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get a bad knight ahead of yourself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사냥감의 크기는 중요하다
항카이부 버일러의 사냥은 몰이 사냥이었다. 몰이꾼 역할을 할 사람을 무수히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냥감은 큰뿔사슴 무리였는데, 어깨높이만 따져도 사람보다 훨씬 큰 대형종이었다. 뿔은 더 무시무시하게 컸다. 좌우 폭이 사람 둘은 눕혀 놔야 맞먹을 지경이었다.
“저거에 받히면 곱게 못 죽겠는데.”
에드워드가 수풀 속을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천성은 사슴이라 그런지, 큰뿔사슴은 사람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몰이꾼들의 숫자가 워낙 많은 데다, 북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는 탓에 겁을 잔뜩 먹은 것이다.
큰뿔사슴 무리는 한참을 몰리고 몰린 뒤 버일러, 에드워드, 카치운 등이 포진한 본대와 맞닥뜨렸다. 함정에 빠진 걸 깨닫고 당황하는 사이, 부족 전사들은 좌우에서 화살을 쏴대며 암컷과 새끼들부터 쓰러뜨렸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가장 큰 우두머리였다. 그걸 쓰러뜨리는 건 버일러의 몫이었다. 큼직한 화살이 허공을 가르더니 어쩔 줄 모르고 날뛰던 놈의 급소를 맞췄다.
며칠씩 이어진 사냥은 그런 식이었다. 버일러와 그 휘하 장수들과 손님이 번갈아 가면서, 또는 순서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형 짐승들을 잡는 것.
에드워드는 긴 창을 하나 준비했다. 그건 가르달이 미리 손잡이 부분에 철제 손 받침을 만들어 붙여 준 것이었다. 그는 부족 전사들이 올가미로 붙들어 놓고 사냥개들이 몰아붙인 들소를 맡아 찔렀다. 들소는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땅이 뒤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놀라운 힘이오!”
버일러가 다가와 웃으면서 말했다. 세심하게 신경을 썼지만 창대의 손 받침 부분은 에드워드의 손자국이 깊게 패이고 꺾여 있었다. 대형 사냥감을 잡는 데 힘을 빼기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는 겉으로만 웃었다.
“이래서야 창이 백 개라도 모자라지요.”
“기사는 돌격 때 부러뜨린 창대의 숫자로 용맹을 가늠한다지 않소?”
“미묘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때 저 멀리서 카치운과 누군가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에드워드의 귀에 들렸다. 그가 돌아보니, 카치운과 어느 사내들이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들의 뒤에는 제사장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전사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이오. 별일 아니오.”
버일러는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그는 그 다툼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아는 눈치였다.
“짧은 동행입니다만 카치운이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군요. 마치 모욕을 받은 듯합니다만.”
“부끄럽소. 다들 혈기 넘치는 전사들이라 때때로 통제하기 어렵다오.”
버일러에게 베레스포드 공작이 겹쳐 보이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쌈박질의 현장으로 말을 몰았다.
“카치운! 무슨 일이요?”
“이 작자들이 날 모욕했소!”
카치운이 씩씩거리며 대답하자 제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타이지의 손자분께서 몰이꾼에 그치는 세태를 한탄하고 자신의 사냥터를 갖도록 격려했을 뿐입니다.”
에드워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도발이잖아.’
버일러조차도 당황해서 제사장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드워드와 버일러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이야기는 고삐 풀린 말처럼 진행되었다. 잠시 뒤 버일러가 카치운을 꾸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무슨 내용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카치운이 터무니없는 내기를 해서…….”
“내기요?”
“사냥터 따위 없어도 이곳 전사 중 그 누구보다 큰 사냥감을 잡아 오겠다 그러지 뭐요. 그러자 제사장이 카치운의 아내를 걸 수 있냐고 말했소.”
“저런, 제사장은 뭘 걸었습니까?”
“돈을 걸려나 본데.”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사장한테 돈은 없어져도 다시 생길 것이지만, 카치운의 아내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제사장과 카치운은 놀란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치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제사장을 향해 뭐라 말했다. 제사장의 얼굴도 굳었다. 버일러는 에드워드를 보고 말했다.
“싸움을 더 붙이지 말고 말려야 하는 것 아니오?”
“서로 잃기 싫은 게 걸리면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그게 앵글리아식 중재법이오?”
“제 방식입니다.”
하지만 쿠쿠슈 제사장은 결국 그 내기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버일러는 이마를 짚었다.
“일이 꼬이는구려. 주술사는 신물을 걸었소.”
“뭡니까, 그게?”
“우리 시조이자 영웅인 바야투르의 활이오. 제사장이 대대로 관리해 오던 건데.”
카치운은 마지막엔 아퀴타니아어로 에드워드도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연초 밀수나 하는 놈이 왕가의 후예를 욕보인 대가는 절대 싸지 않을 거다!”
그러고 카치운은 먼저 사냥터를 떠나 버렸다. 버일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오늘은 이만 파합시다.”
* * *
에드워드는 버일러에게 양해를 구하고 씩씩거리는 카치운을 쫓아가 농을 붙였다.
“어째 사냥터 오기 싫은 눈치더라니, 저 패거리들이 종종 비웃었나 보군?”
“그렇소. 사냥터 올 때마다 그랬지. 그래도 평소엔 오늘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소.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운운하지 뭐요!”
“실례가 안 된다면, 부친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묻지 마시오.”
“흠.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런 민감한 이야기까지 꺼냈다…… 쿠쿠슈라는 양반하고 평소에 사이가 돈독하지 못한 거요?”
“음험하고 음탕한 노친네요! 남들에게 위험한 밀수를 시키고 자기는 한 발 뒤에서 이익만 챙기지. 그러다 밀수꾼들이 죽으면 그 아내를 훔쳐 간다오.”
“이야, 수완 좋은데. 본받고 싶군.”
“농담할 기분 아니오.”
카치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드워드는 낄낄 웃었다.
“서로 감정 쌓인 게 한두 해가 아닌 모양인데.”
“그자와 나는 상극이니까.”
“그런 것 같네. 서로 멸시 좀 하셨겠소.”
돈이 없지만 명문가인 전사, 잘 나가지만 부패한 제사장. 카치운은 계속해서 쿠쿠슈를 규탄했다.
“놈은 불쌍한 과부를 챙겨 주는 거라고 생색내지만, 대개는 노예 같은 신세가 되오. 질리면 부하들에게 던져 주기도 하지.”
“버일러는 그런 거 알고 계시오?”
“추종자도 재산도 많아서 버일러도 함부로 손을 못 대오. 그러니 오만이 하늘을 찌르지!”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정말 큰 사냥감을 잡아야겠군. 생각해 둔 거 있소?”
“이곳 짐승들은 못 잡소. 버일러의 것이니까. 나가 봐야지.”
“밖에는 뭐 큰 짐승이 있소?”
“있소.”
“뭔데?”
카치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카치운은 집에 돌아와서 그간 아들 무클이 사냥해 놓은 큼직한 마멋들을 보았다. 동면을 준비하기 시작했는지 살이 오른 설치류들. 작은 것도 팔뚝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무클은 칭찬 대신 알아듣기 힘든 말을 들었다.
“이 정도 크기로는 안 돼.”
“제일 큰 마멋들이었는데요?”
에드워드는 무클을 향해 말했다.
“야. 제사장이 네 엄마를 탐내더라.”
무클은 손에 쥔 마멋들을 떨어뜨렸다.
한참의 소동이 지나간 뒤. 빗자루로 카치운의 머리를 치고 바가지를 긁던 아내 시린은 구석에서 훌쩍거렸다. 카치운은 아무 말도 없었으며, 아이들은 눈치만 보았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챈 에드워드 일행도 카치운의 유르트로 들어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외부인이고, 손님이고, 여자지만, 아니 오히려 여자니까 한마디 할게요. 왜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에 여자를 희생시키죠?”
베로니카의 힐난에 카치운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그를 변호했다.
“뭐, 쿠쿠슈라는 그 제사장은 오래전부터 이 집안에 눈독을 들였을 거야. 그러니 손님과 버일러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겠지.”
“확신해?”
“어.”
“왜?”
“내가 악당이라도 누구 아내가 욕심나면 그럴 것 같거든.”
“네가 말하니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네.”
리안나는 카치운네 딸들에게 속삭였다.
“악당 맞다니까.”
밴시가 다시 에드워드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뒤, 카치운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일 큰 들소. 그 녀석이 가장 가능성이 클 것 같소.”
“하지만 이미 사냥꾼들이 웬만큼 큰 놈들은 다 잡았을 텐데. 밀려났다는 오크 부락 쪽도 사냥꾼을 내려보내고 있을 거요.”
“수틀리면 놈들을 죽이고서라도 뺏어야지!”
유목민의 전사다운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찾아보면 아직 안 잡힌 대물 정도는 남아 있겠지.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거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무클한테 준비를 시키고, 날 도와줄 사냥꾼들도 찾아볼 거요.”
“도와줄 사람이 있소?”
“솔직히 기대할 수는 없소. 전문 사냥꾼들은 밀수꾼 다음으로 쿠쿠슈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자들이라…… 여차하면 오르도 밖 외부인들 중에서라도 찾아볼 거요.”
“그럼 나도 참여하겠소.”
“당신이?”
“여기서 사냥 경험 있는 사람은 댁 빼면 나뿐이잖소.”
“당신은 손님이오. 게다가 그 손으로 때려잡으면 트집만 잡히겠지.”
“결정타는 댁이 날리면 되는 거 아뇨.”
“왜 날 도와주려는 거요?”
“고용주잖아. 뭘 따져.”
베로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러지?”
“그럼. 뭐, 여기서 쉬는 동안 아내 잃은 집안 꼴을 계속 보고 있기도 껄끄러울 테고.”
“알았어. 그럼 나도 간다.”
“엥? 넌 쉬어야지.”
“대형종 사냥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 혹시 누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게? 뒤에서 천천히 따라갈 테니까, 다치면 나 찾아. 카치운이 결정타를 먹였다는 증인도 필요할 것 아냐?”
가르달은 자기 수염을 잡아 뜯을 듯이 쓰다듬더니 말했다.
“확실히, 난 사냥꾼은 아니오. 활 못 쏘는 엘프도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고.”
“드워프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슬프네요.”
에드워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베로니카 시중을 들고 주변을 지킬 녀석도 하나는 필요한데.”
카치운은 자기 아들을 가리켰다.
“무클에게 맡기면 되는 거 아니오?”
“하나 더. 아, 리안나.”
“그럴 줄 알았어요.”
리안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스텔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걔 없으면 저 점 못 치는데요! 점성술로 입 터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통역을 따로 구해. 아니면 다른 일을 하던가.”
“쳇. 나쁜 고용주. 지금이 한참 잘 벌릴 때인데.”
“강 있으니까 낚시나 가. 그리고 준비할 게 또 뭐 있나…….”
베로니카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이상하게 투자가 자꾸 늘어난다? 너 속셈 따로 있지?”
에드워드가 피식 웃었다.
“주술사 새끼가 애지중지한다는 그 신물이 탐나서.”
“네가 활을 가질 것도 아니잖아?”
“내 고용인이 쓰면 내가 쓰는 거나 마찬가지지.”
카치운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영웅 바야투르의 활이오. 그걸 얻는다면, 내게는 새로운 권위가 생기는 거요. 유목민들 사이에서 부대를 모집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 부대는 에드워드 경의 뜻대로 움직일 거요. 성지에 큰 도움이 되겠지.”
베로니카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 세력을 갈라치면 버일러께서 싫어하실 텐데요.”
“어차피 이 안에서 모을 것 아니오.”
에드워드는 육포 한 조각을 씹으면서 말했다.
“어디서 누굴 모으든 하여튼, 그거 갖고 있으면, 댁도 최소한 버일러까지 출세하고 군대를 모을 자신 있지?”
“왕족의 피가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겠소.”
에드워드는 씩 웃었다.
“역시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잖아.”
* * *
다음날, 급조된 사냥팀은 사냥감을 찾아 출발했다. 쿠쿠슈가 미리 손을 썼는지, 전문 사냥꾼들은 전혀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평지를 벗어나는 순간까지 일부러 찾아와서는 불길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어디에 액운이 꼈네 날이 안 좋네 등등.
그들을 무시하고 사냥팀은 강을 건너 산을 올라 고갯길로 들어섰다. 골짜기 하나를 지나쳐 봉우리 하나를 넘을 때쯤, 에드워드와 카치운은 다른 사람들을 놔두고 말에서 내렸다. 에드워드는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넌 여기서 기다려. 더 깊게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오늘은 이 주변에서 활동하는 거야?”
“그럴 것 같아. 적당한 자리에 캠프 치고 기다려.”
“며칠씩 못 끌어. 날 더 추워지기 전에 끝내.”
리안나는 접이식 의자와 카펫을 꺼내 베로니카가 누울 자리를 만들고, 무클은 서둘러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카치운은 무클을 한번 쓰다듬어 준 다음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들소 무리 하나가 좀 전에 이 길을 지나쳤소. 지금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요.”
“그중에 적절한 놈이 없으면 어쩔 거요? 내가 봐도 지금 보인 발자국으로는 마땅한 크기가 있는지 확신이 안 드는데.”
“실은 생각해 둔 무리가 하나 더 있소. 놈들의 영역은 이 근처거든.”
“들소 말고 다른 거요?”
“그렇소.”
“뭔데?”
카치운은 심호흡을 한 다음, 나지막하게 말했다.
“털코뿔소.”
에드워드가 듣기에, 그건 화살로 탱크를 잡겠단 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