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civil servant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상대의 태도가 워낙 당당했기에(그리고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따질 수 없는 처지였기에) 모금묘사는 했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혈교의 무인들이 용봉지회에 참가하려고 한다!
“용봉지회에서 작은 소란을 일으켜서 체면을 깎으려는 수준이 아니오. 이들은 진지하게 용봉의 별호를 노리고 있소.”
“……”
습격이나 소란이 아니라 진지하게 후기지수로 위장해서 성과를 노리고 있다니.
이는 정파무림이든 사파무림이든 충격받을 일이긴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혈교 입장에서도 용봉지회에 제대로 참가하는 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위장할 만한 문파를 고르고, 온갖 자세한 역사와 상황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 해당 문파의 후기지수로 위장해야 했다. 그 문파의 진짜 후기지수를 처리하는 건 덤이었고.
어떻게든 문파의 후기지수로 잘 위장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만약 후기지수가 쌓은 친분이 있다면 그 친분에 맞춰서 의심을 받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교우관계가 넓다면 더더욱 난이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이건 시작이었다. 용봉지회가 열리면 후기지수로 위장한 혈교도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비무에서 이겨야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아주 조금의 수상한 사술도 써서는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일 아닐까?
“혈교가 무림에 원한이 많고 언제든 역천을 노린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혈교의 무인들이 이번 용봉지회에 그렇게 참가한다는 건 너무… 허황되게 들리는데. 안 들킬 수가 있나?”
“그렇게 말할 것 같았소. 그 허황되게 들리는 것을 노리고 녹귀혈뇌 방종동이 계획을 짠 것이오. 헛소리처럼 들릴수록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가장 철두철미한 계책은 가장 허튼소리 같은 계책이라는 게 녹귀혈뇌의 말버릇이지.”
혈교의 여러 장로들 중 혈뇌가 들어간 별호를 가진 무인들은 교 내에서도 지략과 계모로 악명 높은 이들이었다.
적면혈뇌가 적극적이고 사나운 계책을 펼쳤다면 녹귀혈뇌는 끈기 있고 철두철미한 계책으로 그 이름이 높은 책사.
이번 계획 또한 녹귀혈뇌의 악명답게 철저했다.
“혈교에 혈뇌란 자들이 얼마나 있는 건가?”
“많지 않소. 왜 그러시오?”
“저번에도 만난 적 있으니 그렇지. 자꾸 엮이는군.”
“……”
연우혁의 짜증에 모금묘사는 경악했다.
설마 마교의 다른 혈뇌와 맞부딪친 적이 있었을 줄이야.
“어, 어떻게 됐소?”
“뭐가 말인가?”
“그, 혈뇌…”
“동창의 도움을 받아서 잡았다.”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모금묘사는 전율했다.
혈교의 장로들 중 혈뇌의 별호를 가진 이들보다 무력이 강한 무인은 여럿이었지만, 누가 더 잡기 힘든지 비교한다면 당연히 혈뇌를 꼽을 터였다.
자신의 무공만을 믿고 설치는 자들보다 더 지독한 것이 교활함과 음험함을 같이 겸비한 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나이에 혈뇌를 잡았다니.
동창의 무인들이 무공을 빌려줬다 하더라도 혈뇌와의 계략 승부에서 이긴 건 진충비도 본인일 터. 새삼스럽지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말하겠는데, 녹귀혈뇌의 계획은 기존 문파의 후기지수를 납치하거나 죽이고 위장하는 게 아니오.”
“아니라고?”
“이 계책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오. 원래는 녹귀혈뇌의 스승이 준비한 계책이라더군. 쓸만한 교의 첩자를 만들기 위해 준비한 계책.”
녹귀혈뇌의 스승은 제자와 비슷한 성정을 갖고 있는 만큼 대계를 그렸다고 했다.
기존 정파 문파를 포섭하거나 매수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문파를 새로 만들면 어떨까?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그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정파무림은 의심하지 못할 터였다.
불행히도 녹귀혈뇌의 스승은 녹귀혈뇌한테 암습당한 탓에 계획의 결말을 보지 못했지만, 녹귀혈뇌는 스승의 대계를 이어받아 자신이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쌓아놓은 문파와 그 후기지수를 활용해 정파무림의 폐부 깊숙한 곳에 쐐기를 박으려고 한 것이다.
용봉지회에서 별호를 얻은 무림인이라면 차기 정파무림에서 무시못할 명성을 얻을 테니…
“놀랍군. 그런 계책이라니.”
연우혁도 솔직히 감탄했다.
자신은 언제나 단편적으로 사건을 해결했기에 이런 커다란 뒷배경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혈교 첩자는 여럿 잡아봤어도 그 첩자를 보내는 대계가 어떤 식으로 엮여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처럼.
새삼 이렇게 보니 무림인들의 끈기가 지독하다는 걸 느꼈다.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수십 년을 기다리다니.
‘혈교 첩자라… 동굴 살인 사건인가? 아니면 사찰 범종 살인 사건? 옥경 도난 사건?’
“…아마 진충비도 당신처럼 현명한 사람이라면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오. 내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모금묘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모금묘사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힘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판관한테 붙잡히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사실 난 혈교의 무인들과 일한 적이 있소.”
“그렇군.”
“…그, 그게 다요?”
“어… 뭐, 보수가 좋았나?”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별 생각 없이 되물었다. 모금묘사는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수는 좋았소…”
“그래. 잘 된 일이군.”
“아니! 그게 다요?!”
“뭐 어쩌란 건가?”
“혈교와 같이 일했다니까!?”
“아.”
연우혁은 그제야 상대가 왜 지랄인지 이해했다.
“그렇군! 내가 그쪽을 혈교도로 의심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혈교와 결탁한 놈이라거나…”
“도둑이 무슨 사람 가려서 도둑질을 하겠나. 가진 거 많고 아는 거 많으면 손 잡아서 하겠지.”
연우혁은 시큰둥했다.
만약 상대가 팽주성이나 제갈규였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하며 충격을 받았겠지만 상대는 도둑놈 아닌가.
역적하고 결탁하든 사교도와 결탁하든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금묘사는 연우혁의 시큰둥한 태도를 잘못 이해하고 뜨겁게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이 자는… 믿어주는 건가!’
정파의 무인들은 대의명분과 체면치레를 일 자체보다 더 중요시여길 때가 많았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자들이라면 모금묘사의 발언을 믿지 않거나 혹은 역으로 베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진충비도는 달랐다.
과연 판관으로 일하고 있는 기인답게 사람의 과거나 죄로 멋대로 선입견을 갖지 않고 일의 옳고 그름과 경중만을 엄중히 따졌다.
한경의, 아니, 조정의 유일하게 공정한 판관이란 칭송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믿어줘서 고맙소!”
“애초에 그쪽이 혈교도라면 이걸 왜 나한테 말해주겠나.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혈교 이야기나 더 해보도록.”
“알겠소.”
모금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는 이야기를 더 털어놓았다.
이 도둑은 가끔은 사파 문파에게, 더 가끔은 정파 문파에게, 그리고 아주 더 가끔은 혈교에게 의뢰를 받아서 일을 처리하곤 했다.
강호에는 칼부림보다 도둑질이 필요할 때가 은근히 많았던 것이다.
“도역유도에서 훔쳐야 할 물건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을 바로 지(知)라고 했소. 실은 이 이야기가 물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오.”
“과연. 의뢰를 맡긴 자들이 더 위험하단 건가.”
바로 알아듣는 진충비도의 총명함에 모금묘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정파든 사파든 혈교든, 도둑에게 의뢰를 맡기는 자들만큼 위험한 자들도 없었다. 물건은 훔쳤지만 의뢰인에게 죽은 도둑이 강호에 얼마나 많던가.
그걸 대비하기 위해 모금묘사는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리고 그런 조심함이 의외의 이야기를 엿듣게 만들었다.
“일을 끝내고 혈교의 무인들과 만나기로 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먼저 가서 보름 동안 버텼소.”
모금묘사가 익힌 특수한 무공과 귀식대법은 뒤에 도착한 혈교도들이 모금묘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보름 동안?”
“기다리게 하면 성질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날 죽일 자들은 보통 떠들기 마련이오. 그런데 그 때는… 의외의 이야기를 하더군.”
자신을 죽일 계획이 있나 귀 기울이던 모금묘사는 아주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바로 용봉지회에 첩자를 보내려는 녹귀혈뇌의 계획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소. 하오문한테도.”
혈교는 원한을 잊지 않았다. 혹여라도 나중에 모금묘사가 입을 놀렸다는 사실이 들키기라도 하면 모금묘사는 평생 혈교한테 쫓겨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마땅한 증좌도 없고, 누가 첩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둑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렇기에 모금묘사는 입을 다물고 그 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왔었다.
“난 믿는다. 고맙군.”
“…!”
영안으로 모금묘사를 본 연우혁은 상대가 한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모금묘사는 괜히 울컥 밀려오는 감정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왜 독혼수 같은 마두 새끼가 판관을 위해 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더 아는 게 없어서 미안하오. 그저 계획이 있다는 것만 들어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서신을 보내야겠군.”
“그만두시오!”
모금묘사는 깜짝 놀라서 연우혁을 말렸다.
누구한테 보내려는 건지는 몰라도 서신을 보내는 건 최악의 행동에 가까웠다.
무림의 어느 누가 받더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증좌라도 있어야 했다.
“괜히 진충비도 당신만 힘들어질 것이오. 그 자가 당신을 믿어준다 하더라도, 그 자 또한 증좌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
“으음. 그런가? 난 괜찮을 것 같은데.”
“누구한테 보내려고 했소?”
모금묘사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진충비도가 보낼 법한 무인이라면…
‘독혼수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설마 천기수사!? 하지만 천기수사도 이런 일에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을 텐데…’
“무송진인께 보내려고 했는데.”
“무송진인? 그게 누구요? 무당파의 무인인가?”
“무당파… 출신이시지. 무림맹 맹주시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태극검존!?!?!”
뒤늦게 연우혁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은 모금묘사는 경악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 판관은 대체 어떻게 태극검존을 알고 있단 말인가?!
* * *
곤륜(崑崙)의 젊은 무인, 선도광은 형형한 눈빛을 내뿜으며 말을 내뱉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구파에서 마(魔)를 상대한 경험이 가장 많은 이들은 우리 아닙니까? 마땅히 혈교의 첩자를 찾는 일도 우리가 맡아야 하는데!”
곤륜파의 무인으로서 선도광이 자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마교가 신강에서 그 세를 잃고 사라지기 전까지 곤륜의 역사는 마교와의 투쟁으로 인한 피의 역사였으니까.
당연히 곤륜의 무인들은 마공을 상대하는 데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는 마인들을 찾아내는 것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맹주는 곤륜파에게 전권을 주고 첩자를 찾게 하는 일을 거부했다.
“입조심하거라. 도광아. 네 녀석이 검존의 뜻을 감히 얕잡아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장로님.”
곤륜의 서 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검존께서는 구파일방의 체면을 신경쓰시는 거겠지… 설령 첩자를 잡는다 하더라도 서로 간에 앙금이 남으면 자승자박일 테니.”
그 말에 선도광은 속으로 가득 불만을 가졌다.
다른 문파의 허영과 무능을 지켜주기 위해 중요한 일을 돌아가야 하다니.
그 불만을 알아차렸는지 서 장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아직도 멀었다. 검존께서 전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첩자를 찾는 일을 금하지도 않으셨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
그제야 선도광의 얼굴에서 불만이 사라졌다.
곤륜에서 젊은 후기지수 중 무공은 물론이고 뛰어난 오성(悟性)으로 명성이 높은 선도광이었다. 산맥의 일월봉에서 은거하고 있는 몇몇 진인들에게 술법을 배울 만큼, 선도광은 문파 내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시작할 생각이느냐?”
“후기지수들 중 영리한 자들과 손을 잡겠습니다.”
서 장로는 대답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지모만을 믿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드물었다. 정파의 여러 문파를 폭넓게 확인해야 하는 만큼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과 손을 잡는 건 좋은 계책이었다.
“좋다, 시작 하거라.”
“예!”
두 시진 후.
선도광은 황망한 얼굴로 제갈세가 무인들이 머무는 장원에서 걸어 나와야 했다.
‘대체 진충비도가 누구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