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유목민 겨울 야영지
베로니카가 말 안장 위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노숙하거나 오래 말을 타는 루트는 피해야 한다. 이 조건에 맞춰 일행은 경로를 짰다.
길이 너무 험해도 문제고, 너무 길어도 문제다. 너무 외진 곳이라 사제가 없어서 전례를 대신 해 줘야 할 지경인 곳도 피한다. 하루 이동 거리는 평소의 절반 이하로 잡는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도 도착지에서 그냥 쉬고 다음 날 출발한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였지만 그래도 닷새쯤부터는 산길이 끝났다. 그때부터는 평야였기 때문에 속도를 높였다.
베로니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골 마을은 송사고 뭐고 별거 없네.”
“거 일 중독이네.”
“교통로도 무난해서 끊겼나 안 끊겼나 기록할 것도 없었고.”
“왜 그렇게 일에 환장했냐?”
“평점이 깎여.”
“그놈의 평점.”
둘의 대화를 듣던 헬레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업적이 중요한 남자와 평점이 중요한 여자…….”
“살다 살다 엘프한테 저런 소릴 다 듣다니. 우리도 많이 망가졌네.”
베로니카가 웃어 버렸다. 헬레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욕한 거 아닌데요.”
“알아요.”
베로니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카치운이 말했다.
“저기가 항카이부의 ‘오르도’요.”
그의 손끝에는 하얗고 둥그스름한 지붕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건 도시가 아니었다. 평야, 산, 강 사이에 수많은 유르트가 밀집한 모양새. 군주의 숙영지인 오르도였다. 그 외에는 곳곳에 가축을 가둔 울타리가 보였다. 에드워드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풀이 많지 않군. 목초지로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대로요. 벌써 다 뜯어먹어서, 더 깊은 산이나 들로 들어가고 있소. 그러나 공작한테서 겨울을 날 콩과 보리, 건초를 받을 테니 걱정은 없소.”
“그게 용병 일의 보수요?”
“보수의 일부요. 그 외에도 장사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도시로 가서 날품팔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당신처럼 현상금 사냥꾼도 있고?”
“그거 의외로 경쟁이 치열한데 보수는 짜고 방해도 많아서 못 해 먹겠소.”
“흠.”
방해꾼 에드워드는 부족의 야영지를 좀 더 살펴보았다. 유목민답게 말을 타고 몰려다니는 무리가 많았는데, 대개는 ‘부대’ 티가 나는 무장한 남자 집단들이었다.
“전투 나가기 전이오?”
“그 반대요. 끝내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소. 겨울엔 휴전한다더군.”
“댁도 참전했소?”
“그렇소. 공작이 작년 겨울엔 휴전이고 나발이고 그냥 미친 듯이 싸웠는데, 올해는 안 그럴 모양이더군.”
“공작이 돈 다 떨어졌나?”
용병은 전쟁이 없으면 급료가 반 이하로 줄어들거나 끊긴다. 카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기전이 글렀다는 걸 깨닫고 장기전을 각오한 거요. 뭐, 항카이부의 용병들은 이미 겨울을 날 돈과 물자, 그리고 이 땅까지 챙겼소. 월동엔 문제가 없겠지.”
“그런데 왜 당신은 현상금 사냥꾼 일까지 했소?”
“……전리품 분배에서 다른 이들에게 밀렸소.”
“바가지 좀 긁히셨겠구만.”
“잔소리보다 더 무서운 건 난로나 저금통을 들여다보면서 한숨 짓는 모습이지.”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일행은 오르도 외곽을 빙 돌아서 좀 동떨어진 곳에 있는 유르트 앞에 멈췄다. 13살쯤 된 사내아이와 그보다 어린 여자애 둘이 달려 나왔다. 1남 2녀. 그 뒤로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까지. 부인은 카치운에게 뭐라 속삭였다.
“반기는 분위기는 아닌데.”
“손님이 너무 많아서 접대할 걱정을 하네요.”
마부석의 리안나가 통역처럼 말했다. 에드워드는 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번역해 봐, 번역기.”
“돈 내고 묵을 손님이니까 걱정 없다, 유르트는 누구누구 씨네 가서 빌려올 거다, 오히려 돈이 굴러들어온 거다, 뭐 그 정도?”
그 직후 부인이 바로 일행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조금 타긴 했지만 미녀였다. 그녀는 에드워드 일행한테 일일이 인사했다. 카치운이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아내 시린, 아들 무클이오. 딸들은 타라, 소라야. 말은 내 아들놈에게 맡기고, 잠시 안에 들어가서 쉬고 계시오. 유르트 빌려올 테니.”
그 다음 카치운은 멀리서 가축들을 돌보고 있던 두 남녀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남자가 달려오는 걸 보자 밴시 리안나가 덧붙였다.
“쟤들은 노예래요.”
“부인 하나, 아들 하나, 딸 둘, 노예 남녀 하나씩인가. 소박하군.”
에드워드는 가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과 소가 합쳐서 10마리 남짓. 그 외에는 염소 두 마리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 집의 수입원은 아마도 소젖과 염소젖, 그리고 말. 잘 산다고는 못할 재산 목록이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은 고급이던데.”
“쇠락한 집안인가 보오.”
가르달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번역기 리안나의 도움을 받아 에드워드 일행은 유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형형색색의 카펫들이 가득했다. 바닥에 깔거나 벽에 걸거나. 일행이 앉을 자리는 바닥이었다.
“바닥에 바로 앉는 건 안 익숙한데.”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카페트와 혼연일체가 될 기세로 몸을 비볐다. 베로니카와 헬레나도 좌식은 어색했다. 풀밭 위나 천막 안에서도 그냥 앉기야 하지만, 유르트는 거의 집에 가까웠고 지붕서 바닥에 아래 앉는 것은 다른 감각인 듯했다. 에드워드는 별 생각 없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구만.”
“기사님은 전에 경험해 본 적 있으세요?”
리안나가 묻자 에드워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리안나는 원정 때 이야기인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카치운이 돌아왔다. 그는 유르트 입구에 선 채 말했다.
“사람까지 빌려왔소. 곧 유르트와 난로를 설치할 건데, 밤에는 들어갈 수 있을 거요. 편히들 쉬쇼. 오늘 저녁은 무료로 대접할 테니.”
카치운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가 보았다.
“거 주인이 손님 접대 안 하고 계속 어딜 다니쇼?”
“접대하려거든 가축을 잡아야지. 사람도 많으니.”
“흠. 뭘 잡을 거요?”
“염소. 한 마리가 젖이 잘 안 나와서. 그 녀석은 겨울도 못 넘길 것 같소.”
잠시 뒤 카치운은 비단으로 만든 겉옷을 벗어 나무 그루터기에 두고는, 염소 한 마리는 끌고 와 아들 무클과 함께 도축하고 손질을 시작했다. 무클은 에드워드를 힐끗거리면서 염소를 부위별로 해체했다. 에드워드는 그걸 보다 물었다.
“염소 새끼는 어쨌소?”
“죄다 팔았소. 출정 비용 충당하느라.”
“저런.”
“그래도 본전은 뽑았고, 생활비도 마련했고, 염소 한 마리 더 살 돈도 남겼지. 딱 그 정도요.”
“그래 봤자 내년에도 염소 두 마리군.”
“댁들한테서 돈 받을 테니 걱정 없소.”
에드워드는 카치운이 한구석에 벗어 놓은 비단옷을 보았다.
“고위 전사 같소만, 용병 일이 그리 돈이 안 되오?”
“간판만 장교요. 타이지의 손자거든.”
“내가 유목민 작위는 모르니까 좀 설명해 주시오.”
“버일러보다 높고…… 이쪽 말로 하자면 왕이오.”
“그럼 왕족?”
“그렇소.”
“맙소사. 그런데 어쩌다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는 거요?”
“초원의 법칙이지. 어제의 왕이 오늘도 왕일 수는 없소.”
“그럼 항카이도 트레베리아처럼 왕위가 공석이오?”
“유목민에게 왕위는 자리랄 게 안 남소. 그냥 공중분해요. 그때그때 강한 자가 왕이 되는 거지.”
이 부족 저 부족 잡아먹고 팽창하다 갑자기 사라지는 유목민 국가들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깃거리가 많겠구만.”
공동가마에서 구워 온 큼직한 빵, 고기와 일부 내장을 채소와 번갈아 끼워 지글지글 구운 꼬치, 창자에 피와 고기와 곡물가루를 넣어 삶은 순대 등이 저녁 메뉴였다. 거칠다면 거친 메뉴였지만, 손님 접대용이라 신경을 쓴 건지 채소와와 향신료를 적잖이 잘 썼다. 향신료는 비싼 게 아니라 근처에서 구하기 쉬운 종류들이긴 했지만, 배합이 좋았다.
에드워드는 수녀원에서 가져온 포도주 중 일부를 내놨다. 좋은 술이 함께 나오니 나쁘지 않은 만찬이 되었다.
가르달은 순대가 삶은 국물에 함께 담겨 나온 걸 맛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이거 내 취향이군.”
“그러고 보니 소금산도 가축을 꽤 키웠죠?”
베로니카의 말에 가르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은 별미지만 산에서 키울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스텔라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남기진 않았다.
“내장까지 먹는 건 처음인데 나쁘진 않네요.”
“소시지도 창자로 만들잖아?”
에드워드는 우걱우걱 씹으면서 말했다. 스텔라는 묘한 표정으로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은 아닌가.”
카치운의 아들은 한쪽에 걸어놓은 에드워드의 갑옷과 검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고, 딸들은 여자 손님들 사이를 맴돌았다. 특히 딸들은 겉보기로는 동갑내기인 리안나와 죽이 잘 맞았는데, 막내딸 소라야가 특히 그랬다.
“엘프 언니 머리카락이 너무 이쁘대요. 이런 금발은 처음 본다고.”
“그래?”
리안나의 말에 헬레나는 싫은 표정 한번 못하고 소라야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소라야는 그걸 한참 만지작거리다 스텔라와 베로니카의 머리카락에도 흥미를 가졌다.
“마법사는 머리카락이 다 분홍색이냐는데요?”
“과시용으로 형형색색 물들이는 사람도 있지…….”
“긴 흑발은 어떻게 관리하냐는데요?”
“잘.”
소라야는 남자들, 그러니까 가르달과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고는 리안나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리안나의 얼굴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꼴이 되자 에드워드가 물었다.
“뭐래냐?”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요정의 주인으로서 명령하건대 진실만 말해라.”
리안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니 나쁜 사람이군요.”
에드워드는 일어나 밴시의 발목을 붙잡고 거꾸로 들었다. 리안나는 항의했다.
“왜 나만!”
“그럼 집주인 딸내미를 이렇게 하랴?”
“억울해!”
가르달은 껄껄 웃으면서 무릎을 쳤다.
“여자애들의 대화를 주인의 권한까지 써 가며 캐물은 기사 양반 잘못이오.”
“그만 흔들어요! 먹은 게 넘어올라고 해!”
에드워드는 리안나를 놓아줬고, 얼른 타라와 소라야 자매한테로 도망쳤다. 세 여자애가 소곤거리기 시작하자 시린이 짧은 꾸중했다. 내용은 그쪽 말을 몰라도 짐작이 가능했다.
“역시 악당이다, 뭐 그런 소리나 했겠지.”
“정답이오.”
카치운이 웃으면서 확인해줬다. 시린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들. 철없는 애들이 하는 소리예요.”
“부인도 아퀴타니아어를 하시오?”
“조금은요. 아이들은 제가 나중에 따로 주의를 시키겠습니다.”
“틀린 말 아니니까 괜찮아요.”
베로니카가 바로 답변했다. 에드워드는 입을 삐쭉였다.
“여자를 구하고 사제를 구하는 악당도 있냐.”
“너. 여기 있네.”
만담이 오가는 식사가 끝난 후에는 차를 마시고 연초를 피우는 시간이 왔다. 차는 버터와 소금을 넣은 것이고, 연초는 향료를 섞어다 물파이프로 피우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연기를 맛만 보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더니 말했다.
“이 연초, 교회서 키우는 게 아니야…….”
카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남쪽으로 가면 교회 권역 밖에서 재배되는 걸 싸게 사 올 수 있소.”
“설마 그거 교회 권역에 파나요?”
“밀수지. 돈이 꽤 된다오. 나는 안 하지만.”
“그래요?”
“숙영지 안에서 거래하면 수익이 안 남고, 도시로 가서 거래하면 위험해서. 용병 일보다 더 목숨 걸고 하는 짓이지.”
카치운의 말에는 경멸이 묻어나왔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에드워드가 끼어들었다.
“밀수는 별로 안 좋아하나 보군.”
“그건 아니오. 우린 관세 따위 없는 자유무역을 선호하니까. 이곳 정착민들의 관세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지. 낮지도 않은데 몇 겹이나 된다니까.”
“세금 싫어하는 건 다 똑같네.”
“다만, 여기서 연초를 밀무역하는 패거리들이 좀 마음에 안 드는 작자들이라오.”
“흠. 여기도 복잡하군.”
에드워드도 연기를 빨아 마셔 보았다. 나무껍질과 꽃잎가루 따위를 섞어서 뭔가 달착지근한 향.
“건강엔 안 좋으려나.”
에드워드가 한 모금만 빨아본 물담배를 내려놓는 순간,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시린이 나가 보자 완전무장한 유목민 전사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시린은 그를 안으로 들였고, 전사는 카치운을 향해 뭐라 말했다. 에드워드는 리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번역기. 쟤는 누구고 뭐래냐?”
“버일러가 보내서 왔대요.”
“이곳 우두머리? 왜?”
남은 설명은 카치운이 했다.
“소금산과 투리치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기사 에드워드 경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 하시는군. 언제든지 좋으니까 방문해 줄 수 있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