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화(2/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화 마시던 홍차를 내뿜자 집사가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결혼? 내가?”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워낙 비중이 없던 캐릭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었던 공자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았다. “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신가 보군요. 의원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자기 결혼식을 까먹을 수 있냐는 어투에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냐, 아냐. 괜찮아.” 손사래를 치며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라면 나는 일주일 뒤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 잠깐, 소설 속 린다이어 백작가가 정략결혼으로 혈연을 맺는 곳이 어디였더라? “바슈른 공작가?” “예. 바슈른 공작가의 장녀가 바로 도련님의 혼인 상대입니다.” “장녀? 설마, 그 장녀가 플레타는 아니겠지?” “……맞습니다만.” 쿵! 심장에 돌덩어리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안 된다. 바슈른 공작가의 장녀만큼은 절대 아니 된다. 소설 속 조연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개성 넘쳤던 그녀였기에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철혈공녀(鐵血公女) 플레타 바슈른. 바슈른 공작가엔 남아는 필요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희대의 천재이자, 불세출의 마법사. 그와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희대의 사이코패스! 그런 여자랑 지금 결혼을 하라고? 그 여자는 물 대신 피를 찾을 정도로 정신 나간 여잔데? ‘그럴 바엔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하고 말지.’ 잠깐만. 자살? ‘그러고 보니 여기서 죽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꿈에서 깨듯, 현실로 돌아가는 건가? 그게 아니면? 진짜 죽게 되는 거라면? 또다시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은 일단 그 결혼식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와 살을 부대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복잡한 건 나중에 찬찬히 정리하고.’ 집사의 말에 따르면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집사.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어.” “예?” “왜?” “영주님 말씀입니까?” “안 될 거라도 있어?” “무엇 때문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긴히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 근데 그건 왜?” “……아닙니다. 도련님의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사를 전달해? 아무리 백작이라지만 그래도 부자지간인데 너무 거리가 있는 거 아닌가? * * * “그래, 카인.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것이냐?” 거리가 있는 게 정상이다. 아니, 거리가 없더라도 만들어야 할 판국이다.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 린다이어 백작, 그러니까 이 몸뚱이의 아비와 마주한 것까진 좋았다. 다만 문제는, 내가 상대를 그저 텍스트의 나열인 소설 속 인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느냐? 무슨 일이냐고 했다.” 방금 막 전장에서 사람 서넛은 베고 온 듯한 분위기다. 마나를 다룬 지 수십 년이 넘어서일까, 백작의 눈에는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고 벌어진 어깨는 태산과 같았다. 집무실임에도 약식으로나마 걸친 갑옷과 비스듬히 허리에 맨 검집. 그것들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내 용기를 깡그리 없애 버렸다. 북방의 군주라는 이명이 단순 활자가 아닌, 체감으로 다가오는 이 느낌이란. “영주님을 뵙습니다.” “두 번 물었다.” “예?” “한 번만 더 물으면 세 번이 되겠군.” 그제야 앞서 백작이 무슨 일이냐고 두 번 물었던 걸 자각했다. 젠장. 그렇게 눈에 힘주고 있으니까 까먹은 거 아니야. “제가 이렇게 찾아뵌 연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간청할 게 있어서입니다.” 아, 이걸 말할 수 있을까? 저 솥뚜껑 같은 손에 맞기라도 하면 죽는 건 시간문제 같은데. “간청이라?”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집에 슬며시 손을 얹는다. 저 사소한 몸짓만으로 벌써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백작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안다. 저것은 십수 년간 영지에 군림해 온 백작 고유의 협상 기술이다. 소설에서도 여러 번 나왔던 습관. 즉, 백작은 지금 내가 어떠한 말을 꺼내든 협상의 자세로 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이 내게 일말의 용기를 안겨 줬다. 협상이라는 건 상대가 그 누구든 간에 나 하기에 따라서 이길 수도 있는 게임이니까. “결혼, 하기 싫습니다.” “…….” 이 정적, 끝내주게 긴장감 넘친다. 소설 속 설정에 따르면 나는 지금 백작의 마빡 퉁기기 한 방에 머리통이 터질 수도 있다. 톡톡. 백작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백작이 입을 다시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하기 싫은 이유는?” “제 인생이니까요.” 구질구질하게 늘어놓기보단 본질을 파고드는 게 최고다. 내 인생이니까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말할 것인가? 더군다나 백작이란 캐릭터는 원리원칙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무엇보다 냉혹하지만, 반대로 합당한 이유만 있다면 결코 앞세우지 않는. 어찌 됐든 나름의 노림수 있는 베팅인 셈이었다. “…….” 백작의 반응은 꽤 특이했다. 뺨을 후려갈겨도 근엄할 것 같던 인간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뒤이어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끝내는 낮지만 울림 있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 “네 인생이니까?” “그렇습니다.” 내 재빠른 대답에 잠깐이지만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뒤이어 턱수염을 쓸어내린 백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간단명료하기 짝이 없군. 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니. 좋다. 제 인생을 제 맘대로 하겠다는데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린 백작이 긍정의 뜻을 밝혔다. “하나.” 성공인가 싶어 반가웠던 마음도 거기까지였다. 백작은 여전히 나를 하찮고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네가 지금껏 누려 오던 가문의 모든 것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 “그래. 부모된 도리로서 자식을 길러 내는 것에 보상을 바랄 수는 없지. 하지만 그것도 성인까지의 이야기다. 네놈은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도 가문에 힘이 되지는 못할망정, 그 재화를 사사로이 헛되게 쓰고 다니지 않았더냐?” 뭐? 내가 재화를 쓰고 다녔다고? “아둔한 놈. 향락가에서 무희를 품에 안고, 도박장에서 금화를 뿌려 대었던 건 온전히 네놈이 벌어들인 것이었더냐?” “그, 그건…….” “기억하거라. 세상 모든 것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네가 누려 왔던 모든 것의 대가는 바슈른의 영애와 혼인하는 것이다. 인생? 말 잘했구나. 그래, 지금 네놈의 상황이 바로 네가 만든 인생이다.” 아무래도 이 몸뚱이 원주인의 씀씀이가 어지간히 헤펐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자식새끼를 팔아넘길 정도인가? “집사.” 백작의 부름에 문이 열리며 바깥에 자리하고 있던 집사가 들어왔다. “예, 영주님.” “카인 린다이어가 성인식을 치른 이후 지금껏 가문의 재화를 얼마나 소비했지?” “공적인 업무를 제외한다면 약 금화 천오백 닢 정도 됩니다.” 천오백 닢! 그 정도면 산을 깎아 별장을 한 채 지을 만한 보화다. ‘미친.’ 이 미친놈은 대체 돈을 얼마나 펑펑 쓰고 다닌 거야? 아니, 애초에 자식새끼가 그렇게 펑펑 쓰고 다니면 당연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더 할 말이 있느냐?” 백작의 코웃음에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 인간은 일부러 그런 것이다. 어차피 정략결혼을 보낼 생각이었으니 그런 방탕한 생활도 눈을 감아 주었던 게 분명했다. ‘젠장, 젠장, 젠장…… 어?’ 잠깐만. 저건 지금 반대로 내 몸값이 금화 천오백 닢이라는 소리잖아? 그렇다면. “갚겠습니다.” “……!” 백작도, 집사도 때아닌 폭탄선언에 눈을 크게 떴다. “갚겠다고 함은?” “제가 사사로이 썼던 재화, 고스란히 돌려놓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알기론 네놈 수중엔 가문의 것을 빼면 동화 한 닢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화르륵! 농담이 아니라 정말 백작의 등 뒤로 푸른 기운이 일순간 뿜어져 나왔다. 집무실 안 모든 공간이 백작에게 장악되었다. 백작의 뜻이 없다면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 과연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초인이 보여 줄 법한 기세였다. 하지만 나도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장난을 치겠습니까.” “해명하지 못한다면 네놈은 결혼식까지 영주성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금화 천오백 닢을 갚겠습니다.” “기어이 날 능멸하려는 것이냐!” 팡!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조각이 흩날렸다. 식은땀이 흐르다 못해 팬티까지 젖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순 없었다. “거짓이 아닙니다. 갚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똑바로 해명하라.” “아시다시피 지금 제 수중에 그만한 돈은 없습니다.” “한데.” “곧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못 만들 것도 없다. 지금 당장이야 뚜렷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지만, 소설을 줄줄이 꿰찬 내가 그깟 돈푼도 벌지 못할까. “허무맹랑한 소리! 네까짓 놈이 무슨 방법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방도는 온전히 제 수완이자 모든 것입니다.” 백작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 기세가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와 같았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다. 물론 떨려 오는 손은 뒤로 감추고서 말이다. 그때였다. 성난 파도처럼 목젖까지 옥죄어 오던 백작의 마나가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평생 해 온 것이라고는 주색잡기가 전부인 놈치고 제법 장사꾼 같은 말을 하는구나.” “…….” “네놈이 지금 무슨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지는 모르겠으나 계획을 알리기 싫다 하니 내 더 캐묻지는 않겠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끝은 아닐 텐데?” 역시 수십 년을 닳고 닳은 귀족답게 눈치가 빨랐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사람도 필요합니다.” “또.” “……자금도 조금 필요합니다.” “웃기는 놈이군.” 백작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서 실패한다면?” “군말 없이 혼인하겠습니다.” “공정하지 못해. 그건 원래 내가 받아야 할 것이고.” “무엇을 원하십니까?” “린다이어로서의 모든 걸 포기하고 바슈른가(家)의 일원으로서 평생을 근신하라.” 린다이어로서의 모든 걸 포기하라. 정통성(正統性)을 버리라는 뜻이다. 훗날 바슈른 공작가의 배경을 뒤에 업은 채 가문의 후계 구도에 관여할 수 없도록 못을 박으려는 게 분명했다. 백작으로서는 일찍이 후계자를 정한 뒤 후환을 없애고 싶겠지. 애당초 나를 그런 재목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겠지만, 이번 기회에 아예 싹을 자르려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나로선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시큰둥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알겠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다 답하자 백작이 눈매를 좁혔다.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배알도 없는 놈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네 차례다.” “시간은 반년이 필요합니다.” “천하의 바슈른 공작가를 반년이나 기다리게 할 셈이더냐?” “그렇다면 얼마나 가능합니까?” “네놈이 허약해 잔병을 치른다고 하면 한 달 정도는 미룰 수 있겠지.” 하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한 달이면 빠듯하긴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솜씨 좋은 기사가 세 명 정도 필요합니다.” “한낱 놈팡이의 소꿉놀이에 기사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저잣거리에서 칼 맞지는 않도록 한 명은 붙여 주지. 물론 단장, 부단장급은 제해야 할 것이다.” 어지간히 후려쳐야지 진짜. “……더불어 금화 백 닢 정도가 필요합니다.” “열 닢을 주겠다.” 이번만큼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그런 내 심경을 읽었는지 백작이 비웃음을 흘렸다. “인생을 바꿀 마지막 기회인데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 많이 웃어 두라고. 그 비웃음 언젠간 도로 돌려줄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그 기사 한 명은 제게 선택권을 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언제까지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이 시각부터. 집사가 책임지고 뒤를 맡아 주도록.” 백작의 명에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숨 막혔던 협상이 끝났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최선의 결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결과도 아니었다.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머리를 바삐 굴려야 했다. 더불어 한 명의 기사를 내 입맛대로 고를 권한도 얻었다. 적지만 돈도 얻어 냈고.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본 게임 시작이다.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의 백작과 걱정 가득 섞인 표정의 집사를 뒤로한 나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