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185)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186화(186/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186화
48장. 얼어붙은 악령
짙게 내려앉은 안개를 뚫고 나온 나와 일리아는 이름 없는 언덕 위에 올라섰다.
푸르르…….
한참을 내달리다 멈춘 탓일까. 아직도 더 달리고 싶다는 듯 투레질하는 군마의 콧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이쯤일까요.”
“그래.”
일리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군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트롯 남작령에서 떠난 이후 시일을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달린 우리였다. 최대한 보안을 지키기 위해 마을조차 들르지 않고 노숙을 일삼았다.
그렇게 도착한 동남부에서, 나는 이르페 후작이 보낼 병력과 접선을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군요.”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주위를 살피며 머플러를 입가까지 끌어올렸다.
겨울의 새벽은 쌀쌀했다. 강인한 기사의 육체는 추위나 더위로부터 잘 버티기 마련이었지만, 한참을 질주하며 흘린 땀이 식기 시작하자 은근히 한기가 샘솟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한 무리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에 나와 일리아가 동시에 검집에 손을 올렸다. 약속된 신호가 없다면 단박에 목을 베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캐피탈의 밤은.”
그렇게 나타난 인영들로부터 작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피탈의 밤이라……. 불현듯 불타는 그날의 밤이 아른거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노로 식지 않는다.”
약속된 암구호로 답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인영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카인 백작님을 뵙습니다.”
이윽고 나타난 열댓 명의 인영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함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제각기 중구난방의 색깔로 망토를 걸쳤고, 그 안으론 손때가 껴 원래 검은색이었나 싶을 정도로 낡은 가죽 갑옷이 보였다.
용모는 또 어떻고. 며칠을 감지 않았는지 기름진 머리칼과 듬성듬성 난 수염들은 세상 그 누구를 데려와도 용병이라고 답할 생김새였다.
“반갑다. 리더가 누구지?”
내 물음에 그들 가운데서 훤칠한 키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차가운 외모가 인상적인 그는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의 지원을 위해 이르페 후작님께서 파견한 분견대를 지휘하는 벨로므라고 합니다.”
“좋아. 벨로므, 소개를 부탁하지.”
“분견대는 전원 왕실 직속 비밀 수사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맡은 분야에 통달한 최고의 베테랑들입니다.”
이후 벨로므의 뒤로 도열한 인영들이 차례차례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벡터, 게리, 롱, 파이크, 카룬 등등.
그렇게 그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확실히 검 한 자루 달랑 들고 다니는 기사와는 다른 모습들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시미터와 맹수의 발톱을 연상케 하는 클로, 길가의 강도나 쓸법한 블랙잭과 투척용 단검 십수 자루를 허리춤에 찬 사내도 있었고, 그중 백미는 자신의 키만 한 대궁(大弓)을 멘 사내였다.
말이 수사관이지, 실제 모습을 보니 나조차도 정말 용병들이 온 건가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다. 이쪽은 앞으로 표면상 우리를 이끌게 될 일리아 프로스트다. 마찬가지로 용병단의 이름은 프로스트 용병단이 될 것이고.”
내 소개에 벨로므를 비롯한 수사관들이 일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짧은 인사는 끝낸 나는 벨로므를 바라봤다.
“근처에 쉴 만한 곳이 있나?”
“근거지를 만들어 뒀습니다. 어차피 위조 작업이 필요할 테니 일단 그곳으로 가시죠.”
“위조 작업?”
내 물음에 벨로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병패를 만들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백작님에게도 시술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시술이라면…….”
“염색만으론 사람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긴 힘든 법입니다.”
벨로므의 말에 나는 갈색으로 염색했던 내 머리칼을 쓸어 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가들을 만나니 든든하군. 가지.”
이후 벨로므의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은 한적한 산골짜기의 통나무집이었다.
사냥꾼이 살았던 곳인 듯 벽마다 걸려 있는 산짐승의 뿔과 가죽이 인상적이었다.
놓인 가구나 용품으로 볼 때 빈집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에 원주인은 어디 있냐고 묻자 벨로므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곳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그 두 곳이 천국과 지옥임을 뜻하는 벨로므의 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수사관들은 신분패와 용병패를 위조하고, 몇몇은 내게 달라붙어 내 이목구비에 온갖 기상천외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TV에서나 보던 분장실의 배우가 된 기분이다. 어느새 작업이 끝나고 일리아가 가져다준 거울에는 냉혈한이 따로 없는 용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게 생겼군.”
“본래 가지신 용모가 너무 뚜렷하신 탓에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무미건조한 그 말투가 마치 로봇에게 칭찬을 듣는 기분이다.
“좋아. 벨로므, 그럼 본격적으로 의견을 한번 나눠 보자고.”
“알겠습니다.”
이르페 후작이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약조는 했지만, 정확히 그 사람들을 어떻게 쓸지는 정확히 정해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목표를 밝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조율하는 과정은 필수였다.
하지만 어려운 건 없었다. 벨로므는 내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 관해선 최고의 전문가였고, 그렇기에 내 어떤 요구에도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면서 악명을 쌓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만에 하나라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백작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안전하면서도 효과 좋은 방법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지요.”
무슨 뾰족한 묘수라도 있는 건가?
벨로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동남부 고른 남작령에 자리한 협곡.
벨로므가 데려온 분견대엔 동부를 도맡아 활동하는 수사관이 있었고, 그는 만약 자신이 레드란의 보급관이라면 반드시 이 협곡을 루트로 삼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렇게 협곡 근처에 자리 잡고 대기한 지 며칠이 흘렀을까.
멀리 정찰을 나갔던 수사관이 협곡의 입구로 한 행렬이 접근해 온다고 알려 왔다.
“나타났습니다.”
“수효는?”
“군량을 실은 짐마차 다섯 대와 검병 열, 창병 스물, 궁병 다섯, 기사로 보이는 자가 하나입니다.”
보고를 들은 벨로므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바라보았다.
“보급대치곤 꽤 작은 규모군요.”
“한데 모아 놓는 것보다 작게 흩트려 놓는 게 혹시 모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 다른 루트로도 많은 보급대가 오가고 있겠지.”
“일리아 님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보급대 호송이나 맡는 기사쯤이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기사는 일리아 님이 맡고, 백작님을 포함한 저희가 나머지를 처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어차피 일리아의 존재는 레드란도 알고 있고, 따라서 기사가 죽었다고 해서 의문을 품을 리도 없을 테니까.
레드란을 향한 나름의 선전 포고로는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좋아. 시작해 보자고.”
내 허락이 떨어지자 벨로므가 고개를 돌려 수사관 두 명을 지목했다.
“너희는 가서 더미(Dummy)를 데려와라. 나머지는 강습 대형으로 나를 뒤따른다.”
더미? 더미가 뭐지?
내 의문을 뒤로한 채 명령을 들은 수사관은 대답 없이 어디론가 사라질 뿐이었다.
그저 목표만 이루면 될 뿐이라는 듯, 복명복창 같은 군대의 기본적인 요소조차 무시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눈빛만 마주쳐도 뜻이 통할 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게 전장으로 선택한 비교적 폭이 넓은 협곡으로 이동한 우리는 이윽고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보급대와 마주했다.
“워워.”
최선두에서 홀로 군마를 타고 이동하던 기사는 말을 멈춰 세우곤 우리를 보며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용병들이냐? 쯧.”
혀를 차는 기사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붉은 기사단은 아닌 듯했다. 아마 레드란을 추종하는 몇몇 영주의 하급 기사겠지.
“이 행렬은 바사라크 가문에 소속된 호송대다. 그러니 당장 그 더러운 얼굴을 치워 버리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은근슬쩍 마나를 피워 낸 기사의 말에 마차를 호위하던 병사들 또한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꼬락서니 보니 전쟁을 틈타 날뛰는 놈들 같은데?”
“병신 같은 놈들. 정당하게 돈을 벌 생각은 안 하고.”
그런 모욕적인 말에 벨로므의 대답은 참으로 간단했다.
“격멸한다.”
파아앙!
벨로므의 수신호와 함께 협곡 위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드득!
이윽고 날아온 화살이 낄낄대던 창병 둘의 머리통을 동시에 뚫어 버렸다.
누구의 솜씨인지는 분명했다. 아마 그 커다란 대궁을 든 사내겠지.
“궁수가 있다! 방어 대형으로!”
누군가의 고함에 방패를 든 검병이 앞으로 나서고, 창병이 바로 그 뒤에 늘어섰다. 이후 궁병이 가장 안쪽에서 활을 들어 협곡 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단순한 호송대임에도 불구하고 잘 훈련된 그 모습에 레드란이 이번 전쟁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백작님, 오러는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기억하지.”
조언을 남긴 벨로므가 수사관들과 함께 적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하룻강아지 같은 새끼들이…….”
그런 모습에 얼굴을 구긴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을 보아하니 대충 유저에 올라선 듯한 실력이었다.
“일리아.”
“예.”
내 부름에 총알처럼 튀어 나간 일리아가 검으로 반월을 그렸다.
파스슷!
검에서 솟아오른 오러를 본 기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 기사?”
상대가 보통의 용병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기사 또한 뒤늦게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실력 차이가 나는 마당에 타이밍까지 뺏겨 버린 기사의 말로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푸확!
일리아의 검이 기사의 오러를 그대로 깨부수며 목을 베고 지나갔다.
기사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피를 흩뿌리다가, 이내 땅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대, 대장님이 당했다!”
“기사다! 적에게도 기사가 있다!”
당황한 병사들의 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믿고 들고 있던 방패도 기사 앞에선 한낱 장난감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믿음의 상징이었던 기사까지 잃어버린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등을 보인 채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려 보내선 안 된다.”
그를 본 벨로므가 크게 손짓하자, 위에서 활을 쏘았던 수사관이 미리 설치해 둔 트랩을 발동시켰다.
쿠르르…….
두터운 통나무들이 가파른 협곡을 타고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후 협곡엔 두 다리만으론 쉽사리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생겨났다.
“크어억!”
“으어어어! 사, 살려 줘!”
이후론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전열이 무너진 탓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적 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론 용기를 내어 반격해 오는 몇몇이 있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족족 협곡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머리통을 꿰뚫었다.
“이, 이길 수 없어! 도망가!”
“도망가라! 도망가!”
이내 병사들은 전투를 완전히 포기하고 무기마저 내버린 채 통나무를 기어올랐고, 그에 수사관들 또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 또한 그걸 우두커니 지켜만 보진 않았다. 검을 쥔 나는 오러를 끌어올리지 않은 채 사냥에 가세했다.
“저, 저리 가!”
한 병사가 나를 보곤 겁에 질린 얼굴로 창을 휘저어댔다.
그에 가볍게 허리를 숙여 창을 피해 낸 나는 이후 병사의 손목을 잘라 내곤 발을 뻗어 명치를 걷어찼다.
발끝에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늑골이 가루가 됐겠지. 그리고 그 늑골에 보호받고 있던 심장 또한 무사치 못할 것이다.
“커어억…….”
나는 허물어지는 병사를 뒤로한 채 계속해서 패잔병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는 어느덧 마지막 병사가 단말마를 뱉고 나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이후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그러던 내 눈에 문득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습격 전에 벨로므에게 따로 지시를 받았던 수사관이 한 무리의 포박된 사람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벨로므, 저들은 누구지?”
“일전에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한 것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저들은 며칠 전 몇몇 수사관이 인근 산을 이 잡듯이 뒤져 찾아낸 산적들입니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 포박해 사로잡아 두었죠.”
“…….”
써먹으려고 사로잡았다고?
뜻 모를 벨로므의 말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이내 산적 무리의 옷차림을 본 나는 눈매를 좁혔다.
“저 옷은…….”
“프로스트 용병단을 뜻하는 휘장이 새겨진 망토입니다.”
“왜지?”
내 물음에 벨로므는 덤덤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호송대는 정규군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용병단이죠. 그런 정규군과 용병단이 맞붙었는데, 저희 쪽 시신은 하나도 없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용병들은 동료의 시체를 챙기거나 하는 족속이 아닙니다. 특히나 스캐빈저면 더더욱. 그러니 의심을 덜기 위해선 이런 위장은 필수입니다.”
벨로므의 말이 맞았다.
기사가 죽은 것까진 레드란도 납득할 것이다. 현재 프로스트 용병단이 트롯 남작가에 고용되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 용병단의 수장인 일리아는 마나를 다룰 줄 알았으니.
하지만 그 휘하는 분명 일개 용병들로 꾸려진 것으로 보여야만 했다. 그러니 벨로므의 말마따나 우리 측 사상자도 있어야 타당하겠지.
“맞는 말이야.”
“이런 더미가 있다면 위험 요인을 갖고 목격자를 남겨 두는 것보다 더 확실하죠.”
확실히 전문가는 전문가다.
나는 단지 프로스트 용병단의 상징이나 몇 개 던져 두고 빠져나가려고 했건만, 벨로므는 이런 작전에 한해선 나보다 몇 수 위였다.
그렇게 수사관들은 협곡 아래로 끌려온 산적들에게 제각기 무기를 휘두르며 그들의 몸에 전투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느꼈다.
이 수사관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피를 담은 물풍선쯤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르페 후작, 당신은 대체 뭘 키워 놓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