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prince of an enemy country RAW novel - chapter (375)
제67장. 향기(4)
트라우마.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상처자국.
대단히 거창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사실 누구든 앓게 될 수 있는 것.
물론 누구나 지닐 수 있다 하여 그 하나 하나를 가벼이 보아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얀에게 매미 소리가, 드미레아에게는 머리에 얹는 꽃 장식이, 앨런에게 단 음식이, 니들렌에게는 어두운 골목길이, 체이스에게 왕궁의 첨탑이, 베른에게 깊은 바다가. 그것들이 상기시켜주는 감정들처럼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일들로 느껴질 수 있을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만큼은 쉬이 아물 수 없는 생채기가 아닌가.
아르센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센에게는 누군가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가 그랬다. 처음 만난 스승님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여 호되게 혼이 난 이후로, 누군가를 처음 마주하게 되면 어깨가 쑤셨다. 그 날의 서러움이 떠올랐다.
“······ 이런.”
그런 아르센이 조금 낭패한 얼굴을 하며 제 발을 내려다봤다. 투명화 마법을 썼으니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으나 아르센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던 탓에, 앞으로 한 걸음도 떼려 들지 않는 자신의 발 끝이 아주 잘 보였다.
– 욱씬!
왼쪽 어깨에서 통증이 밀려드는 기분이 든다.
스승님에게 혼이 났던 날 때문에 아파오는 환상통이 아니었다. 물론 환상통인 것은 맞았으나 그 일이 아닌 다른 날의 사건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살기, 눈초리, 목소리.
그리고, 붉은 빛의 오러.
‘따라온다면, 죽이겠다.’
라시드 브리센. 놈을 마주쳤는데, 왜.
왜 에우리아와 함께 찾아갔던 숲에서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세웠던 제온의 전사놈이 생각나느냔 말이다. 그 이후로도 제온의 전사를 많이 마주쳤지만 멀쩡했다가, 왜 하필 지금.
그 날과 비슷한 어둠 때문일지.
라시드 브리센이, 투명화를 하고 숨어있는 자신을 눈치챌 정도의 실력자임을 알았기 때문일지.
그것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딱 하나. 그레이가 아직 세상에 내어놓지 않은 아들이 상당한 강자라는 사실이다. 정확한 수준은 파악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그 아르센으로 하여금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고 다쳤던 어깨에 환상통을 심어 줄 만큼은 된다는 소리다.
“······ 서클 하나를 빨리 늘려야 할 이유가 더 생겼군.”
누구나 각자의 트라우마를 지녔으니 그것을 대하는 자세 역시 모두 다르지 않겠나. 때문에 아르센은 자신이 숨은 곳을 향해 짙은 살기를 보낸 뒤 사라진 라시드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대신 마법 정진의 꿈을 한층 더 키웠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목표물을 허망하게 놓친 것에 대해서는 그리 애석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칼리안이 시킨 일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리하게 놈을 쫓아가다 또 다치기라도 하면 ‘내 따까리가 또 내 말 안 듣고 또 나다니다 또 다칠까봐 또 걱정하느니 이참에 그냥 원인을 없애고 말지’ 하는 칼리안의 손에 의해 영원히 다칠 일 없을 몸이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게 될 테니까.
물론 칼리안이 그것을 애석해 할 머리를 붙여 둔 채로 죽여놨을 때의 얘기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사단장과 함께 있을 것을 그랬네.”
애석해하는 대신 아주 잠시 아쉬워 한 아르센이 고개를 들어 옥상을 쳐다봤다. 그리고 건물 안을 향해 발을 옮겼다. 에일라가 다쳤다면 라시드의 뒤를 캐는 것은 에우리아가 직접 맡게 되든 칼리안이 나서든 할 테니, 이제 속편하게 옥상으로 올라가 오늘의 사건을 일으킨 형제를 르메인의 앞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된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 [클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온 바닥에 피가 가득했고 피 냄새와 백합 향이 섞여 코가 마비될 듯한 냄새가 풍겼다. 함께 있겠거니 했던 칼리안은 온데간데 없이 혼자 멀뚱히 서 있는, 과연 그 인성의 끝이 어디인지 아직도 도통 알 수가 없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오지 말 걸.
그냥 니들렌이랑 있을 걸. 아니면 억지로라도 라시드를 따라가다 적당히 포기하든가 아니면 그냥 한바탕 하고 왕자님한테 반성문 낼 걸.
아, 물론 반성문 쓸 손가락이나 반성문 내용 생각할 머리가 남아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아무튼. 오지 말 걸.
“왕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물었다. 대답이 없다.
아. 물론 그런 경우 정말 많았다. 익숙하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러십니까?”
어쩌다보니 같은 집무실을 쓰게 된 탓에 아르센 생전에 스승님 다음으로 꾸준히 자주 보지 않았나 싶은 생명체라서, 저어어엉말 원치 않았으나 그 표정이 참 가관임을 알아보게 된 아르센이 진짜 묻기 싫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요. 저하 셔츠에 피가 잔뜩이었습니다만.”
“아니라고.”
“뭡니까.”
“마법사.”
“······ 네.”
부군단장입니다, 라거나.
저도 이름 있습니다, 라거나.
그렇게 말하면 왕족의 권한으로 아예 왕궁 밖에 나가게 될 것 같은 예감도 들고 그렇게 되면 나간 김에 세뉴 강까지 건너가게 될 것 같은 확신도 들어서 얌전히 대답했다. 아르센은 진짜 어른이니까.
“물어볼 게 있는데.”
이해 안 되고 모르는 것 앞에서는 특별히 상대에 대한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 왕세자가 가관인 그 얼굴로 질문을 시작했다.
사실 질문이라 하기보다는 지금 얼굴이 왜 가관인지와 아르센이 클린을 쓰기 전까지 셔츠에 묻어있던 게 누구의 피인지, 그리고 오른팔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이라 해야 맞을 일이다.
“그게 질문입니까?”
“질문인데.”
방금 전 칼리안에게 멱살도 잡히고 생전 처음으로 누구 얼굴에 주먹질도 해 본 일까지 하필 아르센에게 죄 꺼내놓는 것이 의외라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정작 아르센은 그렇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에 지나가던 멍멍이 한 마리 붙들고 털어놓는 정도의 심정으로 꺼낸 말임을 알았다. 평소에 아르센을 이지를 지닌 온전한 인간으로 안 보는 플란츠니까. 물론 그 사실을 기분 나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쌍방이라서.
“그런 건 보통 상담이라 하는 것 아닙니까?”
“질문이라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정답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제 의견이 듣고 싶으신 거면 말씀드리고, 정답 알고 싶으신 거면 그건 저하께서 직접 찾아보십시오. 제가 관여해서 답안 알려드릴 일 아닙니다.”
“······ 상담으로 정정하지.”
아무튼 그렇게 지나가다 싸움 구경하게 된 동네 멍멍이들 중 네 번째 얼룩이 정도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플란츠의 상담 의뢰를 되짚어보던 아르센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저하께서 라시드의 검을 막았다는 말씀입니까?”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앞에 선 저하가 우리 왕자님이랑 싸움을 해서 상담을 요청했든 말든, 내가 겁 먹고 물러난 놈의 검을 저하 저 분이 막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시도부터 시작할 수 있는 동물이다. 지금 아르센은 아르센이 아니라 네 번째 동네 멍멍이를 겸직하는 중이지만 일단 사람이기도 하니까.
기대한대로 아르센의 말을 개 짖는 소리로 들은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센은 라시드가 왕세자를 향해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실제로 죽일 마음까지는 안 먹었거나, 아니면 칼리안의 반응을 살피고자 했거나, 무슨 이유에서든 라시드가 플란츠를 많이 봐 준 정도로 알아서 적당히 이해하기로 했다.
“두 분 다 잘하신 것 없습니다만. 왕자님 잘못하신 것이야 저하께서 더 잘 느끼셨을 테니 다른 말 해드리자면, 저하께서도 왕자님만큼 잘못 많이 하셨습니다.”
“알아.”
“라시드 브리센이 저하 봐 드린 겁니다. 아니었으면 칼리안 왕자님이 나서기 전에 저하께서 먼저 세뉴 강 건너셨을지도 모릅니다.”
플란츠가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바닥 쪽을 잠깐 가리켜보인 아르센이 설명을 더했다.
“아래에서 방금 전에 라시드 브리센 만났습니다만. 저는 죽을까봐 못 덤볐습니다.”
라시드에게 죽든, 칼리안에게 죽든.
죽을까봐 못 덤볐다. 암만 따져봐도 질 것 같아서.
“저하의 판단에서 벗어나는 상황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런 생각 없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저하 목숨 거시는 행동은 누가봐도 잘못된 것 아닙니까? 지나가는 개미 앞에 발 내려놓으면 개미도 그 발 피해갑니다. 죽기 싫어서요.”
“아는데. 그게 아니라.”
“네. 저하께서 계속 목 내놓고 다니시면 칼리안 왕자님이 저하 살려놓느라 다른 생각 않고 더 악착같이 살 것 같아서 그러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정말로 사는 데 미련 없어서 그랬던 거였어도 속 터지는 일인데. 그게 아니라, 왕자님 때문에요. 지킬 게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셔서요.”
“······ 그래.”
“그런데 라시드가 저한테 보였던 딱 그대로 손을 썼으면, 지킬 게 없어지면 못 사는 사람 살게 하려다 저하 목이 진짜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을 겁니다. 게다가 저하께서 그런 식으로 목숨 거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야.”
고개를 주억거린 아르센이 플란츠의 어깨를 지그시 쳐다봤다. 아브턴던트라도 걸어줄까 고민하다가, 영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플란츠가 원치 않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말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 왕자님께서 저희가 그 때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건, 지금의 세크리티아 국왕도 그 때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같이 인정해야 했다는 소립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지금은 멀쩡히 살아있고 그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고 있다 해도 냉정히 말해 왕자님이 지키려던 그 형제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은 겁니다. 그 때의 왕자님이 검의 길에 올랐어도 다 소용없이 죽어버린 겁니다.”
“······ 알아.”
아르센의 목소리가 잘게 갈라졌다.
“그렇게 강한 검으로 고작 형제 한 명을 못 지키고 죽은 사람한테.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그렇게 매번 일부러 상기시켜주신 겁니까. 저하께서 같은 일 겪을까봐······ 그게 무서워서요?”
연두색 눈이 조용히 감겼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일지 왜 생각 안하셨습니까? 결국 언젠가의 저희 때문에 형제 잃어버리고 이제는 저하를 형제로 여기고 살려놓으려 하는 왕자님한테. 제 책상 위에 있던 꽃 한송이도 서랍 속으로 치워놓는 분에게. 하필 저하께서요. 잃어버리는 게 어떤 건지 떠올리게 한 왕자님 말 한 마디에 주먹질했다는 분께서요.”
“······ 알아. 이제.”
칼리안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이제야 알았다.
“저하 목숨 간신히 살려 둘 때마다, 저하가 목숨 걸어둔 것 알았을 때마다, 왕자님은 언제 어디서든 그 날 세크리티아의 그 성벽 앞에 서게 됐을 겁니다. 잊어버릴 수도 없는 일이니 계속 그렇게 그 날의 왕제로 돌아갔을 겁니다. 강제로요. 또 같은 일이 생길 뻔했다고 심장이 깎여나갔을 겁니다. 매번, 조금도 나아지는 것 없이요.”
– 다행입니다. 걱정했는데.
칼리안이 플란츠를 형제로 여기게 되었음은 진작에 알았으면서, 걱정하고 살피는 것이 당연히 뒤따르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르니에리 향기를 누군가 일부러 플란츠의 코앞에 들이대는 것과 같은 일을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저질러왔다는 사실도 이제야 알았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서 향기를 치우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정말로 저하가 제 목숨 아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저하께서 동생을······ 같은 일을 더 겪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래왔던 것이었다면. 아무리 기저에는 지금의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들.”
아르센이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누굴 탓하겠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무튼 제가 봤을 때 그건 두 분 다 잘못한 일이니까 두 분이 알아서 푸십시오. 저지른 숫자로 경중을 따지든, 그런 것 없이 똑같이 잘못했다 하고 넘어가든, 아무리 못 알아들었어도 그렇지 꼭 그렇게 똑같은 칼을 되돌려주며 깨닫게 해줬어야 했느냐 원망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고민은 제 몫 아닙니다.”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어깨가 아픈 건지 다른 곳이 아픈 건지 모르겠을 그 얼굴을 보던 아르센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뭔데.”
얼룩이 멍멍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살 자리,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가며 내어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플란츠의 시선이 아르센을 향했다.
맥주 여섯 잔쯤은 마셔야 할 것 같은 답답함을 참아낸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의 그 동생 분 자리 대신하게 할 생각 않고 지금의 왕자님도 온전히 봐 주고 동생으로 삼을 빈 자리도 하나 더 만들어주신 건 저도 알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님도 그 자리 고맙게 여겨가며 잘 지내셨을 겁니다만. 이제와 보니 그게 그냥 빈 자리가 아니라 저하께서 일부러 목 내놓고 다니면서 마련해 준 자리였던 것 아닙니까.”
아르센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어떻게 더 설명해야 플란츠가 이 말을 이해할지 고민해 볼 시간을 두고자 했던 것인데.
– 혹여 이런 날에는 파랗게 내리는 별이 보고싶기도 하고. 그 작은 바다에서 나던 비린내가 여전히 나는 그리워서. 그런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어도 되나, 그럴 자격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술 취한 아르센이 칼리안을 만났던 밤.
차마 기억난다 말도 못 하는 칼리안의 목소리.
소금내가 가득했던 목소리가 떠올라버렸다. 아마도 칼리안은 아르센이 기억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을 그 말들과 소금내. 그것을 애써 다시 묻어 둔 아르센이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제 자리 못 찾고 둥실둥실 배회하던 분 붙들어주고 빈 자리 하나 만들어주신 것이면 충분합니다. 지킬 것이 있어야만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저하 목숨까지 걸어가며 챙겨주지 않아도, 만에 하나 왕자님께서 정말 그런 분이 맞다 한들, 살 만한 이유가 없어도 왕자님은 알아서 이유 찾아가며 사실 분입니다. 살 이유 못찾으면 살 맛 안 난다 툴툴거리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 놓고 포기할 분 아닙니다.”
– 나는. 정말로 잘 살아야 하거든.
“왜 그 이유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일부러 챙겨주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분명하다고, 사라질 것이 아니냐고, 이번에도 왕자님은 형제보다 먼저 떠나게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단정지은 것처럼요. 이미 살려고 열심인 왕자님인데 왕자님 살 자리 만들어 주겠다며 저하께서 목숨을 걸어두시면 어떡합니까. 왜 왕자님을 누군가 그렇게까지 해줘야 사는 사람으로 만들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동생이 곁에 있을 것처럼 위태롭게 사십니까.”
– 가끔씩 그렇게 다 털어내는 것처럼 보여도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 믿어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일까.
“사람 일 모른다지만, 지금 당장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른다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러지 마십시오. 그건 왕자님께도 저하께도 똑같은 비수가 되는 겁니다.”
“······ 알았어.”
플란츠가 다시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해 준 동종업자에게 중요한 것 하나를 더 알려줘서 고맙단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지닌 무력이 워낙 미비하셔서, 굳이 그렇게 무리하게 안 챙기셔도 왕자님 이미 바쁩니다.”
말 안 했다.
* * *
신발에 달린 단단한 굽에서 묵직한 발 소리가 났다.
“소가주님. 이제 오십니까.”
말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저택 본관으로 들어서는 이를 향해, 마중을 나온 집사장과 지나가던 하인들이 예를 보였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드미레아가 물었다.
“리리에는.”
“조금 전 잠에 드셨습니다.”
“그래. 두 분은, 들어오셨나?”
“공작 부부께서는 아직입니다. 오늘 남부 귀족 모임이 새벽까지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혹시 아직 식사 전이시면 준비를 해 올릴까요, 아니면 쉬시겠습니까?”
“식사는 괜찮고 우선 씻지.”
“네, 소가주님. 목욕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멀어지는 집사장을 일별한 드미레아가, 이제껏 동행해 뒤에 서 있던 기사 로난시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소공작님.”
“다른 일 말고 오늘은 쉬지.”
“알겠습니다.”
긴 말을 하기엔 다소 피로한 하루를 보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스트리샤를 찾았다가 다시 나에랑샤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수도 경비대원들과 대치한 것으로 모자라 왕궁으로 직접 돌아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왕실의 법을 무시하려 들었는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했다. 에일라를 잡아들이려던 그레이의 행동을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 뚜벅, 뚜벅.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오른 드미레아가, 좋은 향이 나는 물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 자신의 욕실을 지나쳐 방으로 갔다. 목욕 준비가 끝나기까지 잠시 쉬려는 생각이었다.
– 달칵.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 ······ 탁.
방 안에 들어선 드미레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곳에 올 때까지와는 달리 어느새 매섭게 변한 눈을 한 채였다.
피 냄새.
욕실에서 났던 향기 때문일지 몰라도 복도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냄새가 확 퍼진 까닭이다.
– 스릉······.
드미레아의 허리춤에서 조용히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났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청회색 눈이 익숙해지지 않을 냄새가 풍겨오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나야.”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에서 작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마치, 드미레아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탁, 하고. 반쯤 뽑았던 검을 도로 집어넣은 드미레아가 밝지 않은 불 두 개를 켰다. 짙은 갈색의 가구들이 주황색의 옅은 불빛 아래 어두운 윤곽을 드러냈다.
소파 한 가운데,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채 깍지 낀 손 위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사람이 함께 보인다.
“왕궁에 왜 아직 안 가셨습니까.”
“응.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잠시 큰 숨을 들이 쉰 드미레아가 검을 풀어 벽에 기대 세웠다. 그리고 뚜벅 뚜벅 걸어가 칼리안을 잠시 보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협탁 서랍을 열었다.
“레이븐은, 마굿간에 안 보이던데요.”
“그랬으면 여기 집사가 너한테 나 왔다고 얘기했겠지. 저택 밖에 있어.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어. 저 새까만 건 아는지 이럴 땐 어두운 데 잘 찾아가서 알아서 숨어있더라.”
“주인 닮아서요.”
“아, 그런가.”
서랍 속에 한 가득 들어있던 수많은 붕대들 중 적당한 것 몇 개를 집어 든 드미레아가 다시 칼리안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방금 전까지 방을 메우던 피 냄새가 어느새 지워져 있다.
“마법 안 쓰셔도 됩니다. 피 냄새 안 불편합니다.”
“향기 나던 남의 방에 피 냄새 붙여두면 미안하잖아.”
“남의 방인 걸 아시는 분께서 이렇게 몰래 와 계십니까.”
“그래도 내 정혼자님이니까.”
창문의 긴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미레아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일라는. 어때.”
“괜찮습니다. 며칠 누워있어야 할 테지만 베른 자작이 있으니까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 다행이네.”
“네.”
“내일 오지 마. 다음에 와, 드미레아. 혹시 그 아이한테 이미 얘기 한 거면. 기대하고 있을까. 그럼 미안한데.”
“리리에에겐 아직 얘기 안 했습니다. 왕자님과 약속 잡자마자 이제껏 밖에 있다 저도 지금 들어온 것 아닙니까.”
“아. 그렇겠구나.”
다문 입술을 한 번 더 꾹 다물었다 뗀 드미레아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오른손을 잡아다 들여다보며 말했다.
“왕자님 죽을 뻔한 건 봤어도 얻어맞은 건 처음 봅니다.”
“이런. 아직도 티가 나?”
“티 많이 납니다.”
눈 앞에 내밀어진 손 말고, 입술 끝에 맺힌 상처 얘기였다.
“생각보다 저하 주먹이 매운가 봅니다. 제대로 터졌는데요.”
“응. 아프더라······ 근데 내가 형님한테 맞았다고 얘기 했나?”
“안 하셨습니다.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왕궁에도 못 돌아가고 여기로 오셨는데.”
“아. 내가 말해놓고 착각한 줄 알았네.”
“말해놓고 착각할 분이십니까, 왕자님이.”
“아닌가.”
“아닙니다.”
“다행이네, 그것도.”
칼리안의 손바닥과 팔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린 드미레아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약 하나를 들고 왔다. 에일라를 치료하느라 진이 빠져 있을 히나에게 손 고쳐달라며 찾아 갈 사람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으니까.
“팔도 심하지만 손바닥이 더 안 좋습니다. 알아서 아물 테지만 그래도 날 밝으면 베른 경에게 꼭 보이십시오.”
“응. 그렇게 할게.”
상처 위에 뿌려진 새하얀 약에서 푸른 회색의 거품이 인다. 그것이 심하게 아리고 아플 텐데도 칼리안은 손 끝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서, 혀를 쯧 찬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안 아프십니까.”
“아파. 많이.”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감싸안고, 싸우고, 대들다가.”
“어디서 맞고 다니실 분은 아닌데. 뭘 그렇게 잘못하셨습니까.”
“내가 잘못을 했어. 나만 한 건 아닌데. 잘못을 했어. 내가.”
“사과는 하셨습니까.”
“해야지. 가서 사과하려고. 나도 사과 받고. 그러려고.”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리는 약을 닦아낸 드미레아가 상처 위에 거즈를 덮었다. 그리고 붕대를 들어 팔과 손을 조심스레 감았다.
“차라도 내 오라 할까요.”
“아니. 갈 거야. 이제.”
“입술이라도 다 나으면 가시던가요.”
“바로 쫓아낼 줄 알았는데. 약도 주고 차도 준다 그러네.”
“그 꼴을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쫓아냅니까. 약도 드리고 차도 드려야지.”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야. 나는 여기 와서 숨어 있다 너한테 아프다고 자랑이나 하지. 오늘 같은 일에는 숨을 데도 없이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이라고는 고양이 앞밖에 없는 분이 거기 있어서. 호숫가에 멀뚱히 앉아있을 게 뻔해서. 가 봐야지.”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붕대에 매듭을 졌다. 그리고 걷어올린 검은 셔츠 소매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 다니시면 귀족들이 참 좋아할 겁니다. 오라버니 옷이라도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클 텐데.”
“아버지 옷보단 나을 텐데요. 아니면 제 옷 드릴까요.”
“아니야. 얀 꺼 줘.”
“네.”
붕대 값도 비쌀 텐데 옷 값까지 따지면 진짜 죽을 때까지 공작저 뒷마당에서 일만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얀의 옷을 건네 준 드미레아가 자리를 피해주려는데,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치켜 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드미레아. 약 준 건 또 언제 갚아주나.”
“그건 왕자님께서 오라버니에게 하모니카 가르쳐주시는 값인 셈 치겠습니다.”
“아, 얀이 얘기했어?”
“왕자님 안 계실 때 제 귀에 딱지 앉도록 불다 갔습니다. 이제 리리에도 할 줄 압니다.”
작은 웃음이 터졌다.
“리리에도 다룰 줄 알아?”
“네. 오라버니가 왕자님께 배운 게 아직 얼마 없어서 조금 뿐이지만요.”
“좋네. 정말로.”
작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드미레아가, 칼리안이 옷을 갈아입도록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목욕 준비가 끝났다 하는 집사장에게 조금만 있다 가겠다 이야기를 한 뒤 돌아왔다.
그 사이 얀이 가진 옷 중 그나마 작은 셔츠와 재킷으로 갈아입은 칼리안이 긴 창 앞에 서 있었다. 그곳으로 나갈 생각임을 안 드미레아가 나름의 배웅을 위해 창가로 갔다.
“고마워. 드미레아.”
“인사 이미 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정혼자님한테 늘 받기만 하네.”
“늘 알고는 계셔서 그나마 낫습니다. 손을 또 다치셨으니 대련도 또 미뤄지게 생겼지만요.”
“그러게. 그것도 매번 못 지키고.”
칼리안의 눈이 드미레아를, 손 위에 정성껏 잘 감긴 붕대를, 짙은 회색의 셔츠를, 그리고 검은 재킷을 쳐다봤다.
“그게 참 이상하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의 것보다 품이 넓은 얀의 재킷.
소매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아마도.
“사실 나 약속 되게 잘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베른에게 딱 맞았을 법한 검은 재킷.
– 천 명이 오든 만 명이 오든 지켜내는 건 어려운 일 아닙니다.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형님 동생 얼마나 강한지.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 지키러 가는 거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어머님이랑 아리안느 데리고 잠시만.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잠시만 계십시오.
“한 번 어기고 났더니 점점 못 지키는 게 늘어나는 것 같아서. 지키는 게 어렵네.”
– ······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찬 바람이 한가득 불고 지나간 얼굴을 하고 애섧게 웃는 꼬락서니를 보다못한 드미레아가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차라도 마시고 가라 이야기를 하려는데, 칼리안이 창문을 열었다. 한 밤의 더운 바람이 확 들어왔다.
“갈게. 정혼자님.”
“······ 네.”
“나으면. 다 나으면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혼자 남의 방에 앉아 반성도 잘 하고 치료도 잘 받고 인사도 잘 마친 칼리안이 창틀을 짚었다. 그림자 짙은 밖으로 몸을 날렸다. 지그프리드 공작저를 나섰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나흘이 더 지났다.
칼리안이 왕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