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기사들의 이야기(1)
코끼리와 주술사왕에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통증에 미쳐 날뛰었지만 후자는 짜증을 냈다는 사실이다.
검은용 주술사왕은 거칠게 양 뒷다리를 번갈아 털었다. 그리고는 사방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쿠웅! 쿠웅! 쿠웅!
사람이 발에 붙은 벌레들을 떨쳐내고 짓밟는 데 쓸 법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후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문을 세웠고 경계병에게 순찰을 시켰지. 그런데 네놈은 여기 있구나. 하늘을 날아온 것인가? 땅을 파서 온 것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주술사왕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네놈이 어떻게 내 관문들을 돌파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내 경계병들의 눈초리를 피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코끼리에 벌레를 붙인 네 솜씨를 보아, 하나는 확신하건대, 네놈은 경건왕처럼 기적을 부를 자가 아니다!”
발치의 기병들을 짓밟아대고, 꼬리를 휘둘러대던 주술사왕은 곧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기병들보다는 약간 더 높은 곳을 나는 존재. 너무 작아서 주술사왕이 깜빡 놓칠 뻔한 것이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더없이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날개 달린 소녀. 천사와 흡사한.
등골이 오싹해진 주술사왕은 재빨리 대응했다.
“이놈!”
“끼야아아악!”
주술사왕이 허리를 급히 숙이고 앞발을 내질렀다. 밴시 리안나는 냅다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당연히도, 또는 불행히도 그녀의 울음소리는 주술사왕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주술사왕은 요리조리 회피기동을 하는 밴시를 한참 추적한 끝에, 날개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냐, 이 깃털은?”
연극용 날개 소품. 속임수가 들통나자, 허리띠 캐슬린은 쏜살같이 밴시를 버리고 달아났다.
“야, 허리띠! 돌아와요! 날 버리고 가다니!”
주술사왕은 ‘검은용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본디 날 수 없는 요정 같은데…….”
“허리띠래요! 허리띠가 범인이래요!”
밴시는 방정맞게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주술사왕은 혼란에 빠졌다.
“네 주인의 이름이 허리띠냐?”
“아뇨! 허리띠는 방금 저 버리고 날아간 그 허리띠요! 허리띠인데 하는 짓은 음탕하고 대가리는 벨트 버클 수준…… 그게 대가리가 맞나? 어쨌건 밴시가 하늘을 나는 이유는 걔한테 따지세요! 밴시는 잘못 없어요!”
“저능한 종류의 요정이로구나.”
“허리띠보다는 똑똑한데요!”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항변을 하고 만 밴시였다. 주술사왕은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혹여 기적이라도 나타났나 했는데. 끝까지 속임수에 협잡질이로군.”
주술사왕은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기사냐, 아니면 광대냐! 무엇이건 당당히 나서라!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속임수를 내밀지 말고!”
* * *
그 애들 장난 같은 속임수들의 원천인 기사 에드워드는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다행히 주술사왕의 발바닥에 깔리는 일은 피했고, 그가 밴시 리안나에 낚여 움직이는 바람에 거리도 좀 멀어졌다.
그러나 동료들은 다리와 꼬리를 피해 흩어져서 어딨는지 모르겠고, 온몸은 안 아픈 데 없이 쑤셨고, 승리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저 괴물딱지 같은 검은 용을 어떻게 이긴다…….”
검댕과 흙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기사로서건, 재간꾼으로서건, 어린이의 재앙으로서건, 60권짜리 만화 삼국지 애독자로서건 생각나는 수가 없었다.
“네놈은 기사냐, 아니면 광대냐! 무엇이건 당당히 나서라!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속임수를 내밀지 말고!”
주술사왕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놈의 눈은 그리 좋지 않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땅을, 흙먼지 위를 구르는 것들은 쉽게 찾지 못한다던가.
“아직 니 뒤다, 새꺄. 혀는 미식가여도 눈은 그닥인갑군.”
에드워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술사왕은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아마 자기 앞으로 나서는 기사를 찾는 모양이었다. 몇몇 용맹한 기사가 그간 찾은 마법의 무기들, 또는 동료 마법사, 또는 사제의 엄호를 받아 앞으로 나섰지만 가볍게 짓밟히고 잡아먹히는 꼴이 보였다.
“그냥 처음부터 저 모습이었으면 웬만한 건 다 짓밟았을 것 같은데. 왜 늙은이 모습이었을까? 역시 본모습은 용이 아니었던 걸까? 그럼 일시적인 건가? 시간제한이 있으려나. 질질 끌어보면 승산이 있을지도. 근데 그게 과연 언제가 될지. 시간제한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를 통솔하고 땅을 통치하기 위해 사람 모습인 거였다면…….”
에드워드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동시에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어떻게든. 그는 계속 상상의 나뭇가지를 그려가다 어느 순간에 도달했다.
“그냥 공주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닐까?”
움찔.
그때였다. 에드워드는 자기 발치에서 타다 만 시체 같은 것이 움직이자 식겁했다. 그러나 이런 데서 살아 움직일 건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곧 머리를 스쳤다.
그는 황급히 검은 덩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검은 덩어리는 시오니아의 경건왕 루이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 순간 검은 덩어리에서 흰자위가 나타났다. 다행히도, 검은 덩어리는 살갗이 타들어 간 게 아니라 단순한 그을음이었다. 왕의 어깨를 붙잡은 에드워드의 손에 검댕이 묻어나오고, 구멍 난 옷감과 약간 붉어진 피부가 드러났다.
“와, 폐하. 역시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걸 맞고도 멀쩡하시다니.”
“멀쩡하지 않아. 숨을 쉬기 힘들어.”
“폐하가 타고 있던 말은 말 그대로 숯덩이가 되어서 흙으로 바스러지고 있는데요. 사우나 좀 하신 피부에 검댕만 묻은 거면 훨씬 좋은 거죠. 재와 모래로 찜질 좀 하셨네요. 가만 있으시죠. 혹시 허리나 다리에 통증 있으십니까?”
“백작.”
“예.”
“난 오만했다.”
왕의 신체를 살펴보던 에드워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경건왕을 보았다.
“경건왕이 오만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내게 내려왔던 기적은 두 번씩 반복될 것이 아니었다. 난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되리라 믿고 나섰어.”
“사명 받은 기사는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발걸음을 떼는 법이죠.”
“저건 내 사명이 아니었어.”
경건왕은 짧은 기침을 했다. 그는 검은용을 보며 말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적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머리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에드워드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다들 ‘신의 사랑을 받는’ 경건왕이면 어떻게든 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신께서 보살피실 겁니다.”
“오만한 자는 보살피시지 않아…… 그가 신을 시험하려 한 셈이니까.”
“뭐, 우리 신이 자애롭다기보다는 엄격한 분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기적 없이도 이기고 있었잖습니까. 저딴 게 나올 줄 몰랐던 것이지. 할 만큼 했습니다. 폐하께서는요.”
그때 저 멀리서 밴시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사 에드워드요! 기사 에드워드가 제 주인이세요! 하르몬 주의 총독이자 카말라의 백작! 아, 근데 지분은 절반만…… 아, 아니다. 둘이 결혼하면 재산법이 어떻게 돼요? 으악!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배신했잖아요! 배신은 결정적일 때 하는 거래요! 기사님이 죽으면 난 자유! 아, 근데 공주님 지분은 어쩌지? 요즘 고깃값도 비싸서. 꺄악! 네! 그 백작이 관문들을 돌파했고 코끼리 귀에 벌레를 넣었어요! 미염공이니 오관육참이니 뭐니. 아, 당신 부하들 밴시한테 졌지롱요. 와아악! 잘못했어요! 미염공이 누군데 여기 왔냐고요? 몰라요! 밴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으악! 잠깐만! 증거요? 반 벌레 반 유령 유니콘이 남았죠! 안내해드려요? 지금은 벌레 무더기로 돌아갔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여기 벌레는 아닌 거 알아보실 거에요! 징그럽지만 사실 뭘 봐도 거대 꼽등이네 제국보단 낫죠! 그게 뭐냐면요, 제가 만티코어 발바닥은 무슨 맛인지 알게 되기 전의 일인데요…….”
주술사왕의 위협에 혼비백산한 리안나가 자백하는 소리. 구구절절하기까지 했다. 에드워드는 검은용의 목소리보다도 쩌렁쩌렁한 밴시 목소리에 혀를 한번 찼다.
“먹혀봤자 소화 안 되고 나올 것 같은데. 하긴 그것도 끔찍한 경험이려나. 잡혀도 말하지 말라고 미리 명령해둘 걸 그랬군요.”
경건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술사왕의 목소리가 다시 전장을 울렸다.
“경멸스럽고 한심하다! 저주받은 기사 에드워드여! 그 우스꽝스러운 저주를 풀었다고 네 만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히 내 뒤를 노릴 생각을 하다니! 애초에 네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라 왕성에서 나야 했을 것을!”
회개한 기사는 공주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동화들이 뒷이야기 없긴 하지요. 실제로는 공주의 부군이 격무와 전쟁에 시달릴 게 뻔한데 말입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이겠지. 틀린 말도 아니야. 자네 왕성에 공주와 함께 남았다면, 시오니아의 권역이 크게 줄어들겠지만, 어쨌거나 자네 목숨은 건졌을걸. 내 여동생이 우는 일도 없을 테고…… 공주와 결혼한 기사들 이야기들 중에 비극이란 건 항상 그렇잖은가.”
경건왕이 말했다. 에드워드가 구조한 뒤로 가장 길게 한 말이었다. 카말라의 백작은 ‘님 여동생 사실 여기 있음’ 따위의 방정맞은 소릴 생각 없이 하진 않았다. 주술사왕도 비슷한 소리를 뒤이어 외쳤다.
“공주를 두고 출정한 바보들의 이야기는 항상 비극으로 끝나지! 네 이야기도 그렇게 될 것이다!”
걔 안 두고 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에드워드는 참았다. 농담할 시간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문득 자기 머리 위를 보았다. 허리띠 캐슬린이 되돌아와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공주님은 못 찾겠는데요. 엘프는 저어기 보이네요. 다른 기병들이랑 있어요. 나머지는 숨죽이고 있으려나. 가르달이나 스텔라요. 카치운은 기회를 보는 타입이고……. 아, 그럼 카치운이 공주님 데리고 숨어있겠네.”
“언제 왔냐?”
“조금 전에요. 폐하를 안전한 데로 모실까요?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패퇴하는 시오니아군쪽으로 가려면 주술사왕의 발치를 지나가야 한다. 에드워드가 돌파했던 관문 쪽은 이미 다시 경계병과 순찰병이 점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안전하지도 않다.
“으악! 안 먹는다면서요! 왜 약속을 깨는…… 계속 들고 있기 귀찮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엑? 먹으면 뭐가 보인다고요? 그럼 소와 돼지는 어떻게 드세요? 맨날 소와 돼지 체험하시겠…… 끼야아악! 꼭 지옥 가세요!”
주술사왕의 외침 사이에 간간이 쓸데없는 소리로 끼어들던 밴시는 덧없는 저주를 내질렀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쟤는 코끼리 똥 무더기 다음엔 용의 똥 무더기에서 기어 나오겠군.”
사소한 방해물이자 적의 속임수인 밴시를 치워버린 주술사왕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나와라, 인간! 시간 끌어봤자 소용없다! 네 오만의 대가를 치러라! 네 이야기에 끝을 내라!”
에드워드는 열쇠검을 들고 일어났다. 그는 검은용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성자 양반이 궁성에서 공주님과 노닥거리라고 저주 걸어 줬던 건 아닐 텐데, 뭘. 야, 캐시.”
“넵.”
“주변에 다른 건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폐하 지키고 있어라. 내 부하나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지나가면 바로 세워서 폐하를 모셔.”
“넵. 그런데 기사님은 어쩌시게요?”
에드워드는 턱으로 검은용을 가리켰다.
“부르잖아. 가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