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Knight After the Ending RAW novel - Chapter (82)
82화. 황금의 승계 (1)
유령은 말이 없었다.
푸른색 후드 아래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뿐이었으니까.
말을 할 입도 성대도 없으며, 당연히 감정을 보여 줄 얼굴조차 없다.
하지만 오시안은 저 유령이 자신의 말에 제대로 반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네 형태는, 아무리 봐도 내가 기억하는 그것과는 많이 달랐거든.”
하늘의 기사가 다루는 힘.
그 힘의 일부가 구현된 것이 지금 눈앞의 유령이었다.
그것은 오시안이 델런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세 번째’ 가능성이었다.
설마 가장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답이었을 줄이야.
무엇보다도 오시안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유령의 존재 그 자체였다.
어딘가 물건에 깃든 것도 아니고, 혹은 사람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힘 자체가 의지를 지니고서 형상을 갖춘 상태.
‘최소한 내가 지녔어야 할 힘의 파편이 형상화된 거라면, 그래도 기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리는 없고 낫을 들고 날아다니는 사신의 형태라니.
낫으로 베어 버리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모습을 보면, 저것도 퍽이나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많이 의외란 말이지.”
검에 깃든 성광이 강하게 타올랐다.
유령도 지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낫 주위로 대기가 얼어붙으며 국지적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성탄절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아니, 애초에 여기엔 성탄절도 없으려나?
오시안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가볍게 끊어냈다.
지금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할 때다.
저것이 최소한 자신이 지니고 있어야 할 ‘힘’이 맞다면.
자칫 방심했다가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쩌저적.
한기가 강해졌다.
유령을 중심으로 저택의 복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창문에 서리가 끼고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구두 주위의 카펫조차 얼어붙어서, 푹신해야 할 그것이 바스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아.
오시안이 호흡을 내뱉자 하얗게 낀 입김이 흘러나왔다.
“춥군.”
그 나지막한 감상평이 끝나기 무섭게 유령이 달려들었다.
전날 도망간 것을 내심 담아두고 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놈도 오시안의 존재가, 자신의 원류라는 것을 자각했던 걸까.
달려드는 유령은 국지적인 눈보라와 함께였다.
힘차게 휘두르는 서슬 퍼런 낫이 오시안의 쇄골을 노렸다.
예리한 날이 오시안의 코트자락을 건드리기 직전.
새하얀 빛이 불쑥 중간에 개입하며 푸른 날을 막아냈다.
별빛이 춤을 췄다.
오시안은 곧바로 어깨 아래로 망토를 펼쳐냈다.
목에는 깃털이 있으며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지는 망토.
바깥은 흰색이지만 망토의 안감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것 같은 아름다운 형태.
성운비단을 두른 오시안은 냉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 목적으로 흩뿌린 냉기는 그저 저택 자체를 얼리는 용도밖에 되지 않았다.
카앙!
별빛이 서리와 충돌하며 아름다운 불꽃을 자아냈다.
어둠 속에서 푸른색과 흰색이 뒤엉켰다.
마치 흰 뱀과 푸른 뱀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서 싸우는 것 같았다.
휘리릭.
오시안이 몸을 회전하자 성운비단이 함께 회전했다.
그저 망토였어야 할 그것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하나의 무기가 되어 유령의 옆구리를 노렸다.
단순한 방어용 스킬이 아닌, 공격으로도 전환이 가능한 기습적인 일격.
그러나 유령은 당황하지 않고 공중으로 높게 날아오르다니 천장에 달라붙었다.
마치 세상이 180도 뒤집힌 것처럼, 천장에 매달린 유령이 오시안의 목을 노리고 집요하게 낫을 휘둘렀다.
오시안은 차분하게 성광검으로 낫을 막아냈다.
‘이런.’
오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낫을 막아낼 때마다 손끝에 울리는 충격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낫의 궤적을 따라 흩뿌려지는 미세한 얼음 결정이었다.
냉기에 의한 효과로만 보이겠지만, 저것은 닿기만 해도 피부를 괴사시키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성운비단이 미처 막아내지 못하는 얼굴을 노리는 크리스탈 조각들.
자칫 잘못 호흡하면 폐가 얼어붙을 것이고, 눈에 들어가면 무조건 실명하게 될 것이다.
그 악랄함을 생각하면 고명한 사제가 와도 치료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시대는 빠진 눈알도 대체할 수 있는 의안 기술도 발달했다는 거지만.
‘멀쩡한 눈을 굳이 기계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지.’
오시안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카페트를 밟을 때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바닥은 하얗게 성에가 끼어서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는 순간 미끄러질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노련해. 일부러 검술의 축이 되는 지면부터 얼렸어.’
검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보법이 중요하다.
두 다리로 지면을 딛고서 그 힘을 받쳐 줘야 제대로 위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바닥을 얼려서 균형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면, 오시안이 펼치는 검의 위력은 절반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반대로 녀석은 자신이 만들어 낸 필드에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일단 다리가 없이 허공을 부유하는 것도 그랬지만, 놈은 움직일 때마다 의도적으로 진눈깨비를 동반했다.
시야를 현혹시키고 다리를 묶고.
낫을 휘두르는 것만이 놈이 보여 주는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미끼.
‘상대를 정면에서 찍어 누르는 정통파 검술을 사용하는 성광과 다르게, 온갖 다양한 환경적인 요소로 상대방을 말려 죽이는 싸움방식.’
그래.
저것이 하늘의 기사가 지니고 있어야 할 2번째 특성.
[월흔(月痕)]의 힘이었다.“이런 강적과 싸우게 된 것을 한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내 힘이니 감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유령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집요하게 이쪽의 빈틈을 노리고서 공격을 가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로 나의 원류라면, 어디 나를 상대로 증명을 해 봐라.
말을 할 줄도 모르며 눈빛도 없었지만, 오시안은 이상하게 유령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증명인가.”
말은 쉽지.
유령의 전투 방식은 오시안으로서 상대하기 상당히 난해한 것이었다.
‘다른 기사 유저들이랑 PVP를 했을 때 저런 방식은 없었으니까.’
게임 내에서 빙결과 동상이라는 상태이상 효과가 존재하기는 했다.
월흔 특성을 지닌 기사들은 이런 디버프를 주는 것이 가능했으며, 뛰어난 기동성으로 상대방을 치고 빠지는 형태로 공략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저렇게 주변 필드를 얼리거나, 혹은 결정조각을 뿌리면서 전방위로 압박을 가하는 방식은 없었다.
게임으로는 시스템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던 일이, 현실이 된 지금은 제약이 사라졌기에 얼마든지 가능했다.
즉 오시안으로서는, 전혀 처음 보는 방식을 사용하는 적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미지의 적.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패턴의 공격.
게임이야 몇 번이나 죽어도 부활이 가능해서 재도전을 했지만, 현실이 된 지금 그의 목숨은 오직 하나.
기회는 한 번.
실패는 죽음뿐.
그 벼랑 끝에 선 오시안의 정신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미소마저 맺혀 있었다.
“이래야 재미있지.”
그 미소를 본 유령의 낫질이 순간이지만 멈칫했다.
정작 이 상황에 매몰된 오시안은 그런 유령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 볼까.”
계속 수비로 일관하던 오시안이 곧바로 태세를 바꾸었다.
펄럭!
등 뒤의 성운비단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날개의 형태를 취했다.
그 뒤로 새하얀 원이 맺히며 별가루가 분사, 오시안의 신형이 제트기류를 탄 전투기처럼 유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령은 오시안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낫을 휘둘렀다.
낫의 궤적을 따라 반짝이는 자그마한 푸른 결정들이 모래처럼 오시안의 얼굴을 향해 뿌려졌다.
푸른 결정이 피부에 닿기 직전.
오시안의 모습이 바닥에 훅 꺼지듯 사라졌다.
성운비단이 내는 추진력의 방향을 수직으로 꺾어서 회피한 것이었다.
오시안은 바닥을 밟고 유령을 향해 미끄러지듯 접근했다.
유령은 낫을 수직으로 세우더니 그대로 바닥을 쿵 찍었다.
쩌저저정!
지면에 깔린 서리로부터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고슴도치처럼 솟구쳤다.
이대로 발을 내딛으려 한다면, 날카로운 얼음 가시에 발바닥이 꿰뚫려 발등을 뚫고 나올 터.
단순히 바닥을 미끄럽게 하는 것만이 유령이 지닌 능력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시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추진력의 방향을 재차 변경한 뒤, 그대로 벽을 밟았으니까.
……!
설마 이건 예측하지 못했는지 유령이 당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오시안은 벽을 밟고 천장을 밟으며, 입체적인 움직임을 선보여 유령에게 접근한 뒤였다.
“기상천외한 방식을 사용하는 건 너만이 아니다.”
시스템의 제약이 사라진 지금.
더 자유롭게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오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성광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유령은 낫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이대로 힘을 줘 오시안을 튕겨낸다면, 그는 곧바로 날카로운 얼음 바닥의 중심으로 떨어질 터.
그걸 노리려던 유령은, 오시안이 허공에서 몸을 틀며 발길질을 하려는 걸 보았다.
단순히 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 근접전에서 펼칠 수 있는 격투술.
이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유령은 차라리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피어오르는 냉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오시안의 다리가 얼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령의 의도는, 오시안의 다리에 맺힌 별빛을 보는 순간 바뀌고 말았다.
발끝부터 무릎까지 감싼 새하얀 각반.
성광갑주를 전신에 두르지 않고 다리에만 한정되어 펼친 것이었다.
쩌억.
냉기를 몰아낸 각반이 유령의 몸에 제대로 틀어박혔다.
클린히트의 충격에 유령이 뒤로 날아갔다.
날렵하고 가벼운 움직임을 선보이는 놈이었지만, 그렇기에 이런 타격 한 번 한 번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잡은 기회.
오시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쩌엉!
두 다리에만 두른 각반으로 바닥의 송곳을 산산조각 내며 지면을 내디딘다.
몸을 살짝 굽히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벽과 천장을 내달리는 전투를 펼쳤지만, 결국 그의 특기는 지면을 딛고서 그 힘으로 싸우는 정통파 방식.
오시안은 굽혔던 허벅지를 쭈욱 펴며, 튕겨 날아가는 유령을 추적했다.
놈이 어떻게든 허공에서 자세를 잡으며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번 공격을 허용한 시점에서 이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오시안의 검이 유령의 낫을 후렸다.
퍼억!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유령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낫을 놓치고 말았다.
핑그르르 회전하는 낫이 천장에 푹 하고 박혔다.
바닥에 쓰러진 유령을 향해, 오시안이 다리로 놈의 몸통을 밟은 뒤 검을 겨누었다.
“충분한 증명이 되었나.”
*
유령과의 싸움을 끝낸 오시안은 천천히 저택을 거닐었다.
그가 넓은 중앙 홀에 도착했을 때, 어둡기만 하던 저택의 불이 일거에 켜졌다.
갑작스러운 빛에도 오시안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오시안의 주위를 [슈프리머시]와 살라만 학파 마법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
데이빗 골디런과, 마실리 골디런이 함께 있었다.
“내가 유령을 상대하는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
오시안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델런 녀석이 고용한 해결사치고는 꽤 유용했다만. 차라리 유령에게 죽었어야지.”
데이빗이 이죽거리며 한 말이었다.
설마 단신으로 유령을 쓰러뜨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반응.
“그래도 덕분에 우리가 처리할 일이 줄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마실리가 호호 웃으며 데이빗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 얼굴은 반반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역시. 여기서 집안정리를 끝낼 생각이었군. 가주가 쓰러진 지금이 기회니까. 목표는 델런을 제거하는 건가?”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도망을 쳤어야지.”
레이첼이 오시안을 쏘아붙였다.
“애석하게도 의뢰를 받았거든.”
“그 의뢰가 네 명을 재촉한 거다, 해결사.”
리카리오가 오시안을 향해 조소를 내뱉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살라만 학파 마법사들도 낮게 웃었다.
경멸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오히려 내가 궁금하군. 너희가 힘을 합쳐도 쓰러뜨리지 못한 유령을 나는 혼자서 쓰러뜨렸다. 그런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보나?”
“허세는 그만둬. 그 유령을 쓰러뜨린 건 예상 밖의 일이지만, 그만큼 너도 힘이 빠졌겠지.”
리카리오를 비롯한 그의 학파원들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오시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크게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화륵.
오시안의 전신에 별빛이 둘렸다.
순백의 갑주와 망토, 그리고 손에 일렁이는 별빛의 검까지.
“너희야말로 차라리 도망을 쳤어야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