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Knight After the Ending RAW novel - Chapter (94)
94화. 빛이 가르치는 것 (2)
이슬로우의 말은 어딘가 두루뭉술했고 대부분 뜸을 들이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드러내지 않은 의도는 발루드에게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완벽해야 할 자신이 이번 마녀 망명 사건의 실패를 기점으로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자신은 실패했으며, 실패했을 거라 판단한 오시안은 심판자로부터 생환했으니까.
그것도 마녀를 멀쩡하게 데리고서 말이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발루드가 순순히 수긍하자 이슬로우가 낮은 목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카리스마가 있고 든든해야 할 그 목소리는, 이제는 시가를 너무 피워댄 나머지 가래가 끼어 탁하게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발루드가 보았던 이슬로우는 뛰어난 전사이자 사업가,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닌 보스였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 편한 곳에 앉아만 있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발루드는 그걸 굳이 지적하지 않았고, 그러한 생각에 오히려 불경함마저 품었다.
이슬로우는 누가 뭐래도 노스 블라인더스의 보스다.
보스의 말에는 당연히 복종을 해야 했다. 아무리 그가 이사라는 높은 직책에 올랐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 발루드 이사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는데.”
“안 그래도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미끄러지는 일이 있는 법이다.
물론 그 나무 아래가 불구덩이거나 창칼이 가득한 곳이기에, 실수도 용납되지 않지만.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면, 사소한 실수는 더 큰 공적으로 덮으면 그만이었다.
“최근 고고학 연맹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입니다.”
“고고학?”
고리타분한 단어가 나오자 이슬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살이 너무 쪄서 오히려 그 모습이 기괴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고대 유물과 관련된 일입니다.”
“오호. 그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슬로우는 시가를 하나 꺼내 끝부분을 커팅한 뒤 입에 물었다.
발루드는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각진 오일라이터를 꺼내 이슬로우의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뻐끔거리며 연기를 내뱉은 이슬로우가 시가를 손가락에 걸치며 말했다.
“그래. 유물이라면 어떤 거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근 고고학 연맹 쪽에서 지하유적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은 소문뿐이지 않나.”
“저희 쪽 애들이 약을 많이 쳐두었기에, 소식이 들어오는 족족 저희로 넘어옵니다. 최근에 정보를 종합해 보니, 단순히 헛소문으로 치부할 규모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슬로우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크흐흐. 그래그래. 우리 발루드 이사가 말이 참 잘 통해서 좋아. 너무 그렇게 섭섭해하지 말라고.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은 자네니까.”
“……예. 감사드립니다.”
발루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때 멋있어 보이던 남자가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충의가 흐트러진 탓인 걸까.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내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붙들어 둔 것이 아닌가 싶군. 어서 이만 가보게.”
“예. 모쪼록.”
발루드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보스의 방에서 나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가 따라붙었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일, 차질 빚는 일은 절대 없는 거겠죠?”
“예.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저번 일을 실패한 만큼, 저희들의 흔들리는 입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 합니다.”
발루드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담배 갑 하나를 꺼냈다.
이슬로우가 핀 시가와 다른 평범한 연초였다.
“이사님. 다시 담배 피우십니까?”
그 말에 부하가 놀라서 물었다.
고객을 대할 때 담배 냄새가 나면 좋지 않다는 걸 자각하셨다는 이후로, 피우던 것을 끊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발루드는 입에 문 연초에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냥. 오늘은 좀 피고 싶군요.”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연기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발루드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앞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
창밖을 향한 발루드의 망막 위로는 이셀라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
오시안은 공터에 섰다.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이곳은, 오시안이 간혹 검을 휘두르는 데 애용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그런 오시안의 앞에 도열했다.
그들은 기대 반 긴장 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해 두지만, 나는 살살 하는 법을 모른다. 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의 한계에 도달해 그것을 수차례나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둘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
물론 그렇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또한 나름의 간절함을 지닌 사람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좋군. 모두가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부른 김에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그 말에 데이빗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오시안의 가르침을 받게 되니, 그들의 눈앞에는 벌써부터 성광을 쓰는 자신들의 미래가 그려졌다.
오시안은 바구니를 하나 가져와 기사 지망생들 앞에 놓았다.
“이건?”
“모래주머니다. 모두 이걸 팔다리에 차라.”
다들 의아해했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조나단은 덩치가 크고 근력이 강했기에, 따로 더 무거운 주머니를 달았다.
그렇게 다시금 도열한 자들을 향해, 오시안이 말했다.
“뛰어라.”
“어, 응?”
“예? 뭐라고요?”
“뛰라고.”
오시안이 손가락으로 넓은 공터를 가리켰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뛴다. 실시.”
기사 지망생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자신들이 생각한 가르침은 이런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순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며 입에 문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이익!
“지금 말 안 들리나! 어서 뛰어!”
기다란 상아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나타난 것은 선글라스를 낀 로레인이었다.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군모까지 착용하며 기사 지망생들을 향해 일갈했다.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지? 안 뛰면 내가 뛰게 해줄까?”
로레인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준비해 온 총을 꺼내 기사 지망생들을 겨누었다.
그 모습에 지망생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총? 여기서 갑자기?
설마 진짜 쏘겠어, 라는 생각을 품는 순간 로레인이 방아쇠를 당겼다.
특제 고무탄이 쏘아지며 기사 지망생들을 때렸다.
“악! 아악!”
“으헉!”
아무리 고무탄이라 하지만 맞으면 아프다. 아프다 못해 뼈가 부러지고 근육에 푸르댕댕한 멍이 들 수 있었다.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무기.
사실상 비살상이 아니라 저살상이라 부를 물건이었다.
“뛰어. 안 뛰어? 안 뛰면 뛸 때까지 맞는 거야.”
로레인의 등쌀에 떠밀린 기사 지망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해보기나 하자.”
“우리가 그대로 기초 체력은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야!”
뛰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로레인이 오시안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마치 어떠냐고 묻는 그 표정이 오시안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주 제대로 즐길 작정이로군.”
“뭐, 왜. 이런 건 즐기려 하지 않으면 오히려 못 한다고. 할 거라면 즐겁게 해야지. 그게 맞지 않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로레인의 경우에는, 저 기사 지망생들을 괴롭히는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흑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너무한 거 아니야?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서 내가 도와주는 거잖아. 저거 말고도 훈련 커리큘럼을 누가 짰다고 생각하는 거야?”
놀랍게도 이 훈련의 과정을 짠 것은 오시안이 아닌 로레인이었다.
재밌을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고 말한 것 치고는, 그녀는 이런 쪽으로 진심이었다.
헉헉대며 뛴 기사 지망생들은 슬슬 끝났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늦췄다.
거기에 빗발치는 것은 로레인의 고무탄이었다.
로레인의 뛰어난 눈썰미는, 제대로 뛰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어쭈. 발이 보인다. 발이 보여. 더 빨리 안 달려? 영영 못 뛰게 만들어 줄까? 앙?”
그야말로 호랑이 같은 교관이었다.
해결사 일을 하면서 기본적인 체력에는 자신이 있던 자들도, 쉬지 않고 계속 달리니 숨을 헐떡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냥 달리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주머니를 달고 뛰니 그 힘듦이 배가 됐다.
그럼에도 로레인은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뭣 하는 거야! 똑바로 안 해?! 저길 봐! 너희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꾹 참고 뛰고 있잖아!”
로레인은 묵묵히 달리고 있는 데이빗을 가리켰다.
데이빗은 이 자리에서 최연장자임에도 꾸욱 참고서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 그는 꽤나 잘 달렸다.
인형사이며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지닌 사람답지 않게, 평소에도 꾸준히 기초 체력을 키워온 티가 났다.
조나단은 뮤턴트라 당연히 잘 달리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이어진 달리기가 끝난 것은 1시간이 지난 뒤였다.
땀에 젖어 바닥에 쓰러진 자들에게 이어진 것은 근력 훈련이었다.
심장을 끝까지 쥐어짜낸 이들은 이제 근육을 최대한 쥐어짜내야 했다.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 내리는 과정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공터에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자 잠시 휴식! 식사 시간이다!”
로레인이 호루라기를 불자, 어디선가 에나가 커다란 솥을 수레에 담아서 끌고 왔다.
“배식 시작!”
에나는 7명의 기사 지망생들에게 솥에 담긴 죽을 부어주었다.
여러 곡물과 고기, 콩을 갈아서 물에 푹 고아서 만든 죽이었다.
그야말로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때려 넣는다는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나의 뛰어난 조리실력 덕분에, 맛이 완전히 최악을 달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리라.
후루룩.
공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공복은 그들에게 최고의 조미료가 되었다. 그렇게 맛있지 않은 죽조차 물처럼 들이킬 수 있었으니까.
“다 먹은 놈들은 뭣들 하는 거야! 바로 움직여야지!”
오시안은 기사 지망생들을 달달 볶는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로레인을 향한 오시안의 시선에는 의외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능숙한데.’
무턱대고 기사 지망생들을 갈구는 것 같지만, 그녀의 훈련 방식은 아주 체계적이었다.
개개인의 육체적인 한계와 특성을 빠르게 구분하고, 그들에게 맞춰서 훈련의 강도를 따로 재분배하기까지 했다.
잠시 자리에 돌아온 로레인을 향해 오시안이 물었다.
“대체 어디서 이걸 배운 거지?”
“왜. 뭐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과정 같지만, 전부 육체 단련에 필요한 것들만 채워져 있군. 게다가 상대방의 수준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강도를 맞추는 것까지 아주 상세해.”
“흐흥. 드디어 나를 제대로 봤구나? 봤지? 나 정도나 되니까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야.”
오시안의 칭찬에 로레인의 콧대가 한껏 높아졌다.
씨익 웃으며 헤픈 미소를 흘리는 로레인의 모습을 보니, 했던 칭찬조차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오시안은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을 꺼냈다.
“이런 과정에 익숙한 거 같은데. 혹시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했었나? 가령 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거나.”
“…….”
로레인의 표정이 순간이지만 변했다.
얼굴에 가득했던 자부심 가득한 미소에 금이 갔다고 해야 하나.
그 변화는 물론 찰나였고,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온 로레인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비밀이야. 누구에게나 비밀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그게 더 매력적이고.”
“그런가. 내가 괜한 걸 물었군.”
오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 물러났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로레인이 보인 반응으로 추측건대, 그녀의 과거사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로난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남의 과거 이야기를 로난에게 물어보는 것도 실례겠지. 로난도 그런 쪽으로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테고.
‘숨겨진 과거인가.’
이해한다. 당장 같은 소속 해결사인 디올란만 보더라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해결사라면 당연히 숨기고 있는 것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다.
그게 과거든, 혹은 실력이든 간에 말이다.
“뭐야. 내가 안 알려 줘서 삐졌어?”
“그럴 리가.”
“너무 그러지 말라고, 너한테도 숨기는 과거는 있잖아.”
“나는 딱히 숨긴 것이 없다만.”
오시안은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사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하늘의 기사라 불렸던 존재지. 내 검 아래 쓰러진 악마와 마녀, 흑마법사만 해도 엄청난 숫자이며 마수와 악령, 심지어 신조차도 내 손에 죽었다.”
오시안은 자신이 이룩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옆에서 접시를 정리하던 에나도 귀를 쫑긋 세우며 그 말을 경청했다.
“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으며, 나의 명예를 걸고도 맹세할 수 있다.”
“와.”
오시안이 이래도 믿지 않을 거냐며 진지한 눈빛으로 로레인과 에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엄숙한 부위기, 눈빛 깃든 짙은 신념,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까지.
그것을 마주한 로레인이 입을 헤 벌리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그래. 너한테도 말 못 할 비밀이 있겠지. 이해해.”
“…….”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