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80)
80화 여성의 문제는 곧 기사의 문제 (3)
이번에 방문한 수녀원은 귀족 여성들의 요양원 성격이 더 강한 탓인지, 식당마저 호화로웠다. 큰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벽돌 기둥이 주르르 늘어섰고, 식탁은 고급 목재로 만들었으며, 촛대는 전부 금이었다. 벽에는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끼워 놨는데 불청객이 수녀원 주변을 맴도는 탓인지 커튼으로 다 가려 놓았다.
그래도 명색이 수도원인지라 식기는 은으로 만든 식기가 아니라 목기와 도기였지만 그것도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종류들이었다.
수녀복을 벗고 평범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전 스폰하임 백작 부인, 율리아는 에드워드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앉아요. 내가 대접하는 거니 사양하지들 말고.”
보통은 따로 음식이 나오는 밴시 리안나의 자리까지 있었다. 리안나는 침을 질질 흘릴 기세로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고기, 고기, 더 많은 고기.
“수녀원이라는 데는 살기 좋은 곳인가 봐요?”
“여기가 돈이 많은 거겠지.”
가르달의 솔직한 평이었다. 율리아는 웃어 버렸다.
“역시 드워프는 거침이 없군요. 네, 돈 좀 썼죠. 은인들을 위한 것이니. 저는 은원은 확실하게 챙기는 성격이거든요.”
“거 드워프랑 잘 맞으시겠구먼.”
에드워드가 자리에 앉자 다른 일행도 다들 따라 앉았다. 하녀들이 곧바로 손 씻을 물과 술병 따위를 가져왔다. 율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덕분에 여기저기에 편지를 보냈어요. 과연 몇 분이나 저를 도와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에드워드가 바로 말을 붙였다.
“호위가 필요하면 말씀만 하시죠. 투리치까지는 하루 거리니, 거기로 모시겠습니다.”
“고마워. 하지만 투리치에는 내 인맥이 없어. 난 학교가 아니라 수녀원이나 교회 복지시설에 헌금했으니까.”
“전 이제 투리치에서 유명인입니다. 도움을 청해도 거절당하진 않을 겁니다.”
“유명인? 뭔가 했어?”
에드워드는 한껏 가슴을 편 다음 대답했다.
“악마를 죽이고 수많은 여성들을 구했죠.”
“와!”
율리아는 감탄했다.
“그 꼬마 기사가 벌써 그렇게 큰 업적을 이뤘어?”
“아니, 그때나 지금이나 꼬마 아니라니까!”
에드워드는 질색해서 손을 내저었다. 율리아는 깔깔 웃으면서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쟤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아기’나 ‘꼬마’라는 거?”
“그건 몰랐군요. 의외네요. 그때는 키가 작았나요?”
베로니카가 마주 웃으면서 말했다.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때도 건장하긴 했죠. 그런데 묘하게 그 단어로 불리면 질색을 하더군요.”
“신기하군요.”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환생 후 몇 년 동안 아기·꼬마 취급을 받는 데 신물이 났다고 말하면 아무도 못 믿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투덜거리면서 고기에 집중했다.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십니다. 진짜.”
“그런가? 내 주변은 정말 많이 변했는데. 너도, 내 남편도.”
율리아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 슬픈 눈을 했다. 하녀들이 술잔을 채우고 그 잔들이 몇 번씩 비워질 때쯤, 에드워드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실례지만,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애가 안 들어섰거든. 중요한 문제였지. 백작은 더 젊고, 더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려 했어.”
에드워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알기로 백작은 나이가 훨씬 더 많았다.
“부인보다 백작한테 더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남편이 나이가 꽤 있긴 했지. 그래서 누가 문제라 불임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어.”
“결과는요?”
율리아는 쓰게 웃었다.
“백작이 처녀를 데려와 임신시켰지. 그 여자는 땅을 받아 그의 정부가 되었고. 교황청은 내가 문제라는 걸 인정해 결혼을 무효화했어. 그러자 백작은 날 내쫓고 새 결혼을 했지. 물론 정부도 그대로 데리고.”
에드워드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율리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나대로 화가 나서 위자료 소송을 진행했지. 일부러 백작의 이웃과 재혼했고, 임신했어. 그러자 난리가 나 버렸지 뭐야. 친정은 백작이 증거를 조작했다고 성이 나서 전쟁을 선포해 버렸어. 그의 영토가 욕심이 난 새 남편도 당연히 전쟁에 나섰지.”
“와, 개판이다.”
리안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았어. 그러다 새 남편도, 친정 사람들도 다 죽어 버렸어.”
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작이 이겼어요?”
“들어 봤니? 트레베리아 왕실까지 휩쓴 대역병. 1년이 좀 넘은 일이야.”
앵글리아의 꺽다리왕 로버트가 ‘몇 년 더 일찍 퍼졌으면 전쟁 이겼다’라고 농담했던 그 대역병. 당시 재상은 ‘그랬다간 앵글리아도 역병에 작살 났다’라고 받아쳤다. 그 역병은 치사율이 높았지만 유행 기간이 짧아서 트레베리아 안에서만 끝났다고 했다. 그 발톱이 율리아의 주변을 휩쓴 것이다.
“순식간에 기댈 곳을 다 잃어버렸고, 유산까지 해 버렸지. 다행히 백작도 더 싸우고 싶어 하진 않았어. 역병도 겁이 났고, 내가 또 재혼해 복수를 꾸밀까 봐 겁을 냈거든. 그래서 위자료를 보냈지. 나 역시 진절머리가 나서 수녀원에 일찍 들어가 버리려 했어.”
에드워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위로는 언제 누구한테 해도 어색한 일이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유감입니다.”
“아직 안 끝났다? 내 남은 재산과 미모를 탐낸 맹수들이 쫓아왔거든. 무력으로든 계략으로든. 겨우 여기까지 오는 것도 엄청 힘들었어. 믿을 놈 하나 없더라.”
“그 정도였습니까?”
“복수를 이어 주겠다면서 떠돌이 기사들이 강제로 결혼하려고 쳐들어왔어. 웃기는 일이지. 난 이미 위자료를 받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갈 거라 해도 놈들이 안 믿더라고. 하긴, 복수를 해 줄 마음도 없었겠지만.”
에드워드는 자기 잔도 비웠다. 술은 고급인데 맛이 쓰다. 율리아는 살포시 웃었다.
“그때 옛 인연을 다시 만난 거야. 내가 한때 가장 믿고 의지한 기사. 많이 놀리기도 했지만.”
에드워드는 어렵게 답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마워.”
율리아는 비운 술잔을 도로 채웠다. 그때 헬레나의 귀가 까딱거렸다.
“숙여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뭔가가 스테인드글라스를 깨고 커튼 틈새를 통과해 날아왔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식탁 밑으로 들어갔고 하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에드워드는 황급히 율리아 곁으로 달려가 그녀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뭐야, 방금 그거?!”
“화살이에요!”
에드워드의 외침에 헬레나가 대답한 다음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이 그녀를 스쳤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헬레나가 외쳤다.
“놈이에요! 현상금 사냥꾼!”
“어디야?”
“안에는 안 보여요! 아래에서 벽 너머로 쏘고 있어요!”
“개새끼, 재주도 좋네!”
세 번째 화살이 다시 식당 창문을 깼다. 쨍그랑! 비명이 다시 울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더는 공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헬레나가 식당 안을 향해 말했다.
“도망갔어요!”
그제야 사람들은 식탁 아래, 기둥 뒤 같은 데서 하나둘씩 나왔다. 에드워드는 바지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그 새끼, 안 보이는 데도 그냥 화살을 쐈군.”
“아무나 하나 맞으라는 식 같네.”
율리아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워드는 화살을 확인해 보았다. 하나는 식탁에 꽂히고, 하나는 식탁을 훌쩍 지나 반대편 벽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잠을 못 잘 거란 게 이런 의미였군.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이런 얕은 수작을 쓰다니.”
가르달이 투덜거렸다. 베로니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투덜거리는 대상은 조금 달랐다.
“넌 내 호위인데 나부터 지켜야 하는 거 아니니?”
“미안. 그래도 넌 주문이 있잖아.”
“거 참 든든하게 생각해 주네.”
에드워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텔라?”
“전 조금 이따 나갈게요. 그 녀석 또 화살 날릴지도 모르잖아요.”
식탁 아래에서 여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레나가 식탁으로 돌아와 말했다.
“나오셔도 돼요. 아까는 제가 방심해서 접근을 허용했을 뿐이니까. 수도원 주변 아래를 맴도는 건 알았는데 설마 화살을 이렇게 쏠 줄은 몰랐네요.”
“아, 그래요?”
스텔라는 겨우 식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헬레나는 놈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에드워드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커튼 틈새로 빛이 새어나가는 걸 봤다든가…… 들어가면 식사부터 할 거라고 추측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너처럼 귀가 엄청 밝든가.”
“다시 오면 바로 경고부터 할게요.”
“그래야겠어.”
에드워드는 쓰게 웃었다. 그는 하녀들을 향해 말했다.
“뭐든지 좋으니까 창문을 막아. 전부.”
하녀들은 바쁘게 흩어졌다. 에드워드는 일행 중 마지막 하나를 깜빡한 걸 떠올렸다.
“리안나는 어디 갔어?”
“여기요!”
와장창. 구석의 수납장 안에서 밴시와 은식기, 은촛대가 쏟아졌다. 율리아는 기겁했다.
“너 대체 어디 숨은 거니?!”
“죄송해요! 흠집 안 나게 도로 집어넣을게요!”
밴시가 허둥거리면서 은식기를 도로 챙겨넣는 걸 보자 에드워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혹시 흠집 나면 쟤 부려도 됩니다.”
“사양할게.”
“리안나, 촛대는 그냥 다 꺼내놔. 혹시 모르니 여기저기 배치 좀 해놔야겠어.”
“그럴까요?”
그러자 율리아가 에드워드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그건 좀 참아 주라.”
“예? 무슨 이유로?”
“그래도 명색이 수녀원이라 은식기는 잘 안 꺼내. 게다가 촛대들 중엔 성직자가 축성한 것도 있어. 오늘 밤 그런 걸 꺼내 놓기는…….”
에드워드는 당황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금촛대로 시선이 갔다. 여체, 나비, 꽃 따위를 묘사한 화려한 양식들. 수납장 안 은촛대의 수수하거나 교회 기호가 가득한 양식과는 천양지차였다.
귀족 수녀원의 두 얼굴.
에드워드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손님이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내놓는 장식물들인 것이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가능하면 사람이 안 다니는 으슥한 곳이나 외곽에 두죠.”
“그럴래?”
“현상금 사냥군은 절벽을 기어올라올지도 모르니까요. 게다가 놈한테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고. 엘프가 경계하더라도 철저한 게 좋겠죠.”
에드워드는 긴장과 당황 속에서 말이 길어졌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해. 난 그만 들어간다?”
“어, 벌써?”
“그만 쉬어야겠어. 피곤해. 그리고 너는 이제 할 일이 있잖아.”
눈치를 챘으니 방해꾼은 비켜주겠다는 뜻이었다. 에드워드는 슬쩍 스텔라와 헬레나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녀들도 군말 없이 베로니카의 뒤를 따랐다. 리안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은촛대들을 싸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율리아는 에드워드에게 속삭였다.
“정리 끝나거든 본관 계단 앞으로 와.”
꽃, 나비, 여체.
* * *
엘프 헬레나는 담요 한 장 들고 객관 옥상에 올라갔다. 가르달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낮에는 내가 경계를 서겠소. 엘프만큼 예민하진 않지만, 할 일 없고 다른 사람들도 깨어 있으니 귀 좀 기울이면 되겠지.”
“그러세요.”
베로니카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여자 침실로 들어갔다. 스텔라는 그녀를 뒤쫓아가며 물었다.
“사제님, 혹시 질투하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저 녀석이 여자랑 뒹구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보통 여자가 아니잖아요. 자그마치 옛 여자예요! 남자한테 옛 여자가 얼마나 강력한데! 게다가 기사님이 저렇게 꼼짝을 못 하는!”
“그래서요? 저랑 그 녀석 사이에 무슨 정분이 났다고. 그냥 그 녀석이 임무고 뭐고 눈이 먼 것 같아서 그래요.”
“흐응.”
스텔라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나태한 고양이 속성인 줄 알았는데 수다쟁이 암탉 속성인가 봐요?”
“남의 연애사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잖아요.”
“택도 없는 소리. 그 녀석은 아직 멀었어요.”
“어머나, 그건 기준에 도달하면 받아들이시겠다는 뜻?”
베로니카는 코웃음을 쳤다.
“기준에 맞는 자라면 쟤가 아니라 그 누구든 못 받아들일까요? 그리고 쟤는 그 기준 맞추기보다 회개하는 게 더 빠를걸요. 기대도 안 해요.”
“왜 말이 길어지실까?”
스텔라가 웃으면서 반문했다. 베로니카는 뚱한 표정을 지은 다음 사제복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스텔라는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에이, 삐졌어요? 내일은 저 다른 데서 잘게요. 그 여자 보란 듯이 기사님이랑 해 봐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저하고 걔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차라리 헬레나 양이 남녀로는 저보다 더 진도 나갔을걸요.”
“꼭 일이 있어야 정분이 나나요? 오래 같이 호흡 맞춰 봐도 나는 게 정분이지.”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녀가 옷깃만 스쳐도 망상을 한다더니.”
“솔직하게 말해라, 솔직하게 말해라. 거짓말쟁이는 나무꾼 할아버지가 잡아가신…….”
“당신 이런 캐릭터였어?! 그 좋아하는 잠이나 좀 실컷 자요!”
베로니카는 스텔라를 향해 베개를 냅다 집어던졌다. 스텔라는 깔깔 웃으면서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잠시 뒤 그녀의 베개가 베로니카의 등짝을 때렸다.
“귀족에게 덤벼요?!”
“격려를 겸한 정당방위예요!”
우당탕.
복도에서 파이프 연초를 피우던 가르달은 그 소란을 듣고 메모지를 꺼냈다. 그가 틈틈이 속담과 명언 등 쓸만한 구절을 주워 모아 기록하던 것이었다. 상인 일을 할 때 인간과 교류하기 위해 쓰던 건데, 한동안 꺼낼 일이 없던 것이었다. 잠시 뒤 그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 멈췄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읊었다.
“남이 내 것에 손대면 없던 정분도 나는 법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