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prince of an enemy country RAW novel - chapter (276)
제49장. 정녕 아름다운(4)
해가 떠오른다.
어지간한 영주성의 귀빈실보다는 나을 마차 안에서 알고 봐야 순한 왕자가 잠을 자고, 왕자가 들어갔으니 잠시 쫓겨난 새끼 오리가 파란 머리 엄마 품에서 잠을 자고, 그 엄마 맞은편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보라 머리 마법사도 잠을 잤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보라 머리 마법사를 경계하던 세작 출신 검사도 어느새 잠이 든 시간이었다.
“지난 여정에서도 못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너는 왜 안 자고.”
“아닙니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춥지는 않았어?”
“네. 세이렌 경과 헤르츠 경이 수고해준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그래.”
새벽 하늘.
이른 시간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새벽 안개가 산 중턱에 걸렸다.
산 꼭대기에서 자는 사람들 춥지 않게 신경써달라 부탁해놓고는 정작 자신은 마법 범위 밖으로 나와 밤을 지새운 칼리안이 먼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저 아래도 보이고 바다도 보였거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잘 안 보이네.”
“해가 다 뜨면 보일 겁니다. 그것을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언젠가와 같이 엎드려 잠든 레이븐의 등에 기대 앉아있던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언제 접해도 반가운 민트 향기가 모락모락 풍겨왔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레이븐이 숨 쉴 때마다 나까지 같이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는데 그게 좋아서 계속 앉아있었어.”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이 보고 있던 곳을 함께 바라봤다.
어둠과 옅은 햇살과 아침 안개에 잠겨든 바위산 위에 칼리안의 작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테일란 카스트린. 그 분이 내 검술 스승님이셨어. 그런 얘기를 했던가.”
“네. 한 번 해주셨습니다.”
“그래. 그 분이 저기 저 즈음에 방벽을 하나 더 세우자고 말씀하셨었는데 굳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해서 미뤄뒀었어. 초입에 이미 방벽이 하나 있기도 했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만 미루자 해놓고 결국은 세우지 못했어.”
조용한 바람에 움직이는 안개 무리를 보고 있으려니 마치 물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기 저 쪽이 헤이사드 변경백령인데. 그 변경백이 자금 지원을 요청했었거든.”
지금은 다른 변경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혼잣말을 덧붙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변경백 힘을 키워주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좀 갈렸어. 나는 반대를 했고 아리안느는 찬성을 했어. 아, 아리안느라고 능력 좋은 후작 영애인데 내 친구이기도 했고 체이스 형님의 정혼자이기도 해서 셋이 그런 의견들을 종종 나눴었거든. 아무튼 체이스 형님은 내 의견에 손을 들었어. 혹시나 변경백이 반기를 들까 걱정이 됐으니까.”
“그러셨습니까.”
“응. 그랬는데 이 길에 카이리스 군대가 나타난 것을 알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이 길목을 막으려고 했더라고. 지나오면서 봤던 그 단단한 방벽이 너무 쉽게 뚫린 것을 알았을텐데도 마법사 하나 없는 기사단 이끌고 저 아래를 막았어. 뭐······ 전멸했지. 방벽처럼, 순식간에.”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잠시 들렸다.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라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웃음기 남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게 좀 많이 아쉬웠었어. 방벽을 세울 걸. 변경백에게 지원을 해줄 걸.”
키리에가 말없이 손에 든 차 향을 맡았다. 딱 좋은 온도에 적당히 우러난 차에서 퍼져나오는 좋은 민트향이 조금 쓰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씩 아쉬운 걸 없애보면 하루는 더 버텼을까. 하루만 더 벌었으면 무엇이든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하루.
고작, 하루.
고작 하루라 하여도 하루가 더 있었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고스란히 밤을 지샜다. 늦게 뜬 달이 하늘로 오르고 햇살이 번지도록.
“······ 그런 기억으로 밤을 보내셨습니까.”
“그냥 기억이 났다는 소리야. 이제와서까지 후회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미 하루를 벌었었더라고, 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모아 쥔 칼리안이 답지 않게 후후 하고 차를 식히더니 호로록 소리까지 내며 한 모금을 마셨다. 그 뒤에는 조금씩 사라져가는 안개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텐실에 수해가 난 이후에 난민들이 많이 찾아왔어. 무작정 다 받아 줄 수가 없어서 험한 산을 무턱대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보이는 족족 일단 다 억류했어. 그런 상황도 보고 해결책도 정하려고 찾아갔는데, 그 안에 되게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더라. 비쩍 말라서는 키만 큰 놈이 여차하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눈을 하고서. 그래서 그 놈만 데리고 일단 왕궁으로 돌아갔지.”
키리에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지만 참 이상하게도 옛날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내가 그 놈 하나를 줍는 사이 체이스 형님은 난민을 다 받기로 결정했고, 세크리티아 국왕은 그렇게 하라 했어.”
“텐실과 사이가 좋지 않다기에 받아주지 않았다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야. 세크리티아 국왕은 체이스 형님에겐 늘 관대했거든. 체이스 형님 말이었으니 전부 그리하겠다 대답을 했지. 대신 얼마 뒤에 난민들이 잠시 모여 살던 곳에 불이 크게 났는데 참 이상하게도 전부 다 죽었어. 아무도 도망을 못가고.”
추억이라 하기에는 많이 이상한 뒷이야기가 이어지자 키리에의 고개가 칼리안 쪽을 향했다.
다시 한 번 호로록, 별 것 아닌 기억을 풀어놓는 얼굴로 민트차를 마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 소식이 왕궁에 전해진 날 밤에 내가 주워온 그 놈이 내 방에 쳐들어왔어. 칼 들고. 귀가 밝은 건 알았는데 그걸 내 방 찾아올 때 써먹을 줄은 몰랐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웃음이 나는 것은 이번에는 텐실의 난민들이 세크리티아를 찾지 않은 까닭이다. 카이리스에서 제대로 지원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리스에 찾아오는 난민이 있다면 전부 다 받았다. 과거와 달리 사형시키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혼자만의 기억으로만 남겨지고 말았으니 웃음이 났다.
“아무튼 그래서 뭔 생각으로 찾아왔느냐 했더니 내가 한 짓인지를 묻더라고. 그렇다 했지. 그때도 난 거짓말은 잘 못했고, 알려주고 그냥 죽여버리려고 했거든. 나나 그 놈이나 제정신 아니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런데 내 대답 들은 그 놈이 한 말이 참 가관이었어.”
“뭐라고 했습니까.”
“너네 아빠 침실이 어디냐고 물어봤어.”
결국 키리에의 입에서도 웃음소리가 났다.
“진짜로. 그 칼 들고 당장 찾아갈 것처럼 굴더라고. 그러는 놈을 간신히 말려서 앞에 앉혀놨더니 그 놈이 그러더라. 앞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라고. 칼 쓰는 법 배우는 대신 다 들어주겠다고. 듣는 건 잘 하는 놈이라고.”
잠결에 레이븐이 잠시 몸을 뒤척였다. 거대한 머리에 깔릴 뻔한 칼리안이 토닥토닥 레이븐을 다시 재우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나는. 키리에. 다 들어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던 그 놈 덕분에, 미쳤다가도 다시 어떻게든 제자리로 돌아왔노라고.
바로 그 놈이 나에게 마지막 하루를 벌어줬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입으로 전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이번에는 어디인지 알려주실 겁니까.”
“세크리티아 국왕 침실?”
“네.”
“그러려고 내 형님 찾아가서 같이 가겠다 말했을 것 아냐.”
왕궁 밖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플란츠를 찾아가 같이 가겠노라 했던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크레타가 있을 곳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안이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옛날 얘기 꺼낸 건 난데 내가 졸리네.”
“조금이라도 주무십시오. 제가 있겠습니다.”
“그럴까······.”
제 스승 앞에서만 마음 놓고 취할 수 있을 칼리안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키리에를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게. 좋은 검도 가졌으니, 이제는 나도 좋은 꿈 꾸고 싶으니까.”
잠들기 직전에 흘러나온 말.
칼리안의 좋은 검이 칼리안이 건넨 좋은 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엇이 먼저일까.
가만히 선 채 그것을 생각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던 체이스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조금씩 악화되던 기침 소리가 어느 날부터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기 때문이다. 루이즈가 수면향을 올리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더 중독될 일이 없었을 테니 병의 진행속도도 늦춰진 것이리라.
게다가 이제 데블란은 물조차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
자신의 입으로 만들라 말했던 그 많은 독을 의심하느라 무엇 하나 마음 놓고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손대고 숨쉬는 것, 그 어떤 것도 데블란에게 있어 안전하지 않을 테니.
심지어 이제 더 이상 체이스를 집무실로 부르지 않았다. 검을 다룰 줄 아는 체이스가 밀폐된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당신이 병으로 죽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의심의 무덤 속에 스스로 파묻혀 미쳐버리는 것이 먼저일지. 혹은 결국 참지 못한 나의 검에 당신의 피를 묻히는 것이 먼저일지.
“시킬 일이 있어 불렀다.”
한 시간.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날에는 집무실에 말없이 앉혀두었지만 지금은 왕실 정원의 한가운데 세워두었다는 것.
눈이 내리지 않고 날 선 바람이 불지 않는다 하나 세크레타에도 추위는 있다. 실내에서 데블란을 만나고자 챙겨 입은 재킷 하나만으로는 쌀쌀해진 바람을 막기 어렵다.
지금의 일을 어디에도 알리지 않을 데블란의 호위기사들 사이에 홀로 선 체이스의 손 끝이 새빨갛게 얼어가도록, 과할 만큼 두터운 외투를 걸친 데블란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네, 전하.”
그러니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생각인지. 혹시 과거 그 언젠가에도 이렇게, 치졸함을 경계하지 않고 내 동생을 짓밟았는지.
“말씀하십시오.”
한 시간 만에 나온 말에도 담담한 대답을 건넨 체이스를 향해 데블란이 말을 이었다.
“생일 맞이로 굳이 이 나라의 바다를 보겠다 한 것은 2왕자인데 함께 온 이들이 전부 다 3왕자의 사람인 연유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두 왕자가 나란히 엘프 대장로 나르잔을 만나러 갔던 일은 이해를 했다. 발칸의 많은 인원이 호위를 했고, 찾아간 곳 역시 카이리스와 동맹 상태에 있는 엘프들의 도시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세크리티아였다.
“두 왕자가 그토록 숱하게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해 가며 귀족들을 쥐락펴락 해온 것은, 분명 서로 이득을 보려 그리 한 것일진대. 이번 일은 그런 면이 전혀 없지 않느냐.”
생일 맞이로 부린 고집이 핑계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아봤다.
나란히 엘프 도시에 다녀오자마자 그런 짓을 벌였으니, 그것이 무작정 세크리티아에 오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 못채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뻔한 연극이다. 어차피 명분 상의 일일 테니 데블란이 그 진위를 알든 말든 칼리안도 그리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2왕자는 이번 일로 무엇을 얻을까. 오로지 위험하기만 한 여정에 2왕자는 무엇을 믿고 제 사람 하나 없이 3왕자의 명분 노릇이나 해주는 것에 동의했을까.”
문제는 그 구성원이다.
칼리안이 지금 당장 플란츠의 목을 잘라내고선 ‘르메인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데블란이 앞뒤 안 재고 일행을 공격해 플란츠가 죽었다’는 누명을 씌우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칼리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다. 자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데블란을 르메인의 칼 앞에 밀어넣고, 경쟁자 하나는 제 칼로 줄여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곳에 2왕자가 자신의 사람 하나 없이 동행했다.
“그렇다면 2왕자는, 바다 구경이나 하자며 꼬여내는 말에 넘어갈 만큼 무모한가. 3왕자가 제 사람들만 데려와 호위길에 올라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가. 그도 아니라면 목숨 걸고 지켜낸 동생의 명분 역할을 스스로 꾸며 줄 만큼 미련한가.”
성미가 사납고 늘상 술을 가까이 했다는 왕자.
칼리안을 공격하려 한 실리케의 앞을 막아선, 제 손으로 제 어미를 내친 왕자.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모두 아니라면 혹여······ 전부 다 거짓인가.”
아직 지지 않은 붉은 베고니아 꽃무리에서 시선을 뗀 데블란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네가 직접 만나보라 권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동행인조차 이렇게나 많은 것을 숨겨두고 있는데 3왕자 본인은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을지.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나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어찌 반갑지 않겠느냐.”
곧 데블란은 여유 가득한 움직임으로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잠시 확인한 뒤 베고니아만큼 빨갛게 언 체이스의 손 끝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반가움이 큰 만큼 나 역시 마땅한 응대를 보여야 하겠지. 그러니 네가 나가보거라. 가서, 반갑게 맞이하고 이곳까지 데려오거라.”
데블란의 말을 들은 체이스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체이스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거리가 멀어 왕궁을 비우며 직접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보내······.”
“직접. 다녀오거라. 체이스.”
데블란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궁에 둔 것들을 잠시 잊고 바람을 좀 쐬고 오는 것이 너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
린 후작, 아리안느, 그리고 루이즈.
그 모든 것을 네 품과도 같은 이 왕궁 안에 두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오라고. 그 사이 왕궁에 둔 것들을 신경쓰지 않도록 내가 잘 보아 줄 생각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리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몸을 돌려 소리 난 방향을 바라본 데블란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에우리아와 아르센의 이름에 가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마법사 레이첼 그레이스의 힘을 빌어 참 빠르게 찾아온 손님들이 서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이동 속도에 대한 보고를 담은 새들은 열심히 소식을 전했고 체이스의 새들은 열심히 그 새들을 쏘아 맞췄다. 물론 쏜 것은 사람이고 꿰뚫린 것은 비둘기다.
– 또각, 또각.
낯선 목소리의 뒤를 이어, 언제나 조용하던 익숙한 구두 소리가 붉은 베고니아 정원 쪽으로 다가왔다. 후궁 루이즈였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귀빈이 도착하였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해서 제가 급히 맞이했습니다.”
침착한 목소리의 루이즈가 짧은 상황 설명을 마쳤고 그 뒤로 두 명의 왕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빛의 긴 망토와 검은 정장.
똑같이 생긴 왕자의 정복을 입었으나 완벽히 다른 얼굴과 표정이 눈에 띈다.
“추운 날씨에 왜 이렇게 입고 나와 계십니까. 꼭 누구에게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조금 전 그렇게나 싸늘한 목소리를 낸 이가 맞을까 싶은, 마치 베고니아 향을 담은 듯한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찌하시려고요.”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움직인다.
칼리안은 한쪽 어깨를 감싸는 검고 풍성한 털 장식이 달린, 베고니아보다 붉은 빛을 내는 자신의 두꺼운 망토를 풀어냈다. 그리고 체이스의 뒤로 걸어가 제 손으로 직접 망토를 덮어준 뒤 본래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 체이스 형님.”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
붉은 베고니아 향기 짜증난다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붉은 망토에 새겨진, 또렷한 카이리스 왕실의 문장이 잠시 바람결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