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prince of an enemy country RAW novel - chapter (522)
제92장. 벌(3)
상처는 다 아물었다.
대련을 하다 칼리안의 목에 엇비슷한 상처를 내어 놨을 그 즈음에 이미 다 아물었었다.
“그래도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저하?”
그러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도 믿지를 않고 결국은 이렇게 묻는다.
만약 칼리안과 얀이었다면, 얀은 분명 칼리안의 머리카락을 서슴없이 걷어내고 확인을 했을 터다. 그리고 상처를 내어 둔 이를 향해 화를 냈겠지.
그러나 차마 그런 짓을 하지 못할 왕세자의 시종은 그저 안절부절. 어떻게든 상처가 다 나은 것을 제 눈으로 보고는 싶지만 손을 대지도 못하여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그 꼴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왜 그러느냐 물으니 그제서야 어렵사리 부탁을 한다.
당신의 상처를 내가 확인해도 괜찮겠느냐고.
“다 나았다니까.”
“그래도요, 저하. 제가 약을 가져왔으니까 한 번만 확인할게요. 흉이 지면 어떡해요.”
그것을 어떻게 거절할까.
루시에게 배운 그루밍을 ‘참 고마운 육포 최다 제공자’에게도 베풀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안네의 까실까실한 혓바닥 덕에 엉킬 털도 없는 손등이 새빨갛게 되었을 때에도, 아침 내내 이미 진작에 아물어든 손등을 쳐다보며 한숨만 내리 쉬었던 레릭이다. 그러니 정말 그것을 어떻게 거절할까.
“······ 알았어.”
결국 이렇게. 어색함을 감추듯 대답하면서도 손을 움직인 플란츠가 목을 반쯤 덮을 만큼 길어진 옅은 에메랄드 색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파비안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도 변장을 풀지는 않기로 했다. 다만 지금 있는 곳이 발칸의 대원들, 그리고 레릭과 에우리아만 들어와 있는 지하 감옥인 까닭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을 뿐이다. 대원들이 지나치게 어색해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였다.
“아직 살짝 남았나봐요, 저하. 흉이 지면 어떡하죠······.”
“확인했어. 다 나았잖아.”
“그래도 이쪽으로 고개를 안 돌리시잖아요. 아프신 거잖아요. 그럼 안 나은 거예요, 저하. 겉보기로만 아물면 뭐해요.”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아파. 잠깐 버릇돼서 그래.”
“휘트린이라는 그 엘프, 벌을 받는 게 맞죠? 광장 위에 세우는 게 맞죠?”
“안 받아. 아직은, 아마도.”
앨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휘트린을 만나지도 못한 채 감옥 밖에 마련된 경비병들의 휴식 공간에 멀뚱히 앉아 있는 중이다. 때문에 두루뭉술한 대답만 하고 말았다. 휘트린을 만나서 얘기를 해야 그를 계속 살려둘지 아니면 처형을 할지 알 수 있을 일이 아닌가.
“벌을 안 받아요? 왕세자 저하를 인질로 삼고 상처를 내 놨는데요.”
“당장은. 그렇게 됐어.”
“그런 짓을 벌이고도 벌을 안 받으면, 세상에 벌을 받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내가 받았는데.”
차분히 전해지는 대답에 레릭이 입을 딱 벌렸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이다가도 퍽 우스워서, 레릭의 얼굴을 쳐다보다 피식 웃은 플란츠가 말을 더했다.
“벌.”
“누가 저하께요. 어떻게요.”
알고 보면 순한 플란츠는 얼굴이라도 안 순하지. 알기 전에만 순한 얀은 속이라도 안 순하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겉부터 속까지 전부 다 순하기만 한 레릭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된다. 그런 레릭에게 ‘나한테 검술 가르쳐 주는, 어딜 봐도 순한 데가 없는 놈이 그렇게 시켰다’ 라고 하면 저 순한 얼굴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플란츠가 대충대충 대답을 했다.
“혼자 알아서 달린건데.”
“저하께서 왜요.”
“붙들렸잖아. 검을 놓치고.”
“그게 왜 저하 잘못이에요?”
레릭이 묻는다.
“저하께서 싸움을 못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검도 놓치고 붙들리게 된 건데 그게 왜 저하 잘못이에요.”
······ 편을 들어주는 것이 맞기는 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이고서.
“안 들어갔어야 하는 거잖아. 싸움을······ 하······. 휘트린 만큼은 못하니까.”
“그렇게 될 줄 알고 들어가신 것도 아니잖아요. 왜 굳이 알아서 벌까지 받으세요. 왕세자 저하께서요.”
“왕세자니까.”
목숨값이 참 비싼 왕세자니까.
그러니 이런 일이 앞으로 몇 번이든 생길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운 좋게 별 일이 없었어도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그런 건데. 왜.”
“······ 그래서 저하께서 알아서 혼자 벌을 받으셨어요?”
“그래.”
“세상 사람들은 저하가 이런 분인 줄 모를 거예요. 저 억울해요, 저하.”
실리케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저도 몰랐으면서. 누구는 처음부터 알았다는 것처럼 억울하기는.
이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생각하는데 레릭의 말이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 평소답지 않게 속사포같은 말을 계속 꺼내놨다.
“다치셨으면 그냥 아이고 아프다 저놈 잡아라 당장 잡아다 광장에 보내라 하시면 되는 걸 왜 전부 다 저하 잘못이라고 생각하세요. 백 번 천 번을 양보해서 저하도 잘못하신 게 있다 해도, 저하는 저하 편을 들어주셔야지 왜 자처해서 벌을 받으세요.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잘못을 안 하고 살아요.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무슨 대답을 해 줄까, 또 한 번을 고민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있어. 나 말고 하나 더.”
벌 받은 놈 말고 벌 준 놈.
똑같이 생각하고 사는 놈이 하나 더 있지 않나. 잘못 한 자락을 안 하려고 옷차림 하나 글씨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살면서 제 스스로의 편을 들 생각은 죽었다 살아나도 안 하는 지독한 놈 말이다. 그게 당연하다 여기는 놈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별 수 있나. 똑같아질 수밖에.
······ 똑같이 바닷속을 유영하며 살 수밖에. 그저 가끔씩 억울하다 생각이나 하면서.
설명할 수 없을 말을 삼킨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릭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 들어오듯 휴게실에 와 있었으나 이제는 나가 봐야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목숨값이 참 비싼 왕세자이기 전에 부군단장이어야 하지 않나.
“어쩔 수 없는 거면, 저하. 저하께서 저하 편 안 드셔도 돼요. 대신 제가 저하 편 들어드릴 테니까 저하께서는 그럼 편하신 대로 하세요.”
덩달아 일어난 레릭이 플란츠의 등 뒤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
“어쨌건 그 엘프가 나빴어요. 저하는 잘못하신 것 없어요. 누가 뭐래도 없어요. 무조건 없어요. 하나도 잘못 안 하셨어요. 전부 다 그 엘프 잘못이에요. 저하 잘못 아니에요.”
발을 멈춘 플란츠가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잠시 서 있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역시나 이번에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 알았으니까.”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마셨던 것 좀 가져다 주지. 머리가 아픈데. 아직도.”
사라진지 오래된 베인 상처 대신 사라진지 오래된 숙취를 핑계삼아서, 좀처럼 하지 않던 부탁을 했다.
“네, 네!”
좀처럼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들은 레릭이 반색하는 얼굴을 했다. 순식간에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직도 머리가 아프세요? 그러게 드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드셨······ 아니에요. 술이 잘못했네요. 왜 그렇게 독하게 만들어져서는. 술이 많이 잘못했네요. 정말로요, 저하.”
빈 속에 세레누스 반 병을 들이부었다는 사람에게 술을 못 마신다 하는 것이 과연 맞는 소리인지. 칼리안이 듣는다면 참 많이 억울해 할 말이 돌아온다. 칼리안 뿐만 아니라 오크 통 속에서 열심히 향을 만들어냈을 뿐인 세레누스까지도 억울해 할 말이 그렇게 돌아온다.
그 말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다 하다 술까지 잘못했다 하는 시종에게 대답할 말을 고르던 입에서 결국, 나지막한 웃음 소리가 났다.
“그래. 술이 잘못했어.”
처음 듣는 부탁의 말, 처음 듣는 웃음 소리. 그것을 비로소 듣게 된 레릭의 얼굴이 소라 껍데기 속의 모래알처럼 보드랍게 변했다.
“딸기 주스 제가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하.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그래.”
“제가 딸기 많이 들여놔 달라고 얘기해놨어요. 그러니까 딸기도 많이 넣고 꿀도 많이 넣어서 가져다 드릴게요, 저하!”
“······ 그래. 알았으니까.”
“네, 저하!”
싱글벙글. 신이 난 시종이 문을 열었다. 신이 난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한참을 있었다.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가만히 서 있다 발을 옮겼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 저벅, 저벅.
휴게실 앞에 서서 호위를 하고 있던 아르센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 아르센이 겨울 서리가 떠오르는 새파란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때문에 여느 날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인사를 해 보였다.
“이제 나오십니까, 왕세자 저하이신 게 잠깐 부러웠다가 이제 별로 부럽지 않게 된 부군단······.”
“그렇게 부르지 마.”
아르센의 입을 막았다.
[사일런트]반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휘트린의 공격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이미 보았던 까닭에 크게 놀라워하지는 않는 아르센을 보다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도 고쳐, 마법사. 자꾸 대들지 말고 내 앞에서 멋대로 벌을 끝내고 드러눕지 말고 시도 때도 없이 불경한 말로 나를 부르지도 마.”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찾아가야지.
“나도 네 말 듣기로 했으니까 너도 내 말을 들어달라고. 과거의 나한테도 네가 이런 식으로 굴지는 않았을 것 아냐. 내가 네 앞에서 걷는 사람인데도 네가 그러지는 않았을 것 아냐. 그랬으니까 내가 너한테 설명을 하고 너를 설득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찾아가야지.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얘기를 해야지.
“나도 약속한대로 할 거니까 너도 고쳐. 대들고, 드러눕고, 나를 이상하게 부르는 마법사한테 내가 어떻게 선뜻 믿음을 가져.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있고 아무리 친해지고 아무리 얘기를 많이 했어도 네가 그렇게 굴면, 그렇게 굴면. 내가 어떻게 겁을 안 내.”
얘기를 해야지. 향기가 나지 않을 길을 골라 새 버릇을 들이느라 억울해지지 않도록. 그렇게 말하다 혹여 향기가 다시 든다면.
내가 아니라, 시도 때도 모르고 치미는 향기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아니라 향기가. 잘못한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고쳐. 부군단장님.”
버릇처럼 마음만 먹은 채 말을 또 미루는 대신 얘기를 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지만 얘기를 했다. 겨울 서리 같기만 하던 동종업자를 보며 얘기를 했다.
– 사락.
그러자 긴 로브 자락이 벽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키 차이 덕에 플란츠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르센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는 대신 눈높이를 맞췄다. 겨울 서리 같던 그 눈으로 플란츠를 마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이제야 지적하십니까.”
“또 내 잘못이라는 소리인가.”
“아닙니다. 반가워서 하는 소립니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부군단장님.”
길고 긴 호칭이 비로소 사라졌다. 눈높이 참 높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드디어 제대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스윽.
그런 아르센에게 플란츠가 무언가를 건넸다.
고개를 든 아르센이 그것을 전해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눈치채곤 확 펴진 얼굴을 했다.
“왕자님이 잘못 쓴 종이입니까?”
“······ 내 아우님께서 태우려고 하는 걸 잠깐만 보고 없애겠다고 했던 거니까. 태웠다고 할 테니까.”
역시. 사람이 실수를 안 할 리가 있나.
“네, 저하. 태워 없앤 것처럼 제가 세이렌 경에게도 절대 안 보여주고 몰래 숨겨두겠습니다.”
레릭만큼이나 신난 얼굴이 된 아르센이 한 장의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그 뒤 종이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쭉 훑어내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잘못 쓴 곳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동안 종이를 쳐다봤다.
너무 오랜만에 보고서를 쓰게 된 까닭에, 새로 살게 된 이후로 이런 것을 처음 써보게 된 까닭에.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가며 한 치의 틀림이 없도록 바쁘게 써내려간 까닭에. 덕분에 습관처럼 버릇처럼 써넣게 된.
– 베른 세크리티아
서명.
단 하나의 ‘잘못’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그러다 씩 웃으며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 화르륵!
“이렇게 숨겨두고 간직하는 게 낫겠습니다, 저하.”
어린 시절의 칼리안의 것을 조금 더 힘있고 정갈하게 고쳐 만든 지금의 필체보다 훨씬 더 고풍스럽고 부드러운 글씨. 체이스의 것을 조금쯤 닮았으나 보다 더 유려한 필체의 글씨. 그 위로 아르센의 붉은 불꽃이 지나쳐갔다. 잘못 적은 이름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듯 사라져갔다. 아무도 볼 수 없을 곳에 그렇게 숨겨졌다. 간직됐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가고자 발을 냈다.
– 타닥, 타닥!
조금 전 복도에서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레릭이었다.
그새 올라가서 딸기와 꿀이 가득 든 주스를 만들어 오는 길임을 눈치챈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한밤에 웬 딸기 주스냐며 놀리더라도 화내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 타닥, 타닥!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신이 난 만큼 가볍게, 하지만 주스를 흘리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발소리를 똑같이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껴가며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 뚝.
멈췄다.
발소리가 멈췄다.
뿐만 아니었다.
타들어가던 불꽃의 소리가 멈췄다. 계속 들려오던 발칸 대원들의 말소리가 멈췄다. 멀리서 전해지던 시계 소리가.
– ······.
멈췄다.
모든 것이 침묵에 빠졌다. 정적이 들었다.
고개를 든 플란츠가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마법······.”
불꽃이 멈춰있었다. 베른 세크리티아, 그 서명이 모두 타들어가 사라진 종이가 더 이상 타오르지 않고 멈춰있었다. 그것을 든 아르센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 서리 같던 눈이 깜빡이지 않았다. 다가오던 레릭의 손에 들린 주스가 출렁이지 않았다.
멈췄다. 세상이 멈춰섰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천천히. 아르센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다가.
– 칼리안.
모든 소리가 멈춘 이 순간. 소리를 되돌려줄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을 향해 나지막이 목소리를 보냈다.
– ······ 두근!
대답 대신 심장이 요동쳤다.
맹세의 인이었다.
* * *
히나가 그랬다.
누군가 다쳐야만 해결이 될 문제를 맞닥뜨렸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 카앙!
내쉬는 숨에 피냄새가 스민다. 들이쉬는 숨이 그리 충분하지 않다. 그런 경우를 꽤 여러 번 겪었으니 이유를 찾는 것도 빨랐다. 놈의 검 손잡이에 얻어맞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부러진 뼈에 폐를 다친 모양이라고.
– 부우웅!
– 카아아앙!
검이 날아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 궤적을 제대로 확인했다. 검을 들어 막았다.
– 우드득.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왼손의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날아드는 검을 다시 쳐낸 뒤 단검을 휘둘러 놈의 손목을 노렸다.
– 우웅!
푸른 빛이 쭉 뻗어나가며 허공에 밝은 호선을 그려냈다. 그러나 이제 오러를 어느정도 수월히 다룰 수 있게 된 것이 무색하게도, 내보낸 검이 놈의 손짓 한 번에 쉬이 막혀들었다.
“소공작과 왕세자의 사이가 생각보다 좋다 하더니, 소공작이 왕세자를 열심히 모셔가고 있겠군.”
– 카앙, 캉!
“더 멀리가기 전에,”
– 쉬이익!
– 카아아앙!
“끝냈으면 좋겠는데. 자루걸레.”
“사람 닮은 개새끼가 어떤 건지.”
– 카가강!
“저하께서 이 모습을 봐야 우리 왕자님께 그런 말씀을, 안 하실 텐데!”
– 카아아아앙!
라시드를 향해 검을 내려꽂은 키리에가 한 팔을 더 놀렸다. 공격을 막고 쳐내고, 라시드의 어깨를 베고 손목에 상처를 내어 두고. 그 대신 갈비뼈를 내주게 된 내내 쉴새없이 발을 움직였다.
칼리안과 시오나가 함께 상대했던 라시드다.
진짜 플란츠도 아닌 란델을 옆에 둔 시오나가 라시드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버텨야 했다. 최소한 시오나가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 란델을 맡겨둔 뒤 혼자 싸울 수 있게 될 때까지라도. 버티지 못하더라도 상처 하나쯤은 더 만들어 두기로 했다.
그러니, 히나. 누군가 다쳐야만 해결이 될 문제가 간혹 있기도 하다고. 그런 일을 맞닥뜨리면 다른 어떤 방법도 찾기가 어려워진다고. 그런 말이라도 해줘야지. 변명하지 말라 하겠지만 그래도 변명이나마 하는 것이 다행이라 여길 테니, 만나면 그런 변명을 해줘야지.
– 카아앙!
– 카강, 카아아앙!
꼭. 만나서.
– 휘이익, 카가각!
– ······ 쿵!
라시드의 검이 키리에의 검을 강타했다. 그것을 막아든 팔이 휘청이지 않도록 버티려던 키리에가 비밀 통로의 벽에 등을 거세게 부딪혔다.
안 그래도 부족하던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 타앗!
그런 얼굴을 본 라시드가 발을 박찼다. 그리고 짙은 웃음을 지으며 검을 몰아붙였다.
등 뒤가 막힌 채 몇 차례의 공격을 막던 키리에가 벼락같이 허리를 숙였다. 다친 허벅지에 있는대로 힘을 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라시드의 검이 지나간 궤적의 아래로 단검을 뻗었다.
– 우우웅!
당장이라도 라시드의 허리를 동강낼 듯, 길고 푸른 오러가 뻗어나갔다. 그것을 느낀 라시드가 재빨리 몸을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한 키리에의 공격이 뒤를 이었다.
– 우웅, 우웅!
숨이 부족하다.
라시드의 검을 막아낸 팔에 힘이 빠진다.
라시드가 검을 다잡고 다시 휘둘렀다.
– 부우웅!
– 덜컥!
스산한 검풍에 몸을 틀려 했던 키리에의 몸이 일순간 푹 꺾여들었다. 관통되다시피 한 허벅지에서 힘이 빠진 까닭이다.
– 카아앙!
그 덕에 라시드의 검이 벽을 강타했다. 검에 어린 붉은 오러보다 더 붉은 듯한 불똥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키리에가 단검을 뻗었다. 벽에 박힌 라시드의 검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 위를 짓누르면서, 동시에 장검을 들어 라시드의 목을 향해 내리그었다.
– ······ 콰직!
반가우나 아쉬운 소리가 든다.
키리에의 공격이 라시드에게 먹혀들었다. 그렇기에 반갑지만,
– 쑤욱.
– 카아아앙!
그것이 목을 잘라내는 소리가 아니었음에 아쉬움이 든다.
키리에의 검에 어깨가 관통된 라시드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검 끝에서 어깨를 빼냈다. 그리고 팔을 놀리지 못할 만큼 다친 어깨를 쉼없이 놀려 다시 내리찍었다. 허리를 비틀며 라시드의 공격을 막은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지긋지긋한 붉은 빛.
그 빛에 휩싸인 라시드의 어깨가 다급히 아물어드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 쌔애액!
– 카가가각!
멈출 틈 없이 뻗어나온 라시드의 공격을 다시 막은 키리에의 발이 몇 걸음을 뒤로 밀려난다.
– 욱씬!
지치지도 않는 통증이 다시 든다.
내쉬는 숨에 섞인 피비린내가 조금 더 짙어지고 들이쉬는 숨이 조금 더 부족해진다.
찰나의 시간 동안 눈을 감았다 뜬 키리에가 다치지 않은 다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짧은 도약과 함께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 카아앙!
– 휘익!
라시드가 방금 다친 어깨 쪽으로 검을 내리꽂는다. 막기 위해 날아드는 검을 단검으로 막는다.
– 우우웅!
다루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까닭에 그리 많이 모여있지 않았던 오러를 있는대로 쥐어짜 검에 담았다.
– 카앙!
단검의 날과 라시드의 검이 짧게 맞부딪친다. 불똥이 인다. 붉은 오러가 솟아오른다. 키리에의 단검을 쳐낸다.
– 퍼억!
몸을 틀어 키리에의 공격을 피해낸 라시드가 발을 움직였다. 피가 솟구치듯 떨어지는 다리를 짓이기듯 걷어찼다. 그것에 주춤, 결국 한 발을 뒤로 물린 키리에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들어올리며 붉은 오러를 쏟아넣었다.
그것을 휘두른다.
일순간의 충격으로 다리를 가누지 못하는 키리에에게, 칼리안과 시오나를 제외하고는 꽤나 오랜만에 깊은 상처를 입게 한 지독한 기사에게. 숨이 부족한 키리에의 목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휘두른다.
– 휘이익!
곧 자신의 손 끝에 들게 될 불쾌한 감각을 미리 떠올려 보면서. 멀리서 찾아드는 칼리안의 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그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지금의 검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에 찬 예감을 가진 채로.
– 쌔애애액!
칼리안의 붉은 오러가 날아오는 소리가 난다. 신경쓰지 않고 팔을 내렸다. 간신히 들어올린 키리에의 잿빛 검과 키리에의 목 사이로 이미 들어선 칼날에 힘을 주었다.
라시드의 붉은 오러가 목에 와 닿는 것을 느낀 키리에가 숨을 참았다. 끝까지 놓지 않은 검을 들어올렸다. 막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라시드의 창자라도 찢어놓으면, 그 때는 칼리안이 조금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검을 들었다. 늦은 것을 알면서도.
– 사아아······.
서늘함이 든다.
서늘함이 든다.
– ······ 우뚝!
서늘함이 멈추어 선다.
키리에의 목에 가 닿았던 검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 검을 들고 있던 이의 짙은 녹색 눈이 멈추어 선다. 그의 배를 향해 치닫던 잿빛의 검이 우뚝. 멈췄다.
허공에 그려지던 붉고 푸른 궤적이 멈추고, 비산하던 불똥이 허공에 박힌 별처럼 한 자리에 늘어섰다. 그 누구의 숨 소리도, 그 누구의 피가 바닥에 떨구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자박.
모두가 숨을 멈춘 그 고요함 사이로 발걸음이 든다.
– ······ 자박. 자박.
천천히 한 걸음씩, 발걸음 소리가 홀로 울려퍼진다. 저를 뺀 모든 것을 다 멈춰두고선 오로지 제 기사만을 쳐다보는 이의 발걸음 소리가 길고 좁은 통로 속을 울렸다.
자박.
자박.
시스파니안이 만든 물건.
비록 조각이라 하나 서툰 인간의 손에 쓰이기에는 지나치게 대단한 물건.
자박. 자박. 자박.
시간의 축의 조각을 손에 쥔 칼리안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옮겼다. 혹시라도 서두르면 시간이 다시 흐를까봐. 어떻게든 간신히 멈춘 시간이 도로 흐르게 될까봐.
“······ 쿨럭!”
지나치게 큰 힘.
서클 하나가 통째로 파괴된 것이 아닌가 싶은 충격을 대가로 빌려다 쓴, 지나치게 큰 힘. 그것을 다시 부릴 자신이 없어 천천히,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키리에에게로.
누군가 다쳐야만 해결이 될 문제를 맞닥뜨렸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히나가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죽어야만 해결이 될 문제를 맞닥뜨렸을 땐 누군가 대신 다치는 정도로 죽음을 막는 것도 방법이 될 테니까.
– 스윽.
– ······ 툭!
버릇처럼 남의 말을 또 멋대로 해석한 칼리안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목적한 곳에 다다른 뒤 천천히 팔을 뻗었다. 키리에의 목에 가 닿아있던,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에 멈추어 선 라시드의 검을 밀어냈다.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 챙강!
고요하던 곳에 금속음이 울린다.
“하······ 다행이다.”
긴 숨과 짧은 말이 그제야 나온다.
– 칼리안.
그와 함께 긴 숨 같은 짧은 말이 들린다. 그것에 대답하려 정신을 모았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완두콩에게 해 줄 수는 없으니.
– 또 혼자 깨어 계십니까. 짖을 놈도 없어서 심심하실 텐데요.
또 괜스런 말을 했다. 그 뒤에는 그곳까지는 시간이 멈추지 않았는지를 물으려는데, 긴 숨이 들려왔다. 덕분에 질문을 건넬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형제의 안도감을 듣게 되어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키리에의 앞을 막고 선 채 손을 움직여 자신의 새하얀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상황에서 오러의 검을 쓰다가는 평생 동안 히나에게 혼이 나며 지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 이걸 어떻게 해야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되는지 곧 알아볼게요. 돌아다니지 말고 잠시만 계십시오.
– 알았어.
– 걱정마시고.
– ······ 안 해.
– 네.
스르릉.
멈춘 시간 속에 홀로 선 채로 검을 들었다. 조금 비겁한가, 그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비겁이고 나발이고 앞에 선 멍든 청사과같은 저놈은 어차피.
“깜짝 놀랐습니다.”
어차피.
진작에 죽었어야.
“칼리안 왕자님.”
진작에 죽었어야 했을 놈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던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었다. 그리고 새하얀 얼굴에 올려진 새빨간 입술을 길게 끌어올려 기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다행이다.”
진작에 죽었어야 했을 놈.
멈춘 시간에 뒤덮여 함께 멈췄어야 할 놈.
“안 그래도 찝찝했던 놈 비겁하게 죽였다고 더 찝찝할 뻔했는데.”
“아. 그렇다 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왕자님.”
“그래요.”
세상이 다 멈춘 곳에 서 있던 놈이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짙은 녹빛의 눈을 마주 쳐다보던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것, 인사부터 다시 제대로 건넸다.
– 카아아아아앙!
무른 상추 너 이 새끼 이제 제발 그만 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