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19)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20화(220/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20화
53장. 잊힌 고성
다시 만난 블래우는 내 말을 듣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바로 잊힌 성으로 출발하시겠다고요?”
“그래. 일전에 그 근방에 수인족이 있다고 했었지?”
“그랬었지요.”
“내가 너를 돕는다면 그들에게 협조를 대신 부탁해 주겠다고도 했었고.”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내 말에 블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미리 써 두었던 건지 품속에서 전서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약속했던 겁니다.”
전서를 받아 들어 과거의 빚 대신 내게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지.”
차출해간 다크엘프들이 남겼을 신호를 운운하는 내 말에 블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저희를 위협하던 이들을 무찔러 주셨으니…….”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마음의 짐을 덜은 탓일까, 블래우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입맛은 씁쓸했다. 내가 처치한 놈들은 그저 잔챙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물론 여기서 입 싹 닫고 원하는 것만 얻은 뒤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블래우를 바라봤다.
“블래우.”
“예?”
“이번에 내가 처치한 놈들은 그저 말단에 불과해.”
내 말을 들은 블래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단에 불과하다는 건…….”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대신할 누군가가 이 숲으로 다시 찾아오겠지.”
“이런! 저희 안위를 보장해 주시기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속은 지켰어. 그 결과 지금 너희들은 자유의 몸이잖아.”
“하지만 결국 다른 인간들이 찾아올 거라고…….”
“그거야 미래의 일이니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네 의뢰를 완수한 것도 사실이야.”
자르고 들어간 내 말에 블래우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결국 놈들은 보복을 위해 다시 이 숲을 찾아올 테고, 우리의 운명도 변하지 않겠군요.”
“이 숲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새로운 숲이 어디 있을지도 모르고, 그곳으로 찾아오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 블래우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들의 힘만으론 결국 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밑밥은 충분히 깔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겠어.”
내 말을 들은 블래우가 고개를 들었다.
“거래라니요?”
“만약 너희 일족이 앞으로의 내 일을 돕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나 또한 너희들에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겠다.”
“새로운 거처라면…….”
“뭐, 모르긴 몰라도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일궈야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약속할 수 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 곳이 있습니까?”
“있으니까 결정해.”
안전한 거처가 있다는 내 말을 들은 블래우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새로운 거처라니, 저희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희가 어떤 일을 돕는지는 알아야겠습니다.”
“네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
“단지 눈앞의 일만 생각했다가 이 꼴이 됐으니까요.”
과거 네비로스 교단과의 거래를 말하는 블래우였다.
아마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좋은 마음가짐이다.
“적의 적은 동료인 법이지.”
“예?”
“나는 어느 단체를 뒤쫓고 있다.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들을 없애기 위한 초석이 될 테고.”
“그 단체라면…….”
“너희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
블래우의 눈에 불꽃이 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초리를 늘어뜨린 블래우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희 일족에겐 빠짐없이 구속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건 놈들을 마주칠 때마다 족쇄가 될 겁니다.”
블래우의 말에 나는 흑마법사가 제대로 써 준 마법 수식을 꺼내 팔랑였다.
“그거야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걱정 마.”
마음 같아서야 당장 아휀을 활용해 풀어 주고 싶었지만, 녀석의 말에 따르면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암호를 만드는 건 한순간이지만 푸는 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어쨌든 지금 당장 네게 필요한 건 일족을 추스를 안전한 영역이잖아? 아닌가?”
내 제안에 블래우가 잠시 입을 꾹 닫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북방을 떠돌 것이냐, 아니면 나를 믿고 일족의 운명을 맡겨 볼 것이냐.
블래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나를 선택한 블래우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래는 성립됐어.”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잊힌 성으로 향할 생각이다.”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터전을 옮기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겠지. 이곳에 내 동료 둘을 남겨 둘 테니 너희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잊힌 성으로 따라와라.”
“굳이 홀로 먼저 가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정찰이지. 그 잊힌 성이라는 곳에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네가 말했던 수인족과 접선해 정보를 얻는 것도 급선무고.”
놈들의 잔당이라는 말에 블래우의 눈이 순간 떨렸다.
“그렇단 말씀은…….”
“만약 그곳에 남아 있는 잔당들과 싸워 볼 만하다면 너희가 도착하는 대로 같이 쓸어 버릴 수도 있겠지.”
구속 마법이야 당장은 별문제 없다. 이미 그곳을 담당하던 흑마법사는 잡아 죽였으니까. 설령 또 있다 해도 내 능력이면 마법사를 저격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같이 싸워 주겠어?”
“같이 싸운다…….”
같이 싸워달라는 말에 감명을 받은 걸까? 내 말을 곱씹어 보던 블래우는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나긴 시간 핍박받았던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던질 기회입니다. 피하지 않겠습니다.”
블래우의 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중에 보자고.”
* * *
뒷일은 일리아와 레드란에게 맡긴 뒤 나는 먼저 정찰을 위해 잊힌 성으로 향했다.
잊힌 성은 다크엘프들의 숲과 거리가 꽤 떨어진 곳이었다. 느긋하게 걸어서 갔다면 족히 일주일은 걸렸을 정도로.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기에 힘을 아끼지 않고 마나를 펑펑 써 가며 단숨에 주파했다.
물론 그 여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최대한 몬스터를 피했음에도 크고 작은 십수 번의 전투를 겪어야 했다.
물론 지킬 것 없는 홀몸이기에 피해는 없었지만 뒤따라올 후발대들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일리아와 레드란도 있거니와, 다크엘프들도 마나를 다루니.’
그렇게 고생하며 끝내 도착한 곳은 시간상 늦봄임에도 칼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미치도록 척박하군.”
도착한 곳을 둘러보자 나도 모르게 툴툴거림이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이곳과 비교한다면 다크엘프의 숲이나 푸른산맥과 인접한 지역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블래우가 왜 그렇게 숲을 떠나기 싫어했는지 이해가 간다고 할까.
그러나 웃긴 것은, 이 척박한 환경에도 멀리 고고히 자리 잡은 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성(古城)이었다.
우뚝 솟은 첨탑을 중심으로 주위를 둥그렇게 싸고 있는 성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외곽엔 튼튼해 보이는 성벽이 자리했다.
물론 유수의 도시와 비교하면 장난감처럼 보일 규모였다. 하지만 주위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라 그런지, 꽤 웅장하게 보이는 착시가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달까.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어떻게 케르윈 혼자서 이런 황량한 곳에 고성을 세운 걸까.
“야.”
내 부름에 낮잠이라도 자다 깬 것처럼 아휀이 부르르 떨었다.
[우웅?]“저 고성에 대한 기억은 없냐?”
[없어. 그때의 난 아빠랑 있었거든.]벨랑카스 대제랑 있었다고? 대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야?
“결계를 칠 것을 예견하고 수백 년 전에 고성을 미리 세워 뒀다는 건가?”
[바보야? 결계를 치는 데 뭐하러 성을 지어?]으음, 확실히 결계를 치겠다고 성을 짓는 건 조금 우습지. 사방 어디서 봐도 눈에 확 띄니까.
그렇다면 저 성은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그럼 케르윈은 대체 왜 저런 곳에 성을 세운 거지?”
[엄마 말로는…… 아빠는 은퇴하면 그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 했다고 했었어. 그때를 위해 지어 놓은 게 아닐까?]아, 휴양지 같은 느낌인 건가? 아니지. 북방에서 무슨 휴양을 해. 대제가 늘그막에 은퇴했을 때를 대비해 마련해 놓은 도피처라 생각하는 게 맞겠지.
확실히 북방이라면 귀찮게 구는 인간은 하나도 없겠네. 그 괴물 같은 둘이라면 몬스터 따위야 걱정할 것도 없고.
더불어 케르윈의 마법이라면 고성 내부를 그 어떤 지상낙원보다도 나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목적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대제는 자신의 수명을 왕국을 안정시키는 것에 전부 바쳤으니까.
결국 쓸모가 없어진 성은 훗날 결계를 유지하는 장소로 다시 쓰였다는 건가.
“뭐, 그렇다고 쳐도 저 성은 어떻게 지은 거지? 케르윈이 손수 돌을 나르진 않았을 텐데. 감도 안 잡히는걸.”
[어휴, 골렘이 그토록 비밀스러운 존재였니?]하긴, 케르윈 정도의 실력이라면 골렘을 부리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골렘이 짓는 성이라……. 상상만 해도 대단한데?
짧은 감상을 마친 나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블래우의 말에 따르면 이 근방은 수인족의 영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 어떤 곳에도 그들의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죽고 오랜 시간이 흘러 백골이 된 몬스터만 드문드문 발에 챌 뿐.
‘뭐,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영역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고.’
수인족과의 접선은 물 건너간 건가.
밀려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다. 수인족의 협조는 좋은 옵션이었을 뿐이고 본래 목적은 정찰이었으니.
그렇게 우뚝 서서 날이 저물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서서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강풍이 잠시 잦아들었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에 젖어 하늘이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절경도 이런 절경이 없다. 지구에서 이런 광경을 봤다면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여기는 북방이다.
그래, 북방이지. 몬스터가 들끓고, 인간을 한낱 물건의 재료쯤으로 생각하는 놈들이 음모를 꾸미는 곳.
밀려온 씁쓸함을 느끼며 암안을 일깨웠다. 그러곤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천천히 고성을 향해 나아갔다.
고성의 성벽이 가까워지자 나는 잠시 멈춰 아휀에게 물었다.
“뭐 느껴지는 거 있냐?”
[아무것도?]혹시나 염려했던 마법 트랩은 없는 듯했다.
아휀이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확실하겠지. 그렇다면 경비를 세워 놓은 걸까?
밀려오는 긴장을 느끼며 감각을 일깨웠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확신이 들었다. 성벽 위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내가 북방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겠지. 그렇다면 내부에 있다는 건가.’
언제든 문장을 일깨울 준비를 하며 천천히 고성으로 접근했다.
아치형으로 높게 솟은 고성의 입구는 열려 있었다. 그에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역시나 입구를 지키는 존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감각을 곤두세웠으나 여전히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데.’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이곳이 교단의 근거지란 내 예상이 틀렸거나, 아니면 굳이 경비를 서지 않아도 될 이유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전자라면 맥 빠지고, 후자라면 골치 아프다.
경비를 서지 않아도 될 이유? 그런 게 뭐가 있을까?
확실히 이상하단 말이지. 고성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수인족은커녕 몬스터 한 마리조차 만나지 못했으니.
뭐, 조금 더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지.
결심한 나는 숨죽여 성벽으로 접근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탓일까, 성벽엔 군데군데 흠집과 덩굴이 자라 있었다. 오르기 좋은 조건이었다.
혀를 입술로 축이며 부드럽게 검을 뽑았다. 소리 없이 뽑힌 아휀이 작게 공명해 왔다.
이후 검을 쥔 채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성벽 위로 올라선 나는 은밀히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성 내부는 기이하리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혹시 몰라 감각을 깨운 채 한참을 관찰해 봤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헛짚은 건가? 여기가 놈들의 근거지가 아니라고?’
어쨌거나 외성벽을 지키는 이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높게 솟은 중앙 첨탑을 휘감은 내성이 보였다. 전투 목적이라기보단, 케르윈의 취향을 나타내는 조형미가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내성의 입구 또한 열려 있었다. 그리고 성벽과 마찬가지로 주변에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
천천히 섬세하게, 개미 한 마리의 기척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공들였다.
그리고 끝내 확신했다.
성 바깥을 지키고 있는 자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네.’
해가 저문 시간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경비조차 없다는 건 좀 의아했다. 그렇다고 마법으로 감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때였다.
쿠륵, 쿠르륵…….
멀리서 돼지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 바깥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한 무리의 오크들이 성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수는 열댓 마리. 행색을 보니 무장했다. 그중 몇몇은 죽은 들개들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오크 사냥꾼들인가? 어쨌든 나를 쫓아온 건 아닌 듯했다. 꼴을 보아하니 아마 몰아치는 강풍과 어둠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겠지.
‘마침 잘됐네.’
놈들이 대신 이곳을 들쑤셔 준다면 뭐가 됐든 답이 나오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천천히 고성으로 향해 다가오는 오크들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