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129)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130화(130/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130화
“지옥을 보고 왔다…….”
지옥을 보고 왔다라.
단순히 감옥에 좀 오래 갇혀 있었다고 해서 지옥이라 표현하진 않았겠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귀족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수모를 당했음을 암시하는 말이 분명했다.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굳이 저열한 생각까진 하고 싶지 않았으나 머릿속 한구석에 엄한 상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흘긋 바라본 플레타는 사납게 치켜뜬 눈과 달리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탓이겠지.
“당신이 만들어 낸 지옥이 아닌 걸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킬 일을 예상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내게 미리 귀띔해 줄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제가 신의가 모자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플레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포로로 잡힌 것은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애초에 바슈른을 무너뜨리기 위한 카드였을 뿐, 애초에 나와의 접점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에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내게 정체를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놈들이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앞당긴 상황이었으니.
따라서 이번 영지전은 내가 불러일으켰다고 봐도 무방하고, 플레타는 그 과정에서 충분한 대처를 하지 못해 곤욕을 치른 셈이었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히고 얽힌 인과 관계였으나 굳이 세세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내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숨겼다는 것이니까.
아마 미리 경고했다면 플레타도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도는 마련했겠지. 똑똑한 여자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건 내 탓이고 이건 네 탓이니 싸울 생각은 없다. 그래 봤자 남는 게 뭐가 있다고?
“일단은 사과부터 하지. 미리 일러 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서 깔끔하게 사과했고.
“알겠습니다.”
플레타 또한 깔끔하게 사과를 받곤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그녀는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벌써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습니다. 면목이 없군요. 이 빚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캐피탈로 향하던 때에 습격에서 한 번.
그리고 이번 영지전에서 한 번.
두 번의 기억을 되새긴 플레타가 진심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지나간 일은 이제 잊자고. 앞으로 해야 할 일만 해도 태산이니. 자세한 속사정을 들려 달라고 했나?”
덤덤히 답하자 플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젠 뭐 더 숨길 것도 없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천으로 된 막사 입구가 펄럭이며 열렸다.
이후 모습을 드러낸 건 루스였다.
양손에 포도주 네댓 병을 든 채 입으로는 큼직한 염장고기를 묶은 끈을 문 루스가 심각한 내부 분위기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읍?”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일리아는 순간 고개를 푹 숙였고, 플레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타이밍도 좋지.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루스에게 손짓했다.
“사실 따져 보면 너희에게 이미 해 주었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미루고 미루다 보니 이렇게 늦어 버렸네. 내 불찰이다.”
분위기를 바꾸는 내 말에 플레타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잡았고, 일리아는 근처 찬장에서 사람 수대로 잔을 가져왔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고. 어차피 밤은 기니까.”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테이블에 포도주를 내려놓은 루스가 단검을 꺼내 고기를 얇게 자르기 시작했다.
잘린 고기를 하나 집어 먹은 나는 포도주 마개를 따며 어깨를 으쓱였다.
“있지. 재밌는 이야기.”
“안줏거리론 재밌는 이야기만큼 좋은 게 없죠.”
한없이 긍정적인 루스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잔을 나눈 뒤 포도주를 따랐다.
* * *
딴 포도주는 채 반병조차 마시지 않았다.
모두가 내 이야기를 듣곤 앞에 놓인 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루스였다.
루스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연신 잔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칼날 부족 오크 놈들에게 마석이란 걸 쥐여 주곤 사람을 제물로 바쳐 힘을 내는 사악한 주술을 가르친 놈들이 있고, 그놈들은 캐피탈로 향하던 공자님을 습격했던 놈들과 같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놈들의 주체는 그 옛날 절멸한 네비로스 교단이고요.”
“아직까진 추측이지만.”
“그 교단이 부활해 다시 왕국의 전복을 노린다는 것이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그 작업을 수월히 하기 위해 로드키우스 가문과 손을 잡았고.”
“이해관계가 맞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로드키우스도 왕실에 불만이 많은 가문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대제에게 충성을 바쳤던 이들이 세운 가문에 비해 로드키우스는 그런 접점이 없어 오랜 시간 찬밥 신세였던 건 사실이다.
“이번 영지전을 통해 억지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이유도 그럼?”
“친왕당파인 바슈른의 기세를 어떻게든 한번 꺾어야 했을 테니까. 바슈른이 전쟁을 피하면 세 귀족의 영토를 거머쥘 수 있으니 좋고, 싸워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 해볼 만하다는 생각의 근거는…….”
“흑발 사내를 위시한 언홀리 나이트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걸 왕실을 비롯한 제후들이 눈 뜨고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로드키우스가 네비로스 교단과 손을 잡았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까. 용병의 탈을 쓴 채 활동하면 딱히 제재할 근거도 없다는 뜻이다.”
“골치가 아프군요.”
“골치 아프지.”
드디어 타이밍을 잡았다는 듯 루스가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저를 그때 남부에 보내신 거군요?”
“맞아. 로드키우스와 놈들의 접점을 찾아내려면 일단 네비로스 교단부터 확실히 파악해야 할 테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플레타가 입을 열었다.
“남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놈들의 근거지가 남부 군도에 있다는 정보가 있었어.”
“불온한 놈들이 활동하기 좋은 지역이군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니.”
“워낙 인신매매가 활발한 동네니까.”
“그래서 얻은 정보가 있습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아직 흐릿해. 좀 더 뒤져 봐야 알 것 같다.”
톡톡.
내 말에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플레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때 대수림에서 곧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쓸릴 거란 신탁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게 모르게 또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지구에서 왔다고 하면 그건 진짜 미친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그랬었지.”
“그게 이번 영지전을 뜻한 건 아니었겠죠.”
“그래. 이번 영지전은 단지 전조에 불과하니까.”
“전조라고요?”
나는 이후 덤덤히 말을 이었다.
북부 산맥 너머의 버려진 땅에 우글대는 몬스터가 내려오며 전쟁이 시작된다.
이후 로드키우스를 비롯한 야망을 품은 제후들은 그 틈을 타 궐기를 일으키고, 이종족 또한 과거의 일을 잊지 않았으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안팎으로 분열을 겪게 된 왕국은 끝내 사분오열되어 전 대륙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설명이다.
앞일을 다 안다고 해서 모두 막아 낼 수 있다면 애초에 고민할 거리도 없겠지.
“그래서 기를 쓰고 이번 로드키우스와 바슈른의 충돌을 막아 내려 했던 것이군요.”
“가장 확실한 아군의 힘을 섣불리 깎아 먹을 순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로드키우스가 잠재적인 적이지만, 그것도 상황이 달라지면 모르는 일이니.”
“이해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플레타가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그에 헐렁한 소매가 흘러내리며 앙상한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셔도 괜찮겠어?”
“머리가 아파서 제정신으론 못 있겠군요.”
말로는 그랬지만 가볍게 입만 대는 수준으로 그친 플레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에게 사실을 밝히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한시름은 돌렸으니 천천히 상황을 보자고. 바슈른 공작이 못 믿을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덥석 손을 내밀 만한 사람도 아니니.”
“제가 앞에 있는데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그렇다고 가서 고자질할 건 아니잖아?”
“……어쨌든 일단 천천히 상황을 보자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제 아버님은 마나의 길을 걷는 마법사이시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별 설득력은 없겠죠.”
“너도 마법사면서.”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꼰대라는 말을 에둘러 순화해서 표현하는 플레타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왜 웃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어차피 광산이 무너져 심각한 타격을 입은 로드키우스다. 당분간 남부에 틀어박혀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 신경 쓸 테니 당장은 여유가 있어.”
내 말에 플레타 또한 동의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도리어 더 자취를 감출 빌미를 줄 수가 있겠죠. 모든 정황을 밝혀낸 뒤 가장 확실한 왕당파인 린다이어 백작과 바슈른 공작에게 설명하는 게 옳습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로드키우스와 네비로스 교단을 엮는 건 말 그대로 추측에 불과하니까. 도리어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 외부 지원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부 지원이라면 기대할 만한 곳이 있다.”
“왕실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
내가 왕실로부터 습격자들의 정체를 밝혀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걸 기억해 낸 플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린다이어의 사람이 아닌 왕실의 소속으로 움직이면 타 세력이 제지하고 들기는 힘들겠죠.”
“그래서 캐피탈로 다시 한번 가 보려고 해.”
“만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있다. 중간 보고도 할 겸, 확실히 왕실의 의중도 떠볼 겸, 그리고 지원도 제대로 받아 볼 겸.”
궁내부장, 할린 이크페 후작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번 영지전은 왕실로서도 초유의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을 터.
그런 상황에 중재를 나선 내 움직임은 궁내부장의 귀에 일목요연하게 들려왔겠지.
누구보다 로드키우스의 성장을 꺼리는 왕실의 걱정을 덜어 준 내 움직임은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겸사겸사 블루윈드 상단도 한번 들릴 겸 말이지. 남부 광산이 걸레짝이 된 지금이 돈을 바짝 벌어 낼 적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플레타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분간 후일도 대비할 겸 바슈르노에서 힘을 기를 생각입니다.”
“힘?”
“제 몸은 제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까요. 설령 바슈른의 이름을 가졌다고 한들, 그 이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플레타의 눈이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이번 일로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걸까.
지금까지 그녀가 온실 속에서 잘 자라 왔던 화초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몇 번을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야생초 같은 분위기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시선을 돌려 루스를 바라봤다.
“루스, 너는 당분간 나랑 같이 다니자고.”
“좋지요. 이번엔 캐피탈입니까? 일전에 바삐 움직이느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잘됐군요.”
“놀러 가는 거 아냐.”
“어떻게든 만들면 되는 게 시간 아닙니까.”
말은.
픽 웃은 나는 이번엔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
“예.”
“넌 플레타와 같이 바슈르노로 가라.”
내 말에 일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딱히 귀찮아서 떼어 놓는 게 아니야. 나 대신 바슈르노에 가서 처리할 업무가 있으니까.”
흐르덴 강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은 현재 바슈른에게 넘어간 상태다.
죽 쒀서 개 줄 생각은 없으니 당연히 그 권한을 빌려 와야 하고, 그러려면 서면으로 확실히 인가를 받아 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바슈르노로 갔다가 캐피탈까지 가려면 시간 소모가 너무 심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시키신 일을 마친 뒤엔 어디에서 합류하면 되겠습니까?”
“글쎄. 나중에 기별을 넣어 줄 테니 그때까진 공녀랑 우애를 다지면서 푹 쉬고 있어.”
자신의 이름을 들은 플레타가 도중에 끼어들어 내게 물어 왔다.
“삼공자도 같이 바슈르노로 향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많은 사람이 삼공자의 위명을 전해 듣고 직접 보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글쎄. 딱히 영웅 대접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닐뿐더러, 이번 중재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이유로 벌인 일이니 조용히 끝내는 게 맞아. 쓸데없는 염문을 낳는 것도 귀찮고.”
공작의 생각은 뻔하다.
승리를 자축하는 현장에 날 내세워 린다이어 가문과의 돈독한 동맹을 자랑함과 동시에 어떻게든 다시 나를 공녀랑 엮어 보려는 심산이겠지.
혈혈단신으로 참전해 목숨까지 내걸며 기사단을 이끌고 돌격해 공녀를 구출해 왔다라, 내가 봐도 흠뻑 빠질 만한 스토리이니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런 소꿉놀이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염문이라니 그게 무슨…… 아.”
반면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들은 플레타는 자기 아버지가 창피하다는 건지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대신 사과하죠.”
“됐어. 딱히 나쁜 뜻이 있어서는 아닐 테니까. 기분 나쁜 내용도 아니고.”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에 플레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 상상을 하는 거야?
“뭐 어쨌든.”
채워진 잔을 든 나는 플레타와 루스, 일리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 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밤은 일단 적시자고. 그간 못 본 시간도 많은데 회포도 풀 겸.”
내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이들이 하나둘 잔을 잡고 내밀었다.
뒤이어 루스의 과장된 말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서서히 오갔고, 그렇게 좁은 막사 안에선 조촐한 연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