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civil servant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천담성,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냐? 기껏 천문세가에서 신뢰를 얻은 놈이 거짓말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을 한다고?”
금의위 부지휘사는 혈교 장로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해서 꺼냈다.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부지휘사가 혈교 장로 대신 말하자 이번에는 천담성 대신 연우혁이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대인. 천 형께서는 타고난 정인군자라 혈교의 세뇌가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사람이 어떻게 키워준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담성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본 판관이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 이보시오.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 거요? 내 생각은 어떻게 아는 거고?”
“틀린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맞긴 하오만…”
혈교 출신으로 어렸을 때 세뇌를 받은 후 천문세가에 보내진 천담성이었다.
그 후로 연락이 없었기에 혈교 쪽에서 자신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내심 기대했었지만, 그런 기대는 허망하게도 물거품이 되었다. 최근 용봉지회를 앞두고 혈교의 연락이 다시 날아온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혈교의 명령을 따라야 하겠지만 천문세가의 은혜를 생각하면 천담성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진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연우혁의 질문이 천담성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와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든 거였다.
“이 분은 누구시오?”
“금의위 무인입니다.”
“…과연.”
천담성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잠깐 놀랐었지만, 눈앞의 판관은 방금 생각했던 대로 혈교의 첩자를 색출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용봉지회를 앞두고 소란이 일어나면서 명문정파는 물론이고 금의위나 동창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금의위 무인이 여기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진충비도는 판관으로서 일하고 있는 특이한 무림인 아니던가.
아마 연 판관이 천담성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치밀하고 끈질긴 뒷조사와 감시, 분석 덕분이리라. 천담성은 나름 비밀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금의위가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저 금의위 무인이 왜 저렇게 놀라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죽이시오. 혹시 괜찮다면, 가주님에게는 이 천 모가 뵐 면목이 없다고만 전해주시오.”
“천 형. 저는 천 형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난 혈교의 첩자인데?”
천담성은 젊은 판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혈교의 명령을 받아 누굴 죽이셨습니까?”
“…그러진 않았소.”
“혈교의 명령을 받아 소란을 일으키실 생각이었습니까?”
“그건… 앞으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천 형께서는 그러시지 않았을 겁니다.”
“네놈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거냐!”
천담성은 연우혁이 자꾸 속마음을 읽어내자 분노하며 외쳤다.
자괴심과 수치심에 조용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속마음을 들춰내니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대화를 조굉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끼어들었다.
“두 놈 다 조용히 해라.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화군. 천담성. 혈교의 첩자라고 했겠다? 여기 진충비도와 달리 난 네놈의 선함을 믿지 않는다.”
“이해합니다.”
금의위 무인은 조금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 천담성은 담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믿는 건 네놈이 혈교의 첩자라는 것 하나뿐이지. 그건 확실하니까. 혈교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봐라.”
“저도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천담성은 자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연우혁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렸을 때 길러낸 혈교의 첩자에게 정보를 많이 알려줄 리 없습니다. 혹시라도 발각되어서 붙잡힌다면 손해 아니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조굉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천담성의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천담성이었다. 아까부터 저 판관 놈이 대체 왜 자길 챙겨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혈교에서 비밀리에 전갈을 보낼 때는 어떤 방식으로 보내지?”
“다른 서신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평범하게 보냅니다. 아시다시피 천문세가에는 매일 수많은 선물과 서신이 들어오니 그 사이에 숨기는 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천문세가, 그것도 가주의 아들인 만큼 잘 보이기 위해서 뇌물을 보내는 지역의 부호들도 많았다. 거기에 끼워 넣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용까지 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아마 불을 쬐면 글자가 드러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다른 비표는 너무 어렵고, 의심 받는 상황도 아닌 만큼 저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
“……”
조굉과 천담성이 동시에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제 말에 틀린 거라도 있습니까?”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첩자한테 물어봐야 할 이유라도 있단 말이냐?”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저 예측했을 뿐.”
“맞나?”
부지휘사의 질문에 천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불에 갖다 대면 숨겨진 글자가 드러났습니다. 교를 떠나기 전에 배웠었지요.”
“받은 명령은?”
“남궁세가의 장원에 방문해 몇 가지 물건을 놓고 나오는 거였습니다.”
“누명인가.”
평소라면 오대세가의 으뜸이자 그 자신도 막강한 위엄을 휘두르는 남궁세가의 장원에 방문해 물건을 뒤지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처럼 용봉지회를 앞둔 특수한 상황에서는 어떤 핑계든 쉽게 대고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혈교와 관련된 물건이 안에서 발견된다면?
남궁세가가 무림공적이 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하진 않겠지만 한동안 사람들의 의심은 피할 수 없으리라. 실로 교활한 계책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나?”
“하지 않았습니다.”
조굉은 왜 하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천담성이 정인군자든 아니든 조굉의 일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이야 천담성을 좋게 평가해준 것 같았지만 조굉은 그리 순진하지 않았다.
“혈교 놈들에게 만나자고 서신을 보내라.”
“불가능합니다. 대번에 절 의심할 겁니다.”
“남궁세가에 물건을 놓고 나왔다고 하란 말이다. 그러면 그놈들도 거절은 못할 거다.”
“교가 얼마나 교활한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제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을 때 순순히 나와 줄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건 네놈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음. 맡겨두면 안 되겠군.’
금의위 부지휘사의 뛰어난 용인술에, 연우혁은 자신이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저 밑의 금의위 무인들이 꽤 고생일 것 같았다.
“조 대인. 제가 계책을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다. 원래 네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첩자에게 지나치게 유약한 모습은 보이지 마라.”
“딱히 유약한 게 아니라 사실만을 말한…”
조굉은 더 듣지 않고 턱끝으로 빨리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연우혁이 앞에 서자 천담성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 젊은 판관은 자꾸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천 형. 혈교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천문세가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 싶지 않단 말입니까?”
“그건… 맞소. 갚고 싶소.”
“맞습니다. 천 형 같은 정인군자는.”
“그 놈의 정인군자 소리는 그만 하라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천담성이 분노해서 소리쳤다. 천문세가의 사람들을 속인 자괴감이 정인군자 소리를 듣자 다시 한 번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생각보다 성격이 난폭하군.’
“알겠습니다. 하여간 복수하면서 은혜도 갚고 싶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협조해줄 수는 있소. 다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요. 나는 아는 것도 부족한데다가 어렸을 적 교의 고(蠱)를 먹었소. 언제 죽을지 모르지. 최악의 경우에는 마인이 될지도…”
배교의 진전을 일부 이은 만큼 혈교에는 고독(蠱毒)에 뛰어난 술사들이 있었다. 이런 사악한 술법은 혈교의 무인들이 배신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 섞인 충성을 바치게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 고는 가짜입니다.”
“…뭐요?”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짜입니다. 아무리 혈교의 고라 하더라도 이십 년 가까이 내버려 둔 이상 멀쩡히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천 형처럼 시도한 혈교의 어린 첩자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 모두에게 고를 먹일 수 있었겠습니까. 만드는 것도 꽤 어렵고 비쌀 텐데 말입니다.”
물론 천담성에게 실제로 혈교의 고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치를 따져도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 정도로 효과 좋고 강한 고독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귀한 인재한테 써야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어린아이한테 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굉도 연우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충비도의 말이 맞다. 혈교의 술법이 사이하고 독랄하다지만 모든 첩자들한테 고를 먹여서 보낼 정도는 아니지.”
“그, 그런… 하지만 저번에 혈교의 첩자가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 두통을 느꼈소. 그게 고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오?”
“혹시 차를 대접했습니까? 아마 하인을 매수해서 차에 약한 독을 타놨을 겁니다. 목숨에 지장이 가는 독도 아니니 하인을 매수하기도 쉬웠겠지요.”
“!!”
천담성은 장사치로 위장해서 찾아온 혈교의 첩자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한 걸 떠올리고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는 걸 느꼈다.
‘진충비도의 지혜가 한경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더니 정말이로군…!’
낯선 곳의 소문이란 건 대체로 과장되기 쉬운 법이라 적당히 흘려들었는데, 눈앞에서 직접 보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 그러면 혈교의 첩자를 어떻게 부르느냐인데.”
“…설마, 그것도 부를 수 있소?”
천담성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며 물었다.
혈교의 첩자를 쉽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방금 진충비도가 보여준 재주라면 무언가 비책이 있을지도 몰랐다.
“음.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혈교 첩자가 방문할 만할 일이라면…”
“고가 가짜라는 걸 안 이상, 내가 목숨을 걸고 나서보겠소.”
연우혁이 고민하자 천담성은 살짝 아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고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대를 협박해 볼 생각이었다.
“교의 고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고 보낸다면 놈들도 애가 타서 찾아올…”
“아. 그거면 될 거 같습니다. 탐혈광랑이 습격의 범인을 알아낸 것 같다고 보내시죠.”
“…!”
천담성보다 조굉이 더 놀랐다. 조굉은 보기 드물게 감탄한 목소리로 외쳤다.
“훌륭한 계책이다. 어떤 놈들이든 궁금해서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겠군!”
“감사합니다. 이번 책략을 준비하고 있는 게 혈교의 혈뇌들인 만큼, 연락을 주도하고 있는 자도 꽤 심복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습격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해볼 만하다. 천담성이 야심에 가득 차서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내면 더욱 그럴듯하겠지.”
“혈교 내에서 지위를 보장해달라고 하지요.”
연우혁과 조굉이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자 천담성은 당혹 가득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일지추혼(一指追魂) 장악은 최근 십 년 사이 강호에 출도한 무림인이라면 그 별호를 알기 힘든 마두였다.
이십오 년 전 문파 두 개와 마을 하나를 피로 물들이는 혈사를 일으킨 장악이었지만 하늘은 장악을 저버리는 대신 천운을 쥐어주었다.
장악이 추적대의 포위망을 간신히 빠져나와 혈교 고수들의 손을 잡게 해준 것이다. 천운이 없었다면 실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 후 교에 투신한 장악은 여러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며 지금은 녹귀혈뇌의 심복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외부에서 흘러 온 마두치고는 꽤 대단한 출세였다.
그런 장악이 이번 용봉지회를 앞두고 녹귀혈뇌의 대계를 조율하기 위해 한경에 방문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혈교의 첩자들이 어린 시절에 세뇌를 받았다지만 꽤 시간이 지난 만큼 반항심도 생겨났을 터.
그런 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노회한 전대의 마두가 적합했다.
원래 그럴 터였는데…
“탐혈광랑 놈이 설마 배신한 거냐!!”
조굉에게 일격에 제압당한 장악은 핏발선 눈으로 외쳤다. 연우혁은 무심코 대답했다.
“그렇다. 놈은 장로들에게 원한이 심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