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173)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174화(174/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174화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궁성의 기나긴 회랑을 걸으며 나는 수도 없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멍청한 이르페 후작, 멍청한 바슈른, 멍청한 관료들, 멍청한 캐피탈, 그리고 멍청한…… 카인 린다이어.’
그렇게 한참을 욕하던 나는, 결국 마지막은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끝난 일이니.’
그래. 이미 끝난 일이다. 비록 그게 내가 깨어만 있었어도 없었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냉정히 따져 보면 애초에 내 실수도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었고.
‘언홀리 나이트란 이름에서 한 번쯤 의심해 봤어야 하는 건데.’
언홀리 나이트. 부정한 기사.
부정함은 곧 타락을 뜻하기도 하니, 거기까지 연결하면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
타락한 기사.
미들랜드 세계관에서의 데스나이트는 타락한 마법사가 되는 리치(Lich)와 제법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리치는 으레 그렇듯, 생전 자신의 생명력을 비밀스런 오브젝트에 보관해 부정한 영생을 누리는 언데드다. 껍데기도 적당한 모르모트를 하나 구해 대용품으로 쓰는 게 일반적이고.
‘데스나이트도 같은 메커니즘이지.’
같은 맥락으로 기사 또한 리치와 마찬가지로 불로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리치와 달리 마법적 능력이 전무하기에 외부의 도움이 필수이며, 생전에 지켜 왔던 명예와 신념을 전부 버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흑발 사내 그놈이 데스나이트라고 가정해 본다면, 지금껏 의문이었던 모든 게 들어맞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실력자의 등장도 껍데기를 바꾸었다면 가능한 이야기고, 구울을 부리는 것 또한 흑마법의 정수로 재탄생한 데스나이트에겐 별로 어려운 능력이 아니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런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음에도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한심해지는 순간이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어디까지나 설정으로만 존재했을 뿐, 소설에 등장한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 실제로도 그 흑발 사내는 소설 최후반에나 정체가 드러났겠지.
물론 엘븐 레이크에서 아슬라히나를 겪어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슬라히나는 타락의 개념보단 케르윈의 의해 소망이 이뤄졌다고 봐야 할 테니 일반적인 데스나이트라 보긴 어렵겠지.
‘골치 아프네.’
적의 정보를 새롭게 얻은 것은 분명 이득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있었다간 어떤 변수를 겪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역으로 녀석이 나에 대한 정보도 얻어 갔다는 건 분명한 손해였다.
무엇이 더 큰 손해이고 이득인지 따져 보는 건 무의미했다. 그저 각자 가지고 있던 카드를 하나씩 공개했다고 보는 게 무방하겠지.
‘그래도 내게 남은 건 많으니.’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아휀을 매만졌다.
[어이어이, 몸은 이제 괜찮은 거냐구~]‘뭐냐, 그 짜증 나는 말투는?’
[으으응? 너 잘 때 심심해서 라헨나한테 책 읽어 달라고 했거든. 거기서 나오는 말투야!]라헨나는 대체 뭘 읽어 준 거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일전에 국왕을 알현하러 왔었던 궁성 중심부였다. 그때처럼 문 앞까지 나를 안내한 광휘의 기사는 문을 열어 주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기를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당연하지만 국왕이 기거하는 중심부는 근위기사를 제외하곤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다.
아휀을 검집째로 허리에서 풀어 내민 나는 이후 중심부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선 중심부에서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할린 이르페 후작이었다.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당당한 체구에 자신감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긴장? 그래.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그 사실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를 반역자로 몰며 유쾌하게 웃던 그때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긴장을 다 하시나?
“건강해 보이는군.”
“푹 쉰 탓이겠지요.”
“그런가? 하긴, 두 달이나 내리 잤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럼 가세나.”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나와 이르페 후작은 이후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지난번 국왕을 알현할 때처럼 사적인 공간은 아닌 듯했다. 아마 공식적인 회의가 열리는 홀이겠지.
“시간이 조금 이른데.”
“이르다뇨? 시간에 딱 맞게 찾아왔는데.”
“아, 그랬나? 내가 시간을 잘못 전했나 보군. 뭐, 급할 게 있나? 차나 한잔하고 가지.”
시간을 잘못 전하긴, 그냥 따로 할 말이 있어 일찍 불렀다고 하면 되지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네.
그렇게 이르페 후작은 나를 이끌곤 궁성에 수백 개는 있을 이름 모를 휴게실에 들어섰다.
이후 따듯한 차를 앞에 놓고 마주 앉은 이르페 후작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카인 남작.”
“예, 후작님.”
“이번엔 저번 알현과 달라.”
“그렇겠지요.”
“저번에야 겉으론 어땠을지 몰라도 속으론 전부 자네의 편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뿐이었잖은가.”
“자기 편을 반역자로 모는 사람도 있습니까?”
“……어쨌든 이번엔 자네 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네. 물론 나는 자네의 처신을 믿네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손짓, 발짓은 물론이고 입술이 달싹이는 것까지 모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을 테니까.”
바슈른 공작과 린다이어 백작을 위시한 왕당파의 실세들은 모두 자기 영지, 혹은 관할 직할령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두 달은 긴 시간이다. 영지를 그렇게나 오랫동안 비워놓을 순 없었겠지.
아마 후작의 걱정도 그래서였을 거다. 혹여나 내가 말실수하진 않을까 노파심이 든 게 분명하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차라리 대본이라도 만들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외웠다가 그대로 읊기만 하게.”
“대본은 무슨, 애초에 두 달이나 지난 사안이네. 조사는 충분히 이루어졌고 결론도 잠정적으로 난 상태야.”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인데 뭐하러 모인답니까?”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그날 밤 자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지 않나? 물론 나는 자네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엔 다르지. 충분히 악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니.”
“악의적이라……. 주의해야 할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칼럼 자작.”
“칼럼 자작이라면…….”
“로드키우스 후작의 똘마니지.”
“캐피탈의 녹을 먹는 관료 주제 로드키우스의 끄나풀이란 겁니까? 웃기는 놈이군요.”
“로드키우스의 세력을 생각하면 끄나풀 정도는 이상할 것도 없지. 칼럼 자작 외에도 놈의 눈과 귀는 캐피탈에 널려 있다네.”
“으음, 그래서 칼럼 자작이란 자는 위험한 놈입니까?”
“위험하다라……. 어떤 의미론 그럴 수도 있겠지.”
뭐지? 이르페 후작이 음흉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뭐 만나 보면 알겠죠. 그나저나 로드키우스 후작은 결국 끝까지 직접 나오지 않고 똘마니를 보냈군요.”
“공식적으론 병환이 깊어 참석하지 못했다더군.”
“치질이라도 걸렸나 봅니다.”
던진 농담에 이르페 후작이 픽 웃음을 흘렸다.
“모쪼록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아무튼.”
잠시 말을 아낀 후작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자네가 이번 사태의 원흉인 흑발 사내를 찾아냄으로써 공을 세웠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네. 아마 적절한 포상이 내려지겠지.”
“포상을 빙자한 족쇄라면 그리 달갑진 않습니다만.”
“뼛속까지 의심으로 똘똘 찬 친구로군. 걱정하지 말게. 순수히 자네의 공적을 기려 내리는 포상이니.”
“그렇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어떤 겁니까?”
“작위를 수여받을 거네.”
“작위라고 하심은…….”
“앞으론 카인 백작이라 불러야겠군.”
백작? 갑자기 이렇게?
물론 백작이라 하더라도 봉건제 특성상, 능력이 없다면 남작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귀족의 힘은 황금과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백작이란 작위는 이렇게 사은품 뿌리듯 내키는 대로 수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백작의 작위라니요? 여타 귀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셀 겁니다. 설령 같은 왕당파라고 해도.”
“당연하지.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 했겠나.”
이르페 후작이 픽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정확히는 명예 백작일세. 세습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자네가 죽으면 그 작위도 사라지게 되겠지. 따로 내려지는 봉토나 부산물도 없다네. 말 그대로 명예직인 셈이야.”
그럼 그렇지.
뭐, 애초에 왕실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런 포상을 내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줬다 뺏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듣고 보니 딱히 공적만 보고 내리는 포상도 아닌데요?”
“알고 있나?”
“앞으로 있을 동부의 전쟁과 남벌 계획에 낮은 작위가 혹시라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힘을 실어 주겠다는 거 아닙니까?”
“하나를 말해 주면 둘을 알아들으니 참으로 편하군.”
뭐, 나로서도 손해 볼 것은 없다.
명예직이라곤 해도 높은 작위를 가질수록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강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이후 대충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이르페 후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자네가 어련히 잘하리라 생각하네만, 그래도 자리가 자리이니 신경 써 주게나. 노파심 때문인지 거듭 말하게 되는군.”
“걱정 놓으시죠.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이르페 후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연극이라면 이젠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하니 말이다.
* * *
“카인 린다이어 남작에게 묻겠소. 그날 밤 궁성 연회장에서 어째서 홀연히 자리를 비운 것이오?”
“토너먼트로 몸이 피곤해 일찍 귀가하려 한 것입니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단순한 마창 시합 한 경기에 심신이 피곤하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소만.”
“피로에는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중 후자였고.”
“어째서 정신적 피로를 느꼈는지 그 이유를 밝혀 주시오.”
“…….”
내가 피곤하다는데 그걸 왜 자기가 맞다 아니다 지랄이야?
계속 이런 식이다. 내가 그날 밤 행적을 밝히고 있으면 내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질문을 빙자한 심문을 걸어왔다.
칼럼 자작이라고 했나? 여길 자기가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왜 다른 사람이 말도 못 꺼내게 사사건건 걸고넘어지지?
이제야 이르페 후작이 왜 음흉하게 웃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음 같아선 멱살을 잡아 바깥으로 내던지고 싶었으나,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속으로 화를 죽였다.
“……개막전의 상대는 그 위명 높은 마스터, 린다이어 백작이었습니다. 그런 상대를 만났으니 부담감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토너먼트는 마나를 쓰지 않는 경기요. 상대가 마스터든 아니든 마창술로만 겨루면 되는 것에 어째서 부담감을 느낀 것이오?”
저 새끼 진짜 내던질까?
고개를 흘긋 돌려 가장 드높은 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국왕, 벨린테스를 바라봤다.
연극은 계속되는 듯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벨린테스는 내 시선을 느끼곤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입 모양을 만들었다.
‘잘 참는데?’
……왜 벨린테스가 저런 연극을 하는지 대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칼럼 자작처럼 작정하고 말꼬리만 물고 늘어지는 녀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신이 돌아 버릴 테니까.
저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며 이르페 후작에게 짬을 시키는 건 대단히 현명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오늘만인데, 그냥 참자.’
그래. 이 또한 지나가겠지.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나는 칼럼 자작의 얼토당토않은 시비를 받아 주기도 잠시, 내 인내심은 곧 바닥을 드러내었다.
“린다이어 백작의 말로는 흑발 사내는 마스터, 혹은 그에 준하는 최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이라고 했소. 그런 사내와 겨뤄 어떻게 살아남았소?”
“…….”
칼럼 자작의 말에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내가 거기서 죽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질문의 저의를 해치는 실언은 삼가고 성실히 답해 주시오, 카인 남작.”
“글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쳤고, 녀석은 그런 나를 잡지 못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무슨 묘수가 있고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까?”
“지금 그 말은 흑발 사내가 일부러 당신을 살려 주었다는 말이오?”
“좀 전에 말했을 텐데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냐고. 그 흑발 사내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죄인은 알 수 없는 불온한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망령이 되었소. 그러니 당신에게 묻는 것 아니오?”
“그러면 결론이 나왔군요. 그 정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죽었으니 그 정답도 사라졌겠죠.”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 죽음이 미리 계획된 일이거나 작전일 수도 있지 않겠소?”
“아,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단상에서 내려와 칼럼 자작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에 칼럼 자작은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이렇게 무모하게 굴지는 몰랐겠지. 아마 그가 상상한 내 모습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땀을 흘리는 모습이었을 테니.
그렇게 칼럼 자작 면전에 선 나는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모든 질문과 답은 공식적으로 기록이 된다는 걸 알고 있겠죠.”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사적인 대화로 바뀌자 말을 낮추는 칼럼 자작이었다.
“지금부터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주는 건 당신의 치아 개수만큼입니다. 사람의 치아가 몇 개죠? 한 서른 개쯤 되나? 기회가 그리 많진 않군요. 그러니 신중하게 질문을 고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치, 치아 개수?”
“참고로 생니만 쳐주는 겁니다. 썩은 이엔 관심 없으니.”
“지금 협박을 하는 건가, 카인 남작!”
“협박이라뇨. 진지한 조언입니다.”
눈썹을 구부린 칼럼 자작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어 주었다.
“아,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게 말을 높여야 할 겁니다. 지금부터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마, 말을 높이라고?”
“백작으로 출세했거든.”
“……배, 백작?”
아무리 봉건제라고 해도 칼럼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관료 귀족가 명예직이긴 해도 백작을 무시할 순 없겠지.
당황한 칼럼 자작을 뒤로한 나는 다시 단상으로 되돌아왔고, 예상대로 칼럼은 이후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