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에필로그
시오니아 왕국의 혼란은 생각 이상의 승리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는 한편, 빛이 승리한 곳에서 으레 그렇듯 어둠의 첩자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단자들이 암약하거나, 뱀파이어 소동이 벌어지고 시체만 남는다거나…….
수도사 생활을 위해 사실상 은퇴해 버린 경건왕 루이 대신, 제1왕위계승자 베로니카 공주와 그 남편인 섭정공 겸 호국경 에드워드는 그 와중에 모범적인 부부로서의 업무까지 해내야 했다.
“아드로피아에 늑대인간 소동이 일어났다네. 마침 오빠가 그 근처에 있을 텐데. 편지 써야지.”
이른 아침, 베로니카가 침대에 길게 누운 채 서류를 보다 말했다. 먼저 일어나 허리띠 캐슬린이 끓여 놓은 커피를 마시던 에드워드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웃어 버렸다. 때문에 커피 방울이 정면으로 슬쩍 튀었다.
“와, 경건왕 폐하한테 늑대인간 토벌을 맡기겠다고?”
“멋대로 은퇴해 버렸는데 늑대사냥 정도는 하라고 해야지. 어쩌면 이미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늑대인간이 불쌍해질 것 같은데.”
“세상에 불쌍한 늑대가 어딨니.”
“아우우우우우.”
에드워드는 낮게 늑대 울음소릴 흉내 냈고 베로니카는 베개를 집어다 던졌다.
“종마 새끼.”
“몸조리나 잘해. 둘째 곧 가져야겠다며.”
베로니카는 홀쭉해진 자신의 배로 시선을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몸매 또 망가질라.”
“그게 걱정이야?”
“그것만 걱정인 게 아니거든? 사내새끼들도 이런 고생 좀 해 봐야 한다니까.”
베로니카는 첫 아이를 출산하고 몸이 웬만큼 회복되자 바로 둘째를 가질 작업에 착수했다. 왕족과 귀족 여성들은 사교활동과 다음 임신을 위해,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수유와 육아를 해결하는 게 보통이었다. 높은 영유아 사망률은 다산을 권장했다. 후계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건 의무이기도 했다.
“뭐, 가능한 한 많이 낳아야 하긴 해. 우리 남매 같은 모양새는 또 안 내야지.”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빠가 맹세로 사고 치고, 다른 계승자가 없어 공주와 그 부군이 섭정에 나서게 된 상황을 말한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경험에서 우러난 이유구만.”
“내 딸을 나처럼 너 같은 놈에게 시집 보내는 일은 피해야지.”
에드워드는 잔을 내려놓은 다음, 침대로 도로 들어갔다. 그는 아내를 덮쳐 와락 끌어안고는 말했다.
“그런 걱정은 일단 낳고 하지?”
“야, 잠깐! 벌써 해 떴잖아!”
“낳게 해 달라며.”
“그건 그런데, 오늘만 날이니? 읍, 으응……!”
“한 번만 더.”
“한 번뿐, 이야앙!”
“오, 방금 그 소리 한 번만 더 내 주라.”
두 남녀는 입술을 맞대고는 다시 엉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둘을 방해했다.
“섭정공 각하, 연금술사 루이스입니다.”
“푸하! 아, 미아 양. 지금 좀 바쁘니까 나중에!”
“곧 근무시간입니다만.”
“좀만 늦추지, 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 오늘 낮에 여자들 도착한답니다.”
사지로 에드워드를 와락 끌어안고 있던, 베로니카의 움직임이 먼저 딱 멈췄다. 섭정공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자들? 어, 그러니까, 무슨 여자들?”
“이번엔 요하나 양과 그 친구들요.”
“아, 그랬지. 몇몇 동료들을 버릴 수 없어서 데리고 온댔나?”
“편지 상으로는 그렇네요. 요하나 양이 리더 역할을 했다니, 의존이 심한 여자들도 있겠지요. 아니면…… 혹시 베니아시 인근에서 요하나 양 말고 더 건드린 여자들 있어요?”
“루이스 양, 지금 이 안에 누가 있는지 알 텐데 좀 잔인한 질문을 한다…….”
“어차피 공주님도 아시게 될 텐데요, 뭘.”
에드워드의 등짝에 공주의 손톱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손톱이나 늑대인간의 발톱만큼이나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가 남편의 목덜미를 쓸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 데다 남자가 왕성한 거야 어쩔 수가 없지만…… 부부지간에 거짓말하지 않기, 알지?”
에드워드는 이실직고했다.
“요하나처럼 나 찾아올 정도는 아님.”
“혹시 증표 같은 거 줬어?”
“일단 베니아엔 그런 여자 더 없어.”
“베니아엔?”
“다른 덴 없다고는 못 한…… 끄악!”
에드워드는 비명을 지르며 베로니카 위로 무너져내렸다. 공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오늘 오전 통째로 비워.”
딸깍. 뒤이어 만삭의 엘프 임산부, 헬레나가 문을 슬쩍 열어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럼 제 일정 조정 좀 협의하시죠.”
* * *
점심이 더 지난 오후. 아기를 하나씩 안은 여자들이 시오니아 왕성을 기웃거렸다. 웅장함과 화려함에 잔뜩 주눅이 든 그녀들의 선두는, 양 갈래로 묶은 갈색 머리 여성이었다. 그녀는 베니아시 이단 소동의 생존자 요하나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편지와 사절이 올 줄은 몰라서, 엉겁결에 오긴 왔지만…….”
그리고 그 여자 무리를 안내하는 건 꼬마요정 리안나였다.
“자, 자! 관광은 좀 있다 하고! 애들 기저귀랑 묵은 빨랫감은 다 저쪽 바구니에 담으세요! 큰 밴시가 든 큰 바구니요!”
요하나는 낑낑거리며 바구니를 가져온 은발 처녀를 곁눈질하곤 리안나에게 질문했다.
“저 여자도 밴시니?”
“네! 앵글리아에서 밴시 사냥을 피해 성지까지 왔다네요!”
리안나의 말에 처녀 밴시는 조그맣게 훌쩍였다.
“대체 어느 정신나간 밴시가 어떤 난리통을 펼쳤길래 사람들이 밴시들을 사냥하려는 건지…… 사장님은 아세요?”
[시오니아 왕실에 드워프식으로 독점 사업권을 따낸 밴시 세탁소> 사장 리안나는 작은 가슴을 한껏 펴고는 당당히 말했다.“몰라!”
그 꼿꼿함과 당당함에, 처녀 밴시는 리안나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못했다.
“흑. 섭정공 각하께 다시 여쭤봐야 할까요?”
“여쭤봐서 뭐 하게. 그리고 아까 발코니에서 공주님이랑 엘프님께 잡혀가는 거 봤잖아. 당분간 뵙기 힘들걸? 일이나 집중해라, 노동자!”
“업무가 너무 과중해요! 거인족인 지클린 양만큼 해야 한다니!”
“세탁의 요정들이 거인족 세탁부한테 진다는 건 중대 사항이야! 싫으면 그만둬! 갈 데는 있어?”
“너무하세요! 주급도 밀렸는데!”
“저번 주에 줬잖아!”
“이번 주는요?”
“다음 주에 줄게!”
“너무해! 왜 자꾸 미루시는데요!”
“사장이 된 거지, 통장 잔고가 찬 게 아니거든!”
“그래도 한 푼도 없는 건 아니잖아요! 사장님도 노예인데, 왜 노동자의 입장은 안 헤아려 줘요?”
“노예랑 노동자는 다르니까!”
“네, 더 낮은 곳이시죠!”
“출신은 문제가 아니야!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사장님이 그 말 하니까 너무 가증스러운 거 있죠!”
“불만 있으면 너도 노예하고 사장해라 이거야!”
리안나가 부하 밴시를 갈구는 모습에 요하나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기사님이 섭정공이 되었다는 건 알겠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면 안 될까? 잠시 머물기도 너무 부담스러워서…….”
“아, 백작님이 절대절대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요하나 언니를 놓치면 안 되니까 사람 꼭 붙이래요.”
“아…….”
순간 요하나는 얼굴을 붉혔다. 좀 용감한 여자들은 얼른 자신들의 리더를 추켜세우고 달래기 시작했다.
“사랑받네. 좋겠다아.”
“높으신 분이 잊지 않고 신경 써 주시는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주는 건 받아야지.”
속내가 뻔히 보이는 그 칭찬 세례에 리안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내일 중으로 카말라 백작령으로 보낼 테니까 같이 잠깐만 대기하라던데요.”
요하나 뒤의 여자들은 전직 이단 성가대원들로, 요하나가 에드워드를 찾아가는 길에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베니아 시에 적응하질 못했거나, 요하나에 의존하게 된. 당연히, 그녀들이 안고 있는 아기들은 요하나의 아이와 달리 에드워드의 핏줄이 아니었다. 설령 핏줄이 맞다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기를 안은 여인들이 요하나를 필두로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은 시오니아 공주 베로니카와 케라시움 치안대장이자 둘째 부인 헬레나한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다.
“어머나, 진짜 애들이 바글바글하네. 공주님이 빡돌 만하다. 오해라지만.”
스텔라가 여자들이 모인 방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리안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빨래도 못 하는 무쓸모 인텔리가 여기는 왜 왔나요!”
“쓸모없긴? 교통정리가 내 역할인데. 각하가 뿌린 씨가 학교급이래서 와 봤지. 근데 오는 길에 이야기 들어보니, 하나 빼고 다 각하 애들 아니네.”
“와, 어느새 다 챙겨 들었어요?”
“마법사는 귀가 열려야 하는 법이지.”
그 순간, 옆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너 전에 로니한테 눈 흘기더라?”
“아니, 그 이야긴 또 왜 나와? 그냥 너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여자가 나란히 서 있으니까 새삼 신기해서 그런 거지.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저 중엔 나랑 관계있는 애가 요하나 외엔 없다고…… 으악!”
“그래, 그래. 근데 지금 내가 그 이야기 하는 게 아니잖아! 안 되겠다, 로니는 얼른 켈러핸 경한테 줘 버려야지. 아, 올리비아 건으로도 할 말 생각났는데…….”
요하나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베로니카 사이의 관계는 이단 소동 때부터 불편하고도 남았으니까. 그 표정을 본 리안나는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마세요. 공주님이 화내는 건 맨날 있는 일이지만 그래 봤자 기사님이랑은 ‘매일 밤’ 잘 지내요. 각하의 여자들한테도 화 안 내고. 오히려 여자들을 위해 화를 내면 냈지.”
뒤이어 헬레나의 볼멘소리도 들렸다.
“백작은 본부인들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 해요. 데스피나는 그 나이에 조르쥬 경의 아이를 세쌍둥이나 임신했죠. 그때는 늙은 엘프 할망구가 주책이라고, 남은 생애의 놀림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네, 난산이었다죠? 산파들 앞에서 눈 뒤집고 울부짖으면서 분뇨까지 지렸다던가. 근데 왜 제가 그년이 제 앞에서 승리자의 표정을 짓는 걸 봐야 할까요?”
에드워드의 합리적인 모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쌍둥이를 내가 무슨 재주로 1년 만에 따라잡…….”
두 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말꼬리를 가렸다. 밴시 리안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스텔라를 돌아보곤 말했다.
“인텔리는 애 아직 없죠?”
“창창한 마법사의 연구에 방해될 육아계획 따위!”
“역시 피임했구나.”
“했는데…… 제길.”
“왜요?”
“좀 불안해.”
“왜요? 정부들끼리의 총애 경쟁에서 밀리는 것 같아요? 연금술사 언니도 며칠 전에 보니까, 헛구역질 중이시던 게 의심스럽던데.”
“그런 거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마. 어쨌거나, 아무리 계산해 봐도 피임 실패한 것 같아서.”
“하는 도박마다 꼬라박는 마법사가 피임은 뭔 깡으로 성공할 줄 알았어요?”
“요 가증스러운 주둥이는 사장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네! 제길, 하긴 그만큼 해 댔으니…… 일단 유모도 알아보고 있어.”
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엘프님이 최근 심기가 불편하셨구나. 누구는 둘째 준비에, 누구는 피임해도 덜컥 임신하고, 자기는 아직도 임신 중이니.”
“엘프는 원래 임신과 출산이 좀 느려.”
“데스피나 님은 벌써 세쌍둥이라던데요.”
“그건 데스피나가 실수한 거야.”
“실수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주술사 니코스를 찾아내 다산의 약을 주문했다더라.”
“꽥.”
“그 치매 주술사에게 일을 맡기니, 한 덩치 하는 조르쥬 경의 씨가 세쌍둥이나 들어앉는 사고가 생겨버리지…….”
“안 죽은 게 용하다. 엘프라 그런가?”
“나라면 그딴 미친 짓 안 해. 현직에게 임신은 하나만 해도 불행한 사고거든.”
“그럼 안 낳을 거예요? 에이, 표정 보니 아니네.”
“뭐, 각하께 돈 뜯어야지! 내 든든한 돈줄이자 복지!”
“그럴 줄 알았다. 여러분, 이 속물은 신경 끄시고 그만 반대쪽 방으로 옮길게요!”
“돈에 미친 요정 주제에 누굴 속물이라고 평하는 거야!”
다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투닥거리다 밴시를 제압한 스텔라는, 요하나의 뒤에서 양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요하나 양. 그때는 우리 서로 깊게 이야기를 못 했죠?”
“네, 네…….”
“애 이름이 뭐예요?”
“에드워드요.”
“어머나. 아빠랑 이름이 똑같네. 에드워드 2세? 정부의 아들이니까 그냥 에드워드?”
“에드워드요.”
“어머나, 귀여워라. 그렇네요. 걱정 마요. 둘이 살 집 정도는 각하께서 기꺼이 마련해 줄 테니까. 편지 잘 챙겨 왔죠? 거기 쓴 걸 어길 분은 아니거든요. 당신 동료들도 나름대로 챙겨 주실 테니까 걱정은 놓고, 오늘 밤은 각하랑 회포 풀 준비나 하세요. 시오니아에 온 걸 환영해요. 이젠 혼란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스텔라는 아직 본부인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옆방을 흘겨보고는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운 나라죠.”
* * *
왕실 정원 구석으로 피신한 에드워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하나가 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신년 두 번인가 넘기고 겨우 만나는데, 얼굴 마주보기는커녕 이쪽이 본부인들에게 바가지 긁히는 소리만 들려줬으니.”
“오늘 밤에 살살 잘 대해 주면서 분위기 잡으면 되겠지, 뭐.”
카치운이 말했다. 에드워드가 실내 흡연금지령을 때렸고, 그건 기병대장이자 버일러인 그도 예외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카치운은 연초 피우러 피신해 있던 참이었다.
“기사의 정부 정도나 기대하다가 왕의 정부가 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할 일이지. 감히 무슨 불만을 품겠소?”
그의 흡연 친구 드워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자 각지를 오가는 상인으로 각성한, 눈을 겨우 뜰 정도로 살이 쪄서 동글동글해진 드워프. 에드워드는 그를 향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왕 아뇨. 섭정공이지. 게다가 계승권을 정확히 정리하면, 왕위는 베로니카와 그 아이가 받는 거고…….”
“드워프 상인한텐 그게 그거요. 어쨌거나 베로니카 양이 즉위하면 댁도 공동 왕 아뇨. 사실을 말했는데 불만이면, 드워프 목을 쳐 보라 그러지 뭐.”
가르달은 손날로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카치운은 조그맣게 말했다.
“목이 보여야 치지…….”
살찐 가르달은 껄껄 웃었다. 에드워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앵글리아 쪽 소식은 없소?”
“어, 음. 내 고향 소금산 소식부터 전하자면, 왕실 건축사 루이사 님이 참 오랜만에 베로니카 공주께 연서를…….”
“생략.”
“아, 아브릴 기억나쇼? 아가티우스의 딸. 걔가 결국 아르데니아 엘프들이랑 대판 싸웠…….”
“보류. 나중에 들을게. 국가 지대사부터.”
“그러지. 다음 소식. 댁 본가 사람들도 여길 뒤늦게 기웃거리는 모양인데. 클레어 가문 말이오.”
“쳇. 정도 안 붙는 인간들이.”
“그래도 도움은 되겠지. 남쪽에서 성전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지금 로드리고 경과 올리비아 경을 전선에서 빼낼 수는 없으니.”
놀랍게도 꺽다리 로버트는 세트렛 해안 도시들을 단번에 분쇄하질 못했다. 그쪽에도 만만찮은 영웅이 등장해 도시국가들을 규합하고, 농성전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로버트는 적수가 나타났다고 더 신났으며, 앵글리아제 초대형 투석기 ‘신의 주먹’은 혹사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꺽다리 로버트가 아브멜렉의 여왕으로 세운…… 펠리샤, 그 여자가 밀서를 보냈소. 이기든 지든 어차피 떠날 로버트왕 말고, 우리 쪽에도 연줄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더군. 농촌 출신 노예 여자가 세트렛 귀족 여자의 껍질을 뒤집어쓰더니, 완전히 정치가 다됐어.”
가르달의 말에 에드워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악마 다쉬사베스가 펠리샤로 변신한 지젤과 함께 공작으로 아브멜렉을 뒤집어엎은 이래, 그 도시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지나가던 로버트가 빛의 교회로 최단기 집단전향을 시켜 놨지만, 내외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하긴 로버트 폐하가 성지를 아예 떠나고 세트렛인들의 영웅이 남으면 아브멜렉은 방위가 골치 아플 테니까.”
“먼저 귀국길에 오른 아퀴타니아 왕세자가 앵글리아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단 소문이 있소. 진짜 그랬다간 로버트도 휴전하고 귀국할지 몰라.”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군.”
“답장 뭐라고 보낼 거요?”
“도와준다고 하긴 해야지. 근데 왜 밀서지? 국서를 보내도 될 텐데?”
가르달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내밀었고 에드워드와 카치운은 뿜어 버렸다.
“뭔데, 그거?!”
“맙소사. 이야기가 거기로 튀나?”
가르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브멜렉 세트렛은 일부일처 규정이 없거든. 셋째 부인 만들 생각 없냐, 결혼이 안 되면 씨라도 내놔라 이거지 뭐.”
“아니, 걔가 나랑 뭔 연이 있다고?!”
“꼭 연이 있어야 하나? 걘 세트렛 영역에서 수단과 방법 안 가리며 살아남은 여자요. 지금 임신하면 꺽다리 로버트의 아이라고 뻥칠 수도 있을걸.”
“로버트 폐하가 그럴 리가 없잖아! 머리 한구석이 좀 미쳐서 그렇지, 완전 바른생활 사나이라고!”
“그걸 세트렛 놈들이 알 리가 없지. 사실 우리 쪽 대중도 ‘꺽다리왕의 전설’만 있으면 충분하고. 어쨌거나 펠리샤 여왕은 [시오니아 섭정공의 셋째 부인>, 그게 안 되면 [꺽다리왕 로버트의 씨로 추측되는 후계 영웅을 품은 여자>를 겸해 계속 성전을 이어 나간다는 계획이오.”
“그 계획, 베로니카랑 헬레나가 알면 나 죽이려 들걸.”
“그러니까 밀서로 보내라고 했소.”
“댁이 아이디어 제공자였냐! 이 막무가내 드워프!”
“아, 경이 씨 안 주면 걔는 다른 놈 씨를 고를 건데, 뭐가 이득인지는 명확하잖소! 생각해서 가져와 줬더니만!”
드워프식 셈법에 에드워드가 머리를 싸매고 답장을, 정확히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카치운은 파이프를 갈무리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파이프 속 재를 비우며 말했다.
“그래, 이제 하고 싶은 걸 하는 ‘진짜 삶’은 살만 하쇼?”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올라가고, 스케일이 커지고, 예상보다 변주가 좀 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틀에 박힌 귀족 결혼생활인데.”
“틀이 있으니까 거기 안주하는 것과 자기가 원해 틀에 뛰어드는 건 다른 거잖소. 그러니 여기까지 온 거요. 틀뿐인 삶이 아니라, 틀을 채운 삶이지.”
“남의 결혼생활에 유부남으로서 한마디 얹고 싶은 거요?”
“며느리가 임신해서, 난 이제 곧 할아버지거든. 경험자로서 조언할 게 넘쳐나. 요즘 어떻소?”
에드워드는 기병대장을 올려다보았다.
“매 순간 왕국과 후대를 위해 생을 갈아 넣는 중이지.”
가르달은 말없이 펠리샤의 밀서를 에드워드의 신발에 쑤셔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