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Knight After the Ending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아득한 밤하늘 (2)
업을 쌓아라.
그 말이 내 마음속에 말뚝처럼 깊게 박혔다.
그 말이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해 주는 것 같았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업을 쌓으면 어떻게 되느냐.
별빛은 침묵했다.
그 대신 내 뒤에서 하늘에 변화가 일었다.
오른쪽 하늘이 청아하고 써늘한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었고.
왼쪽 하늘은 강렬하고 찬란한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별 하늘이 가득했던 그곳에 태양과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의 힘을 다룰 수 있으리.]동시에 눈부신 천체의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잠에서 깬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머무는 방이었다.
창밖에는 어느덧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중이었다.
“거 참.”
게임이 현실이 되니 이런 신기한 경험도 다 해 보네.
*
로난이 내게 추천해 준 곳은 티르나의 35번구였다.
35번구는 발명가, 기술자들이 가장 많이 있는 구역.
그래서인지 유독 거리에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보였다.
압축 증기를 시원하게 뿜어내는 증기 엔진, 태엽을 감으면 알아서 움직이는 자그마한 기계인형, 더 많은 압축 증기를 유통시킬 수 있는 합금 파이프,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태엽 등등.
깡! 깡!
몸에 기름때를 묻히며 한 손에는 스패너를 쥔 기술자들이 땀을 흘려가며 볼트와 너트를 조인다.
다른 한쪽에서는 만든 기계가 제대로 굴러가는지 검증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철을 두들기는 소리, 똑바로 하라는 고함소리, 증기가 우렁차게 뿜어져 나오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무언가를 만들고, 고장 난 것을 고쳐주고.
노동자들이 가득한 공장과는 다르게 생기가, 그것을 넘어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곳이다.
나는 그 거리를 걷다가 나도 모르게 한쪽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리 한복판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웃통을 깐 채로 한쪽 팔을 수리공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그의 팔이 기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계 팔? 세상이 바뀌니 저런 것도 생기는군.’
수리공은 기계로 이루어진 팔을 돋보기로 살피며 미세하게 드라이버와 조립기로 조율하는 중이었다.
기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팔이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있었다.
나는 그 팔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로 정교한 기계 팔이라니. 지금 사람들은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평생 일 못 하면서 살지는 않겠네.’
나는 문득 기계 팔을 달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기계팔은 뭔가 로망이 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있는 이 몸이 가장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통행증 역할을 하는 신분증을 만들려고 온 거지, 저런 걸 구경하기 위해 35번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길이 엄청 복잡한데.’
약도를 건네받긴 했지만, 주변이 워낙 다양한 금속물품들이 많아서 길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길치는 아닌데, 이 거리는 그걸 감안해도 너무 복잡했다.
일단 걸어 볼까 생각하는 그때였다.
콰직!
나무로 이루어진 의자가 나의 바로 앞에 날아와 박살이 났다.
만일 조금만 더 발을 내디뎠다면 직격 당했을 위치.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 의수를 조율하던 쪽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지금 이 팔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흠집이 났잖아!”
의수의 남자는 자신의 기계 팔뚝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을 가리키며 역정을 냈다.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팔뚝에 난 기스 말고도 그의 의수는 험하게 굴린 것인지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 있었는데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본인도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그럼에도 저렇게 뻔뻔하게 외치는 것을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됐고 수리비 내놔. 천만 르네. 그거면 넘어가줄 테니.”
아. 수리비를 등쳐먹으려 하는 거였군.
쓰러진 기술자도 눈치가 없진 않았는지 눈을 부릅뜨며 기계팔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 양아치 자식이. 싸구려 의수를 기꺼이 고쳐줬더니 오히려 돈을 떼먹으려 들어?”
“뭐? 싸구려 의수? 이 땜장이 새끼가 돌았나.”
괜히 찔린 것인지 의수를 착용한 남자는 기계팔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을 듣지 않으니 기술자의 안면에 강철의 주먹을 꽂아 넣기 위해 팔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길 좀 묻지.”
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강철의 주먹을 한 팔로 붙들었다.
*
한 손으로는 내질러진 강철 의수를 가볍게 쥔 오시안은 의수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충분히 강하긴 하다. 아마 이 강도만으로 주먹을 내지르면 벽돌 정도는 쉽게 부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기사의 육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아니면 이 의수 자체가 약한 걸지도 모르고.’
오시안은 바닥에 쓰러진 기술자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하비의 공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하마터면 얼굴이 뭉개질 뻔한 기술자는 오시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강철 의수를 맨손으로 잡아?
아무리 싸구려 의수라 하지만 강철로 이루어진 군용의수는 그 파괴력이 남다르다.
살짝만 휘둘러도 사람 두개골을 부수는 것이 군용의수인데, 오시안은 그것을 맨손으로 잡아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히려 힘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의수가 오시안의 손을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너, 너 뭐야. 이 씨발 이 새끼들이랑 한 패냐?”
팔을 붙잡힌 남성은 역으로 힘을 줘서 오시안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강철의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안 놔? 이 미친 새끼가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얼마짜리인지 내가 알아야 하나?”
오시안이 기계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끼기긱 소리와 함께 군용의수의 주먹이 우그러졌다.
“어, 어?”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리고 의수를 붙잡힌 남자도 눈을 크게 떴다.
맨손의 남자가 강철로 이루어진 의수를 종이마냥 구기고 있었다.
그것도 순수한 악력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오시안이 힘을 준 손을 풀자 남자는 그제야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완전히 일그러진 강철 의수는 손이라는 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압착기에 넣고 손 부분만 동그랗게 뭉쳐 놓은 것 같았다.
“히익!”
의수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오시안은 그런 남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별 힘도 주지 않았는데 부서지는 걸 보니까 싸구려인가 보군. 다음에는 더 비싸고 튼튼한 걸로 맞추도록.”
오시안의 시선이 닿자 의수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근처 공방에서 구경나온 기술자들이 그 모습을 한껏 비웃었고 동시에 오시안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시안은 뭐 별일 했냐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쓰러진 기술자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됐는데.”
오시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술자의 말대로 오시안이 굳이 나서서 도와준 것은 오지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시안에겐,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업을 쌓으라고 했었지.’
대체 그 업을 어떻게 쌓는 것인지 오시안은 아직도 모른다.
게임이었다면 경험치 정도로 해석하겠지만 이곳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다만 처음 며칠은 꾸지 않았던 꿈을 최근에 갑자기 꾸었다는 것.
오시안은 거기에 착안점을 두었다.
‘칼 잭슨을 상대로 싸우고, 그 흑마법사 여자애랑도 싸웠지. 연관이 있다면 그쪽이겠고.’
업이라고 한다면 기사로서, 혹은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쌓아야 하는 일정의 업적일 수도 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위기에 빠진 기술자를 구해 준 것이다. 덤으로 의수를 지닌 잡범도 쫓아내고 말이다.
‘뭔가 딱히 업이 쌓인다는 느낌은 없는데.’
상대가 너무 나약해서 업을 쌓을 정도는 아니라 이건가.
혹은 검을 뽑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뭐가 어찌 됐든, 몇 번의 시행착오는 이미 감안한 바였다.
“그래서 하비의 공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예? 예.”
기술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안내 좀 부탁하지. 여기 길을 영 모르겠거든.”
맨손으로 의수를 우그러뜨린 남자가 한다는 말치고는 너무나도 소탈하다.
늙은 기술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 그럽죠.”
*
하비의 공방까지 안내를 받은 오시안은 그 앞에 선 채 공방을 말없이 응시했다.
“흐음.”
일단 찾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비의 공방은 이름과 다르게 공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잡화점에 가까워 보였다.
다른 곳은 셔터를 올리고 넓은 공간에서 사람 여럿이서 부대끼며 기계를 만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하지도 않고 열기도 없다.
오히려 이 근방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래도 로난이 추천을 해 준 곳이니 마냥 문제는 없을 거라 믿고 오시안은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못 보던 얼굴인데.”
안쪽 가판대에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두 눈에는 이상하게 생긴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오시안이 물었다.
“그쪽이 하비인가?”
“어린놈이 어디서 반말이야? 그래. 내가 이 공방의 주인 하비다. 넌 또 뭐냐? 여긴 어떻게 왔어?”
“오시안. 로난이 추천해 줘서 왔다.”
로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화를 내려던 노인이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세 글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대체 로난은 이 노인에게 어떤 이미지이기에 반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
하비는 오시안의 모습을 훑다가 옆구리에 찬 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옆구리에 찬 건 또 뭐야?”
“검이다. 혹시 처음 보나?”
“……내가 이 나이 먹고서 칼을 처음 봐서 물어본 거라 생각하는 거냐?”
하비는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로난이 보낸 놈에게 내가 괜한 말을. 그래. 뭐 여기까지 왔다면 뭘 원하는지는 알겠군. 신분증을 바라는 거겠지?”
“그래.”
“얼마짜리로 생각하고 있지? 보나마나 신입 같은데, 당연히 300만짜리…….”
“5천만.”
5천만이라는 금액을 듣자 노인이 눈에 착용하고 있던 고글을 이마 위로 확 올렸다.
머리가 반 이상은 벗겨져서 어디까지 이마라고 할지 애매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 늙은이를 놀리면 못 쓰지.”
하비의 불신 어린 목소리에 오시안은 굳이 설득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가판대 위에 가져온 돈을 턱 소리 나게 올렸다.
“어?”
하비는 척 봐도 적지 않은 돈의 금액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군.”
“이걸로 증명은 됐나?”
“이런 돈을 두고도 의심을 하면 그건 머저리지.”
하비는 오시안에게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신청서야. 적도록 해.”
“이런 건 없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싸구려나 그렇지. 5천만짜리면 필요한 거 몰라? 이 정도 급이면 공무원들도 눈여겨보는 거라고. 허투루 할 수 없어.”
그것도 그렇군.
오시안은 납득하며 신청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하비는 직업 쪽에 [기사]라고 적는 오시안을 보며 이걸 말릴까 말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괜히 따져서 귀찮게 될 바에는, 이쪽이 알아서 수정을 가하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대충 알았으니 3일 뒤에 찾으러 와.”
하비는 그렇게 말하며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오시안은 밖으로 나왔다.
신분증과 관련된 일도 일단 끝냈겠다, 오시안은 35번구에 온 김에 더 많은 것을 구경해 볼 생각이었다.
“저, 저기 저 녀석입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덩치 하나가 오시안을 향해 위협하듯 말했다.
“너냐? 내 동생의 팔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게.”
자연스럽게 덩치의 옆으로 향한 시선.
그곳엔 오시안에게 의수가 완전히 박살이 난 남자가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