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Knight After the Ending RAW novel - Chapter (96)
96화. 불편한 만남 (2)
오시안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심판자인 마르티네스가 대체 왜 티르나까지 온 것일까.
‘설마, 아직도 에나를 포기하지 않은 건가?’
그때 충분히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심지어 이 티르나까지 쫓아오다니. 보통 집념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이곳에서 마주한 것은 우연이리라.
마르티네즈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꼬옥.
옷자락을 쥔 에나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페트라 교황청의 심판자가 나타났으니까.
‘여기서 싸우자니 장소가 별로 좋지 않은데.’
하필이면 아이들이 다 모여 있는 데다가 수녀까지 있는 상황.
그것이 오시안에게 당장 검을 뽑지 못하게 만들었다.
딱히 두려움은 없었다.
다시 싸운다고 해서 질 것 같지도 않은 데다가, 찾아올 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선전포고를 한 것은 오시안 본인이었으니까.
설마 여기까지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마주한 이상 허투루 끝낼 생각은 없었다.
놀란 것은 마르테니스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오시안과 에나를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은…….”
퉁!
마르티네스가 들고 온 물동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만나자마자 메이스를 휘두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의외였다.
다만 무언가 결의를 다진 것인지 마르티네스의 눈빛이 표독하게 변했고.
“야 임마! 겨우 떠온 물을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도르테아가 마르티네스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쳐 버렸다.
“엑?!”
에나의 눈동자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아이고, 미안해요. 최근에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얘가 얼마나 말을 안 듣고 눈치가 없는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 아뇨. 괜찮은데.”
“에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들에게 이렇게 무료 음식도 건네주는 고마우신 분들인데 어떻게 가볍게 넘어가겠어요! 야! 너도 사과해!”
“괘, 괜찮다니까요!”
에나는 자신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도르테아에게 괜찮다 말했지만, 도르테아는 기어코 마르티네스를 에나의 앞까지 끌고 왔다.
에나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둘의 과거 만남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티네스는 에나 그룬트를 죽이려 했고,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에나가 차로 그를 들이 받아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신성력을 지닌 사람답게 그런 상처야 훌훌 털어 넘겼겠지만.
마녀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속 앙금으로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그, 그게…….”
에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도무지 마르티네스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에나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기에 오시안이 대신 말했다.
“그보다 어째서 이쪽이 여기에 있는 거지?”
“그건…….”
“본청에서 보내 줬거든요!”
도르테아가 하하 웃으면서 마르티네스의 등을 두드렸다.
마르티네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딱히 반박을 하지 않았다.
“보내 줘?”
“조금 더 여기서 경험을 쌓으라고 해서요. 이렇게 보여도 어리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오시안은 마르티네스의 반응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표면상 마르티네스가 티르나에 온 것은 미숙한 그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상은 유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얌전하군.’
도르테아가 물을 길어오라니 심부름을 그대로 하는 것도 그렇고, 그녀가 저렇게 등을 두드리는데도 얌전히 있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마르티네스가 항상 가만히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도르테아가 새하얀 연초를 입에 물 때였다.
“도르테아 수녀님. 또 그걸 피우시는 겁니까?”
“아 또 왜.”
“담배는 백해무익.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끊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또 잔소리 시작이다. 내가 너보다 연상이거든?”
“연상이라면 연상답게 모범을 보이십시오. 수녀님은 이곳 교회의 책임자. 응당 건강을 신경 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
“또 그런 식으로 제 말을…….”
갑자기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를 보건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
오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고, 마르티네스가 그런 오시안을 찌릿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지?”
“그냥. 지금 상황 자체가 조금 재미있어서 말이지.”
“뭐가 재미있다는 거냐.”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도르테아가 끼어들었다.
“오, 그러고 보니 둘이 아는 사이예요? 아까도 그렇고 반응이 뜨겁던데.”
도르테아가 장난스럽게 눈을 샐쭉 휘었다. 마르티네스는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오시안이 선수를 쳤다.
“일을 하다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러다 안면을 익혔지. 뭐, 썩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다만.”
“아, 그거 뭔지 알 거 같아요. 이 녀석이 여간 사회성이 없고 퉁명해야죠.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둘이 따로 편하게 이야기 좀 나눠 봐요.”
도르테아가 마르티네스를 오시안이 있는 방향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도르테아 수녀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제 잔소리에서 도망치려는 속셈이 아닙니까.”
마르티네스가 정곡을 찔렀지만, 도르테아는 못 들은 척 사라져 버렸다. 에나를 끌고 간 것은 덤이었다.
남겨진 오시안과 마르티네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뭐,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대화라도 하지.”
“…….”
마르티네스는 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교회의 뒤편 마당으로 향했다.
교회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꾸준히 손질을 하는지 상당히 깔끔해 보였다.
“이곳에 언제부터 온 거지?”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게 된 계기는, 역시 나 때문인가?”
오시안이 아픈 곳을 물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 내가 약했기 때문이지. 나의 신앙심이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에 온 거다.”
마르티네스는 오시안에게 딱히 악감정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실패를 자신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놀랍군. 악감정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이단과 함께하는 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날의 싸움은, 내게 다른 생각을 품게 했지.”
“흥미롭군. 어떤 생각이지?”
“그 새하얀 빛. 그것을 다루는 자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
마르티네스가 말한 것은 성광검과 성운비단이었다.
하늘이 머금은 그 빛을 누가 이단의 것이라고 깎아내릴 수 있을까.
하물며 마르티네스는 그 정순한 힘과 직접 겨뤄 본 당사자였다.
“그대처럼 신실한 자가 어째서 마녀를 돕는지는 모른다.”
신실한 자라니.
오시안은 마르티네스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가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신앙 스탯 때문인가.’
성기사와 사제의 신앙은 신을 향한 믿음.
반대로 방랑기사, 즉 하늘의 기사의 경우에는 그 신앙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성광과 월흔의 힘과 같은 하늘의 존재를 향한 신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강함을 믿는 신념이기도 했다.
아무튼 신앙 스탯이 높은 덕에, 마르티네스가 오시안을 크게 적대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내가 진 것은 내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벌을 받는 것에 후회는 없다.”
“벌이라……. 이 도시에 오는 게 벌이라고 할 정도인가?”
“이곳은 죄인의 도시. 마녀와 흑마법사, 이교도들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곳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런 것치고는 여기서 멀쩡하게 지내는 것 같군.”
“그건…….”
마르티네스가 잠시 망설임을 보였다가 말을 이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잘못 없으니까. 그리고 도르테아 수녀님도 있고.”
“하는 행동은 수녀답지 않지만 말이지.”
“수녀님의 행실은 조금 방정맞은 것은 사실이다.”
“조금?”
“……생각보다 많이.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실한 자다.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며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그 증거지.”
“그렇군. 그보다 의외인데. 너 정도 된다면, 아무리 좌천되었다고 해도 나름 큰 지부로 가게 되지 않나?”
“나 스스로가 원해서 온 거다. 다른 곳에서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 것은, 결코 벌이 되지 않으니까.”
참 고지식한 녀석이다.
싸울 때도 느낀 거지만, 어린 시절부터 신앙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일까.
조금은 또래 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려도 될 텐데, 너무 어른스러워서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본인에게 그렇게 엄격하면 힘들지 않나?”
“나는 항상 이렇게 살아왔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
심판자는 그런 위치였다.
하물며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13성부 중 한 자리를 차지한 마르티네스가 아닌가.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신찬]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재능.
그가 어딜 가더라도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마르티네스는 그 반응이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이것이 아버님의 시련이라며 굳게 믿으며, 기도를 올리며 더욱 경건하게 이단을 사로잡는 일에 몰두했다.
“이게 내가 걸어온 길이고 내가 믿어온 삶이다. 의문을 품은 일 따윈 없어.”
“그렇군. 그래도 에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지 않은 걸 보면, 용케 자제심을 키우는 모양이야.”
“……내 처지를 망각하고 이단 사냥에 열을 올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나는 지금 좌천된 죄인의 입장. 그런 내가 무슨 염치로 이단을 쫓아낼 수 있을까.”
전부 진심.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에 오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뭐, 앞으로도 몇 번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내가 조언 하나 해 주지. 너무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은 좋지 않을 거다.”
“몰아세운다고?”
“그렇게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속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되지. 그건 네 약점이다. 널 보낸 사람도 그 약점을 극복하라고 여기로 보낸 모양인데.”
마르티네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오시안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이곳 티르나는 네가 말한 죄인의 도시지만, 동시에 온갖 인간군상과 사건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함의 도시이기도 하니까. 여러 사람을 마주하다 보면, 너도 깨닫게 되는 것이 있겠지.”
“…….”
마르티네스는 차마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임무 실패에 대한 벌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오시안이 말한 이유 또한 있었으니까.
자신은 벌이라고 말했지만 글쎄.
과연 이게 정말로 벌인 걸까? 어쩌면 스스로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벌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언을 해주지.”
“무슨 조언이지?”
마르티네스가 오시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해도, 방금 전 오시안의 조언은 마르티네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내가 연상이다. 말을 할 거면 존댓말을 써라.”
“…….”
“알겠나?”
“……알았다.”
“존댓말 쓰라니까.”
“……알았어요.”
오시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됐다.”
*
“이, 이야기는 잘 끝냈어요?”
“그래. 앞으로 여기 자주 찾아와도 좋다는 말도 하더군.”
“자, 자주요? 자주는 안 될 거 같은데.”
돌아오는 길.
에나는 마르티네스를 떠올리면 아직도 공포심이 몰려오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뭔가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그 수녀님은 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만.”
“그,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마르티네스가 너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보다 괜찮나?”
“어, 뭐가요?”
“도르테아 수녀는 네가 마녀인 걸 모르지 않나.”
“아뇨. 알고 있는데요?”
“허?”
그건 또 의외였다.
아니, 마녀인 걸 알면서도 주는 걸 받아먹고 또 찾아오라고 한다고?
에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해요. 도르테아 수녀님은 뭐랄까, 조금 별난 분이시죠.”
“조금이 아니던데.”
당장 남들이 다 두려워하는 심판자인 마르티네스를 무슨 남동생 대하듯 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 교단의 직위는 마르티네스가 훨씬 높을 텐데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안 되면 어쩔 건데. 성황청에서야 자기가 높으신 분이지, 여기 오면 내가 대빵이거든? 그보다 잘생긴 오빠. 나한테 좋은 술 있는데 어때? 한잔 같이할래?
마지막까지 그런 말을 하던 도르테아 수녀를 생각하면, 에나의 말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상당히 괴짜였다. 하지만 동시에 선한 사람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툴툴대고 애들에게 짜증을 내도, 아이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보다 조금 의외이긴 했어요. 아무리 입지가 좋지 않은 곳이라 해도, 그래도 페트라 교황청 휘하 교회인데, 저렇게까지 지원을 받지 못하다니.”
“어쩌면.”
오시안은 자신이 생각하던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지원을 받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 빼돌리는 걸지도 모르지.”
“네? 그게 가능해요?”
“페트라 교황청이 티르나에 놓은 지부만 해도 여럿 있다. 다른 곳에서 손을 썼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어.”
“그, 그래도 그건…… 불경한 짓이잖아요.”
“마녀가 할 말은 아니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오시안은 걸었던 길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지금은 녀석이 있으니까.”
알을 깨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몇 단계는 더 날아오를 가능성을 지닌 천재.
이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성기사 마르티네스.
그가 있는 이상,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
며칠이 흘렀다.
기사 지망생들은 매일 같이 고된 훈련을 거듭했다.
그들은 공터를 넘어, 티르나 전체를 순회하기라도 하듯 아침부터 열심히 달렸다.
그런 것이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이 될 무렵, 오시안은 소란스러워진 바이올렛 폭스 내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내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무언가 큰 사건이 터진 걸까.
“오시안! 너 이야기 들었어?”
아니나 다를까, 로레인이 오시안에게 다가오며 신문을 내밀었다.
“이건…….”
“유적이 발견됐어! 그것도 최소 수백 년은 거뜬히 넘는 고대유적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