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8)
8화 순례자의 죽음 (1)
암브로즈 시로 가기 전에 있는 어느 소도시에서는 마상창 시합이 한창이었다. 어느 두 귀족 가문의 결혼 잔치 덕에 열린 대회였는데,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구색은 다 갖추었다. 준비된 모의 전장에서 수많은 기사가 두 무리로 나누어 서로 격돌했다. 사람의 비명과 말 울음소리.
평소라면 에드워드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앵글리아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아는 얼굴들도 종종 보였다.
하지만, 이제 남들의 잔치였다. 에드워드는 심통 난 표정으로 떠들썩한 축제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다음 시합을 위해 대기하던 몇몇 기사가 에드워드를 향해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난 이번 시합에 참가하지 않소. 임무가 있어서.”
그러면 기사들은 에드워드의 서코트에 그려진, 교리법무성의 흰색 망치 문장을 보고 납득했다는 듯 물러섰다.
사실 ‘순례나 임무 중인 기사는 시합 참가 금지’라는 규정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에드워드가 마상창 시합에 부정적인 교회의 눈치를 보거나, 베로니카 호위에 주의를 쏟아야 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오히려 단상 구석에서 그 경기를 흥미롭게 보는 중이었다. 그녀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에드워드는 당장 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이유는 에드워드가 받은 저주 때문이었다. 괴력의 저주가 걸린 손으로는 시합에 참여하지 못한다. 사정을 아는 기사를 만난다면 공정성 시비가 걸릴 것이다. 난전 속에서 말고삐를 잘못 쥐면 끝장이다.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기만 해도 창대 파손으로 전투 불가다.
전투도 결혼도, 시합도, 명성도, 전부 먼 나라 이야기가 된 기사.
“처량하구만.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회가 작고 신참 기사들의 비중이 높아서 에드워드가 아는 얼굴들의 비중이 그리 높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베레스포드 공작가 밑에서 같이 배운 동기들을 만나는 건 사양이다.
에드워드는 문득 자신과 함께 선두 그룹을 지배했던 동기 중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전설에서 빼다 박은 듯한 모범생이었다. 한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앵글리아엔 사악한 것들과 싸울 기회가 적다며 바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고 들었다. 유쾌하고 잔인했던 어느 동기와는 매번 의견이 충돌했는데, 에드워드가 그 둘 사이에 끼어서 고생했다는 것 빼고는 그럭저럭 잘 맞았던 친구였다. 어쩌면 성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그가 생각난 이유는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인 기사 때문이었다.
집단전을 끝내고 개인전으로 넘어가는 시점, 다들 귀부인이나 숙녀에게 주목받고 싶을 타이밍이었다. 베로니카한테는 검은색 섞인 금발의 풋내기가 꼬였다. 이제 막 기사 서임을 치른. 다른 놈들은 다 호화롭게 차려입은 정면의 귀부인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그 명예를 받았는데, 이놈은 구석 자리의 베로니카에게 흥미를 보였다. 싸움박질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베로니카 아래로 말을 몰았다.
“고위 가문의 여사제님,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의 증표를 하나 받아도 될지요?”
베로니카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답변했다.
“신기한 분이군요. 일개 사제한테서 명예를 받길 원하다니.”
“저는 제게 가장 빛나 보이는 분을 택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축복도 중요하지요.”
“마상창 시합은 교회가 안 좋게 보는데요?”
“그러니 더욱 사제님의 보증을 받고 싶군요.”
풋내기와 노닥거리는 건 재밌는 일이다. 베로니카는 소매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그걸 신인 기사 앞에서 흔들었다.
“그대가 정말로 신실한 자라면, 세 가지를 맹세하세요. 오늘 우승하고, 더는 마상창 시합을 하지 않고, 성스러운 전투에 매진하겠다고. 그리하면 교리법무성과 캠벨 가문의 이름으로 된 소개장을 드리죠. 이것 하나면 성지까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교회와 기사단이 당신을 도와주고 환대할 거예요.”
단상 주변의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소개장은 탐낼 만한 물건이지만, 앞의 둘은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우승하고 다시는 대회에 나오지 말라니. 베로니카는 소개장에 입술을 쪽 맞추었다.
신인 기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베로니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개장은 이제 제 겁니다. 이랴!”
신인 기사는 말을 몰고 다음 시합을 위한 대기열에 합류했다. 에드워드는 베로니카를 슬쩍 째려보았다.
“야, 신참을 너무 놀리지 마라.”
“어머, 질투하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제오늘 서임했을 놈한테 앞으로 마상창 시합을 하지 말라니, 무슨 엄청난 조건이야?”
“기사들이 맹세 깨고 속죄하는 거 한두 번 보는 줄 아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성지로 가라고 해 주지 뭐.”
이렇게 불쌍한 기사 하나가 낚였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리하다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단상 아래 광대 하나가 소리쳤다.
“기사 양반들, 미모의 여사제께서 이번 우승 상품으로 교리법무성과 캠벨 가문의 소개장을 추가하셨습니다.”
적절한 왜곡이었다. 참가한 기사들은 창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베로니카는 깔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쟤들 다 성지로 보내 버려야지.”
“무서운 년.”
“그 기사, 몇 번째 조야?”
“세 번째.”
나팔 소리와 함께 첫 대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조가 서로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일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두 기사는 격돌했다. 와장창! 에드워드는 말끼리 부딪치는 바람에 공중으로 날아가는 기사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둘 다 죽었군.”
* * *
아무리 조심해도 불의의 사고는 따라오기 마련. 마상창 시합에서 죽으면 교회 묘지에 안 묻어 주겠다는 으름장 따위는 사실 별 효과가 없었다. 베로니카의 예에서 보이듯, 교회 사람들도 즐기는 게 마상창 시합이었으니까. 게다가 교회 묘지에 묻히지 않은 시체는 정말 재수 없는 경우 언데드로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선 성직자들은 대충 눈감아 주곤 했다.
베로니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단상 아래로 내려와 죽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이 소개장을 받는 조건에는 앞으로 마상창 시합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걸려 있었죠. 오늘 죽은 이 기사는 자신의 맹세를 지켰군요.”
편한 대로 갖다 붙이는 논리였지만 장례식을 치르기엔 그걸로 충분했다. 그의 지인들은 베로니카에게 감사를 표했고, 베로니카는 ‘정 보답하고 싶다면, 성지로 한번 오라’는 상투적인 말로 답했다. 그들 중 한둘만이라도 정말 성지에 온다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문제의 신인 기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살았다. 그리고 우승했다.
단상을 오르락내리락하다 수여식 때를 간신히 맞춘 베로니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개장을 건넸다. 신인 기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걸 받았고, 주변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정말로 우승할 줄은 몰랐는데요.”
“사제님의 미모와 은총 덕분이죠!”
신인 기사의 말에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기사는 베로니카를 따라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그녀는 교묘한 말로 거절했다. 요약하면, 일이 바쁘고, 길이 멀고, 호위는 이미 왕실이 붙여 준 기사가 있어서.
신인 기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질척하게 들러붙지 않았다. 기사가 숙녀의 명예를 걸고 대회에 참여하는 건 일회성도 많았다. 그럴싸하게 ‘정신적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일종의 놀이고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는 건 에너지 낭비다. 결국 그는 베로니카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에드워드와도 서로 덕담을 교환했다.
“진짜 성지로 갈 건가?”
에드워드의 짓궂은 질문에 신인 기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맹세는 신성하지요! 게다가 성지에서 목숨 걸고 어둠의 종족들과 싸우다니, 이보다 보람찬 일은 없습니다!”
정말 생각이 없다면 ‘급한 일부터 처리한 다음에’라는 말을 넣었을 것이다. 이 신인은 진심이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참은 힘이 넘치네. 그래도 목숨은 아껴라.”
베로니카는 에드워드를 흘겨보았다.
“다 늙은 아저씨처럼 말하지 마.”
“나 이래 보여도 나름 베테랑이거든?”
둘의 만담을 뒤로하고, 신인 기사는 우승 상금과 소개장을 챙겨 들어 기사 무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식과 폭음. 그의 뒤로 몇몇 순례객이 동행을 자처하며 따라붙는 것을 보자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운 사제를 등 뒤에 두는 것보다는 저렇게 부하들을 만들어 성지로 가는 게 더 여행답긴 하다.”
“죽을래? 그리고 너 부하 있잖아?”
“누구?”
“리안나.”
“걔는 반쪽만 내 부하지. 반 쪼개서 줄 거야?”
뎅그렁. 멀찌감치서 고기 죽을 퍼먹던 리안나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왜 결론이 항상 절 괴롭히는 건가요?!”
밴시의 비명을 마무리로 마상창 시합이 끝났다.
* * *
베로니카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 가지 송사를 처리해 준 다음 날에야 여행을 재개했다. 송사는 사실 별것 없었으니 순전히 귀족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다. 에드워드는 베로니카에게 질문했다.
“성지로 갈 만한 인물들은 있었냐?”
“아니. 앵글리아로 올 때 본 사람들 몇 명에, 생각도 없는 양반들뿐이야. 군대를 만들어야 시오니아 교회에 도움이 될 텐데, 개별 순례자가 고작이야.”
편력 기사나 단순 순례객.
에드워드는 성지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빛과 어둠이 싸우는 최전선. 어둠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이단자들, 악마를 숭배하는 사교도들, 악마가 빛의 종족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든 오크와 오거들.
그놈들과 맞서 싸우려면 역시 많은 기사, 용병, 순례자가 필요하긴 했다.
“역시, 시오니아 출신이라 그쪽에 신경이 쓰이는 건가?”
“뭐, 그렇지. 여기서 많은 순례자가 시오니아로 갈수록 그곳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니까.”
“용병 찾기군. 그런데 어쩌다 교황청을 거쳐 앵글리아까지 왔어? 시오니아 교회는 별도의 이단심문조직이 있지 않나?”
“캠벨 가문은 시오니아에서 앵글리아까지 걸쳐 있고, 그래서 상호 교류는 중요해.”
“아, 그래서 시오니아 교회 말고 교황청에 유학 온 건가?”
“그래. 일종의 연계지.”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에드워드는 머릿속으로 대충 지도를 그려 본 다음 말했다.
“트레베리아부터는 오크도 보겠군. 자기 일이 더 급한 사람들의 동네인데, 순례자를 모을 수 있으려나.”
“트레베리아면 바다 건너죠? 거기는 성지도 아닌데, 왜 오크가 있죠?”
베로니카의 앞에 탄 리안나의 질문이었다. 에드워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반대야. 앵글리아에 오크 부락이 없지. 역대 앵글리아 국왕들이 다 쳐 죽였거든. 앵글리아는 섬나라니까 오크들이 도망칠 곳이 없었어.”
“와, 그런 거예요? 그럼, 앵글리아가 더 살기 좋은 건가요?”
“대신, 사교도는 어느 동네보다도 더 활발하게 설치지. 악마 숭배자, 늑대 인간, 흡혈귀…….”
“저는 그런 거 본 적 없는데요?”
“먹지도 못할 밴시 촌년 앞에 그런 게 나타날 일이 있겠냐?”
리안나는 납득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단자나 사교도의 준동은 안정적인 곳일수록 심하지. 악마도 생각이 있으면 후방을 교란할 테니. 결국 안정은 일시적인 거야. 어둠이 존재하는 한 안전한 나라 따위는 없어. 언제든 다시 고블린과 오크가 상륙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런 거예요?”
“앵글리아 못지않게 안전하다는 소리 듣던 아퀴타니아가 지금은 이단자들이 급속도로 세력을 늘려서 난리라지. 남부는 완전히 뒤집어졌대.”
리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네가 다 만날 거란 이야기다.”
리안나는 겁에 질려 쪼그라들었다.
“왜 항상 결론이…….”
베로니카와 에드워드는 같이 웃어 버렸다.
한적한 고갯길로 접어들 때쯤이었다. 갑자기 얼굴 주변으로 달려드는 파리 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불길한데. 누가 하나 죽어 나자빠졌나?”
해답은 빠르게 나왔다. 좀 더 나아간 에드워드 일행의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가에 길게 누운. 베로니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아는 얼굴 아냐?”
에드워드는 말을 몰아 그 시체 바로 앞까지 나아갔다. 베로니카의 말대로였다.
흑색 섞인 금발의 신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