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191)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192화(192/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192화
49장. 로드 메이커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던 버서커들을 잃어버린 레드란은 그 길로 트롯 남작령을 포위한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레드란은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행적도 내세우지 않은 채 침묵했다.
예상한 일이긴 했다. 녀석에게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
물론 레드란이 조용한 건 내게도 다행이었다.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으니.
“어떻습니까?”
산토끼를 사냥해 온 나는 칼란다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일리아의 안위를 물었다.
“보이는 대로다.”
내 물음에 의자에 기대 독서 중이던 라헨나가 책을 덮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라헨나의 옆엔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일리아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언제쯤 일어날 것 같습니까?”
“모르지.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았더냐.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고.”
“그랬죠.”
“인간 같지도 않은 네 녀석과 이 아이는 다르지. 아마 많은 무리가 왔을 거다.”
“인간이 아니라니, 기분이 조금 그렇네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맞는 말이라 더 그렇다는 겁니다.”
푹 한숨을 내쉰 나는 팔짱을 낀 채 잠이 든 일리아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그날의 일리아는 대단했다. 물론 라헨나의 힘이 있었기에 더 빛난 것이지만, 그래도 내보인 힘만큼은 일리아가 가진 순수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라헨나의 말대로 강력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억제하고 있던 마검의 봉인을 풀고 결속한 대가로, 일리아는 전투가 끝난 뒤에도 잠시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그렇게 내가 나서서 강제로 제압한 일리아는 이후 며칠간 줄곧 잠만 자고 있었다.
“언제쯤 일어날까요.”
“단순히 잠만 자는 건 아닐 거다. 아마 무언가와 싸우고 있겠지.”
“싸우고 있다는 건…….”
“이 아이의 검이 어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평범한 무기더냐?”
“아니죠.”
“그래. 사악한 마검이지. 저를 휘두른 주인마저도 잡아먹을. 그런 녀석과 결속되었는데도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더냐.”
“뭐, 그래도 잡아먹힐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일은 없다?”
“푸른 산맥에서 저와 일리아 단둘이 있을 때 몇 번 시험해 봤습니다. 간단하게 사용하는 것부터 잠시지만 전력을 다하는 것까지.”
“지금과 달랐느냐?”
“그때는 제법 버텨 냈죠. 하지만 이번엔 실전이란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꽤 컸을 겁니다. 그래서 제어하는 데 조금 무리가 있었을 테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은데.”
“일리아는 제가 잘 알아요. 저런 날붙이에 먹힐 녀석이 아닙니다.”
“뭐, 네 녀석이 그렇다면야.”
잠시 대화가 멈춘 틈을 타 나는 토끼를 손질해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다.
“칼란다트는요?”
“방 안에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나 보군요. 가서 모델이라도 서 주시죠?”
“……시끄럽다.”
나는 라헨나의 살벌한 눈빛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장은 레드란이 조용히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곳에만 있을 순 없죠. 슬슬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럼 일리아 이 아이는?”
“칼란다트가 잘 돌봐 주겠죠.”
“보모 삼기에는 못 미덥지 않느냐?”
“라헨나가 옆에서 도와주실 거잖습니까.”
“…….”
나는 다시 한번 째려보는 라헨나의 눈빛에 웃음을 흘렸다.
“그거 아십니까? 둘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거.”
“시끄럽다.”
“어쨌든 일리아가 일어나면 이걸 전해 주시죠. 겸사겸사 이것도 좀 먹이시고.”
품속에서 써 놓았던 편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나는 스튜가 완성됐음을 확인하곤 지폈던 불을 껐다.
“지금 떠날 생각이더냐?”
“사방이 레드란의 군대입니다. 어두울 때 움직여야죠.”
“밤길 조심하거라.”
라헨나의 말에 나는 짐을 챙기며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칼란다트도 있는데 밤길 조심할 게 뭐 있나요.”
* * *
거대한 까마귀 형상으로 변한 칼란다트는 하늘을 날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올라 밤바람을 맞으며 비행을 즐겼다.
경치는 좋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트롯 남작령을 휘감은 레드란의 군대가 밝힌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마냥 감탄만 흘릴 순 없었다. 붉은 기사단이 패퇴했다고 해도 여전히 레드란이 가진 군대는 강력했으니.
그에 앞으로 있을 싸움이 고민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골자는 짜 놓은 상태다. 하지만 전황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저긴가.”
그렇게 한참을 비행하자 멀리 트롯 남작의 영주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전에 약속해 놓은 대로 루스가 한쪽 성벽에 봉화를 피워 놓은 덕이다.
“저 성벽 위에서 조금만 낮게 날아 줘. 그러면 내가 알아서 내릴 테니.”
까아악-!
내 말에 칼란다트가 부리를 열어 깨끗한 울음을 토해 냈다.
으음, 솔직히 좀 실망했다. 왠지 칼란다트라면 까마귀 울음도 더듬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후 칼란다트가 속도를 높여 곤두박질치듯 지상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에 타이밍을 재던 나는 때가 왔음을 느끼곤 그대로 몸을 던져 성벽 위에 착지했다.
쿵!
마나를 끌어 올리고 낙법까지 했음에도 발목을 타고 저릿함이 밀려왔다.
‘찌릿하네.’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루스가 미리 손을 써 둔 탓인지 성벽 위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카인 린다이어가 전쟁 중에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걸 들켜 봐야 좋을 건 없지.
“공자님.”
아무도 없다는 건 취소.
인기척을 느꼈는지 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인영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딱 벌어진 어깨와 익숙한 걸음걸이. 저걸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지.
“루스.”
“오셨군요.”
“그래.”
“저게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 드루이드입니까?”
“맞아. 크지?”
잠시 활공하다 다시 치솟아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까마귀를 본 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긴 크군요.”
“너도 나중에 한번 태워 달라고 해 봐. 꽤 재밌다.”
“……사양하겠습니다.”
“겁내긴. 뭐 어쨌든 오랜만에 다시 봐서 반갑다.”
“무사히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단단히 손을 맞잡은 루스와 나는 이후 간단히 근황을 나누었다.
“트롯 남작의 반응은 좀 어때?”
“말해 뭐하겠습니까. 레드란의 붉은 기사단이 완전히 박살 났다는데. 굉장히 흥분한 상태입니다.”
“그래? 병사들은 아직 모르지?”
“그렇긴 합니다만, 숨기는 게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무슨 말이야?”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프로스트 용병단을 뒤쫓던 붉은 기사단이 실종됐다고.”
“……소문을 막을 순 없는 노릇이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셀라는 지금 어디에 있지?”
어쨌거나 지금 당장 내가 최우선으로 만나 봐야 할 인물은 셀라 플로레스였다.
지금껏 누누이 말해 왔듯, 이번 계획에 제일 중요한 열쇠는 바로 그녀였으니까.
“셀라요? 같이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앞서 걷기 시작한 루스를 뒤따르며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셀라는 좀 어떻지?”
좀 어떠냐는 물음에 루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물음에 담긴 뜻을 알기 때문이겠지.
혈통만 가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인지, 아니면 당당한 군주로서 행보를 보여 주고 있는지.
고민 끝에 내놓은 루스의 답은 간단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셀라도 백작님과 만나길 원하고 있는 것 같고요.”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그리고 날 만나길 먼저 원하고 있다?
아리송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이후 성채를 지나 영주성 상층부로 향했다.
이윽고 한 방문 앞에 멈춰선 루스가 옷매무시를 단정히 가다듬곤 문을 노크했다.
“카인 백작님이 오셨다.”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이후 모습을 드러낸 인영과 마주한 나는 직접 보고 판단하라던 루스의 말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알던 그 여자가 맞나?’
분명 내 기억 속의 셀라는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용병 특유의 거친 면모가 찐득하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달랐다.
군의 지휘관이나 걸칠 법한 제복을 갖춘 채 특유의 붉은 머리를 정갈하게 땋았다.
가슴팍에는 플로레스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 브로치가 달려 있었고, 허리춤엔 기사들이 쓸 법한 장검을 매고 있다.
그 기품 넘치는 모습에 나는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몰라보겠는데.”
나와 시선을 마주친 셀라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왔다.
세상에, 저런 교양 있는 몸짓이라니. 이르페 후작 밑에서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낸 거야?
“오랜만이네요.”
목소리에도 마찬가지로 부드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이래서 그토록 학부모들이 자식을 서울로 보내려는 건가? 캐피탈에 좀 머물렀다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뀌지?
“많이 바뀌었는데?”
그러나 내 칭찬을 들은 셀라는 이내 굳어 있던 자세를 풀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뭐야, 좀 전에 그 단아한 여성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다시 날티 가득한 양아치가 나타났지?
“연기였던 거냐?”
황당해하는 내 물음에 셀라가 킥킥 웃으며 방 안으로 손짓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오세요.”
이후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다시 한번 실소를 흘렸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뭐야, 그 연기는? 정말 제대로 속았는데?”
“저 혼자만 달랑 캐피탈에 두고 간 복수라고 생각하세요.”
“…….”
내 헛웃음에 맞은편에 앉은 셀라가 샐쭉 웃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세요. 백작님만 속은 것도 아니니까.”
“뭐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데 캐피탈에선 잘 지냈나? 이르페 후작이 못살게 군 건 아니고?”
“별로 그런 건 없었어요.”
“별로 없었다고? 뭔가 못 미더웠나 본데?”
“아, 후작님께선 제대로 보살펴 주셨어요. 달리 차별을 받거나 그런 일도 없었고.”
셀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캐피탈에 남은 이후 이르페 후작의 주도하에 검술 훈련과 귀족으로서 배워야 할 교양과 학문을 쌓았다고 했다.
“힘들진 않았나?”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기분이었으니. 백작님과 동료분들이 저를 그냥 내버리고 떠난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고.”
“이해해라.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예. 이해해요.”
“그래도 지금 모습을 보면 나름 노력한 것 같은데? 아깐 정말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다고.”
“그 극성맞은 캐피탈의 귀부인들과 지내다 보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될걸요.”
셀라가 차를 홀짝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나쁜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플로레스로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때?”
내 물음에 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실감은 잘 안나요. 그래도 일단은 왕궁 도서관에서 플로레스 가문의 이야기를 읽어 보긴 했죠. 앞으로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니까.”
“소감은.”
“정말 천하의 몹쓸 가문이던데요?”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셀라의 말에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겠지. 대역죄를 저지른 가문이니까.”
“그래도 루스 경이 제게 말해 줬어요.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조금 오해가 있다고. 룽센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면서.”
루스 이 자식, 입 한번 가볍네.
내 뜨거운 시선을 받은 루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뭐라 하진 마세요. 그게 정확히 뭔지는 죽어도 말 안 해 줬으니까.”
“……뭐 어쨌든 그래서.”
“그렇게 나름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죠.”
찻잔을 내려놓은 셀라의 표정이 변했다.
이를 드러낸 채 입술을 씹는 그녀의 모습은 과거 닳고 닳은 용병으로 살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이르페 후작님이 저를 어디론가 데려가더군요. 제게 줄 선물이 있다면서.”
“선물이라는 건.”
“뭔가 싶어 따라가 봤죠. 점점 음침한 왕궁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더라고요. 도착한 그곳엔 한 남자가 수감되어 있었고.”
“남자?”
내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셀라가 서랍장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나는 내용물을 꺼내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안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누군가가 거액의 보수를 내걸며 의뢰를 맡겼고, 그 의뢰를 받아 든 이들은 조력자와 함께 깔끔히 처리했다는 것.
“…….”
문제는 의뢰를 받아들인 놈들은 약탈꾼 무리였고,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목표는 라일리 가문이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의뢰자와 조력자는…….
“바사라크 가문.”
그렇게 마지막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 감옥에 있던 남자는?”
“당시 의뢰에 가담했던 용병이었어요. 그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했죠.”
“확실한 정보인가?”
“이르페 후작은 수사관들이 가져온 정보니 믿어도 좋을 거라 했어요.”
수사관들이라.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필요하다면 죽은 자에게도 증언을 받아 낼 이들이 바로 비밀 수사관이었으니.
“그렇다면 이르페 후작은 네게 이걸 선물이라고 주었단 거야?”
“예.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너구리 같은 영감.
셀라의 흔들리는 멘탈이 혹여나 내 계획에 차질을 줄까 걱정한 거겠지. 하여간 동기 한번 제대로 심어 줬네.
“그래서 네 뜻은?”
내 물음에 다시 의자에 앉은 셀라가 눈을 빛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뭐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레드란의 신병은 어떻게 되는 거죠?”
“보통 전쟁에서 승리한 영주가 판단하는 문제지만, 이번 경우엔 아마 왕실의 의중대로 흘러갈 거다.”
원래대로라면 셀라 플로레스가 레드란의 처벌을 맡게 되겠지. 만약 그녀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레드란을 무너뜨렸다면 말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처지는 그저 껍데기만 있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왕실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은 레드란을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처형할 확률이 높지. 레드란은 위험한 녀석이니 왕실 입장에서도 그러길 바랄 테고.”
마음 같아선 살려 놓은 채 체스말로 요긴하게 써먹고 싶긴 하다. 인간성이야 어쨌든, 레드란은 강력한 기사임과 동시에 훌륭한 지휘 능력까지 보유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녀석이 고분고분하게 회유될 때의 이야기였다.
녀석의 지나온 행보와 가진 간악한 성정을 생각해 보면 곱게 숙여 오진 않겠지. 그러니 아마 레드란은 죽게 될 것이다.
“카인 백작님.”
그러던 그때였다. 내 설명을 들은 셀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 앞에 다가오더니 이내 무릎을 꿇곤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시키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게요. 그러니 레드란, 그 개자식을 남들이 건들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건들지 못하게 해 달라는 건 무슨 뜻이지?”
내 물음에 다시 고개 든 셀라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제가 겪었던 상실감을 똑같이 그 자식에게 맛보여 주고 싶어요. 반드시 제 손으로 말이죠.”
상실감.
라일리 가문으로 살아왔던 그녀는 일시에 가문이 몰락하고 가족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기억을 가진 채 긴 시간을 보내왔다.
그녀가 겪은 상실감은 어떤 수준일까. 감히 짐작할 순 없으나 아마 지금껏 죽지 못해 살아온 고통이었겠지.
그런 셀라의 감정이 전해지는 듯해 나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건 어려운 일이야. 좀 전에도 말했듯 왕실 입장에서 레드란은 죽여 후환을 덜고 싶은 존재니까. 그런 녀석을 단지 네 사익을 위해 빼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일전에 백작님께서 해 주셨던 말이 있죠.”
“내가 해 주었던 말?”
내 물음에 셀라가 확고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개상에겐 중개상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아, 그때 했던 말인가.
처음 셀라와 동행해 캐피탈로 향하던 여정 중에 숲속에서 단둘이 나누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의 넌 왕실에게 휘둘리는 게 불만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랬었죠.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생각해 봤어요. 과연 제가 왕실의 손길을 뿌리침과 동시에 플로레스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결론은?”
“불가능해요. 제가 철이 없었던 거죠. 플로레스의 자리를 그저 용병단을 이끄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받아들일 거예요. 설령 왕실의 입김대로 휘둘린다고 해도, 그걸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자립할 수 있겠죠. 그때를 위해 노력하고 공부하며 힘을 기를 생각이에요.”
긍정적인 변화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셀라가 이내 다시 강렬한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레드란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그렇지만 제겐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죠. 그러나 백작님은 달라요. 그러니 방법을 찾아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아예 두 팔까지 바닥에 짚은 셀라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방법이라…….
방법이 있을까? 왕실 입장에선 암 덩어리나 다름없는 그 레드란을 빼내 올 방법이.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도 해 볼 만은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래서 레드란을 굴복시킬 수만 있다면 나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시도는 해 보겠어.”
내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든 셀라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러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러니 너는 내가 시킨 모든 일을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무엇이든 하겠어요.”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한껏 긴장한 셀라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난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그러니 넌 내게 아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그래도 괜찮겠나?”
“……그 어떤 대가든 치르겠어요.”
“좋아. 그렇다면 계약 성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