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05)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06화(206/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06화
케르윈이 기거하고 있는 장소는 볼룸 산맥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마넬로프 고봉이었고, 그곳에 당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옛날에 비해선 확실히 쉽네. 그때는 갈 길이 참 멀게 느껴졌는데.’
플레타와의 혼인을 파하기 위해 린다이어 백작에게 금화를 벌어 오겠다 선포한 뒤, 케르윈에게 마법을 팔러 왔었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는 참 힘들었다. 비바람이 몰아쳤을뿐더러 마나도 다루지 못해 몸도 허약하던 시절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내 힘은 그때와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고, 이후 루스와 함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고봉에 다다랐다.
그리고 마주한 옛 기억 속의 광경.
봉우리 끝을 목전에 두고 단단히 뿌리박고 선 세 그루의 침엽수. 마치 자로 잰 듯한 일정한 간격의 나무 앞에서 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군요. 마치 언제 와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과거 나와 함께 케르윈까지 만났지만, 그녀에게 기억이 지워진 탓에 까맣게 잊고 있는 루스였다.
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지금의 루스에게도 계속 케르윈의 존재를 숨겨야 할지.
답은 아니오였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루스는 누가 뭐래도 나의 가장 헌신적인 수족이었으니까.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루스는 지금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난다는 내 말을 머리로는 믿고 있으나 현실로 끌어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치 고리타분한 어르신들의 앞날 걱정에 별생각 없이 동의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니 지금 케르윈을 찾아가는 건 그런 루스의 머리를 깨어나게 해 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공자님, 여기는…….”
“루스.”
“예?”
“지금부터 맹세해라.”
“갑자기 맹세라니요?”
“농담하는 거 아니야.”
짐짓 굳은 얼굴로 뱉은 내 말에 루스가 곧장 태도를 바꿔 짐짓 자세를 취했다.
“맹세라 하심은…….”
“지금부터 보고 듣고 겪게 될 모든 것을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영원히 함구할 것.”
거창한 의식은 없었다. 무릎을 꿇지도, 검을 뽑지도 않았다. 루스는 그저 평범한 얼굴로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제 명예와 목숨을 걸고,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좋아.”
루스의 맹세를 들은 나는 검을 뽑았다.
“이 검은 마법검이다.”
내 말을 들은 루스는 뭐 그게 대단한 사실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찍이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명검이라기엔 가진 분위기가 남달라서 말이죠.”
“단순한 마법검이 아니야.”
“……예?”
루스의 의문을 들으며 나는 뽑은 아휀으로 세 그루의 침엽수들 가운데를 가리켰다.
“왕국의 등불이자, 대마법사로 일컬어지는 케르윈 아휀이 대제의 뜻을 내게 위임하며 맡긴 마법검이지.”
쥐고 있던 아휀의 크로스가드에 박힌 호박색 보석이 서서히 황금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케르윈 아휀이요? 그 전설 속의 인물이 공자님에게? 아니, 그보다 그 검의 빛은…….”
당황에 젖은 루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휀에 모인 빛은 세 그루의 침엽수로 향했다.
사아아아…….
이후 벌어진 일은 그때와 같았다.
한바탕 마나가 휘몰아쳤고, 이후 구름 깔린 황량한 고봉 아래 거대한 대리석 문이 나타났다.
“무, 무, 문이…….”
당황한 말과 함께 루스의 손이 검집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고, 공자님, 저 문은?”
“루스, 진실을 맛볼 준비는 됐냐?”
나는 내 물음에 입을 꾹 닫은 루스를 뒤로한 채 천천히 걸어 문 앞에 섰고.
쿠우웅…….
이후 그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열린 문 내부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고봉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루스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연신 바깥과 문 안을 비교해 보았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위험한 장소는 아니야.”
내 아리송한 대답에 루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그런 내 모습에 루스가 손을 내저었다.
“고, 공자님?”
“그래서, 안 올 거야?”
내가 간다는데 루스가 뭐 어쩔 도리가 있나.
그렇게 반쯤 죽을상으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인 루스는 이후 환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현실감에 다시 한번 입을 쩍 벌렸다.
고개를 꺾어야 보이는 천장과 그 천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무수한 벽화들.
용, 인간, 이종족, 몬스터, 그리고 천사와 악마들이 한곳에 뒤엉겨 피를 흘리는 그 섬뜩한 광경에 루스는 말을 잃었다.
“여기는…….”
“케르윈의 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아지트가 더 맞겠네.”
“아지트라고요? 아니, 그것보다 그 사람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겁니까?”
역사 속에서 잊혔던 인물의 등장에 루스가 황급히 되물어왔다.
“그래. 아직 살아있다.”
“어떻게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을 수가 있죠?”
“모르지. 대마법사니까 아마 나름의 방법을 찾았을 수도.”
“…….”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루스는 결국 입을 닫았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 거겠지.
그런 루스를 뒤로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랑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은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이 하나 나왔다.
그때와 같은 기억이다. 아마 이 문 너머엔 케르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루스.”
“……예.”
“경고 하나 할까?”
“경고라고 하심은?”
“이번에도 한바탕 두들겨 맞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때도 같은 경고를 했었던 것 같다. 물론 루스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케르윈에게 단숨에 제압되었지만.
옛 기억이 떠오른 나는 픽 웃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둔중한 문은 그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밀어낸 내 손을 따라 가볍게 열렸다.
이후 드러난 내부는 백색으로 가득한 거대한 홀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와 달리 안에는 가구라고 할 것 하나 없어 굉장히 황량한 느낌이었다.
“…….”
그러나 그 황량한 느낌도 이내 홀 중앙에 자리한 무언가를 보는 순간 지워졌다.
광휘의 왕좌.
케르윈이 대륙을 통일한 벨랑카스 대제에게 선물했다던 왕좌는 불그스레한 황금빛 기운을 흘려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왕좌 위에는 한 인영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무릎까지 흐드러진 은빛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을 지닌 눈썹과 눈동자, 그리고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창백한 피부까지.
“오랜만이구나, 카인 린다이어.”
케르윈 아휀이 안으로 들어선 나를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 * *
장소는 바뀌었다.
백색의 홀에는 어느새 거대한 테이블이 자리했다. 그 위에는 만찬이 차려졌고, 자리에 앉은 나와 루스의 뒤로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이 주르륵 도열했다.
당연하지만 사용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두 다리가 없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꼴이었으니. 게다가 이목구비조차 없어 허여멀건 한 얼굴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케르윈은 정갈한 차림으로 테이블 상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에 찻잔이 올려졌고, 그것을 받아든 케르윈은 능숙하게 차의 향을 음미했다.
“같이 온 저 아이는 누구지?”
“제 수행기사인 루스 마이어입니다.”
“아, 저번에 데려왔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케르윈의 말을 들은 루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기억이 지워진 채일 테니.
“호,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이야기가 나옴에 루스가 살면서 가장 공손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 나는 궁금해졌다. 어떠려나? 예전처럼 손가락을 튕겨 루스를 저 멀리 날려 버리려나?
“묻거라.”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케르윈은 마치 치기 어린 소년을 보는 듯한 얼굴로 루스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왕국의 등불이신 케르윈 아휀 님이십니까?”
“등불이라……. 나는 그 이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일단은 내가 케르윈인 것은 맞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 건데?
루스의 뜬금없는 사죄에 케르윈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유해진 모습이었다. 옛날엔 건드리기만 해도 베일 것같이 날카로운 분위기였는데 말이지.
‘아, 그것 때문이려나.’
수백 년이란 시간 동안 이 외딴 산맥에 스스로를 봉인한 채 살아왔던 케르윈이다.
그런 고독한 삶에서 내가 케르윈에게 팔았던 마법은 사랑했던 대제의 얼굴을 매일 보며 안식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었겠지.
게다가 대제가 남겼던 유지를 내게 물려줌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도 있을 테고.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내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케르윈이 입을 열었다. 그에 내가 차고 있던 검집을 풀자 그녀가 손짓해 마법으로 끌어와 손에 쥐었다.
“그래, 오랜만에 나가 본 세상은 어땠니?”
마치 오랜만에 서로 재회한 모녀를 보는 듯했다. 케르윈은 검을 쥔 채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고, 아휀은 마치 그에 화답하듯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짧은 재회의 시간이 끝났다.
아휀과 대화를 마친 케르윈은 검을 다시 내게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휀의 기억을 전부 읽어 보았다. 그간 네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대강 알겠구나.”
기억을 읽었다고? 그럼 내 일거수일투족을 한 번에 다 알아 버린 건가? 뭔가 창피한 기분이 드는데.
“……거짓말은 꿈도 못 꾸겠군요.”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느냐?”
“그럴 리가요.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은근슬쩍 농담을 던져 보았으나 케르윈은 유한 분위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마. 네가 이렇게까지 일을 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 사익 따윈 없이 오로지 왕국만을 위해 움직이는 네 행보에 적잖이 감탄했다.”
“알아주시니 감사하네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차로 목을 축인 뒤 슬슬 본론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슬슬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케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잠시 말끝을 흐린 채 고민에 잠겼던 나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케르윈 님의 힘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비슷하게 맞추었다.”
케르윈의 힘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왕국을 구하는 일은 케르윈이 재촉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판국에 나를 불렀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일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곳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영역, 즉 케르윈이 막고 있는 북부의 결계에 관계된 것이리라.
“일전에 듣기론 케르윈 님의 힘이 다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랬지. 그래서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휀의 기억을 읽어 보니 대충 예상이 가는구나.”
“예상이 가신다고 하심은?”
“순리대로라면 북방을 지키고 있는 결계는 앞으로 5, 6년 정돈 무리 없이 버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계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느냐?”
무엇을 뜻하냐고? 답은 뻔하지.
나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군요.”
종족전쟁을 일으킨 원흉이자, 미들랜드 사가의 진정한 흑막들. 네비로스 교단과 언홀리 나이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단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