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civil servant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분통이 터져서 발광해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혈마는 침착하게 말했다.
“네놈의 실력을 인정하겠다. 다음 대계 때 네놈 같은 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먼저 죽이도록 하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혈마 본인이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아직 젊고 신분이 하찮다고 다시는 경시하지 않으리라.
“……”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는 섬뜩한 말이었다. 다음 대계란 말 자체는 물론이고 일단 지금 연우혁은 죽이고 가겠다는 소리 아닌가.
연우혁은 고관다운 태도로 외쳤다.
“어서! 어서 놈을 죽여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재정비를 끝낸 진법이 강렬한 압박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추가된 금의위 위사들이 강궁을 들고 화살을 날리자 혈마는 짧은 고함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소림의 사자후(獅子吼)를 연상시키는 음공이었지만 훨씬 더 사이하고 날카로웠다. 진법에서 벗어나 욕심을 부리려던 몇몇 위사들이 즉시 절명했다.
‘이 놈은 지치지도 않나?’
연우혁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절정 고수들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까지 견제하는 혈마의 모습에 새삼 막막함을 느꼈다.
평범한 마두였다면 이런 상황 자체에 압박감을 느끼고 두려워했을 텐데, 혈마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속마음을 숨기는 재주가 능숙한 걸 수도 있었지만 연우혁은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상대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자기 몸 하나 뺄 자신은 있어 하다니.
‘탈혼비도는…’
연우혁은 비도를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첫 일격을 제외하고서는 한 번도 혈마의 몸에 닿지 못한 만큼 조심스러웠다.
명교의 비전을 잇고, 경지가 오른 뒤부터 한 번 던진다고 탈진해서 쓰러지진 않는다지만 아무래도 혈마 같은 고수를 앞에 두고 이런 초식은 과감하기가 어려웠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혈마의 공격이 연우혁을 노리고 들어왔다. 절정 고수가 각오하고 기공을 펼쳐야 만들어낼 수 있는 강기가 마치 그물망처럼 쭉 뽑아져 나오더니 하늘을 덮었다.
마치 검법의 고수가 펼치는 검망 같았지만 그 위력은 훨씬 더 치명적이고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다른 절정 고수들이 눈을 부릅떴다.
무공의 고수라 하더라도 싸움에는 호흡이 있고 기세가 있었다. 일 대 다수로 싸울 때 한 명을 먼저 끝내려고 해도 살기가 나와 본능적으로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게 연우혁 한 명을 노리고 살초를 펼치다니.
하지만 연우혁도 만만치 않았다. 천마군림ㅂ, 아니, 충혼의백술을 펼쳐서 강기로 만들어진 그물망 자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혈마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명교 놈들은 확실하게 처리했어야 했다.’
명교, 마교, 배교, 혈교…
무림에서 사이하다고 몰린 교(敎)들은 서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명교 출신 고수가 마교에서 일문을 이루거나, 마교 출신 고수가 배교의 장로가 되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반발하고 교의 비전을 빼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혈마는 혈교의 권력을 손에 넣은 뒤 자신의 대계를 위해 여러 고수들의 신공을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일자상전의 비급을 바칠 수 없었던 고수들은 목숨을 걸고 이탈했다.
어차피 혈교의 조직을 개편하는 게 원래 목적이었던 만큼 혈마는 도망친 자들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비급들은 확실히 추적했고 남은 자들은 별 것 아닌 놈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남은 자들 중에 적에게 교주의 비급을 넘기는 놈이 나올 줄이야.
아쉬움과 별개로 혈마는 바로 따라붙었다. 연우혁도 본 적 있는 혈교 장로들의 보법, 혈원보(血怨步)였지만 그 수준은 차원이 달랐다. 눈으로는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고 있어도 마치 몸이 조종당하듯이 앞에 끌려들어갔다.
연우혁은 광명갑을 믿고 권법을 펼쳤다. 파사(破邪)의 기운이 느껴지자 혈마는 한층 더 놀랐다.
대체 이 정파 놈은 명교 교주의 비전을 이은 것도 모자라 보물까지 손에 넣었단 말인가?
이쯤되면 우연히 진전을 이은 수준이 아니라 명교 교주의 후인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혈마는 혹시 눈앞의 젊은 놈이 명교를 다시 세워서 무림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주먹과 주먹이 세 번 부딪치고 연우혁이 가볍게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혈마는 바로 끝장을 내기 위해 쫓으려 했지만 비수가 하나 날아들었다. 섬뜩한 귀곡성에 멈칫하며 쳐다보니 이건 또 귀령비(鬼靈匕)였다.
“……”
배교 마두들을 부리고 있는 건 알았지만 서로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배교의 보물까지 갖고 있다니.
혈마는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집중했다. 수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펼친 진법 사이에서 정확하게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초절정의 고수라 하더라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놈은 광명갑을 갖고 있다. 이 보물은 수라마혈공의 강기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강기에 환(渙)과 변(變)의 묘리를 담아 사방을 포위해야 한다. 다만 놈은 명교 교주의 술법을 쓸 줄 아니, 한 번으로는 불가능하다. 흐음…’
혈마는 뛰어난 기객(棋客)처럼 미래를 빠르게 내다보았다. 연우혁처럼 영안이 있거나 신통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몇몇 고수들은 싸움에 한해서는 앞일을 내다볼 줄 알았다. 혈마 정도의 고수라면 더더욱 그랬다.
특히 서장 법왕의 청수경에 담긴 깨달음을 넣어 새로이 정립한 혈마의 독문무공, 수라마혈공(修羅魔血功)은 혈마가 예측한 미래로 상대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자. 와라.’
사방에서 날아드는 암기와 화살을 튕겨내고 막아내면서 혈마는 연우혁을 향해 암경(暗勁)을 펼치고 격공장을 펼쳤다.
명교와 배교의 무인들을 부리고 있는 정파의 젊은 야욕가(野慾家)였지만 그 심계와 달리 무공은 어쩔 수 없었는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연우혁의 표정이 급변하자 혈마는 승리를 직감했다.
그러나 연우혁의 표정이 변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놈이 혼백을 유도한다. 조심해라!”
“!”
독장을 날리던 당등은 연우혁의 외침에 놀라서 물었다.
“혼백을 유도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섭혼술(攝魂術)과 비슷하지만 그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몸을 뺏는 것만 있는 게 아니군!”
배교나 혈교에는 사람의 이지를 흐트러뜨리고 정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사술이 여럿 있었다. 보통 섭혼술이라고 불리는 이런 술법들은 한 번 당하면 마치 꼭두각시처럼 놀아나게 됐다.
섭혼술은 무공을 익힌 고수에게는 통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대가 어지간히 방심하거나 약해지지 않으면 잘 단련된 정기신(精氣神)을 뚫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혈마가 펼치는 수라마혈공은 정신없이 벌어지는 난전 속에서 상대의 혼백을 혈마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유도하는 힘이 있었다.
“과, 과연…! 그러면 어떻게?!”
“……”
연우혁은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연우혁 본인이야 청수경을 절반 넘게 읽고 영안과 영기를 갖고 있었으니 혈마의 수법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강기를 피하고 권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상단전이 흔들리며 혼이 움직이니 자연스레 이상함을 느끼고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고수들은 무공이야 절정의 경지라 하더라도 연우혁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기가 힘들었다.
“혹시 기감을 예리하게 가다듬어서 상단전 쪽 혼이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나?”
“…그, 그런 게 가능한가?”
‘젠장. 역시 무리군.’
적안호리의 반응에 연우혁은 틀렸다고 직감했다. 아무래도 다른 무인들은 연우혁처럼 반응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독문무공의 비밀까지 하나씩 파헤쳐나가자 혈마는 더더욱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확실히 움직였다. 마음이 급해질 만도 한데 혈마는 침착했다. 초식 열 개가 펼쳐지고 나자 연우혁의 광명갑에 금이 갔다.
운철로 만든 보물이었지만 혈마의 강기공을 완전히 막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자. 다음은…’
광명갑을 무력화시킨 혈마는 절정 고수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한 뒤 다시 연우혁에게 덤벼들었다. 이제까지 만들어졌던 빈틈만 놓고 보면 포위망을 뚫어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연우혁은 확실히 죽이겠다는 게 느껴졌다.
‘젠장. 나 같아도 그러겠군.’
연우혁은 솔직히 불평할 수가 없었다. 혈마가 아무리 자기 목숨을 아끼고 신중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연우혁이 오늘 보여준 것만 보면 등골이 서늘해서 그냥 물러나기가 힘들 것이다.
만약 무사히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또 연우혁이 준비한 함정이 있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차라리 무리를 좀 하더라도 적의 두뇌를 확실히 없애는 게 맞긴 했다.
그렇게 노려지는 게 본인이라서 그렇지!
“야, 안 되겠다! 어쩔 수 없다!”
당등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함을 질렀다. 무슨 비책이라도 있나 싶어 연우혁은 반색했다.
“뭡니까? 혹시 당문 비장의 절독이라도…?”
-그냥 뒤로 튀어서 진법 속에 숨어라!
“……”
천하의 당등도 이건 차마 대놓고 외치기 힘들었는지 전음을 보냈다. 연우혁은 순간 황당했지만 금세 당등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게 가장 맞긴 하군.’
지금 혈마를 가둔 포위망은 거의 수십 겹에 가까웠고, 가장 근접해있는 건 연우혁을 포함한 절정 고수들 여럿의 진형이었다.
직접 맞붙을 때마다 혈마가 압도하는 것 같았지만, 혈마는 내색하지 않아도 다른 고수들을 여럿 경계하고 있었다.
연우혁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무력화시키는 게 그 증거였다. 무리하다가 일격이라도 당하면 혈마의 손해였던 것이다.
만약 연우혁과 이 절정 고수들이 없었다면 그 밑의 고수들이 핏값을 바쳐가며 혈마를 몸으로 막아야 했으리라.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뒤에 있는 이들을 앞에 보내고 시간을 끌어도 됐다. 어차피 혈마를 지치게 만든 뒤 끝장을 보는 게 처음 목적이었던 만큼 결과는 같을 터. 오히려 이 방안을 처음부터 떠올리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우혁은 같이 온 도사들을 포함해 진법을 갖추고 있는 고수들을 훑어보았다. 가까이 붙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쓰러진 자들이 여럿인데 가까이 붙는 순간 어떤 혈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과연 그게 맞는가?
머리로는 그게 맞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연우혁은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육신과 정신이 분리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 * *
‘뻔하군.’
당등은 나름 전음을 보냈지만 혈마는 이미 무슨 전음을 보냈을지 예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혼신군이 선택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군세 속에 숨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혈마는 처음부터 그런 일을 예측했다. 저렇게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용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빠지는 순간…’
혈마는 아직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수라마혈공의 초식을 준비했다. 광명갑도 힘을 잃은 지금, 초절정의 경지로 펼쳐지는 강기공과 그 절초는 상대가 피할 수 없었다.
‘…자, 등을 보여라!’
허공에서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연우혁이 내공을 낭비하듯 방사하며 뻗어낸 것이다. 거의 강기에 가까웠지만 혈마의 강기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났다.
동시에 혈마가 각법을 펼쳤다. 연우혁은 뒤로 기묘하게 물러나며 간신히 피했다. 명교와 배교의 진전을 이은 놈이 보법은 또 기괴한 걸 펼치자 혈마는 의문을 품었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어떤 잔수작도 통하지 않는다. 생문(生門)으로 가거라.’
누구보다도 생 그 자체에 집착해 온 혈마였다. 생 앞에서는 재물이나 명성, 권세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초절정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평생을 바친 혈교를,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라면 제물로 버릴 수 있는 집념!
그러한 집념은 곧 요기(妖氣)와 사기(邪氣)로 변했다. 수라마혈공이 연우혁의 혼을 조종하듯 꿈틀거렸다. 상대는 금세라도 등을 돌리고 도망칠 듯했다.
그러나 연우혁은 등을 돌리는 대신 달려오는 혈마를 두고 비도를 뽑아들었다. 자신의 확신이 정반대로 어긋나자 혈마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속셈…’
그 순간, 비도가 공간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