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civil servant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적안호리는 은림당의 부당주로서, 암왕이란 별호를 가진 당주 조 노야를 제외한다면 은림당의 최고수였다. 냉수사 또한 절정의 고수인 만큼 적안호리가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무공의 경지로 정면에서 생사결을 벌이는 것이라면 냉수사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수의 무공은 백주 대낮이 아닌 캄캄한 심야에 그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
살수 조직인 은림당의 최고수라는 것은 무공의 고하를 떠나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의미했다.
객잔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릴 때, 심지어 심산유곡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숯쟁이들에게 숯을 살 때도 살수가 튀어나와 자신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은 절정의 무인도 지치게 만들었다.
일개 살수의 기습 정도는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도 막아낼 수 있겠지만 적안호리 같은 고수가 거기에 섞여 있다면?
은림당의 살수들이라면 대원들의 목숨을 버리는 패로 쓰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강력한 문파 밑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는 것이었지만 냉수사 같은 떠돌이 마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
그래서 나름대로 적안호리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를 찾아온 거였는데…
‘…이 놈, 나하고 원한이 있어서 대충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냉수사는 살짝 의심이 갔다. 사실 연우혁의 경지가 낮을 때 무공만 믿고 협박한 적이 있긴 했었다. 그 때야 이렇게 될 줄 몰랐기에 한 일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경지가 높아졌을 때도 무공만 믿고 협박했었군.’
마두는 손부터 먼저 나가는 스스로의 거친 성정을 욕했다. 후회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발목을 잡을 때면 반성하게 됐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적안호리에 대해 잘 아는 거냐?”
“소문 정도는 들어봤지. 흑도칠문의 은림당 소속, 부당주, 금명탈검 하선엽과 모용세가의 모용형을 죽인 고수 아닌가.”
“…그런데 따돌릴 방법을 안다고?”
마두의 불신 섞인 목소리에, 연우혁의 태도도 곧바로 퉁명스러워졌다.
“못 믿겠으면 꺼져라. 지혜를 구하러 온 놈의 태도가 말이 아니군.”
“아… 아니. 아니다. 사과하겠다. 이 무지렁이가 무공만 익히고 예의범절이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다.”
냉수사는 허겁지겁 사과했다.
생각해보니 이 판관 놈은 전에도 그랬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듣지도 않고 이치를 잡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은림당의 살수들한테도 통한다는 게 믿기지 않긴 했지만, 허언을 할 자는 또 아니었던 것이다.
“이걸 봐라!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 이렇게 갖고 왔다.”
냉수사는 전장의 전표와 함께 용과 봉황 무늬가 그려진 목함을 꺼내들었다. 이 산전수전 겪은 마두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명판관이 백성들의 원통함이야 철전 한 푼 받지 않고 해결해주더라도, 마두의 원통함까지 그렇게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당연히 마음을 움직일 대가를 갖고 와야 했다.
“오호.”
연우혁은 상대방이 갖고 온 성의 표시에 흡족해했다.
생각해보니 최근 지혜를 빌려주면서 대가를 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두툼한 전표를 보자 갑자기 냉수사가 했던 패악질들이 기억에서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그 목함 안에는 뭐가 들었나?”
“아주 귀한 보물이지.”
“오오…”
그 말까지 듣자 마두 또한 관리가 교화시켜야 할 백성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연우혁은 노련한 관리답게 체면을 지키며 눈짓했다. 냉수사는 눈치 빠르게 알아듣고 목함을 열었다.
달칵!
“정왕호신갑! 칼과 암기는 튕겨내는, 아무리 싸게 잡아도 오백금은 족히 되는 보물이지!”
이 갑옷은 예전에 사파의 고수 둘과 싸워서 얻은 아주 귀한 보물이었다.
눈에 띄는 보물이라 자주 입고 다니지는 않았었지만, 혈전을 각오하고 착용할 때마다 냉수사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주었다.
아무리 청백리라 하더라도 저 판관 또한 무림인. 이런 보물에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으음.”
연우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갑옷이 나쁜 보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고묘에서 금목보의(金木寶衣)를 얻은 덕분에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방어에서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다가, 보물로서 갑주와 옷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더 편했다. 평소에도 입고 다니며 상대를 방심시키기 좋았으니까.
“다른 건 없나?”
“?!!”
냉수사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경악했다. 설마 이 정왕호신갑을 탐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보물에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거냐? 이 보물이 어떤 보물인데…”
“냉수사. 무인의 목숨을 지켜주는 것은 보의나 보갑이 아니라 의기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판관의 모습에, 냉수사는 이놈이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설마 저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닐 테고…
“그보다 냉수사.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소문 말이냐?”
“네가 청수경(靑手經)을 갖고 있다고…”
“…푸, 푸핫, 으핫핫핫핫핫핫!”
연우혁의 말에 냉수사는 진심으로 웃기 시작했다. 일 다경은 족히 웃어댄 것 같았다. 상대가 다 웃은 것 같자 연우혁은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여봐라! 손님이 돌아가신다는군.”
“잠, 잠깐. 미안하다. 예의범절을 못 배워서…”
“그쯤 되면 슬슬 배울 때도 되지 않았나? 남에게 묵형, 의형 가하는 것들은 열심히 고서에서 배웠으면서 왜 예의범절은 못 배웠나?”
‘요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냉수사는 새파랗게 어린 놈이 지껄이는 말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강호를 홀로 주유하면서 온갖 일들을 겪어보았지만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고수 놈에게 핍박받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웃은 이유가 있다. 청수경과 관련해서 내가 싸움에 휘말렸던 게… 십 년, 이십 년은 안 됐던 것 같고…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이야기가 나와서 웃은 거다. 어느 마두 놈이 그런 소리를 했느냐? 정파 놈이 말했을 리는 없고.”
“청수귀마.”
“그 놈이?? 이런 찢어죽일 놈 같으니라고!”
냉수사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청수귀마에게 나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감히 뒤에서 해코지를 하려고 할 줄이야.
죽은 청수귀마의 오해를 굳이 풀 생각이 없었기에 연우혁은 가만히 있었다.
“내가 청수경이라고 불린 비급을 얻은 건, 예전에 마두 놈들과 같이 손을 잡고 문파 하나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객잔에서 쉬려고 하는데 문파의 공자 놈이 날 모욕했고 난 그 모욕을 갚아주려고 했…”
“본론만.”
“…문주 놈의 방을 철저히 털었는데 낡은 고서 몇 권 사이에 찢어진 비급 몇 장이 있더군. 청수경이라고 적혀 있던. 난 그게 가짜인 걸 한 눈에 알아봤기에 숨기지 않고 다른 마두 놈들에게도 보여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청수귀마 이 놈. 내가 숨겼다고 생각한 거였군.”
냉수사는 이를 갈았다. 나름 공명정대하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오해하고 배반했으니 분통이 안 터질 수가 없었다.
“마두 놈들도 보자마자 그게 가짜인 건 알더군. 차라리 그게 진짜 청수경이었다면 내가 아직도 이 경지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텐데… 이후로 소문이 퍼졌는지 몇 번 싸움이 일어났다. 죽여야 할 놈들은 죽였고 타협해야 할 놈은 그냥 보여줬지. 가짜라는 이야기가 돌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관심을 가지는 놈이 없어지더군.”
“나도 볼 수 있나?”
“옛다.”
냉수사는 품속에서 비급 몇 권을 꺼내 뒤적거리더니 낡디 낡은 양피지 뭉치를 하나 던졌다.
온갖 특이한 문양과 도형, 그리고 헛소리처럼 읽히는 글자들. 확실히 누가 봐도 엉터리 비급이긴 했다. 연우혁은 별다른 기대가 가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영안을 열고 확인했다.
“…!”
놀랍게도 영안으로 본 양피지 뭉치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술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우혁이 익힌 천마군림보, 아니, 충혼의백술처럼 술법을 사용한 무공이 분명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쓸 수 없을 만큼 난해한 상승의 무공이었지만 가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뭉치는 비급 중권의 다섯 장인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냉수사처럼 노회한 마두는 눈치가 빨라서 괜한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냉수사. 비책을 듣기도 전에 나한테 이걸 줘도 괜찮나?”
“그런 식으로 잔수작을 부릴 놈이었으면 청백리 같은 소문이 나지도 않았겠지.”
냉수사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연우혁이 그런 식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건 믿는 태도였다.
‘이 마두… 은근히 허술하군.’
연우혁은 나중에 이걸 이용해서 크게 벗겨먹을 수 없나 살짝 고민이 됐다.
* * *
냉수사와의 거래를 마치고 한경으로 돌아온 연우혁은 관청 전체에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용봉지회도 끝났고 금의위와 무림인들의 충돌도 얼추 마무리가 됐는데 이렇게 부산스러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판관 나으리! 돌아오셨군요! 빨리 후당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부 대인께서 나으리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났긴 났구나!’
연우혁은 하인의 외침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돌아온 판관에게 서둘러 등청하라고 하인이 외칠 정도라면 사태가 긴급한 게 맞았다.
‘금의위가 문제를 일으켰나? 혹은 인근에 역모가… 아니다. 마두 놈이 사고를 일으켰을지도. 혈교 놈들이 원한이 있을 테니!’
급히 후당으로 달려가자 이미 한경의 고관들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한경의 지낭(智囊)인 젊은 판관이 도착할 경우 안심과 기대의 눈빛을 보냈을 이들인데도 우중충한 기색이 문 밖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
“연 판관. 어서 오게.”
그나마 금 통판이 투실투실한 얼굴에 잡힌 주름을 억지로라도 피며 맞이해줬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큰일이지. 암. 정말 큰일이야.”
“무슨…”
“한경에 감찰사가 나온다는군.”
“……”
감찰사, 정확히 말하자면 감찰어사(監察御史)는 조정 관리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도찰원(都察院) 소속의 관리였다.
이들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말 그대로 다른 관리들의 임무를 감찰하고 평가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에 어찌 잣대가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천 리 밖에서 벌어난 일을 이제 막 찾아온 외지인이 멋대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한경 같은 번성한 대도시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군선을 개조해서 유람에 사용하는 기지와 휘하 관리들이 군량을 착복해서 빼돌려도 눈 감고 넘어가주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도찰원에서 나온 감찰사는 책상물림하는 서생들이라 무엇이 백성들을 위한 일인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헐뜯기만 할 줄 알았다.
‘…괜히 놀랐군…’
연우혁은 한경의 관리로서 같이 걱정해준 게 수치스러워질 정도였다.
고작 이런 것 때문이 이렇게 난리를 쳤을 줄이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만큼, 연우혁은 좋게 말했다.
“지부 어른께서 알고 계시는 윗분들이 많으니 감찰사도 감히 근거 없이 헐뜯지는 못할 겁니다.”
근거야 넘쳐났지만 원래 관리란 게 자기 파벌의 사람이라면 적당히 눈을 감아주기 마련.
그러나 지부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큼은 다르네. 상서(尙書, 정 2품)가 선물을 받고 친척의 일을 돌봐줬다가 한림원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하는군. 지금 조정은 벌집을 들쑤신 것마냥 시끄럽네.”
연우혁은 지부의 말을 알아서 해석했다.
조정 고관 중 한 명이 정말 뇌물을 끔찍할 만큼 많이 받아서,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주려던 다른 관리들도 ‘이건 안 되겠다 먼저 쳐내야지’해서 포문을 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의 관리들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없는 만큼, 평소처럼 뇌물과 인맥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봐야 했다. 도찰원도 작정하고 감찰사를 보낼 게 분명했다.
‘대체 얼마나 받았길래…’
앉아서 천 리 밖의 일을 해결하는 연우혁이었지만 고관들의 뇌물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연우혁이 지부가 되더라도 군선을 빌려서 강에 띄우고, 군량을 은으로 바꿔서 연회에 필요한 비용을 댄다는 참신한 발상은 감히 하지도 못할 것이다.
도찰원의 감찰사들은 현령이나 지주뿐만 아니라 성 하나를 다스리는 포정사나 안찰사도 고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한경의 지부도 나름 어마어마한 지위였지만 감찰사 앞에서는 상성적으로 매우 불리했다.
“누군가 암습이라도 해주면 좋겠습니다.”
관리 중 한 명이 푸념하듯 중얼거리자 지부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죄, 죄송합니다.”
‘지부가 그래도 양심은 있군.’
“담벼락에도 귀가 달려있는 것을 모르는가? 만약 정말 감찰사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금의위가 자네부터 잡아갈지 모르는 일일세!”
“소인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면 됐네. 앞으로는 조용히, 속으로 기원하게!”
말을 마치고 지부는 눈을 감은 뒤 중얼거리며 태상노군에게 빌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쉬다가 등청할 거 그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