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01)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02화(202/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02화
늦가을에 시작되었던 전쟁은 그렇게 완연한 봄이 찾아올 무렵 끝이 났다.
동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바사라크의 주둔군은 모두 투항하거나 아니면 몸을 숨겨 달아나 와해되었다.
그래도 극소수 남아 저항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이었고, 그에 트롯 남작을 비롯한 제후들은 속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정리하러 떠났다.
그렇게 붉은성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이곳인가요?”
붉은성의 가장 높은 첨탑에 들어선 셀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답에 셀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룽센의 백골이 있었다. 여전히 겉에 걸친 갑주는 녹슬고 빛바랬으며, 온몸을 휘감은 쇠사슬은 건재했다.
“저 시신이 바로…….”
“룽센 플로레스다.”
내 대답에 셀라가 눈을 감았다. 이후 다시 뜨인 그녀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안쓰럽네요.”
“…….”
안쓰럽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축약해 낸 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곁에 시립해 있던 병사에게 손짓했다.
“시신을 내리세요. 장례는 나중에 치를 테니 조심히 모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셀라의 명령에 병사들이 사다리를 가져와 룽센의 시신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픽 웃으며 셀라를 바라봤다.
“영주라니, 감개가 무량하겠어.”
“……놀리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셀라 플로레스는 왕가의 사면을 받았다.
놀라울 것도 없다. 애초에 바사라크를 끝장내고 왕가에 복속되는 조건으로 약속했던 일이니까.
[카인 백작. 약속대로 국왕 폐하께선 플로레스를 사면하고 붉은성의 주인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셨네.]이르페 후작이 보낸 전서였다. 거기에는 플로레스의 죄를 사면하고, 셀라를 다시 동부의 종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자네가 추가로 요청한 건은 내 근시일 내로 방문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네.]덧붙여 엉덩이가 무거운 이르페 후작이 직접 붉은성으로 찾아오겠다고도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벨린테스 국왕이 내린 작위를 수여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셀라가 다시 캐피탈로 향해 정식으로 수여를 받아야겠지만, 현 동부의 불안정한 상황을 고려해 왕실이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물론 그 내면에 감춰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드란의 신병 문제도 있거니와, 셀라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거겠지.’
그러니 이르페 후작이 직접 행차하는 것이고.
그 노활한 너구리를 다시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해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레드란은…….”
“병상에 있어요.”
“상처는 좀 어떻대?”
“치료하고 있긴 하지만 중상이라 시간이 좀 걸릴 거라던데요.”
“아쉽겠어? 마음 같아선 지하 감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하고 싶을 텐데.”
“제가 무슨 변태인 줄 아세요?”
“그럼 아니었나?”
“…….”
나는 눈을 흘기는 셀라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오늘 저녁 식사나 같이하지. 시간 맞춰서 루스와 함께 자리를 만들어 놔라.”
“루스 경과 함께요? 무슨 일이라도?”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예전에 하셨던 말이라면…….”
“이 모든 일을 도와주는 대가는 아주 값비싸게 받아낼 거라는 말.”
일전에 트롯 남작의 영주성에서 나누었던 말을 떠올린 셀라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나요.”
“그 대가를 오늘 말할 테니 저녁에 보자고.”
“…….”
내 말에 셀라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겁먹지는 말라고.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닐 테니까.”
“백작님이 그러시니까 더 무서운 거 아세요?”
“누가 잡아먹는대?”
셀라에게 픽 웃어 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첨탑에서 빠져나왔다.
어쨌든 레드란을 패퇴시키고 붉은성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 모든 계획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 생각할 게 많았다.
* * *
그날 저녁.
이래저래 혼잡한 내부 정리를 위해 종일 동분서주한 루스와 셀라가 피곤한 얼굴로 식당에 모였다.
그런 둘에게 나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둘이 결혼해라.”
“푸흐흡!”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앞두고 물을 마시던 루스가 식탁 위로 물을 내뱉었다.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아,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공자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결혼하라고 했는데.”
“결혼이요?”
“그래.”
“제가 아는 그 결혼이 맞습니까?”
“혼기가 들어찬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고 관계를 맺어 토끼 닮은 자식 낳고 오순도순 사는 그거 맞아.”
루스의 눈이 황망함에 물들었다.
반면 셀라는 냅킨으로 루스가 내뱉은 물을 닦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루스 경과 저보고 지금 혼인을 맺으라는 말씀인가요?”
“바로 맞췄어.”
“그게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가이고요.”
“그래.”
“……단순히 저희를 놀리고 싶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진 않은데요.”
셀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나는 루스가 필요하다.”
“…….”
“하지만 루스는 바람기사단에 얽매어 있지. 특별한 사유 없이는 탈단할 수도 없다. 쥐뿔도 없던 녀석을 데려다 먹여 주고 입히면서 키워 낸 건 린다이어 가문이니까. 명예를 아는 기사로선 그런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겠지.”
“…….”
“하지만 너희 둘이 혼인을 맺게 되면 루스는 자연스레 바람기사단에서 탈단할 수 있게 된다. 데릴사위나 마찬가지인 신세이니 북부에 있으려야 있을 수 없겠지.”
이쯤 되자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셀라와 루스가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루스 경을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라는 말씀이군요.”
“그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야. 말했지 않았어? 나는 아주 큰 걸 바란다고.”
“더 큰 걸 바란다는 말은…….”
“플로레스는 앞으로 카인 백작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조력자라고요.”
“그래. 나는 곧 린다이어 가문에서 독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후 공식적으로 플로레스의 수호 가문이 될 생각이야.”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린다이어라는 배경을 잃었다. 물론 왕실과 깊은 연을 맺긴 했지만, 그들은 조력자라기보단 동업자에 가까운 수평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플로레스는 다르다. 가진 건 정통성뿐인 셀라도 내가 돕는다면 당당히 자립할 수 있을 테니까.
반면 내 말을 들은 셀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은 루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수호 가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공자님이?”
“뭐 꼭 수호 가문이 꼭 대단한 가문끼리만 엮여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지금 군사 요충지인 하늘요새에서 앞으로 거느릴 기사단을 육성하고 있다. 게다가 일단 나부터가 엑스퍼트에 오른 기사고, 나를 따르는 너와 일리아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왕실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하며 린다이어와 바슈른이라는 거대 가문과도 연이 있다. 이만하면 조건은 충분하지 않나?”
내 말에 듣고 있던 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은 플로레스에게 부족한 기사 전력과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을, 플로레스는 백작님에게 동부의 넓은 장원과 군대를 지원한다는 거군요.”
“맞아.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있는 훌륭한 거래지. 게다가 이건 너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해.”
“레드란의 신병을 거머쥐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래. 자격이라 함은 네가 단지 왕실의 꼭두각시가 아닌, 스스로 자립이 가능한 제후가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으니까.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도와준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하지만 왕실이 그런 백작님을 경계하지 않을까요?”
“경계?”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왕실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바라 마지않을 일들인데? 그들은 절대로 나를 내치지 못해.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당연하다. 내가 플로레스를 거머쥐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수호 가문이 되어 영향력을 조금 행사하겠다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그건 곧 앞으로 있을 전쟁을 대비한 일이니 왕실로서도 기꺼이 이해해 줄 것이고.
게다가 나는 이미 로드키우스를 정벌하면 그 모든 것을 왕실에게 바치기로 국왕과 약속까지 했다.
그걸 아는 이상 왕실은 미치지 않고서야 나라는 카드를 절대 버릴 수 없겠지.
“하지만 혼인은…… 과연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루스는 엑스퍼트에 들어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기사다. 바람기사단이라는 누구나 혹할 만한 출신이기도 하지. 게다가 잊혔던 플로레스를 처음으로 찾아낸 인물이기도 하고. 자격은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뭐가 더 필요하지?”
나는 머뭇거리는 셀라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아아, 사랑이 없는 혼인이라 불만인 건가? 근데 그건 남자 쪽에겐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고오옹자님!”
내 너스레에 루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벌떡 일어났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사춘기 소년처럼.”
“그건 제가 나중에 알아서 말하려고…….”
“나중에 언제? 한 십 년 뒤에?”
“너무하십니다!”
“네가 너무할 게 뭐가 있어? 너무할 건 새까만 산적 같은 놈과 지내게 될 셀라지.”
루스의 입을 다물게 만든 나는 고개 돌려 셀라를 바라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입지를 다지기 위한 귀족의 정략결혼은 원래 비일비재한 법이니. 너에게도 분명 나쁜 조건은 아니니까 그냥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에요.”
어랍쇼? 이거 봐라?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캐피탈에서도 저를 잘 돌봐 주셨고, 무엇보다 홀로 트롯 남작령에 도착했을 때 몇 달간 성심성의껏 제 곁을 지켜 주셨으니까요.”
어느새 붉어진 얼굴의 셀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첫 만남은 아직도 떠올리면 짜증 나긴 하지만요.”
“억지로 납치하다시피 데려왔던 거? 이해한다. 워낙 험상궂게 생겼어야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결국 다 저를 돕기 위해 했던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그전에도 약탈꾼들을 소탕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부탁을 아무 대가 없이 들어주기도 했고.”
점점 몸이 배배 꼬여 가는 두 남녀를 보고 있자니 몸에 닭살이 돋아 버틸 수가 없는 기분이다.
“지지고 볶는 건 내가 나간 다음에 알아서 하고, 그렇다면 일단 내 제의는 받아들이겠단 뜻으로 알겠어.”
“예. 제가 더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없어. 곧 도착할 이르페 후작과의 담판은 내가 알아서 지을 테니까.”
“중개상이시니까요?”
쿡쿡 웃음을 흘리는 셀라의 말에 나 또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개상은 중개상의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