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54)
54화 토끼눈
살인 토끼. 아서왕 전설을 패러디한 블랙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선과 성배>에 등장하는 괴물. 갑옷 입은 기사를 통조림처럼 까 버리는 미친 토끼. 이후 글과 영화와 만화와 게임에서 토끼가 나오면 꼭 한번은 패러디되며, 만렙토끼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에드워드의 걱정은 덩굴처럼 다양하게, 쏘아진 화살보다 빠르게 뻗어 나갔다.
‘떠돌이 주술사 니코스가 재미 삼아서 생각해 낸 게 그 만렙토끼와 똑같은 놈일 확률은? 니코스가 나 에드워드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환생일 확률은? 아니면 세계를 넘나드는 고약한 악마가 주워들은 것 중에 지구의 살인 토끼가 있고 저게 그 구현일 확률은?’
에드워드는 긴장한 채 중얼거렸다.
“이 세상이 희극이라면 그 작가 새끼도 어떤 의무감을 느꼈으려나.”
베로니카는 철퇴를 꺼내 그의 뒤에 선 다음 물었다.
“너 지금 신 이야기하는 거니?”
에드워드는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사제의 신경을 덜 긁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아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운명이 변덕스러운 거 어디 하루 이틀 보니? 너 너무 긴장한 것 같다? 무슨 대악마 상대하니?”
“하필 토끼잖아.”
“이빨 힘을 보니 엄청 센 토끼 같긴 하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악랄하고 잔인하고 사나운 토끼일 거야.”
“너무 굳지 마. 악마도 토끼 모양일 때는 별거 아니더라는 설화 많잖아.”
사람 앞에서 쥐나 토끼 따위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낭패를 본 악마들 이야기. 하지만 이놈도 그런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가 “살인 토끼가 상대면 최종 결전 분위기 잡아도 이상할 건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토끼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에드워드는 놈을 열쇠검을 내리쳤지만, 놈은 너무 작고 빨랐다.
“꺄악?!”
놈은 에드워드를 지나쳐 베로니카의 겨드랑이 쪽을 물고 늘어졌다. 콰직! 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베로니카의 사제복이 아래로 길게 찢어졌다. 사제복과 그 아래 사슬갑옷은 물론 그 아래 옷까지 단숨에 찢겨 나가 흰 피부가 드러났다.
“으어어어어!”
황급히 달려든 밀란이 토끼를 붙잡고 늘어지자 옷은 더 길게 찢어졌다. 부서진 사슬이 사방으로 튀면서 베로니카는 다리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그녀는 기겁해서 외쳤다.
“뭐야, 이 미친 토끼!”
“야, 꽉 잡고 있어!”
에드워드는 사제복을 문 채 밀란에게 붙잡힌 토끼를 향해 열쇠검을 내리찍었다. 그제야 놈은 베로니카의 옷자락을 놓고는 몸을 피했다.
졸지에 화끈한 옆트임을 자랑하게 된 베로니카는 얼이 빠진 채로 토끼를 보았다. 건장한 시골 청년인 밀란도 놈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끌려다녔고 에드워드는 이리저리 날뛰는 토끼와 밀란의 손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불행히도 밀란의 손을 베지 않으면서 토끼만 베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으아아악!”
에드워드의 칼이 잠시 빈틈을 보이는 사이 토끼는 몸을 홱 돌려 밀란의 손가락을 물었다.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이 나가떨어지면서 밀란이 비명을 질렀다. 자유로워진 토끼가 에드워드를 향해 손가락을 뱉는 순간, 그는 놈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멀리 날아가는 토끼를 보고 에드워드는 중얼거렸다.
“동물 학대 킥이다. 망할 놈.”
에드워드의 최우선 관심은 베로니카였다. 그는 나무 아래 쓰러지다시피 한 베로니카를 향해 달려가 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놀라기만 했을 뿐, 어디 다친 곳이 없었다.
“상처 없지? 보호 주문 미리 걸어. 보기는 좋네. 옆트임 말이야. 사제복 개조하지 않을래?”
그제야 베로니카는 에드워드의 눈길이 묘한 데 있다는 걸 알아챘다. 겨드랑이, 옆가슴, 옆구리, 엉덩이, 허벅지, 발목으로 쭈욱 이어지는 노출. 베로니카는 그의 뺨을 연거푸 때리며 밀쳤다. 짝짝짝!
“눈 돌려!”
“나중에 느긋하게 보여 주라.”
에드워드는 낄낄 웃으면서 일어섰다.
“어이, 밀란. 괜찮냐?”
“피, 피가 안 멈춥니다…….”
껍질 속으로 들어간 달팽이처럼 몸을 한껏 웅크린 청년의 말이었다. 용감하게 토끼를 붙잡았을 때의 투지 따위는 더 찾아보기 힘들었다. 에드워드는 혀를 찼다. 초짜는 전투 불능, 사제는 정비 중.
“저 미친 토끼는 악마의 주술이 낳은 결과물답게 사제부터 노린 게 분명해!”
베로니카가 말했다. 별로 도움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질문했다.
“혹시 이단심문관은 성유물 같은 거 없어?”
“있으면 내가 이러고 살겠니?!”
영화에서 살인 토끼를 끝장낸 ‘안티오키아의 성스러운 수류탄’ 같은 건 기대하지 못한단 뜻이었다.
부스럭. 다시 돌아온 토끼는 이번엔 에드워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먼저 몽둥이를 들고 접근했던 밀란을 공격할 때도, 주문을 외울 준비를 하는 사제를 공격할 때도 기사가 훼방을 놓았다. 주둥이가 피로 물든 토끼의 다음 생각 정도는 에드워드도 알 수 있었다.
놈의 다음 목표는 에드워드였다.
“아, 시발.”
에드워드가 중얼거리는 순간 토끼가 뛰어올랐다.
* * *
정령의 도움을 받는 헬레나는 주술 걸린 토끼와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지만 따라잡지는 못했다. 놈은 그냥 토끼는 불가능한 속도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녀가 던지는 다트의 명중률은 기대할 수 없었다.
드워프 가르달은 계속 뒤처지기만 했다. 그는 드워프치고는 빠른 편이었고, 눈썰미가 좋아 지름길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결국 투척용 도끼의 사거리에 표적을 넣을 수가 없었다. 엘프와 토끼가 서로를 노려본 채 휴식하고 있으면 그새 엘프를 따라잡는 게 고작이었다.
약간의 옥신각신 끝에 헬레나와 가르달은 처음으로 ‘협력’이란 걸 해 보았다. 엘프가 몰고, 드워프가 잡는다. 간단한 전략이었지만 둘이 그 결론을 내놓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헬레나는 다트를 던지는 것으로 토끼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었다. 양치기들이 돌을 던져 양을 모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양을 왼쪽으로 보내고 싶으면 양의 오른쪽으로 돌을 던지듯. 그렇게 굽이길을 몇 번 지나치자 겨우 목적지로 토끼를 몰 수 있었다.
“지금!”
헬레나가 소리치는 순간, 약속된 장소에 숨어 있던 가르달이 도끼를 던졌다. 도끼는 토끼의 이마 정중앙에 명중했다. 놈은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를 돌더니 땅에 널브러졌다.
“보았냐, 내 솜씨를!”
가르달은 호방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숨을 몰아쉬던 헬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편히 앉아서 기다린 결과를 축하해요.”
“네가 활쟁이였으면 뛰어다닐 일이 없었겠지. 아니면 다트라도 제대로 맞히든가.”
“사람이 어쩌지 못하는 문제로 비난하지 마세요.”
“성격을 고쳐. 참을성 없는 백치를 누가 좋아하냐?”
“백치라니, 제가 어떤 면에서요?”
“남자가 만티코어를 잡아 와야 인정해 준다는 여자가 백치지, 그럼 뭐야?”
“이상하게 왜곡시키지 마요. 저는 저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네 동생도 납득을 못 하더라며?”
엘프와 드워프는 급해야 손을 잡는다. 둘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문제의 토끼와 토끼발 부적을 회수한 그들은 일행이 기다리는 큰소나무로 향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우리 둘이 합심해서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부터는 진짜 동료라고 해도 되겠지. 에드워드 경이 좋아하겠군.”
가르달이 신나게 앞서나가면서 말했다. 헬레나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밴시와 망령은 서로 싸워 대도 에드워드 경이 안 말리던데요?”
“걔들은 노예잖아.”
“아하.”
“아랫것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아야 주인이 다루기 편하지. 하지만 기사의 동료들은 달라. 제 역할을 해낼 뿐만 아니라 서로 호흡도 맞춰 봐야지.”
“그럴싸하군요.”
“뭐, 너는 굳이 따지자면 노예와 자유민 사이에 그 가슴이 낀 것 같다만.”
“……당신의 언행을 조금이라도 고평가하려던 제가 미워지네요.”
엘프 헬레나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에드워드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문제였지만 가르달의 지적이 옳았다. 실제로 헬레나가 마지막까지 에드워드 곁으로 돌아갈지 말지 갈등케 한 문제기도 했고.
에드워드는 따라올지 말지 자유롭게 결정하라고 했지만, 그건 ‘헬레나의 신체 일부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해제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드워드는 절대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어때. 네가 시작한 일인걸.”
“해방을 선언하고 완전히 제 자유 의지로 고르게 했으면 그를 조금 더 고평가했을지도 모르죠. 아예 강제했으면 혐오했겠고. 하지만 그는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말을 뱉은 적이 없어요. 저를 풀어 주곤 약올려서 돌아오게 했지. 묘한 남자예요.”
“젖소는 들판에 풀어놔도 주인이 있다 이건가?”
“아마도. 비유한 동물은 좀 마음에 안 드는군요.”
“비유에 뭘 그리 신경 써? 여하튼 그는 네게 응답했어. 이젠 네가 책임져야지. 만티코어를 잡은 위대한 기사한테 짐이 될 수는 없잖아.”
헬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그저 그가 조금만 더 빛의 미덕에 가까운 남자였다면 더 좋았…….”
“응? 저게 뭐야?”
가르달이 갑자기 멈췄다. 헬레나는 그의 뒤통수를 한번 쏘아보고는 그의 시선을 쫓았다.
만티코어를 잡은 위대한 기사는 열쇠검을 입에 문 흰 토끼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토끼 새끼!”
토끼와 힘 싸움을 벌이는 기사. 기기묘묘한 광경이었다. 기사와 토끼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붙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얼이 빠진 가르달 뒤에서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만티코어를 잡은 기사가 토끼를 상대로 고전…….”
“아, 저놈 역시 보통 토끼가 아니군!”
가르달은 가까스로 납득 가능한 결론을 내렸다. 엘프와 드워프가 쫓던 토끼도 보통 토끼는 불가능한 속도로 도망쳤다. 세트로 준비된 저 토끼는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해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는 리안나가 밀란을 지혈해 주고 있고, 베로니카가 옷이 찢어진 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저 토끼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증거였다.
헬레나는 글레이브를 쥐고는 가르달에게 질문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에드워드 경이 과하게 위축되었어요. 긴장감이 느껴져요. 마치 까딱 실수하면 죽는다는 느낌, 절대 열세라는 느낌…….”
“싸움이 언제는 안 그랬나?”
“그렇긴 한데 저건 만티코어 때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그때 베로니카가 나섰다.
“타인에게 해를 끼칠 목적으로 그 죄와 표식을 은닉한 자, 주님께서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
번쩍! 그녀의 철퇴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에드워드의 열쇠검을 물고 있던 토끼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러더니 놈의 얼굴에서 검은 뿔이 수염과 갈기처럼 무수히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눈도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검붉은색으로 변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가르달은 경악했다.
“뿔 달린 토끼! 볼퍼팅어야! 그냥 주술 걸린 토끼가 아니었어! 낭패군! 사제 아가씨의 주문도 놈의 위장을 걷어 낸 것뿐이야!”
가르달은 에드워드를 돕기 위해 투척용 도끼를 들었다. 베로니카도 서둘러 다음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당황한 사람들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헬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에드워드 경이 여유를 찾았는데요?”
“뭐?”
“그리고 약간의 분노도 보이는 것 같은…….”
가르달이 합세하거나 베로니카의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에드워드는 다시 볼퍼팅어와 대적했다. 그는 열쇠검을 던지고 분노에 찬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토끼를 향해 달려들었다.
“만렙토끼가 아니잖아!”
일행이 납득하지 못할 외침과 함께 볼퍼팅어는 찢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