈말이었다.
* * *
대부분의 미친 코끼리는 전방까지 일직선으로 적진을 관통하기보다는, 주변을 헤집는 게 더 많았다. 즉 후방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그 상황에서 가해진 에드워드의 돌격은, 안 그래도 난장판이 된 후방에 내려진 확실한 사형선고였다.
“저, 적이다! 적이다!”
“경건왕이다!”
심지어 에드워드를 경건왕으로 착각한 비명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천사가 날아다니면서 황동나팔을 불어댔으니까. 사실은 밴시 리안나가 확성기를 들고 울어제끼는 거지만.
주술사왕의 군대에는 평범한 인간뿐만 아니라 뒤틀린 인간들, 오크들, 강화된 오크들까지 있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에드워드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불사조 장식 투구의 마법이 힘을 발휘하면서 잡졸들은 안 그래도 없던 용기와 전의를 마저 다 날려버렸다.
“기사님, 전방에 오거요!”
캐슬린이 소리쳤다. 과연 그 말대로 커다란 오거가 몸을 뒤뚱거리며 나섰다. 대부분의 오거 부족은 전방에 나섰으므로 후방에서는 보기 힘든 놈인데, 외관도 특이했다. 턱에는 송곳니가 길게 자라 사슴벌레마냥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피부는 보랏빛으로 딱딱해져 있었다. 심지어 등에는 여분의 팔이 돋아 날카로운 발톱을 달고 있었다. 리안나가 소리쳤다.
“오거는 기사님 투구로 안 될 것 같은데요! 제가 기절시켜봐요?”
에드워드는 놈의 팔마다 달란 형형색색의 끈매듭과 장식물을 보곤 빠르게 판단했다.
“아니, 저건 주술사다! 헬레나, 저것 좀 해결할 수 있겠어?”
“돌피부 주술만 아니면요.”
헬레나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스텔라의 주문이 오거의 주문과 부딪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는 순간, 엘프 여전사는 달리는 말에서 뛰어오르는 재주를 보여 주었다.
“뒈져!”
헬레나가 고함과 함께 글레이브를 내질렀다. 새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오거는 나머지 한쪽 눈을 양손으로 싸매고 쓰러졌다. 헬레나는 오거를 지나친 말 위에 도로 내려앉고는 다시 에드워드의 옆으로 달려왔다.
“돌피부 아니네요.”
콰르르릉!
흰 번갯불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어젯밤 황산으로 샤워했대도 믿을 것 같은 형태의 끔찍한 네 발 짐승들이 그 번갯불들을 맞고 튀어 올랐다. 불에 달군 냄비 위에 떨어진 콩처럼 튀는 놈들을 향해 스텔라가 소리쳤다.
“최소한의 시약만 쓰는 거니까 죽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잡졸들 따위, 죽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야!”
에드워드는 고함을 질렀다. 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적병들을 짓밟거나 밀치며 말을 몰았다. 적진의 무리에서 가장 큰 덩어리가 곧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부피와 질량’으로 존재하는 적병이 더 많았다.
“역시 중심부부터는 안 쉽구만!”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베로니카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결국 나섰잖아, 저 오빠 새끼!”
경건왕을 현실남매 용어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뒤에 있다는 건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 * *
주술사왕과 경건왕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병사들의 대치와 ‘흐름’이 맞물리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한참 싸우던 와중에 사절을 교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서로 소리치면 들릴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이미 엉망이 된 주술사왕의 부대는 무너지고 흩어지면서 껍질 없이 알맹이만 남은 꼴이 되었다.
주술사왕은 ‘후미에서도 경건왕이 나타났다’는 말도 안 되는 정보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경건왕이 사실은 둘이다’라는 말에도 안 속았다. 눈앞에 실물이 있으니까. 그는 보다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두 왕 중에서 주술사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관문을 넘고 내 경계를 속여 뒤를 칠 자가 있다니, 놀랐소. 코끼리는 그쪽이 수작을 부린 건가 보군. 그대답지 않은 계획이라 더욱 놀랍소.”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전장의 함성 사이를 지나 또렷하게 들리는, 주문이 실린 말이었다. 경건왕은 투구 안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성전에 어찌 나만 있겠소? 수백 년을 산 주술사를 치기 위해 사방 모든 나라에서 기사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 중 하나겠지. 나는 나 나름대로, 명망 높은 기사들을 향해 그럴싸한 대처를 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놓친 이가 있었던 모양이오.”
“그 정의로운 이들 모두를 당신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오만이오.”
주술사왕은 코웃음을 쳤다.
“문을 열고 나가면 모기가 들어오기 마련. 그렇다고 문을 안 열까? 기꺼이 감수하리다.”
그 말과 동시에 주술사왕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한 입으로 두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사람들이 경악하는 사이, 경건왕의 앞으로 근위기사들이 나서며 소리쳤다.
“왕을 지켜라!”
그 순간 주술사 왕의 손에서 검은 안개 덩어리가 뛰쳐나와 근위기사들을 휘감았다. 기사들의 말부터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기사들은 불쌍한 짐승들과 같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말이 안 움직인다!”
“말들이 다 죽었어!”
말만 죽였다. 경건왕은 소매로 입을 가렸다. 그의 말은 다행히 멀쩡했다. 주술사왕이 자비를 뒀기 때문은 아니었다. 주술사왕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대의 성품상 기적을 바라고 온 건 아닐 텐데,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나 보군?”
“난 내 신앙에 기댈 뿐이다.”
어쨌거나 천사가 함께했던 자. 주술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드리지.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말을 한 필 드리겠소. 본래 당신 말을 죽이고 드리려 했던 거지만, 그냥 드리지. 한 명까진 여기서 데리고 나가는 걸 허락하리다.”
원래는 경건왕만 풀어주려 했지만 선심 더 쓴다는 투였다. 군세와 전황만 보기엔 자기가 더 불리한 상황일 텐데도.
경건왕 루이도 지금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주술사왕의 제안은 강렬했다. 그러나 단호히 거부했다.
“여기엔 다 각오하고 온 사람들뿐이오.”
주술사왕은 혀를 한번 찼다. 참모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 조언했다.
“폐하, 코끼리들이 여전히 날뛰고 있습니다. 게다가 후방에는 정체불명의 기사가…….”
“네 목숨이나 간수하라.”
바로 그때, 주술사왕이 사라졌다. 조금 전과 비슷한 검은 안개가 그의 발치에서 솟아 나와 왕을 집어삼키더니, 하늘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당해본 시오니아 기사들은 빠르게 한발 물러섰다.
“이번에도 독인가?!”
그러나 주술사왕 진영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평범한 바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풍압이 시오니아군까지 휩쓸었다. 독에 당하는 비명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무언가에 밀려 나오는 비명이었다.
검은 안개는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기둥을 만들었다. 그 기둥 안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이 지상을 굽어보았다. 안개를 뚫고 끄트머리를 내민 긴 주둥이는 가시투성이 비늘로 뒤덮였다.
사람의 눈높이에 놓인 것은 여덟 발톱이었다. 한 발에 발가락이 네 개씩인.
검은 용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기적이 있다면, 지금 꺼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