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34)
34화 불량배의 법칙
베로니카는 기사단의 휴게실에서 펜, 잉크, 종이를 빌려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우선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 앵글리아 왕실, 그리고 교단의 상관들. 답장이 우선이었고 질문이나 요청이 그 다음이었다.
앵글리아 왕실의 순서쯤에서 베로니카는 펜을 멈췄다. 그녀는 ‘열쇠검에 어떤 내력이 있는 것을 암시하는 고문서를 입수했습니다’라는 말을 솔직하게 쓸 수가 없었다. 물론 앵글리아 왕실이 뭔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빌려준 거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문제였다.
뒤늦게 뭔가 깨닫고 쫓아와서 검을 돌려달라 할 경우.
그건 베로니카와 에드워드 모두에게 낭패가 되는 문제였다. 에드워드가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줬다 뺏는 게 어딨냐고 화를 낼 것이다. 왕이 보낸 추적자가 따라붙는다면, 베로니카의 여행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캠벨 가문에만 몰래 알려서 조사를 부탁한다면? 쉬운 길이긴 하지만, 꺽다리 왕 로버트의 부하들이 귀족들의 우편물을 몰래 훔쳐본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떤 경로로든 이야기가 새어나갔다가 염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다.
길은 하나뿐이었다. 함구. 앵글리아 수도 콜체스터는 물론 에드워드한테도.
‘비밀은 입밖으로 나가는 순간 비밀이 아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에드워드의 입도 별로 믿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감정을 해 줄 만한 사람과 단체 후보들을 떠올렸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철없고 헤픈 남편을 내조하는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의 펜이 다시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 * *
대충 쇼핑을 마친 에드워드와 리안나는 기사단 지부로 돌아왔다. 스쳐 지나가는 기사단원들과 그 직원들을 보는 에드워드의 눈빛은 묘했다.
은퇴 후. 아직 젊지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생은 짧고 위험했다. 어느 기사든 다 마찬가지였다. 가문을 이어받을 장남이 아니라면, 기사 수업을 마치자마자 빈털터리 독신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싸움은 수많은 지출을 강요했다. 시합이든 전투든 승자로서 약탈하지 못하면 당장 빚 위에 올라섰다. 죽을 때도 빈털터리 독신으로 죽는 기사가 부지기수였다.
에드워드는 기사단 지부 복도의 게시판에 눈길을 돌렸다.
[지부장 지시사항>무기고 열쇠관리 철저
부서별 현황판 최신화
규정에 의한 물품 관리
우천 대비 부서별 계획 확인
보급 물품 지급 확인
일과 시간표 준수
새벽기도회 주의 사항 강조
수도기사회의 갑갑한 규정을 드러내는 게시물이었다. 에드워드도 몸이 삐걱거리고 더 이상 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몸이 된다면, 쓸모없는 전사들 그룹에 끼어 좁은 기사단령에서 연명할 가능성이 컸다.
기사들이 무모한 용맹을 과시하고 업적에 매달리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귀족이나 군주의 소개로 부유한 여자와 결혼한다.
가능하면, 군주가 관리하는 상속녀나 미망인이 가장 좋은 보상이었다. 왕세자의 챔피언까지 해 본 에드워드에게 그건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전투와 전쟁에서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면, 좋은 친구들을 만든다면, 줄을 제대로 선다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얻었을지도 모른다.
“난 수도기사회 생활은 정말 못할 것 같다. 얼른 결혼해야 하는데.”
에드워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리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사가 되면 여자 못 만나니까요?”
“비슷하긴 하네.”
“베로니카 님하고 결혼하면 어떨까요?”
에드워드는 평소와 달리 질색팔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의 계산판을 움직였다.
“대귀족 가문이긴 해도, 사제라서 재산은 그리 많지 않을걸.”
“베로니카 님은 부자 맞는 것 같던데요?”
“사제로 출가한 여자들은 ‘귀족이어도 어정쩡한 위치’야. 남자 사제와 별로 다를 게 없지. 교회 고위직에 오른다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 그런가요?”
“그리고 이건 내 욕심인데, 보통 부잣집 여자여서는 안 돼. 기사의 결혼은 신분 상승까지 목표로 하거든. 어정쩡하거나 몰락한 위치의 여성과 결혼해 봤자 소박한 영지가 고작이지.”
“와, 낭만이 없는 소리다.”
“내가 말 안 했나? 낭만 뒤에는 육욕이 있고 그 뒤에는 생활이 있다. 영지라는 건 그냥 ‘집 짓고 땡’이 아니야. 적자에 빚만 지면 무슨 소용이야.”
무장도 말도 스스로 다 갖춰야 하고, 어쩌다 한번 들르는 손님의 접대도 소홀할 수 없다. 자기 영지를 지키기 위한 투자도 빠뜨리면 안 된다. 봉신의 의무를 진다면 1년에 40일씩 종군하고, 각종 세금도 내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영지는 ‘내 집 마련 성공’보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경영하는데 툭하면 적자인 영세 자영업’이다. 경영난이 한 번이라도 닥쳤다간 결국 빚을 대신 갚아 준다는 조건으로 수도회 따위에 기부하고 죽과 장작만 보장하는 소액 연금이나 받게 된다. 빚이 너무 크면 그마저도 거부당한다.
하지만 리안나는 기사가 아니라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는 그 소박한 영지라도 갖고 싶은데요. 저는 제가 영주가 되면 신날 것 같아요.”
에드워드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직은 자신만만해도 되는 때지만, 결국 다시 올라가지 못한다면 소박한 영지라도 감지덕지할 판이긴 했다. 마크 경처럼 수도회로 들어가는 결말을 맞는다 해도, 그 시기를 유예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성지라는 기회는 남아 있었다.
“뭐, 결국 성지까지 가 본 다음에 할 이야기지.”
그때쯤 베로니카가 편지 뭉치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창구에 우편물을 수납한 다음 에드워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다 샀어?”
“필요한 건. 오늘은 어디서 잘 거야?”
“교회 숙소를 빌리기로 했어.”
“이 지방 영주의 성은 안 들르고?”
“영주의 성은 거리가 어정쩡해. 엘프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너나 나한테 도움될 양반도 아니고. 그냥 지나쳐서 다음 마을까지 가도 될 것 같아.”
“잘됐군. 마침 시장서 그 성의 분위기가 수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수상해?”
“며칠째 사람들이 안 나온대. 병사도 하녀도 기척이 없다는 거야. 때문에 사람들이 세금도 안 내고, 도로에는 도적들이 돌아다닌다더군.”
“확실히 수상한데. 내부에서 싸움이라도 났나?”
“그럴지도. 끼고 싶지는 않지?”
“응. 우리 일 아니야.”
에드워드와 베로니카는 의견 일치를 봤다. 둘의 대화를 가만 듣던 리안나가 끼어들었다.
“베로니카 님은 영지 없어요?”
기겁한 에드워드는 황급히 밴시의 발목을 거꾸로 잡아 들었다.
“남의 재산 내역을 묻는 건 실례야!”
“꺄아아아악! 거꾸로 들지 좀 마요! 언제부터 예의 꼬박꼬박 찾았다고!”
뒤집어지려는 치마를 갈무리하느라 바동바동거리는 밴시를 보자 베로니카는 그만 깔깔 웃어 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은 푸짐한 식사와 함께 시작했다. 교회 숙소 관리인은 아침부터 고기를 먹는 건 위장에 부담스러운 야만적 행위라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에드워드가 돈을 내자 입장을 바꿨다.
“사실 앵글리아 방식의 아침 식사는 이미 이 동네에서도 익숙한 것이죠. 지척이니까요.”
그래서 나온 식사는 커다란 거위 두 마리에 채소를 채우고 마늘과 허브로 양념해 통째로 구운 것이었다. 닭은 알을 낳는 게 일인 데다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고기로는 거위나 기러기 따위가 더 흔했다. 물론 흔하다고 해도 만찬 때나 볼 놈이었다.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리는 요리였지만, 아침 일찍 주문한 덕에 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에드워드와 리안나는 기름이 잘잘 흐르는 거위고기에 절인 양배추를 곁들여 허겁지겁 뜯어 먹기 시작했다. 리안나는 거위 날개를 우물거리며 질문했다.
“어째 오늘 아침 식사는 든든하네요?”
“원래 기사는 고기를 많이 먹는 게 중요하지.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제일 좋은데 말이야.”
뒤늦게 식사에 합류한 베로니카는 식탁을 보자 인상을 썼다.
“앵글리아식치고도 평소보다 많은데?”
“마지막 앵글리아식 아침 식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여기는 이런 주문이 익숙하겠지만 말이야.”
“벌써 향수병을 대비하니?”
“뭐, 본격적인 모험에 대비한다고 생각하자고. 여기부터는 앵글리아 밖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앵글리아 밖은 치안이 안 좋아요?”
리안나가 질문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여러 귀족들이 항상 전쟁 중이거든. 너도 들었지? 영주가 성문 걸어 잠그자마자 도적들이 침범했다는 거. 나가자마자 말썽에 휘말릴지도 몰라.”
리안나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볼 속의 고깃덩이를 목으로 삼켰다. 꿀꺽. 베로니카는 자기 자리에 앉은 다음 리안나에게 고기를 더 덜어 주고는 자기 몫을 그릇에 놓았다. 그리고 에드워드에게 질문했다.
“또 애를 던질 거야?”
“인간형에겐 최고의 무기 아냐?”
“그러지 좀 마세요!”
리안나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베로니카도 동의했다.
“앞으로는 비상시 외 금지.”
“왜?”
“부수적 피해를 발생시킬 위험이 너무 크니까. 앞으로 리안나는 기본적으로 보호 대상으로 간주해. 갑자기 울어 버리면 우리도 위험하다고.”
“우린 영향 안 받잖아?”
“가파른 산길이나 흔들리는 갑판 위 같은 데서 그런 일 터져도 우리가 안전할까? 하인, 동행, 선원, 혹은 마주 오던 사람들이 뻗어 버린다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리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의 속셈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그렇다고 재갈 물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결국 에드워드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별도의 귀마개와 재갈을 준비했다. 리안나에게 직접 묶지는 않았고 재갈을 그녀에게 맡겼지만.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면 네가 알아서 매라.”
나름 납득이 가는 타협이었다. 리안나는 꺼림칙해했지만 베로니카가 충고를 하자 군말 없이 그 재갈을 받았다.
“긴급 상황에서 에드워드가 직접 재갈 물리면 그때 힘 조절이 제대로 될 거라고 장담 못 한다?”
턱이 머리와 분해되어 따로 놀 거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짐마차를 추가한 일행은 도시를 떠나 교외로 접어들었다. 시야가 트이고 경비가 돌아다니는 곳에서는 부유한 자들의 별장이나 농장이 보였지만, 숲이 깊어지고 길이 좁아질 때쯤엔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치안이 나빠진 탓인지 사람마저 줄어서, 곧 길에는 에드워드 일행만 남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가 발생했다.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함성소리. 에드워드는 단번에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오, 전투군.”
리안나는 불편해진 표정으로 질문했다.
“뭔데요?”
“열 명 남짓한데. 이 모퉁이만 돌면 보이겠군.”
“피할까요?”
“다른 길 없어. 돌파한다.”
에드워드다운 대답이었다.
일행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인 것은 금발 엘프 하나와 인간 11명의 싸움이었다. 엘프는 가벼운 가죽갑옷을 입은 여자였는데, 커다란 날이 달린 글레이브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 대는 고수였다.
반대로 인간들은 제대로 무장한 것은 셋, 나머지는 냄비나 물통을 투구 삼은 잡병이었다. 그들의 주무기는 엘프의 글레이브 못지않게 긴 창이나 폴암류였지만 실력은 천지 차이였다. 다수로 몰아붙이는데도 타격을 못 줬고, 오히려 반격을 두려워하며 슬금슬금 쫓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는 짧은 사슬갑옷에 코등이 달린 투구를 쓰고 검을 든 자였는데 한 발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엘프와 인간 지휘관의 눈이 에드워드 일행을 향했다. 인간이 먼저 외쳤다.
“도와주시오!”
“끼어들지 마요.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엘프의 경고가 뒤따랐다. 에드워드는 말을 멈춘 다음 느긋한 어조로, 그러나 큰 소리로 말했다.
“어느 쪽을?”
다들 당황했는지 잠시 싸움이 멈췄다. 완전무장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는 아무리 부족해도 싸움의 판도를 바꿀 능력이 있는 자였다. 느긋해 보이던 엘프도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인간 지휘관이 다시 말했다.
“아니, 같은 인간끼리 서로 좀 도와야 하는 것 아뇨?”
“여기는 엘프 도시와 동맹인 영주의 영역이고, 귀관들은 아무리 봐도 영주의 병사들은 아니고, 나는 그저 지나가는 기사다. 내가 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너희를 도와야 되냐?”
“그럼 엘프를 도울 거요?”
에드워드는 엘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녹색 눈동자와 부드러운 눈매의 미녀였다. 가죽 갑옷을 입어도 그 곡선이 드러나는 굉장한 몸매를 가진. 하지만 에드워드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난 앵글리아인이고 엘프들에게 유감이 많다. 그저 지나갈 테니까 길이나 비켜라.”
하지만 인간 쪽 지휘관은 여전히 에드워드를 경계했다. 그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저년과 같이 노시겠소?”
순간 에드워드는 ‘좋다’고 수락할 뻔했다. 베로니카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엘프는 정의와 공권력에 호소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이놈들은 도적이에요. 교회 소속 기사가 편들면 영주가 가만있지 않을걸?”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교리법무성의 문장을 걸쳤지만 난 교회 소속이 아니다. 이 잘난 이단심문관의 파트너지. 그리고 그 영주 요즘 성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오는데, 엘프는 소식이 느리네.”
베로니카가 뒤에서 이죽거렸다.
“너도 어제 알았잖아.”
반대로 엘프는 당황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영주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낸들 아나?”
“그럼 신성한 도시 아르데니아의 이름으로! 저는 아르데니아의 순찰자예요. 절 도우면 사례하죠.”
에드워드는 ‘엘프의 사례’에는 관심을 보였다.
“엘프는 정조 관념이 그닥이라던데?”
“어머나, 인간은 다 똑같군요. 이놈들도 그 소리 하던데.”
에드워드는 도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쪽 지휘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솔직히 엄청난 미녀잖소.”
“동의는 하는데, 그 욕망만으로 고수에게 덤비는 건 좀 무모하지 않나?”
“육욕의 문제는 가능성이 작더라도 도전하는 데 의의가 있는 법!”
“변태 새끼. 하지만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에드워드는 박수를 쳤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주점만 가면 혼자 술 마시던 여자 고수들에게 썰리는 불량배들이 보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