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55)
55화 토끼탕
에드워드가 분을 못 이겨 볼퍼팅어의 사체를 거듭 짓밟는 사이, 베로니카는 찢어진 옷을 옷핀 몇 개로 대충 고정했다. 그리고는 가르달과 헬레나가 챙겨 온 토끼발 부적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하고 강력한 부적이네요. 겉보기엔 평범한 토끼발 부적 같지만 최소 3개 이상의 부적이 합쳐진 형태예요. 위치도 신경 써서 선정했고요. 게다가 파수꾼까지 공을 들여서 배치했죠. 이건 그냥 불태우는 걸로 해결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헬레나가 물었다. 베로니카는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전문가가 시간을 들여서 장치를 하나하나 정화해야죠.”
그 대답을 들은 가르달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시간 걸린다는 뜻이군.”
베로니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니코스가 아직 작동시키지 않은 것부터 시작하죠.”
“아직?”
“네. 한번 사용하면 끝나는 부적이죠. 이건 정화할 필요 없이 그냥 사용해서 없애 버려도 되겠네요.”
“웃기는 놈. 건망증이 심하다더니 그것마저 까먹은 거요?”
“아뇨. 놈은 아마 여기로 돌아올 생각이었을 거예요.”
“무슨 뜻이오?”
“직접 보시죠.”
베로니카는 토끼발의 새끼발톱을 뽑았다. 뽁. 그녀는 그걸 땅에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행은 거대 토끼들한테 포위당했다.
“왁! 저리 가! 이제 토끼는 싫어!”
리안나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토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웃으면서 발걸음을 뗐다.
“그만 가죠. 가르달, 밀란 좀 일으켜 줘요. 리안나, 쟤 손가락 챙겼지?”
“네. 그런데 이 토끼들은 어쩌죠?”
“이제 이놈들은 날 따라올 거야.”
베로니카의 말대로였다. 토끼들은 그녀를 줄줄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가르달은 감탄했다.
“이게 그 발톱 부적의 효과군.”
“네. 니코스는 진심으로 마을에 거대 토끼를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결과가 예상을 벗어났지만.”
“대체 놈이 뭔 짓을 한 거요?”
“항상 그렇듯 건망증이 도진 거죠. 부적에 숫자 하나를 잘못 써 놨더라고요.”
“실력만 좋은 돌팔이 자식! 찾으면 두개골을 쪼개 놔야겠군!”
가르달이 모순된 것 같지만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에드워드는 허리가 두 쪽이 난 뒤 짓밟힌 볼퍼팅어의 사체를 들고 베로니카의 뒤에 따라붙었다. 베로니카는 그 흉측한 결과물을 흘겨보았다.
“3피트 이하 접근 금지.”
“이 뿔난 토끼는 뭐야?”
“볼퍼팅어. 어지간한 맹수나 오크 전사도 달아나는 미친 토끼 괴물이지.”
“오, 그럼 업적 하나 추가군.”
“그러네. 꼴은 좀 우스웠지만. 만렙토끼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야?”
“기사와 극상성이지.”
“이단심문관도 들어 본 적 없는 몬스터인데.”
“세상은 넓지.”
“네 꿈이나 앵글리아 전승에서나 나오는 거 아냐?”
“그러길 바란다.”
존재하지도 않고 만날 일도 없는 것이 최선이긴 했다. 베로니카는 장난삼아 되물었다.
“꺽다리 왕 로버트와 만렙토끼 중에 뭐가 더 무서워?”
“왕.”
즉답이었다. 베로니카는 깔깔 웃고는 질문했다.
“왜?”
“그 양반은 만렙토끼를 잡을 성유물도 몇 개 갖고 있을 테니까.”
“만렙토끼 상대법은 성유물인가 봐? 혹시 모르니 기억해 둘게. 혹시 베트콩이란 것도 그만큼 무서워?”
“걔들은 나 태어나기도 전에 멸종해서 나도 몰라.”
“이상하게 구체적이네. 그나저나 이 토끼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에드워드는 밀란을 향해 돌아보았다. 출혈과 공포 등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그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베로니카한테 도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데려갈 순 없으니 마을에 맡겨야지.”
잠시 뒤, 마을은 갑자기 들이닥친 토끼 떼에 분주해졌다. 대부분의 토끼는 광장에서 도축되었지만 특히 크고 건강한 놈들은 울타리에 갇혔다. 떠돌이 주술사 니코스의 선물은 어쨌든 마을에 무사히 도착한 셈이었다.
드워프 가르달은 유수의 언변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볼퍼팅어가 얼마나 흉악한 놈인지 설명해 주었다. 작살이 난 볼퍼팅어의 시체는 훌륭한 증거물이었다. 거대 토끼들의 수장이며 베로니카의 사제복을 찢고 밀란의 손가락을 잘라 먹은 괴물 토끼! 마을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일행은 광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마을회관에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잔치가 열리게 된 탓이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꼬맹이들 앞에서 쇳조각으로 힘자랑을 하며 낄낄 웃다가 베로니카에게 물었다.
“볼퍼팅어면 대업적 2호는 되나?”
“아무리 그래도 만티코어급은 아니지.”
“쳇.”
청년 밀란은 마을 사람들한테 환영 받았다. 그의 어머니가 인심을 잃었든 어쨌든, 그는 손가락을 다쳐가면서 마을에 공헌했으니까. 다행히 베로니카의 주문으로 그의 손가락은 도로 붙었다. 절단면을 따라 끔찍한 흉터가 남긴 했지만, 흉터가 곧 훈장 취급받는 세계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주술사 양반을 만나면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군요.”
밀란은 아직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베로니카는 피식 웃었다.
“전체적으로는 분명 마을에 큰 이익이긴 하네. 니코스가 개입한 일 중에서는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야.”
“그 정도로 위험한 놈입니까?”
“글쎄. 건망증만 안 도지면? 그런데 아무 문제도 없는 결말이 교회에 보고될 리가 없잖아. 기록에 남는 건 대개 건망증 때문에 사고가 터진 예들이니까.”
“그렇군요.”
“그러니 사람들도, 그놈도 멈추지를 않는 거지만. 너희도 이 결말에 혹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
밀 등 주요 작물은 이미 수확한 뒤라 큰 피해가 없지만, 시장에 팔 상품 작물과 야채는 그야말로 끝장이 난 상황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거대 토끼의 고기와 가죽은 그 피해를 메꾸고도 남았다. 산 채로 가둔 토끼들이 새끼를 친다면 마을의 고정적인 수입원이 될 수도 있었다. 밀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결과가 좋을 때도 있다면, 다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주술사를 찾지 말란 법이 있는가? 그게 큰 위기를 가져올 뻔한 건망증 주술사 니코스라고 해도?
“어려운 문제군요. 이 마을엔 사제님도 안 계시니.”
“어둠이 현실의 어려움을 비집고 들어오니 빛의 싸움은 항상 위태롭지. 다음에 만나거든 잊지 말고 엉덩이를 걷어차 버려. 부적을 회수하러 여기 다시 나타날 확률이 높거든.”
“이단심문관께서도 여기서 놈을 기다렸다가 잡으실 겁니까?”
“언제 올지 몰라서 그러진 못해. 그 건망증 때문에 여기 안 올 수도 있고.”
베로니카는 수많은 토끼들이 도축되는 광장으로 눈을 돌렸다. 가르달과 마을 사람들은 신나게 토끼 가죽을 벗겨 내고 있었다. 양이 너무 많아서 일부 토끼는 그냥 수레에 실어서 다른 마을이나 소도시에 박피와 무두질을 맡겨야 할 판이었다.
“뭐,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 온다면 잡아도 되겠지만.”
베로니카가 대화를 끝내는 순간, 한 마을 처녀가 토끼고기를 가득 담은 질그릇 몇 개를 갖고 들어왔다. 재료야 여전히 불리한 조건의 여름 들짐승이지만, 마을 처녀들의 솜씨는 그래도 가르달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에드워드가 술잔을 들어 올리는 걸 신호로 잔치가 시작되었다.
한참 뒤. 가르달이 굴 속의 토끼처럼 리안나를 들이박는 시늉을 해 보여 다들 폭소할 때쯤, 그리고 리안나가 거기 항의하는 의미로 가르달의 맥주잔에 걸레 짠 물을 넣으려 할 때쯤, 허리띠의 망령 캐슬린이 그걸 가르달에게 고발할 때쯤.
노예들이 서로 사이 나빠야 하는 이유를 증명할 때쯤, 에드워드는 바람 좀 쐰다는 핑계로 회관을 나왔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밀란은 어느 정도 평가를 회복했다. 기사를 따라가 괴물과 싸우고 돌아왔다는 것, 마을의 손해를 메꾸고 남을 수익이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촌장 자리를 다른 일가에게 넘기겠다는 선언이 큰 역할을 했다. 그대로 촌장을 물려받겠다 해도 반대할 사람이 없던 상황에 나온 양보여서 더 큰 박수가 나왔다.
뒤이어 밀란은 볼퍼팅어를 물리친 에드워드에게 죽은 아버지가 남긴 허리띠를 추가 사례로 제시했다. 캐슬린을 부리려면 허리띠가 하나 더 필요하니까. 에드워드가 그걸 수락하는 건 ‘지나가던 영웅’이 밀란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기꺼이 인정했다.
이제 더 이상 밀란에게 시비를 걸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잔치는 새 촌장 선발 기념 연회로 이어졌고 더 떠들썩해졌다. 당선된 일가가 술과 음식을 더 내놓으면서 판이 커졌다. 좋은 결말이다. 모두가 행복해졌다.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밀란이 촌장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한 순간 반발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야유를 받고 퇴장했다.
에드워드는 그 퇴장한 사람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전 촌장이 된 여자의 집이었다. 문을 두드려 보자 바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썩 꺼져! 넌 내 아들도 아냐!”
에드워드는 씩 웃었다. 밀란과 헷갈린 게 분명했다. 에드워드는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나?”
침묵. 잠시 뒤 문이 조금 열렸다. 황갈색 머리카락, 아가티우스를 닮은 이목구비의, 깡마른 하프 엘프 여자. 눈은 이미 충혈되었고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녀는 눈가를 훔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란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허리띠 지금 드려요?”
“좋지. 들어가도 되나?”
촌장은 잠시 갈등하더니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에드워드는 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궤짝을 하나 열고는 그 안에서 허리띠를 꺼냈다. 큼직한 황동 장식판들이 달린 것들이었다. 그녀가 공손히 그걸 내밀자 에드워드는 냉큼 손에 받았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시골 마을의 물건치고는 확실히 좋군.”
“겨우 그것 하나 때문에 오신 건 아닐 텐데요.”
그녀는 몸을 돌려서 궤짝을 닫았다. 에드워드는 그 허리띠로 자기 왼손의 주먹을 묶은 다음 말했다.
“내 손을 묶는 건 똑똑한 아가씨가 가르쳐 준 방법인데, 이거 단점이 하나 있더군. 나 혼자서는 한 손만 묶을 수 있단 거야.”
“무슨 말이죠?”
“나머지 한 손은 여자가 묶어 줘야 한단 말이지. 여자의 동의가 필요해.”
“네?”
“그래야 여자가 침대 위에서 안 다치거든.”
그제야 에드워드한테로 돌아선 촌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을 구해 주신 데 기쁨으로 보답하는 여자의 역할은 다른 처녀들한테 주시죠. 저는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요. 그녀들은 기사님께 몸을 못 던져서 안달일 테니.”
“나도 기준이 있잖아. 그리고 그쪽은 밀란에게 넘기면 돼.”
“도리어 더 거부감이 드는 말이군요. 마을 처녀들의 환호를 얻으려고 가족의 등을 찌른 아들놈 따위…….”
에드워드는 씩 웃고는 왼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손수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너도 환호하게 해 주지. 거래 하나 어때?”
전 촌장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긴 귀를 까딱거렸다.
* * *
겨우 술에서 깬 밀란은 엎어지고 넘어진 사람들을 넘어 회관 밖으로 나왔다. 그는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앞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엘프 여전사 하나가 앉아 있었다. 헬레나였다.
“어, 엘프분이 저희 집에 무슨 일이시죠?”
헬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님 호위요.”
“예? 기사님이요?”
그 순간 여자가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 뒤 에드워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술에 잔뜩 취한 데다 바지만 겨우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밀란을 보고는 그 자리에 섰다.
“어, 왔냐?”
“기사님, 잠시만요! 술이랑 안주 더 가져올게요! 한 번 더 해 주세요!”
집 안에서 울리는 어머니의 달달한 목소리에 밀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워드는 그 표정을 보고 중얼거렸다.
“모자 맞긴 맞네. 떫은 표정이 닮았어. 아가티우스도, 너도, 저 여자도.”
밀란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즐기고 계셨나 보군요. 나중에 다시 올까요?”
“너도 하룻밤 여자랑 놀고 와. 허리띠는 이미 받았어.”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자기 어머니가 외간남자랑 노닥거리는 걸 눈앞에서 보길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시골 남녀들은 귀족과 달리 순결에 그리 빡빡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색정의 도가니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풍속과 행동이 흔했다. 게다가 상대는 마을의 은인인 데다 귀족이고 강력한 기사며 어머니도 동의한 남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장 밀란 자신도 기회가 온다면 마을의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릴 판인데, 어머니와 에드워드한테 성질을 부릴 순 없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애써 괜찮은 척하는 밀란과, 에드워드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그 어색함은 곧 괜찮은 척하려는 허세와 허언들로 이어졌다. 남자들이 갈피를 못 잡는 곧 엉뚱한 말들만 늘어놓다가 서로 선을 넘는 수위의 발언들을 하는 순간, 헬레나는 베로니카처럼 에드워드의 등짝을 때리고 말았다.
“1절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