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third son of a failure RAW novel - Chapter (256)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257화(257/278)
망작의 삼공자로 사는 법 257화
61장. 피와 살점, 그리고 강철
강철과 강철, 살과 살이 맞대어진다.
금속음과 파육음이 한데 뒤섞여 눈과 귀에 혼란을 자아내는 전장은 농후한 피비린내까지 더해져 후각마저 마비시킨다.
로드키우스의 충실한 수족이자 왕실을 향한 뿌리 깊은 원한을 가진 브링거 백작가는, 항복을 선택하느니 단검을 삼키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무장한 상태였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바슈른 공작이 말하길, 브링거 백작가의 조상의 조상쯤 되는 양반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캐피탈의 궁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럴 만한가?’
물론 그 누명은 오래가지 않아 벗겨졌다. 그리고 왕실은 깊은 유감을 표함과 동시에 적절한 보상을 치렀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 겪은 수모를 결코 잊지 않았다.
고귀한 명예. 돈으로 그것을 보상받기엔 자존심이라는 훌륭한 훼방꾼이 있었겠지.
‘그럴 만할지도.’
여하튼, 브링거 백작 가문은 그 수모를 갚기 위해 입에 독기를 악문 듯했다.
백작령의 모든 우물엔 독을 풀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수원의 발원지는 썩은 가축 사체로 메웠다.
추수가 덜 끝난 농경지는 불살랐고, 추수가 끝난 곳도 바닥에 흩뿌려진 낱알 하나 남지 않게 불태웠다. 간단히 말해 브링거 백작령의 모든 농경지가 검은 재로 변했다는 뜻이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이라…….
문득 생각이 들었다.
‘브링거 백작령의 농민들은 내년이 참 고달프겠네.’
맙소사, 이렇게 실없는 생각이라니?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래를 팔아 현재의 복수를 한다.
그 악독한 마음가짐에 브링거 백작령을 지나오는 동안 나를 비롯한 연합군의 귀족들은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 청야전술이 숨겨진 비장의 전술이라 놀란 것은 아니다. 그 정도 생각이야 누구나 당연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겪는 건 엄연히 다르다.
농부가 자신이 일군 밭을 태운다? 말도 안 돼. 세상 그 어떤 어버이가 자기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단 말인가?
‘그럴 만하군.’
그렇게 영토를 잠식해 가며 어느덧 브링거 백작령의, 또 브링거 백작 가문의 총본산인 브린성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공성전에 돌입하고도 기나긴 시간이 지난 지금 이때, 나는 끝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쳐 가는 거야. 우리나, 당신들이나.”
결국 내 머릿속에서 출가를 선언한 혼잣말에 옆에 시립해 있던 부관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본래의 임무, 즉 목석을 흉내 내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멀리 떨어진 전장을 다시 훑어보았다. 개미 떼처럼 군집한 병사들과 그 앞을 가로막는 굳건한 성벽이 다시 시야를 채웠다.
경장보병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고, 그 아래엔 큼직한 타워실드를 든 중보병이 뒤에서 성벽 위로 활을 쏘는 궁수를 보호했다.
-올라! 올라가!
-죽여! 죽여 버려!
들리지 않아도 외침이 들려온다.
그러나 곧 있을 격렬한 근접전을 상기하며 사다리를 오르던 병사들을 환영하는 건 같은 인간이 아닌 의외의 것들이었다.
큼직한 돌덩이와 끓는 기름.
쪼개지는 두개골과 녹아드는 살갗이 비정한 고통을 선사한다. 그 잔혹함 위로 마나가 형성된다. 이윽고 마법이 토해 낸 불덩어리는 추락자들 아래 밀집한 중장보병을 산채로 불태웠다.
그 모든 광경을 배경 삼아 우뚝 선 성벽엔 수백 구의 시체가 목에 밧줄이 매인 채 흔들리고 있었다. 타의로 만들어진 충실한 목격자들이다.
물론 당연히 그 목격자의 육신은 우리 연합군 병사의 것이다. 그들은 앞선 정찰을 위해 파견했던 소규모 척후대겠지.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포로? 그런 걸 원했다면 애초에 영지를 불태우지도 않았겠지.
-빌어먹을 개자식들! 감히 망자를 희롱하다니! 사령관님! 당장 저 잔악무도한 반역자들을 벌해야 합니다!
며칠 전, 그 성밖에 내걸린 부하의 모습을 목도한 군단장은 고맙게도 나를 대신해 분노를 표출해 주었다.
속된 말로 눈깔이 뒤집혀 버린 군단장은 그길로 사령관 바슈른 공작에게 달려가 졸라 댔다.
‘공격 허가를!’
물론 공작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브린성은 어차피 점령해야만 하는 중요 거점이었고, 언제나 그렇듯 탐색은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손을 올려 턱을 매만졌다. 어느덧 공성의 마무리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제4군단장 로트링겐 가문의 헤럴드 백작의 명으로 퇴각 신호가 내려진 것이다.
심장은 뜨겁되 머리는 차갑다. 이미 앞서 여러 차례 격전을 맛본 병사들은 실패한 공성에도 당혹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병사들이다.
하지만 헤럴드 백작의 얼굴은 낭패하게 변해 있겠지. 생각보다 완강하며 잔인한 적의 방어였다. 타협 따윈 없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참모장님.”
소리 없이 다가온 부관이 나직하게 귀엣말을 남겼다.
“사령관님이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빠르다. 아니, 당연한 건가?
아마 선발대의 후퇴와 함께 바슈른 공작은 탐색이 끝났음을, 그리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벌어질 공성전을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겠지.
나는 멀리서부터 풍겨 오는 매캐한 살타는 냄새를 느끼며 몸을 돌렸다.
“일단 다른 것부터.”
* * *
그 규모부터가 여타의 것과는 남다른 천막 위로 은빛 여우와 황금빛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진 두 깃발이 서로 얽혀 나부끼고 있었다.
여우는 바슈른이요, 드래곤은 왕실이라.
도착한 곳은 왕실의 명을 받들어 남부를 정벌할 연합군 사령관인 바슈른 공작의 처소였다.
“……저기, 참모장님, 사령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심하게 서서 깃발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는 뒤에 선 부관의 조바심에 다시 천막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오셨소?”
바슈른 공작의 그림자이자 호위를 맡은 위즈덤나이트의 부단장 하킨스 경이 나를 보곤 반갑게 웃었다.
“예, 왔습니다.”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군. 오늘 공성전의 실패 때문이오?”
“굳이 그것 때문만이 아니어도 전쟁통에 벙긋벙긋 웃고 다닐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봤자 욕이나 더 듣겠죠. 최소한 보는 눈이 있으니 침중해야지요. 비록 그게 가면이라고 할지라도.”
껄껄 웃고 있던 하킨스는 본인의 작태를 돌려 지적하는 내 말에 ‘어이쿠’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상했으려나? 그러든 말든 어쩌라고.
병사들은 이미 적지 않은 동료가 전장에 뒹굴며 까마귀밥 신세가 된 마당이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입꼬리가 제자리를 지키도록 철저하게 단속할 생각이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하킨스를 옆으로 지나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보였다. 그 끝의 상석은 또 가로로 널찍해 T자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널찍한 상석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던 바슈른 공작은 날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혓바닥에 제발 독기 좀 빼면 안 되겠나? 자네가 입만 열면 분위기가 냉랭해지니 원.”
밖에서 하킨스에게 쏘아붙인 걸 들었는지 바슈른 공작이 능청을 떨었다.
물론 난 그 능청을 받아 줄 생각은 없다. 지금 그는 사령관이고, 나는 그의 참모장이니까.
“기사에게 이유를 말하고 설득하는 데 시간을 쓰느니, 그냥 제가 싹수없는 인간이 되는 게 훨씬 빠르고 간단합니다.”
“훌륭한 전술가로고. 하긴, 기사라는 족속이 고리타분하긴 하지. 그건 그렇고 좀 늦었군. 뭘 하다 이제 온 건가?”
“복귀한 병사들에게 몇 가지를 묻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런 정보라면 전후 보고서에 쓰여 있을 텐데?”
“사령관님이 보고받기 전까진 그것을 열람할 권한이 제겐 없습니다.”
“아, 그랬나? 그럼 지금 같이 들으면 될 일 아닌가?”
“회의에 맞추기 위해 먼저 정보를 알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무튼 늦은 것은 죄송합니다.”
내 대답에 바슈른 공작이 벙긋 웃었다.
“음, 상관없네. 다른 곳에서 시간을 벌었다니 문책할 이유는 없겠지. 앉게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또 능청이다. 너구리 같은 영감.
나는 별 감흥 없이 사죄한 뒤 내 자리에 앉았다.
앞에 앉은 군단 참모들이 나를 보곤 가볍게 눈인사를 해 왔다. 그들에게도 내 태도는 익숙한 것이었다.
바슈른 공작은 군사적 수직 관계에선 사사로운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드라이한 것을 선호하는 사령관이었으니까.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보고하게.”
다시 무뚝뚝해진 바슈른 공작의 말에 제4군단장 헤럴드 로트링겐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일 브린성 공격 소기의 목적 달성 실패, 투입 병력의 3할을 잃고 후퇴 결정, 아군 피해는 경장보병 팔백오십, 중장보병 이백, 궁수 백오십, 정확한 사상자의 구별은 현재 파악 중입니다. 적의 대략적인 규모 및 피해 또한 복귀한 병력으로부터 증언을 확보했으며, 그 내용은 미리 제출한 보고서로 갈음하겠습니다. 이상, 제4군단장 헤럴드 로트링겐이 패전의 처분을 사령관님께 여쭙습니다.”
헤럴드 군단장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보고했고, 바슈른 공작 또한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책임은 묻지 않는다.”
답을 들은 헤럴드 군단장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감사할 일도 아니고, 죄송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탐색은 당연하다. 그냥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니까. 전쟁에는 피를 흘려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문책할 만큼 바슈른 공작은 바보가 아니다.
“다음 안건으로 가지. 보급은?”
바슈른 공작이 전후 보고서를 뜯어보며 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질문했다. 그에 나는 제4군단 군수참모에게 지시했고, 또 이후 보고받았던 내용을 읊었다.
“원활합니다. 나흘이면 브린성 다음 목표 거점까지의 필요 보급량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변수는 있습니다만,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변수라면?”
“적의 게릴라입니다.”
“방안은.”
“눈 좋은 자들을 선별해 분대를 이뤄 후방 전역(戰域) 보급로의 외곽 정찰 작전을 입안했습니다.”
“보급로가 포함된 후방 전역이라면 규모가 작지 않네. 작전 피로도가 높다는 뜻이지. 원활하게 돌아가겠나?”
“모든 편성은 끝났습니다. 총 백이십의 분대가 3교대로 순환할 예정이며, 모든 교신 방법과 암호를 숙지한 채 명령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따라서 체력적 문제로 임무가 소홀해질 가능성은 적습니다.”
내 보고에 듣고 있던 참모들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바슈른 공작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군영을 이곳으로 확정했던 건 어제 늦은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를 더 소모해 브린성 배후에 차릴 것인지 마지막까지도 고민했고.”
“그러셨지요.”
“한데 정찰 계획을 짰다? 공격은 오늘 아침이었네. 그렇다면 밤사이에 전부 끝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되는군요.”
내 무미건조한 답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슈른 공작이 입가를 씰룩였다.
그러자 내 머릿속으로 바슈른 공작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메시지(Message) 마법이었다.
-이거 나보다 더한 놈이로고. 쥐어짜는 것은 좋지만, 본 업무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될 일이네. 유념하고는 있겠지?
나는 굳이 답하지 않고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한 게 있나. 고생한 건 군수참모와 그 휘하 보급 장교들이지. 찬사가 있다면 그건 그들 눈 밑에 짙게 그려진 검은 그늘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런 내 몸짓에 고개를 끄덕인 바슈른 공작은 다 읽은 전후 보고서를 내게 내밀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보고서를 받아 들어 빠르게 훑는 내 귀로 바슈른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나흘이면 보급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안에 브린성을 먹어 치워야 한다는 것이군. 그래야 시간 손실 없이 다음 거점으로 곧장 이동할 수 있으니.”
실로 현재 연합군은 대단한 전격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현재 바슈른 공작과 내가 포함된 제4군단은 가장 최전방에서 그 첨단을 달리는 와중이었고.
아마 바슈른 공작으로선 결코 이 기세가 꺾이길 원하지 않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나흘 안에 브린성을 함락해야 했다.
“생각보다 훌륭한 성이군. 골치 아프게 됐어. 뭐 어쨌든 그래서, 브린성을 점령할 방안은?”
바슈른 공작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뭐 이제는 특별한 것도 없다. 이미 군단이 무쇠전차처럼 남부를 가로지르는 내내 겪어 왔던 일이니까.
그들은 내가 보고서를 전부 읽을 때까지 여유를 두고 기다렸다. 나 또한 별로 조급함 없이 충분히 살펴보곤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바슈른 공작이 손을 내저어 환영 마법을 펼쳤다.
테이블 위로 브린성과 그 주위를 포위한 제4군단의 군영이 마법의 힘을 빌어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언제봐도 감탄 나오는 장면이다.
큼큼, 가볍게 헛기침으로 목을 푼 나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명하겠습니다.”