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2)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2화(22/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2화
8장. 북부의 까마귀들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은 이른 아침.
또다시 출발이었다.
단출하게 볼룸 산맥으로 향할 때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사람도 많아졌고, 짐도 늘었다.
늘어선 마차를 하나하나 둘러보려던 찰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레오.”
“공자님!”
상처를 치료한 뒤 내가 준 임무에 열성이었던 레오는 구슬땀을 흘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차질은 없겠지?”
“예, 신경 써서 다 확인했습니다.”
레오가 가져갈 물품이 적힌 물자 보고서를 내밀었다.
적힌 것은 간단했다. 각종 기호 식품과 음식들, 그리고 레인저들이 요청했던 물자와 그들에게 보내지는 편지들이었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 행렬은 백작이 위문차 보내는 보급대나 다름없었기 때문.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니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겼으리라.
“공자님.”
“루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루스까지 다가와 병사들의 배치를 끝냈다는 보고를 올렸다.
“에스테반 경.”
내 말에 멀리 은빛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길레인이 다가왔다.
“예, 공자님.”
“선두에 서십시오. 준비가 끝났으니 출발 명령을 내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뭐, 엄연히 대외적으론 기사단장과 삼공자가 부대 시찰을 나서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저보단 기사단장이 서두에 서는 게 모양새가 나을 겁니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겐 여전히 나는 무능력한 삼공자로 여겨지고 있을 테니까.
굳이 내가 억지를 부려 앞으로 나서 봤자 사람들은 코웃음이나 칠 것이다.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배경을 이용해 억지로 나서면 되려 반감만 살 뿐이고.
물론, 돌아올 때는 바뀌어야 한다. 내기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알겠습니다.”
내 말을 이해한 길레인이 말 옆구리를 차 행렬 맨 앞에 섰다.
“출발한다!”
길레인의 명령이 떨어졌고 나를 포함한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인저들은 북부 산맥의 파수꾼이다.
최일선에서 산맥을 성으로 삼아 몬스터의 침입을 1차로 저지하며, 전령을 보내 백작령에 위험을 알리는 첨병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레인저들은 최고의 엘리트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백작의 사병이 아닌 왕국 직할부대로서 그 위명을 유지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기본적인 명령권은 린다이어 백작에게 있었다.
엄연히 그들의 보급과 관리를 도맡고 있었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허울뿐인 게 문제지.’
백작이 관리한다곤 해도 작전권은 또 독립되어 있다. 서류상 지휘관은 백작인데, 백작이 제 맘대로 작전을 펼칠 수는 없단 이야기다.
웃기는 관계다.
복잡하게 얽힌 미묘한 관계 속에서 과연 레인저들의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백작의 시험이겠지.’
만약 내가 사병과 기사단을 이끌고 가겠다 우겼으면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았을 내기다.
내가 한순간에 말아먹기라도 한다면 가문의 힘은 저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나라도 빌려 주지 않겠다.
근데.
아무리 그 복잡 미묘한 관계라고 해도.
이런 분위기는 좀 심하지 않나.
“검문이 있겠습니다.”
망토를 걸친 레인저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검게 물든 망토를 제외하면 복장은 물론, 병기도 제대로 통일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제각기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 주는 듯했다.
하긴, 산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질서정연이 얼마나 의미 있겠냐마는.
“검문?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요?”
“앞선 전령에게 들었습니다. 바람기사단의 기사단장과 삼공자님이 산맥에 오신다고.”
“한데 왜 지금 영주님이 보낸 보급을 의심하는 거요?”
“우리는 항상 해 왔던 관례대로 하는 겁니다.”
“무엄하군. 설명해 보시오.”
“저희는 국왕 전하의 의지를 따릅니다. 전하께선 그 어떠한 것도 확신 없이 산맥에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게임 끝났다.
국왕의 명이라고 말하는데 거기다 딴지를 어떻게 걸어?
길레인이 벌레 씹은 듯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지나친 한 레인저가 손짓했다.
“샅샅이 훑어봐라.”
“예.”
레인저의 명령에 그 부하로 보이는 서넛이 검을 뽑은 채 마차를 일일이 뒤져 보기 시작했다.
“루스.”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루스를 불렀다.
“예, 공자님.”
“레인저 놈들, 원래 저렇게 기고만장한가?”
“말도 못 합니다. 저놈들에겐 신분이고 뭐고 없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산 위에선 자기들이 왕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콧대가 아주 높습니다.”
자부심이 있다, 이건가.
뭐, 프라이드로 똘똘 뭉쳐 있는 건 좋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급품까지 들고 왔는데 이건 좀…….
아, 혹시 그것 때문인가?
“에스테반 경과 내가 와서 더 그럴 수도 있겠네.”
“예?”
“단순 보급대가 아닌, 기사단장을 위시한 백작가의 공자가 레인저를 찾았다라.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쟤들도 의심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서 더 저러는 거다.”
“기선을 잡겠다, 뭐 이런 걸까요?”
“그래. 최소한 질질 끌려다니진 않겠다는 뜻이겠지.”
“흐음.”
문제는 문제다.
내 목표는 칼날 노래 부족장의 목이다.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현재 나와 길레인, 그리고 루스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리 비협조적인데, 내 목적을 밝히고 나면 과연 어찌될는지.
‘퍽이나 협조하겠어.’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이 축 처진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을.
“루스.”
“예.”
“귀 좀 빌리자.”
* * *
레인저 부대의 구조는 지구에서 겪었던 최전방 부대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크게 두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휴식과 훈련을, 나머지 한 부대는 최일선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 오직 경계만을.
그래서인지 지금 찾은 병영은 생각보다 그렇게 삼엄하지만은 않았다. 나름 환영을 한답시고 연회까지 열어 주었으니 말이다.
“모두 잔을 채워라, 이 망아지 같은 새끼들아.”
레인저들의 계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한 부대의 리더인 큰 까마귀, 레이븐(Raven).
행동 대장인 검은 까마귀, 블랙 크로우(Black Crow).
일반 레인저인 갈까마귀, 잭도우(Jackdaw).
“린다이어 백작가에서 보낸 선물이다. 우리가 산속에서 허벅지 꼬집어 가며 고생하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중 레이븐이란 칭호답게 검고 덥수룩한 수염을 자랑하는 대장이 잔을 들고 외쳤다.
“우리가 북부를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신 듯하니 모두 평소 하던 대로만 해라. 클클.”
레이븐의 건배사에 레인저들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저희가 언제 남의 눈치 보는 거 보셨습니까?”
“지금껏 저희를 감시하겠다고 왔다가 산에서 굴러 죽은 사람만 수십입니다.”
“뒤나 잘 따라오면 다행이지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다.
나와 길레인, 그리고 루스가 앉은 자리와 명백히 선을 그은 레인저들은 저들끼리 술과 고기를 뜯었다.
그나마 대장이라고 옆에 앉은 레이븐이 내게 잔을 내밀었다.
“카인 린다이어 삼공자. 반갑소. 이 빌어먹을 것들의 대장인 큰 까마귀, 게리드 크로우요.”
레인저들은 평생 왕국에 봉사하겠다는 신념 아래 원래 성을 버리고 크로우가 된다.
“반갑습니다, 게리드 크로우.”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소만. 이럴 게 아니라 일단 한잔합시다.”
존대도, 반말도 아닌 어투에 루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루스도 바보는 아니다. 애초에 바보였다면 수하 삼지도 않았겠지만.
챙!
잔을 부딪친 게리드가 단숨에 포도주를 들이켰다.
“크으! 여하튼,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소? 게다가 여긴 술은 있지만 계집은 없는데 말이오.”
술과 계집을 운운하는 걸 보니 내 소문이 이 산맥까지 퍼진 모양이다.
하긴, 나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을 리가 있나. 백작가와 레인저는 가깝고도 먼 사이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마음만 맞으면 되지.”
“으흐흐. 재미있는 공자님이군. 골라 보시오. 마음에 드는 까마귀들을 침소에 넣어 주겠소.”
손을 펼친 게리드가 레인저들을 가리켰고, 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소에선 필요 없고, 사냥 보조가 몇 필요합니다만.”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순간 가라앉았다.
침을 튀기던 고함도, 술잔을 부딪치던 소리도, 손뼉을 치던 박장대소도.
전부 사라졌다.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경계에 투입된 이들을 제한 오륙십의 레인저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꿀꺽.
곁에 있던 루스의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들의 눈빛이 내보인 적의를 느낀 탓이겠지.
나무 위에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쏘아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죽는 순간 덤벼들어 내 눈을 파먹고, 살점을 쪼아 댈 까마귀 무리.
“사냥의 보조가 필요하다 하셨소?”
게리드 역시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낮은 분노를 숨기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흐음, 여우 사냥이라면 백작령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알고 있소만.”
“산맥 너머에는 크고 사나운 것들이 있지요. 그걸 사냥하고 싶습니다.”
“그렇긴 하지. 산맥 너머엔 사람 두개골 따윈 가뿐히 씹어 먹는 놈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공자가 그걸 사냥하실 수 있겠소?”
“그러니까 레인저들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
게리드가 고개를 떨군 채 쓴웃음을 흘렸다.
다시 고개를 든 게리드의 눈빛은 지금껏 보이던 것과 달리 확연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레인저가 한낱 귀족의 사냥 놀음에 쓰일 종자로 보이시오?”
“한낱 귀족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린다이어 가문의 삼공자면 한낱이 맞지. 계집과 술에 미쳐 살다가 혼인조차 무서워 도망치지 않았소? 아랫도리에 그게 달려 있는지도 의심스럽소만.”
말을 마친 게리드가 흘긋 길레인을 보았다.
길레인은 일전에 나와 나눈 이야기 때문인지 일단 아무런 내색 없이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하지만 게리드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삼공자는 기사단장조차 버린 개망나니다, 라고.
“내 아랫도리와 사냥은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사냥에 나설 것이고, 보조를 맡을 레인저가 필요합니다.”
“으하하하!”
크게 웃은 게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린다이어 백작이 적극 협조하라 했으니 못 들어줄 건 없소. 하지만.”
레인저를 쓱 둘러본 게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레인저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따르지 않소. 그것은 권력이라는 부패가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규율이오. 그것마저 부정할 셈은 아니시겠지?”
그래, 너희 레인저는 오로지 실력자만을 추대하고 따르는 관례가 있지.
쿵!
그때, 가만히 있던 루스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공자님! 그렇다면 제가 대전사로 나가겠습니다!”
루스의 고함에 게리드가 씩 웃었다.
“이건 결투가 아니오, 기사 마이어.”
“그렇다면 내가 공자님의 뜻을 이어 행하겠소. 하면 레인저를 내줄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런 저급한 말장난을 할 생각이면 술이나 마시시오. 린다이어 백작이 말한 적극적인 협조는 당신이 아니라 오직 삼공자만을 향한 것이오만?”
“이익, 그 말은 삼공자님에게 병력을 내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오?!”
“내가 언제 그랬소? 우리 레인저는 자신보다 나약한 자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지.”
루스가 벌겋게 흥분한 얼굴로 게리드에게 삿대질을 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군! 그렇다면 돕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잖소!”
“그건 또 아니오. 병영에 청소와 식사를 담당하는 하인들이 있으니 그들을 데려가시면 되겠군. 아무리 삼공자라도 그들 정도는 이길 것 아니오?”
“지금 공자님보고 한낱 하인들과 목검을 들고 대련하란 말이오? 이런 무엄한!”
“그럼 레인저들과 하든가.”
탁.
게리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스가 언제 흥분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의견을 내는 족족 꺾였던 사람이 보여 줄 태도는 아니었기에 게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루스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홀짝이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답니다, 공자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부담스럽긴 했으나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작게 숨을 고른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레이븐께서 하셨던 말을 축약해 보겠습니다. 나보다 약한 레인저는 사냥의 보조로서 내주겠다, 그 강함을 나누는 방법은 목검을 든 대련이다, 그 방법을 통해 가려진 레인저는 내게 적극적인 협조를 해 줄 것이다. 에스테반 경, 맞습니까?”
가만히 있던 길레인이 내 말을 듣고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맞습니다, 공자님.”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해 명예를 걸고 공증을 서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공증…… 말입니까.”
바람기사단의 수장이 지닌 명예는 한없이 무겁다. 그것을 이런 망나니 삼공자를 위해 사용해도 되겠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날 밤, 분명 나의 힘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길레인이었으므로.
스르렁!
검을 뽑은 길레인이 내 앞에 곧추세우곤 무릎을 꿇었다.
“저 바람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자작(子爵) 길레인 에스테반의 명예를 걸고, 앞서 게리드 크로우가 했던 이야기는 제 입회 안에서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잠시 말을 멈춘 길레인이 게리드를 바라보았다.
“명예가 더럽혀진 대가를 제 목숨으로, 또한 게리드 크로우의 피로 치르겠습니다.”
“이, 이 무슨…….”
당황한 게리드와 레인저들의 시선이 오갈 곳을 찾지 못하다 나를 향했고.
“뭘 하고 있습니까, 게리드 크로우?”
나는 술잔에 든 포도주를 바닥에 뿌리곤 자리에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목검 두 자루와 함께 연무장을 준비하고, 서열이 낮은 순으로 레인저를 대기시키십시오.”
내 입으로 늘어놓은 것도 아닌, 자신의 입으로 늘어놓은 것을 과연 어길 수 있을까?
자승자박(自繩自縛).
그것이 무언지 게리드에게 톡톡히 알려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